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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세의 노래 / 출 14:3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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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모래
출애굽기 14:31~15:2 


1995년 11월 2일, 이 날은 엽기적인 살인행각을 벌였던 지존파 여섯 명의 사형집행이 있던 날입니다.
그 지존파의 사형집행 현장에 있었던 한 교도관의 증언입니다.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 그들은 목사님을 모시고, 이 세상에서 마지막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엄숙함과 긴장감이 감도는 그 와중에 한 청년이 조용하게 속삭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다행이야.”

예배를 다 드린 후, 지존파의 두목격인 김기환은 이렇게 유언했습니다.
“나는 죽더라도 나이 어린 동생들에게 사형만은 면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범죄 장소로 사용하던 영광군 불갑면 막사가 있던 자리에 교회를 지어주십시오.”
그러고는 순순히 죽음을 받아 들였다고 합니다.

이들 지존파 청년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사람이 있는데, 그 분은 서울 사랑의 교회 이재명 집사님입니다. 사형을 선고 받고, 형 집행일자를 기다리고 있던 지존파 일당들에게 끈질기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 일로 그들이 주님을 영접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을 영접한 지존파 살인범 가운데 김현양씨는, 나중에 이재명 집사님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 왔습니다.

“집사님, 생각하면 제가 왜 그렇게 바보 같은 인생을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와 생각하니, 제 눈이 무엇인가에 가려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죄에 대한 댓가로 죽지만, 이 세상에서는 죽음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제가 여기서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을 생각하니,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하여 눈물만 흐릅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늘 이 찬송을 부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이처럼, 은혜 받은 성도의 마음 속에는 영혼에 울려퍼지는 노래가 있습니다. 지난 날이 후회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풀어 주신 은혜를 감사하게 되고, 그 기쁨 때문에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오늘 성도 여러분의 마음 속에는 어떤 노래들이 울려 퍼지고 있습니까 ?
간간이 하나님의 이름이 섞여 있는 말이라고 해서, 그것을 기도라고 할 수 없듯이, 단지 교회 안에서 불려지는 노래라고 해서, 모두가 찬양일 수는 없습니다. 복음이 들어 간 노래를 부른다고 해서, 모두가 찬송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찬송할 수 있습니까 ?
그리고, 무엇을 찬송해야 합니까 ?
그리고, 왜 찬송해야 합니까 ?
이러한 의문들에 대한 해답을 본문을 통해, 찾아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먼저 누가 찬송할 수 있습니까 ?
본문 15장 1절입니다.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본문은 “이 때에”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가깝게는 출애굽기 14장 31절을 가르키고, 넓게는 출애굽기 14장 전체를 가르키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14장에는 어떤 사건이 기록되고 있습니까 ?
모세가 홍해를 가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사건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로 들어서기 전에, 만난 첫 번째 난관은 홍해였습니다. 홍해 바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었고, 뒤에는 그들을 놓아 준 것을 후회한 바로의 병거들이 좇아 오고 있었습니다.
앞에는 넘실대는 바닷물로, 뒤에는 추격하는 군사들의 함성소리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진퇴양난의 위기에 빠진 것입니다.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이 하늘을 찌를 듯합니다.
이 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이 일어 난 것입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사히 홍해를 건넜지만, 애굽의 원수들은 수장되었습니다.
바로 그 때,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래가 터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
이 광경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 전까지도 위기상황을 불평하던 그들이었습니다. 바로의 군사들이 추격해 오고, 홍해가 그들을 가로막자 불평했던 그들입니다.
그런데, 그 불평이 변하여, 지금 찬양이 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감격하였고, 그 감격은 찬송으로 이어졌습니다. 마치 범람하는 강물에 제방이 터지듯, 여호와를 찬양하는 함성이 터진 것입니다.
이백 만 명 이상 되는 그 수 많은 인파가 함께 노래하는, 그 합창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자, 그 백성 전체가 장엄한 성가대가 된 것입니다.
지극히 높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을 어린아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사막 한 가운데서 한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출애굽기 15장에 기록된 모세와 이스라엘의 노래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찬양에서 가장 중요한 영적인 원리를 한 가지 발견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
출애굽기 14장 31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 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본문의 동사를 주목해 보십시오.
“보았다, 경외했다, 믿었다, 노래했다”라는 단어들이 서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큰 일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고,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그리고 이 위대한 일을 행하신 그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되고, 믿게 됩니다. 이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그 다음 반응이, 바로 찬양인 것입니다.

이처럼, 진정한 찬양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경외하며, 그 분을 신뢰하는 믿음으로써 시작됩니다. 참으로 믿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누구나 노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찬양은, 주께 대한 진실한 믿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즐겨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사입니다.

