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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힘써 여호와를 알자 - 호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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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6:3

우리는 힘써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를 아는 것(다아트)은 우상 숭배와 배교로부터 돌아서려는 강한 열성을 내포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호 4:1)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호 4:6) 고 합니다.

여호와를 아는 것은 계명을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진실된 마음으로부터 비롯됩니다.

'힘써'(라다프)는 '추적하다', '뒤따르다'란 뜻으로 여호와를 알고 섬기는 일에 온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열심히 따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것을 온전히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신 30: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네 포로를 돌리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신 30:3)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관한 지식을 최선의 지식으로 존중하고 귀하게 여겨야 하며 그 지식을 불러 구하고 찾아야 하며(잠 2:3, 4) 온갖 지혜로 구하고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이 지식을 묻고 힘써 증진시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자비로이 임하시며 그들을 위해 은총을 계획하시는 때에는 은총의 열매로서 자신에게 대한 지식을 더욱 많이 주실 줄 믿습니다. 그때에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땅(세상)에 충만할 것이며(사 11:9) 지식이 더할 것이며(단 12:4)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을 알 것입니다(렘 31:34).

우리는 하나님을 찾고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찾고 알 수 있습니까? 생명을 걸고 하나님을 힘써 찾고 알기를 원할 때 하나님을 찾고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고 아는 것은 그 방법상의 문제에 포인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태도에 그 포인트가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한 수도사가 스승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찾을 수 있을까요?" 스승은 대답했습니다. "갈망함으로써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느니라" 수도사는 다음날도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스승은 역시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며칠 동안 똑같은 대답을 들은 수도사는 다시 물었습니다. "저는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아직도 그 분을 못 찾고 있을까요?" 스승은 제자의 물음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일어나 제자를 데리고 강가로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제자의 머리를 잡아 물 속에 밀어 넣었습니다. 스승의 행동에 놀란 제자는 스승의 손아귀에서 풀려나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쳤습니다. 한참이 지나자 스승은 제자의 머리를 놓아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번에는 스승이 묻습니다. "자네, 내가 머리를 물 속에 넣었을 때 왜 그렇게 몸부림을 쳤나?" "그야 숨이 막혀서 그랬습니다 " 그 때 스승이 말합니다.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숨 막히게 찾으면 하나님을 찾게 될 걸세"...

우리도 힘써 여호와를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먼저 찢으시고 치셨으나 고치시고 싸매시는 여호와를 힘써 알자




(호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고 합니다.




우리는 찢겼고 우리를 찢은 분은 여호와십니다. 우리는 맞았고 우리를 치신 분은 그였습니다. 그가 노여움 가운데서 우리를 찢고 치신 것은 우리의 배반 때문입니다. 우리를 이처럼 괴롭히시는 것은 우리로 마음이 움직여 회개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에서입니다.  치시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의 손은 계속 펼쳐져 우리를 치십니다.

이사야 선지를 통하여 앞에는 아람 사람이요 뒤에는 블레셋 사람이라 그들이 그 입을 벌려 이스라엘을 삼키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 (사 9:12) 이 백성이 오히려 자기들을 치시는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도다 (사 9:13)고 합니다

우리와 우리 땅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 특히 찢으시는 심판을 보며 각성하여 회개할 때 찢으신 분이 우리를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신 분이 싸매어 주십니다. 능숙한 의사처럼 부러진 뼈나 피 흐르는 상처를 따뜻한 손길로 싸매어 주십니다. 자기 백성을 찢으시고 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구원하시며 성령이 위로하십니다. 이로 인하여 처음에 종의 영이던 심령이 나중에는 양자의 영이 됩니다(롬 8:15). 아무리 심하게 찢겨 있다고 해도 하나님은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하나님은 치유하시는 자비를 베푸십니다. 아니 치유하시기 위해 찢으셨습니다.

이를 유대인의 바벨론 귀환을 가리킨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고난 아래서도 버틸 힘을 얻으며 회개하는 가운데서도 격려를 받습니다.

그러나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다양 합니다.

 

병원에서 환자를 치료할 때, 의사는 자기의 온 정성과 마음과 기술을 다해서 환자를 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골치 아프고 손을 떼고 싶거나 돕고 싶지 않은 환자도 있다고 합니다.

