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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로 받은 구원 / 엡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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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은혜로 받은 구원
성경말씀 : 에베소서 2:8-9

우리 기독교인들은 은혜라는 말을 즐겨 사용합니다. 무슨 좋은 일이 생기면 세상 사람들은 ‘재수가 좋다’고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열심히 일해서 성과를 거두었을 때도 저들은 ‘내가 땀 흘려 수고한 결과’라고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끼니때 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자녀들이 학교에서 무슨 상을 타면 그들의 총명함과 노력을 칭찬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매사를 하나님의 은혜와 결부시켜서 말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은혜 가운데서 가장 큰 것은 구원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게 된 것이 은혜 가운데 가장 큰 은혜입니다. 내가 예수 믿고 싶어서 믿었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우리 각 사람이 애쓰고 노력한 결과, 하나님을 찾아 만난 것이 아닙니다. “10)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하신 말씀과 같이, 우리 인간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다 죄인입니다. 죄인은 제 능력으로 하나님을 찾지 못합니다.

범죄한 인간은 영적으로 볼 때 소경과 같습니다.

육신의 눈은 사물을 밝히 볼 수 있고, 먼 거리에 있는 것은 망원경을 사용하고, 미세한 것은 현미경을 사용해서 볼 수 있습니다. 또 사람에게는 육신의 눈외에도 이성이 있어서 도덕적인 삶을 살고, 학문을 연구하고, 예술 활동을 합니다. 그러나 영의 눈이 소경이므로 영적 세계를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육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보여주면 믿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영적 무능의 상태에 놓여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것도 절대 무능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길 잃은 양은 제 발로 제 집을 찾아오지 못합니다.

양이 길을 찾으려고 애쓸수록 점점 더 외딴 곳으로, 위태로운 곳으로 갈 뿐입니다. 낭떠러지 근처로, 또는 늑대나 이리가 득실대는 곳으로 가면서도 제 딴에는 길을 바로 찾아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잠언 14장 12절에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고 했듯이, 우리 눈에 바르게 보인다고 다 생명의 길이 아닌 것입니다. 목자가 길 잃고 헤매는 양을 찾아 나서지 않으면 그 양은 영락없이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 목자와 같이, 항상 하나님께서 먼저 죄인들을 찾아 주십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의 경우를 보세요. 아담은 하나님의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범죄하고나자 그만 눈이 밝아져서 자기의 벌거벗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담은 아내 하와와 함께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해 입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이처럼 죄를 지으면 하나님 뵙기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자꾸만 하나님을 피하여 어두운 곳으로 숨습니다. 아담이 제 발로 하나님을 찾아간다는 것은 전혀 기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아오셨습니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그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찾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든 치마대신에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든 치마는 인간의 의를 의미하고, 가죽옷은 하나님의 의를 의미합니다. 만약에 인간적인 의로움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면, 힘써 착한 일도 하고 자선도 하고 수양도 쌓아서 ‘하나님, 저의 의로움이 이 정도입니다’라고 내세울 수 있겠지만, 사실인즉 인간의 의로움은 말라버린 나뭇잎사귀에 불과하니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나뭇잎사귀는 금방 말라버려서 수치를 언제까지나 가릴 수 없듯이 인간의 의를 가지고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의로운 자라는 인정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의로 옷 입어야 합니다.

그러면 무슨 수로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옷 입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의는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선물로 받는 길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호의로 거저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말씀이군요? 맞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두 가지 견해