영국을 관광하는 많은 사람들이 꼭 빠트리지 않는 관광명소가 하나 있습니다.
그 곳은 영국의 여왕이 살고 있는 윈저성입니다.
그 영국의 윈저성을 방문할 때 보면, 사람들은 그 성의 깃발을 주목합니다. 성안에 여왕이 머물고 있을 경우, 여왕의 깃발이 휘날리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깃발을 보면서 사람들은 “여왕이 저 성에 아직 계시는구나 !”하고 알 수 있습니다.

신앙세계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있어서, 찬송은 하나의 깃발과도 같습니다.
찬송이란 내 마음 속에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는 깃발과 같다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도가 찬송하는 모습을 볼 때, ‘저 사람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는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찬양은 성도의 삶에서 중요합니다.

100 년 전, 초창기 한국교회 성도들이 주님을 모시고 나서 얼마나 기뻐했는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얼마나 찬송했는지, 불신자들의 입에서 이런 말이 오고 갔습니다.
“불교 신자들은 초상집에 사는 사람들 같고, 유교 신자들은 제삿집에 사는 사람들 같지만, 예수 믿는 사람은 날마다 잔칫집에 사는 사람들 같다.”
이렇게 사람들의 입에서 “잔칫집에서 사는 사람들 같다.”는 말이 회자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
우리 마음 속에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그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구원의 기쁨, 구원의 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임한 그 곳에는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항상 그 입에서 찬양이 떠나지 않습니다.
가슴에서 성령의 샘물이 터져 나와, 입으로 막아 둘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혼자 흥얼거리기도 하고, 함께 부르기도 합니다. 찬양이 그 사람의 가슴에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용암이 산을 뚫고 분출하듯이, 찬양이 활화산처럼 흘러 넘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나에게 베푸신 은혜에 감격하여, 그 마음 속에서 솟구치는 노래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그것이 찬미의 제사입니다.
예배순서가 되었기에, 마지 못해 부르는 노래가 아닙니다. 노래할 이유가 있기 때문에, 부르는 찬송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에게는 노래할 이유가 있습니까 ?
구원의 감격이 있습니까 ? 구원의 즐거움이 있습니까 ?
여러분이 이 질문에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다면, 이 찬송을 부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찬양을 배울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은 우리들의 삶에서 노래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한평생 부를 노래, 영원까지 계속 부를 노래인 것입니다.
우리들의 호흡이 다하는 날까지,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특권을 놓치지 않는 성도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그렇다면 무엇을 찬송해야 합니까 ?

출애굽기 15장은 “모세의 노래”라는 별명이 붙어있는 찬송입니다. 또한 성경에 나타난 최초의 찬양입니다.
이 찬송의 가사를 곰곰히 묵상해 보십시오.
철저하게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노래의 주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십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명칭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찬송의 주제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것은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신령한 노래, 곧 찬송입니다.

단순한 노래와 찬송은 어떻게 구별됩니까 ?
엄밀히 말해, 단순한 노래는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을 노래하지만, 찬송은 하나님만을 노래합니다.

본문 15장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내가 그 분을 찬송하며, 내가 그 분을 높이겠다”고 고백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
하나님은 나의 힘이요, 노래며,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 분은 단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만으로도,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찬양은 어떤 찬양입니까 ?
어떤 찬양이 위대한 찬양입니까 ?
그것은 오케스트라나 음악의 화음이 놀랍다는 뜻이 아닙니다. 위대한 찬양은, 그 노래가 담고 있는 주제가 놀라운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 가운데서 이처럼 위대한 찬양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 일까요 ?
그것은 위대한 싸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나를 대신해 죽으신 것을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린 양의 피로 구속되어 애굽에서 나온 것을 믿듯이, 우리도 주님의 십자가 공로로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출애굽 너머있는 메마른 광야길은 피하려고 합니다. 가나안 정복을 위한 싸움은 회피합니다. 영적인 싸움이 보이면, 슬그머니 그 자리를 피해 버리는 것입니다.