그 첫 번째가 치료하는 의사보다 더 많이 아는 척하는, 잔소리 많은 환자라고 합니다. 진찰 결과라든가, 처방이라든가, 약이라든가, 의사가 말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이 없습니다. 다 의심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다 압니다. 이런 환자는 '차라리 당신 스스로 고치라'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영 대하기 싫다고 합니다.

두 번째 환자는 따지기 좋아하는 환자라고 합니다. 왜 그러느냐, 그러면 이렇게 된다, 또는 공식에 의해서 모든 것을 따지는 그런 체질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의사가 이렇게 저렇게 치료를 하면, 이것 먹으면 낫느냐, 이렇게 하면 꼭 낫느냐, 왜 그러느냐, 결과가 어떻게 되느냐 합니다. 치료라는 것이 A+B는 아며 최선을 다할 뿐임에도 불구하고 자꾸 따지니까 의사가 그에게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이 사람, 참 골치 아픈 환자구나 할 밖에 대답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환자는 조급한 마음을 가진 환자라 합니다. 항생제 같은 약은 투여하고 나서 적어도 사흘이 지 나서야 효과가 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약을 한 봉지 먹고는 왜 안 낫느냐, 아침에 치료받고는 저녁에 왜 안 낫느냐, 그리고 왜 이렇게 아프냐고 한답니다. 그래서 보따리 싸가지고 이 병원 저 병원으로 옮겨 다니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 만나면 아주 골치 아프고 '빨리 다른 데로 가라'하고 싶답니다.  의사들도 이런 사람을 만나면 아주 골치 아파한다합니다.

  우리의 교육도, 우리의 신앙도, 우리의 인격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종할 줄을 모르고, 믿음이 없고, 만사를 조급하게 생각하고-

이런 사람은 대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사랑으로 고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힘써 아는 모두가 도시기 바랍니다.




다음 살리시는 여호와를 힘써 알자




(호 6: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 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 곧 단 시일 내에 살리시며 시체의 부패와 매장이 예상되는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그 앞에서 살리라고 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부활과 같습니다. 비록 잠시 동안 버리실 지라도 영원한 자비로 모으시고 살리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찢기고 구타당할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죽은 자로 치부되며 한참 동안 그렇게 누워 있을 수도 있으나 항상 그렇게 있지 않게 되며 오래도록 그렇게 있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곧 그들을 소생시키십니다. 그리고 이 소생에 대한 확신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만들며 따르도록 만듭니다.

시간이 이틀과 삼 일로 한정되어 표현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제삼일의 부활을 예표 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이해합니다. 그리스도는 성경대로 부활하신다고 했는데 이 말씀이 응한 내용이라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문자 그대로 성취되어 우리의 신앙을 확증시켜 줍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예언이 "그가 우리를 일으키시며 우리가 살리라" 고 표현된 사실은 어느 모로 보나 온당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처음 열매로 부활하셨고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다시 살아나며 그를 통해 살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의 칭의를 위해 부활하셨고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사 26:19)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 고 합니다.

부활하는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은 고난 받는 기독교인에게 큰 힘이 되며 회개하여 돌아오는 죄인에게는 풍부한 격려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요 14:19)고 말씀하신 때문입니다. 이러한 살리시는 역사가 각자의 형편 따라 주어지는 줄 믿습니다.