예로부터 인간의 성품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는 크게 두 가지가 지배적이었습니다. 그 하나는, 성선설로서 인간의 본성을 선하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불교에서는 사람들 속에는 부처가 있다고 합니다. 착한 사람은 물론이고 악인 속에도 부처가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부처란 선량한 본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악인도 자기 속에 있는 착한 본성을  깨닫고 그 본성대로 살려고 힘쓰면 얼마든지 선량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물론, 악인도 자기의 잘못을 반성하고 선량한 사람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인간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선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개과천선한 것이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이전보다 악한 일을 덜 행한다는 점이 다른 것입니다. 죄는 적게 지어도 죄인이고 많이 지어도 죄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죄인은 누구나 죽음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성선설에 반대되는 견해로 성악설이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이는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진리입니다. 본디 하나님께서는 선하게 인간을 창조하셨으나 범죄로 인해 본성이 악하게 타락한 것입니다.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되었으므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악한 본성을 지닌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부모의 유전인자가 자식에게 그대로 전달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흑인을 부모로 둔 사람은 검은 피부를 타고 나고, 백인을 부모로 둔 사람은 흰 피부를 타고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선천적인 것으로서 우리가 임의로 바꿀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수양이나 깨달음을 통해서 또는 선행을 통해서 의롭게 될 수 없는 것은 사람의 모든 생각과 행위가 오염된 본성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언뜻 보기에는 선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악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거리에서 구걸하는 걸인을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동전 한 닢을 던져주면서 동시에 ‘나는 착한 사람이야’라고 자부심을 느낍니다. 몇 천원 혹 만 원짜리라도 한 장 걸인의 손에 쥐어주었다면 두고두고 자신의 선행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구제한 것을 가지고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것입니다. 진정한 구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은밀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타락한 죄인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수렁에 빠진 사람이 밖으로 나오려고 애쓰고 힘쓸수록 점점 더 깊이 빠지듯이, 인간이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의롭게 되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더 구원으로부터 멀어지고 맙니다. 전도를 해 보면, 윤리 도덕을 잘 지키노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복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완고하게 나오는 경우를 많이 대합니다. 반대로 별로 도덕적으로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 훨씬 복음을 잘 받아들입니다. 전자는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기 때문이고, 후자는 자신의 불의함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인간적인 의로움은 구원 받는 데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서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자기가 병든 것을 알아야만 의사를 찾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것은 그들이 스스로를 의로운 자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세리 마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자 순종하여 세관에 사표를 던졌습니다. 그는 자기를 제자로 삼아주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 고마워서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시고 큰 잔치를 했습니다. 그 자리에는 동료 세리들과 평소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많이 참석했습니다.

세리와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은 대체로 유대 사회에서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잔치에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제외하고는 죄인들만 참석한 것입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고 비방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하는 말을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고 하셨습니다.

세리들은 자기들이 죄인인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외침을 들었을 때 겸손히 죄를 자복하고 그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왔습니다.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복음을 믿기만 하면 천국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니 세상에 이처럼 기쁘고 복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은 마치 희년이 되어 남의 종살이하던 사람들이 해방되어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가게 된 것에 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와 마귀에게 종 되었던 자들을 해방시켜 자유를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안식일에 고향 나사렛 동네의 회당에서 거기 모인 사람들 앞에서 이사야서 61장에 기록된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누가복음 4장 16절 이하에는 이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16)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곧 종된 자들에게 희년이 임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야말로 죄인들에게 가장 큰 은혜입니다.

한편, 우리는 자신이 죄인인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세리들이나 죄인들이라고 해서 모두 다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고, 바리세인이라고 해서 다 예수님을 배척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리들 가운데도 여전히 복음을 믿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고, 바리새인 가운데도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과 같이 진실되이 주님을 믿고 따랐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다만, 두 부류를 비교해 볼 때, 전자가 후자보다 주님을 믿은 자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세리든, 바리새인이든,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만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1장 18절에 “…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범죄한 인간은 영적인 방향 감각을 상실한 상태에 있으므로 제 능력으로 바른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의 발걸음을 하나님께로 돌이켜 주실 때 비로소 생명의 길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똑같이 완악하고 교만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으므로 그대로 두면 멸망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면 멸망 길로 가던 발길을 돌이켜 하나님께로 향하게 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셔서 설교를 경청하시는 여러분이 바로 여기에 속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 말씀을 듣기 위해 이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 사실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주일이 되면, 오늘은 주일이니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님을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한 동안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다가도 불현듯 영적인 깨우침이 올 때가 있습니다. 그것 역시 하나님께서 성도님을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에스겔서 36장 26절로 27절에 보니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십니다. “26)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새롭게 만들어주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베풀어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일컬어 불가항력적인 은혜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강권적인 은혜로서 우리는 감히 그 은혜를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것이냐 거부할 것이냐를 선택하는 것이라면 구원 받은 것에 대하여 우리의 공로가 포함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우리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에 압도되어 복음을 믿은 것이므로 우리의 공로는 전무한 것입니다. “8)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하신 본문이 이 사실을 말씀해 줍니다.