위대한 싸움이 없는 곳에, 위대한 승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위대한 승리가 없는 곳에, 위대한 찬송은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언제부터인지 좀 편하게 믿겠다는 경향이 마치 누룩 퍼지듯이, 우리 믿는 자들 가운데 퍼지고 있습니다. 소위, 힘들게 믿을려고 하지 않습니다. 적당히 신앙생활 하겠다는 것입니다. 좁은 길보다는 넓은 길을 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 더 이상의 위기도 없고, 더 이상의 승리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성도로서 위대한 찬양을 잊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읽어 보셨습니까 ?
그것을 읽어 보면, 주인공 기독도가 어려움에 빠질 때마다, 제일 먼저 겪는 고초는, 찬양을 잃어 버리는 것으로 나옵니다.
이런 그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어려운 궁지를 빠져 나오면, 제일 먼저 찬양을 하고 다시 길을 떠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입니까 ?
찬양을 잃어 버립니다.
이것을 반대로 말하면, 찬양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것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뜻이요, 구원의 감격과 즐거움 속에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지난 한 주간의 삶을 천천히 돌아 보십시오. 하나님을 노래한 시간이 얼마였는지를 회상해 보십시오. 찬송을 위해 할애되었던 그 시간들이, 우리들의 영성을 대변해 주는 잣대가 될 것입니다.

최근 여러분의 영적인 상태가 어떤지를 점검 받고 싶습니까 ?
오늘 여러분의 영성을 점검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세상의 노래는 보통 2절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찬송가는 보통 4절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가끔 3절짜리 찬송도 있고, 때로는 5절로 된 찬송도 있습니다.
찬송가의 내용과는 관계없이 무조건 예배 중에 3절짜리 찬송이 나오면, 혹은 오늘처럼 두 소절로 된 4절짜리 찬송이 나오면, 그 날은 왠지 수지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고, 5절로 된 찬송이 나오면, “언제 이걸 다 부르나”하고 걱정이 든다면, 그는 틀림없이 신앙이 병든 사람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노래방에서는 1시간 내내 세상 노래를 불러도 지치지 않는 사람이, 예배 시간 가운데 10분 이내의 찬송을 부를 때에는, 마치 장송곡을 부르듯 노래를 한다면, 어찌 그 사람이 건강한 성도라고 하겠습니까 ?

그런 성도님이 계십니까 ?
그것은 반드시 기도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내 심령이 성령의 깊은 감동과 사랑의 격정으로, 다시 불 타 오르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의 사랑에 감격이 솟구쳐 오르도록, 구원의 새 노래가 터져 나오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구원의 감격이 없는 가슴, 하나님의 은혜에 감각이 없는 냉냉한 가슴은, 구원받은 성도의 가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오늘 본문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후, 여호와를 찬송하는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14장이 승리의 싸움을 기록하고 있다면, 출애굽기 15장은 승리의 노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위대한 싸움에서 승리하였기에, 그들은 “하나님은 나의 힘”이라고 외칩니다. 하나님은 나의 노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라고 소리칩니다.
그렇다면, 그들보다 더 큰 구원의 축복을 누리고 있는 우리들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이 나의 힘이요, 나의 노래요, 나의 구원이 되고 있습니까 ? 그 분이 내 입술의 노래, 우리들의 영원한 찬송의 주제가되고 있습니까 ?
믿음의 선한 싸움을 마치는 그 날까지, 우리들의 찬송 제목이 하나님 한 분 뿐이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셋째로, 왜, 찬송해야 합니까 ?
출애굽기 14장 3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 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 일을 보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께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 일이 무엇입니까 ?
그것은 모세가 출애굽기 15장 1절에서부터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하나님과 그의 하신 일을 기리는 내용의 노래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찬송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비로소 바로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애굽의 바로만 위대한 줄 알았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무섭게 달려드는 애굽의 병거와 마병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로의 권세만 들어 왔고, 그것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생의 큰 위기에 한번 부딪치고 나니까, 정말 크신 분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출애굽기 15장 1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하나님은 높고 영화로우시며, 바로의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습니다. 그리고 그 바다는 택함 받은 백성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백성을, 영원히 구별짓는 경계선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한 자들은, 한 명도 이 바다를 건너오지 못했습니다. 바다 이편에 서서 부르는 모세의 노래는, 오직 구원받은 성도들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된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이 새 노래를 부를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후 예배 때마다 이 노래를 부르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회상하고, 그 구원에 감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노래했던 그 찬송은, 지나간 세대와 앞으로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성도들이 부를 찬송의 모범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홍해바다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 그 능력과 사랑으로,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신 것을 믿으십니까 ?
그렇다면, 우리도 이 찬양을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삶이 있다면, 그것은 구원의 찬양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요 ?
그것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자, 유일한 자랑거리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저마다의 자랑거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흐르는 물은 저마다의 노래가 있고, 지저귀는 새들의 노래도 저마다의 가락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기쁨이 될 만한 자랑거리가 없는 사람은 비참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불행한 사람은 잘못된 것을 선택하고, 그것을 자랑하다가 파멸에 떨어져 버리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헛된 것들을 자랑거리로 삼는지 모릅니다. 한 마리 나귀만도 못한 육체의 힘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단단한 흙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은과 금을 자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죽고 나면, 묘비에나 새겨질 명예나 권세를 자랑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예배의 자리에 있는 저와 여러분들의 자랑거리, 내 인생의 간증거리는 무엇입니까 ?