캐롤 버리스라는 주부는 근육무력증에 걸렸다고 합니다. 이 무서운 병은 온 몸에서 점점 근육이 무력해져서 죽게 된다고 합니다. 그는 40대 초반에 6명의 자녀를 두고 변호사 사무실의 비서로 일하면서 무용학교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충만하고 풍요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녀의 모습은 끔찍하게 변했습니다. 머리카락은 모두 빠지고 스테로이드 과다투여로 얼굴과 몸 전체가 부어 있었습니다. 마치 낡은 담요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자존심을 버린지도 오래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오래 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기도를 하지만 마음속으로 "오래 살지 못할텐데"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읽으면서 그녀는 더욱 자기 연민에 빠집니다. 심장이나 호흡 장애가 일어날 때마다 그대로 죽었으면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주변 사람들의 짐이 된 느낌은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부활절에 성가대원들이 그녀의 집에 몰려 왔습니다. 그들은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란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간절히 통성으로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그녀는 하나님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참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병을 위해서 그리고 살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간 다음, 다시 그녀는 원상으로 돌아가는 느낌이었습니다. 다시 무력해지면서 비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마음속에 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나도 그렇게 기도했는데 그것은 다 무엇인가? 그냥 헛것인가? 내가 신자로 그렇게 믿어야 하겠는가? 왜 백부장처럼 움직이지 않느냐? 기도를 하고 말씀을 받았으면 행동을 해야지 백부장은 예수님에게 기도하되 증세의 호전을 원하지 않았고 말씀을 원했고 그의 말씀을 듣고 행동하였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자리에 누워있지 말아야 하겠다고 결심합니다. 일어나서 움직이기는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물러 설 수는 없었습니다. 그녀는 자꾸만 마음속에 들어오는 자멸감의 어두운 그림자를 물리쳐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들을 생각했습니다. 남편, 자식, 친구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들, 사람들의 기도와 자신의 기도를 믿으면 그만큼 마음이 밝아졌습니다. 몸이 불편하고 움직이지 못할 지경이라고 남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친절을 베풀지 못할 것은 없다고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세상과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담을 쌓은 것은 자신이었습니다. 이제 차츰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녀는 병 때문에 어둠에 빠진 다른 이들을 방문했습니다. 휠체어에 앉은 채 집이나 요양원이나 병원의 환자를 찾아 용기를 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노력 속에서 전에 모르던 새로운 영역이 열렸습니다. "내 생명이 꺼질 때까지 사랑하고 생명을 나누리라" 는 결심하며 봉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차츰 몸이 좋아지는 것입니다. 다시 글을 쓰고 연단에서 강의를 하고 50중반의 몸으로 교회 사무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용 강습도 다시 시작했습니다. 병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오히려 비전속에 전보다 더욱 건강한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녀는 말했습니다. "나는 알았습니다. 기도를 사용하렵니다. 마치 은행에 맡긴 돈을 찾아 쓰듯, 하나님께 드린 그 수많은 기도의 말을 나는 실천합니다. 나는 이제 병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언제인가 다시 오더라도 나는 상처받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며 내 생명의 마지막 촛불을 사를 것입니다." 신앙으로 기도를 사용하고 다시 기도에서 더 깊은 신앙을 얻은 일입니다.

죽음과 같은 침체의 늪에서 살리시고 일으키시는 여호와의 역사가 함께 한줄 믿습니다. 이러한 여호와를 힘써 알고 새 힘과 새 능력을 공급 받고 더욱 헌신 봉사하는 모두가 됩시다.




그리고 은혜로 임하시는 여호와를 힘써 알자




(호 6:3)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고 합니다.




  그의 임하심은 어두운 땅에 동터오는 새벽 같습니다. 의의 태양으로서 나오셨고 그에게서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신 까닭입니다.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합니다. 오랜 밤 뒤 새벽을 기다리는 자들처럼 고대하는 심령에 정해진 시간에 그 은총이 틀림없이 임하심을 확신합니다. 그의 얼굴의 빛은 새벽빛처럼 우리가 반기는 모습인 동시에 우리에게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릅니다.




김준곤 목사님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어떤 청년이 자살하려고 약을 먹었다 합니다. 왜 자살하려고 했느냐 하면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공부하던 것이 다 실패로 돌아가서 그는 좌절에 빠졌습니다. 돈벌이를 해보려 했지만 그것도 실패했습니다. 그는 모든 인간과 가족에게서 배신당한 것 같고 버림받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가 의지하고 사랑했던 여인도 그를 떠나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독약을 먹었습니다. 아무리 해도 잃어버린 삶의 의욕을 다시 일으킬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의 친구가 그를 병원으로 데려가서 살리려 했습니다. 그는 친구를 원망하면서 "나는 티끌만큼도 삶의 의욕이 없다. 그러니까 제발 내게 죽음이라는 안식을 허락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에게는 삶의 의욕이라고 하는 것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혼탁한 죽음 속을 그는 그대로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인간의 말과 힘으로는 이렇게 완전히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사람을 살려 낼 길은 없다. 오직 생명의 주이신 창조주의 손길이 이 생명을 터치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친구는 그 에게 같이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말했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기쁨이 없었던 사람에게 기쁨들 주시고, 죽음에 처한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희미하게 거부를 했지만 자꾸만 그 친구가 주장하자 마지못해서 기도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를 하고 있는 동안 그 청년의 마음속에서는 그동안 멈추었던 거문고의 모든 줄이 울리면서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꺼져 버렸던 등불이 다시 빛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이 생기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다시 삶의 의욕을 찾게 되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순간적으로 창조주의 손이 그를 만져주셨습니다. 이것은 무에서 유가 창조되었습니다. 이러한 사건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종종 있습니다.(김준곤예화- 꺼진 등불 속의 새 빛)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함이니라(마 12:20,21) 하신 말씀 대로입니다 

어두움과 같은 절망 속에서도 의의 태양이신 주님께서 새벽빛같이 임하실 때 모든 어두움은 물러갑니다.