선물은 주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대가를 지불하고 받은 것은 선물이 될 수 없습니다. 만약에 우리의 의로운 행실로 구원 받았다면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고 우리의 실력으로 쟁취한 노획물이 될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 구원은 선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은 누구든지 죄인이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구원 받을 사람이 한 사람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구원은 너무나 값비싼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지 않으시면 그 누구도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구원이 우리의 공로가 아닌 것은 믿는 자들의 거듭남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거듭남은 곧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의 영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자말로 중생(重生)이라고 합니다. 부모로부터 태어난 것이 처음 출생이라면 하나님께로부터 영으로 태어나는 것이 거듭남 곧 중생입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1장 12절로 13절에는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태어남은 자식의 뜻과 상관없으며 순전히 부모의 뜻에 의한 것입니다. 영적 출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형식적으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적으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8장 15절 이하에는 이같이 말씀합니다. “15)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16)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17)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종의 영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종이 어찌 천지의 주재이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그러나 성도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으므로 스스럼없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맏아들이시고 성도들은 예수님의 아우들입니다. 성도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라고 한 것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에 대한 상속권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성도들의 영광스러운 신분에 관해서 베드로전서 2장 9절로 10절에는 “9)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10)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고 했습니다. 죄와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 받은 것만 해도 말할 수 없이 고맙고 감사한데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영원한 천국을 상속받게 하시다니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은혜입니까!

만약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바 이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신분을 올바로 인식한다면 삶의 목적과 방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하였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면 때 묻은 가치관을 버리고 새로운 가치관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세상적인 자랑거리를 많이 갖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가문도 좋고, 학벌도 좋고, 사회적인 배경도 좋았으며, 종교적인 열심은 자타가 인정할 정도였습니다. 한 동안 그는 그런 것들을 의지하고 자랑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로는 이전에 자랑하던 것들을 다 내어버렸습니다. 그것은 다이아몬드를 소유하게 되자 모조품을 버린 것과 같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7)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10)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고 했습니다. 또 그는 로마서 14장 7절로 8절에서 말씀하기를 “7)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기 이전과 이후의 사는 목적과 가치관이 180도 달라졌습니다. 이것은 비단 사도 바울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며, 구원의 은혜를 받은 모든 성도들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구원의 은혜를 받은 성도답게 살아갈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도 억지로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기쁨으로 자원해서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올바로 깨달은 성도들에게는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어렵기는커녕 주를 위해 사는 것이 친숙하고 편합니다.

“오리 새끼 물로 가고 꿩 새끼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리가 물을 좋아하는 것은 누가 시켜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오리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꿩이 산을 좋아하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세상 사람들이 허탄한 것을 좇고 육신의 정욕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은 그들이 육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나 죽으나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그들이 영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것은 이 땅의 것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믿음을 올바로 지키는 일로 받는 핍박을 싫어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주의 이름으로 핍박 받을 때 천국에서 상이 쌓이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 아닌 것이 없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은혜는 예수 믿고 구원 받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 60억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어쩌다가 저와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그리스도인의 반열에 서게 되었는지 생각할수록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즉 주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랑하며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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