미국 선교 역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이 있다면, 그것은 아도니람 저드슨이라는 사람이 미국 최초로 미얀마의 선교사로 파송된 사건일 것입니다.
그는 미얀마에 가서 평생을 선교사로서, 자신의 생애를 주님께 바칩니다. 안식년도 없이 30년 동안 그 곳에서 많은 고난과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선교사로 떠난 지 30년 후에, 그가 미국에 올 기회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그를 기다렸을까요 ?
그가 보스톤에서 선교 보고회를 하던 어느 날, 교회당은 입추의 여지없이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미국을 대표해서 파송한 최초의 선교사가 미얀마 복음화에 일생을 바치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어 돌아 왔을 때, 그의 메시지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

그런데, 그의 설교는 구원의 십자가였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피흘리셨습니다. 그의 피흘리심은 우리의 죄사함과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동일한 복음이 미얀마 선교지에 소망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짧게 설교를 마쳤습니다.
그러자 청중들의 실망하는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여러분, 선교사의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무얼 기대합니까 ? 선교지에서 일어난 드라마틱한 사건에 대해 듣고 싶어할 것입니다. 30년 동안 선교했다면, 얼마나 하고 싶은 얘기, 선교지의 자랑거리가 많겠습니까 ?
그러자 사람들은 “아도니람 저드슨의 설교가 너무나 평범하지 않느냐?”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때 그 얘기를 들은 아도니람 저드슨은 청중들에게 돌아서서, 정색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십자가 사건보다, 우리가 구원받은 사건보다 더 비범한 사건이 어디 있습니까 ? 십자가 보다 더 위대한메시지가 어디 있습니까 ? 구원의 십자가 보다 더 놀라운 복음이 어디 있습니까 ? 나에게는 이보다 중요한 메시지, 이보다 소중한 자랑거리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스운 얘기, 신바람 나는 얘기들을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듣는 그것으로 끝나 버립니다.
우리를 묶고 있던 죄의 사슬을 끊어 버리고,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하는 사건, 우리 영혼을 위해 하늘의 문이 열리는 사건,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영광스런 사건, 그것은 구원의 십자가, 복음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이보다 놀라운 사건, 영광스런 사건이 어디 있습니까 ?

왜, 우리가 찬송해야 합니까 ?
주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행하신 영광스런 일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베푸신 큰 일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찬양의 본질입니다. 아름다운 목소리를 자랑하거나, 곡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찬양의 본질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신 그 놀라운 사역을, 그 분의 성품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찬양과, 다른 세상 노래와의 차이점입니다.

하나님의 큰 구원 속에 찬송을 익힌 믿음의 선배들이, 믿음의 후손인 우리들에게 권면합니다.
지극히 높고 영화로우신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
그들은 구속의 순간에 노래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구원의 순간에 새 노래를 받았습니다. 주님의 은혜의 골짜기에서 새 노래를 배웠습니다.
이제, 그 배운 새 노래를, 그 노래의 주인께 올려 드립시다. 그 분의 손 안에, 우리들의 찬송이 드려 질 때, 우리의 메마른 가슴이 찬양의 가슴으로 바뀌는, 심장의 고동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들의 노래는 향기로운 찬미의 제사가 될 것입니다.

이 신성한 찬양의 제단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찬양의 자리로 나아 오십시오. 정말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냥 형식적으로 드리는 찬양이 아니라, 마음으로 영혼으로 찬송하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인생의 수고를 마치는 그 날까지, 이 찬송이 성도 여러분의 삶의 전부가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예배 가운데, 우리는 모세의 노래를 함께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찬양에 대한 세 가지 생각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누가, 찬송할 수 있습니까 ?
구원받은 사람들이 찬양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찬송해야 합니까 ?
구원의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왜, 찬송해야 합니까 ?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은, 우리의 삶에서 새 노래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구원의 노래, 새로운 노래입니다. 하나님이 즐겨 받으시는 신령한 노래입니다.
이 예배의 시간에, 우리들의 새 노래를 이제 하나님께 봉헌하고자 합니다. 주 앞에서 전심으로, 온 몸과 마음으로 찬양하는 우리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들의 찬송이 단 한번의 제사가 아니라, 이 한 주간 내내 우리들의 생활 깊은 곳에서 주님께 봉헌되어지는 삶의 노래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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