이처럼 새벽빛으로 임하시는 은혜를 베푸시는 여호와를 힘써 알고 믿고 따르며 함께 하는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땅을 적시는 비와 같이 비옥하게 하는 늦은 비와 같이 임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하나님의 은혜는 늦은 비와 이른 비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열매 맺는 선한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은혜로써 시작되고 결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른땅에 단비 같습니다. 그는 벤 풀에 내리는 비 같습니다(시 72:6). 그에게서 축복의 소나기가 이 세상에 내리며(사 55:10).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은총은 늦은 비를 내리는 구름과 같습니다(잠 16:15).




한 밤에 잠을 잃어버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전등을 켜고 거울 앞에 앉아있습니다. 초췌한 얼굴! 까칠한 눈매, 한탄의 한숨소리, 그는 얼마간 거울을 들여다보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캔버스를 내려다가 자기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손가락이 떨리고 코(구멍)를 그리면 입보다도 커지고 눈은 짝짝이 맞지가 않았습니다. 그는 화가가 아니라 잠을 잃어버리고 너무도 무더운 밤의 시간을 캔버스에 담아보려는 단순한 자기 몰두나 자기 집중의 한 수단으로 그래 본 것이었습니다. 한밤에 거울 속의 자기를 그리는 사나이 그는 바로 <뉴욕 타임즈>의 발행인인 설츠 버그였습니다. 세계 2차대전 중에 너무도 암담한 현실 앞에서 그는 불안에 떨고 낙담한 속에 묻혀서 잠을 잃어버리고 며칠을 비참하게 뜬눈으로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그 무료한 시간을 넘기는 방법을, 이런 식으로 해보았습니다. 여러 날 동안 캔버스를 앞에 놓고 한밤에 그림을 그리는 불안한 사나이 노이로제 환자 설츠 버그! 서투른 밤의 화가 설츠 버그는 그것으로도 상실해 가는 자신을 찾지 못하고 불면증은 날로 더욱 격심해 고통이 극심하게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단잠이 필요했습니다. 잠들 수 있는 행복이 그리웠습니다. 잠 못 이루는 밤이 저주스러웠습니다. 설츠 버그는 마침내 캔버스를 놓고 눈을 감고 고요히 누워서 찬송가를 흥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찬송가를 가사에 따라 나지막이 그러나 뜻있게 불렀습니다. 그는 곡조 붙은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차분하고 간절한 목소리였습니다. 찬송가는 몇 번이고 되풀이되었습니다. 어느덧 찬송가는 끊어지고 그는 잠들어 있었습니다. 잠든 밤의 행복! 꿀맛 같은 잠 속에 누운 것입니다. (디럭스바이블 내 갈길 멀고)

메마른 사막과 같은 심령에 은혜의 단비와 같은 은혜가 임한 줄 믿습니다. 이와같은 은혜를 베푸시는 여호와를 힘써 아는 모두가 됩시다.




어떤 사람이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어렸을 때 6.25로 부모와 헤어지고 고아원에서 자랐는데, 자신의 친부모를 찾으려고 애쓴 끝에 결국은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부모를 찾기 전에는 온 세상이 부정적으로 보이고,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고발하고 죽이려고만 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 원수처럼 보이고 적대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런데 평생을 찾던 부모를 만난 후에는 온 세상이 자기를 사랑으로 감싸주고, 사람마다 자기를 선의로 대해 주는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차이가 이와 같습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합니다.

찢으시고 치셨으나 고치시고 싸매시는 여호와를 힘써 알고

다시 살리시고 일으키시는 여호와를  힘써 알고

새벽빛과 같이 비와 같이 은혜로 임하시는 여호와를  힘써 알고 믿고 따르며 헌신하는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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