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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법 / 고전 16: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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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법
고린도전서16:15-21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 같은 자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자에게 복종하라.(15-16)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의 온 것을 기뻐하노니 저희가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니라.  저희가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자들을 알아 주라.(17-18)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고전16:15-21)

  찰리 차플린이 만든 어떤 영화에 보면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모습이 戱畵化 되어 있습니다.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는 동안 잠시도 쉬지 못하고 일합니다.  잠깐 한 눈을 파는 사이에 기계와 인간은 뒤엉켜서 엉망이 됩니다.  조직화 된 인간사회 속에서 개개인이 얼마나 형편없는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인간 사회는 점점 거대 조직으로 시스템화 되어갑니다.  국가 공동체는 하나의 거대한 구조물입니다.  그 속에서 개인은 기계의 부품처럼 운신의 폭이 전혀 없습니다.  기업체도 마찬가집니다.  오늘날의 다국적 기업은 국가 조직보다 더 거대합니다.  그 속에서 개인은 마치 작은 컨베이어 벨트 위에 얹혀 있는 물건과 같습니다.  개인의 삶이나 행복의 문제에 대해서 전혀 관여할 여지가 없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끌려 가다가 끝나버립니다. 

  현대 사회 속에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공동체에 속합니다.  국가 공동체, 기업 공동체, 지역 공동체, 학교 공동체, 동창회, 향우회, 경제인연합회, 노동조합... 그러나 이러한 공동체 속한다고 해서 크게 행복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고독감을 느낍니다.  도심지에 우뚝 선 빌딩들을 보세요.  분명히 그 안에 수 천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기는 한 데 서로에게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습니다.  그저 각자의 공간 속에서 조직을 위해 일할 뿐입니다.  누가 마음 고생을 하는지, 누가 아픈지, 사고를 당했는지, 외로움을 느끼는지, 무슨 문제가 있는지, 전혀 상관하지도 않고 알지도 못합니다.  빌딩의 거대한 벽처럼 서로의 의사 소통이 막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 공동체들은 주로 이익 집단이기 때문입니다.  이익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그 이해상관에만 관심이 있을 뿐 다른 사람의 행복 문제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은커녕 공동체끼리 서로 충돌을 일으킵니다. 

미국과 이라크가 싸우고, 사용자와 노조원이 대립하고, 때로는 勞組員과 노조원이 대립합니다.  같은 서울 사람들끼리 벽제 사람들과 강남구 사람들이 서로 대립합니다.  때로는 어떤 공동체에 속해 있는 것이 우리를 평생 불행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교회 공동체에 속하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 속에 임하여 계십니다.  교회는 영원합니다.  우리는 교회에 속함으로써 영원한 행복을 누립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1:23)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엡3:21)  교회 공동체는 세상 공동체와 다릅니다.  다르기 때문에 공동체를 이루는 방법이 다릅니다. 

  오늘 말씀은 고린도전서의 마지막 문안 부분입니다.  단순한 인사말 같지만 여기에는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중요한 비결이 몇 가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원리대로 한다면 교회는 가장 견고하고 축복된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공동체에 속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공동체의 원리들은 어떤 것들일까요? 


섬기는 자들을 섬기라

  첫째로, 섬기는 자들을 섬기는 원리입니다.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 같은 자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자에게 복종하라."(15-16)  스데바나가 누구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알려진 사실은 두 가지 뿐입니다.  첫째는 그가 아가야 지방에서 처음으로 전도를 받은 신자라는 것이고, 둘째는 그가 교회 공동체를 섬기기로 작정한 사람이란 점입니다.  크게 알려진 사도가 아닙니다.  영향력 있는 지도자도 아닙니다.  그저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열심히 교회를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이런 사람들에게 복종하라고 합니다.  바로 여기에 교회 건설의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교회는 섬기는 자를 섬기는 공동체입니다. 

  세상 공동체는 아주 다른 원리를 갖고 있습니다.  섬기는 자는 얕잡아 보고 섬김을 받는 자만 우러러봅니다.  대부분의 공동체는 섬기는 자가 따로 있고 섬김을 받는 자가 따로 있습니다.  노예는 섬기는 일만 합니다.  상전은 섬김을 받기만 합니다.  백성들은 섬기기만 합니다.  황제는 섬김을 받기만 합니다.  지위가 높을수록 주로 섬김을 받습니다.  지위가 낮을수록 주로 섬기기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지 높아지려고 애씁니다.  높아지면 섬기지 않습니다.  그저 앉아서 섬김만 받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을 힘들게 하면서 내가 편한 것이 행복입니까?  강자에게 굴복하고 약자를 못살게 구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  죄인들의 못된 근성 중에 하나가 바로 그것입니다.  힘있는 사람에게는 복종하고 힘없는 사람에게는 군림합니다.  요즘 세상에는 주로 돈 가진 자가 섬김을 받고, 돈 없는 자는 주로 섬기는 위치에 있습니다.  교양이 있든 없든, 인격자든지 아니든지, 돼먹은 사람이든지 못돼먹은 사람이든지 돈 가진 자가 주로 대접을 받습니다.  그래서 품위 있는 사람들이 살맛이 나질 않습니다.  때로는 내가 동물의 왕국에 살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의 원리는 다릅니다.  교회는 섬기는 자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복종합니다.  교회 직책은 높아질수록 더 많이 섬깁니다.  주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5-28)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13:13-14)  교회 직분은 섬기는 직분입니다.  직분 없는 사람들보다 집사들은 더 많이 섬겨야 합니다.  집사보다 장로가 더 많이 섬기고, 장로보다 목사는 더 많이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더 많이 섬기는 자를 더 섬기고 더 복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섬김을 받는 왕이 아니라 섬기는 왕이십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주님을 종처럼 부릴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명령을 무시해도 안됩니다.  마찬가집니다.  교회는 직책이 더할수록 더 섬기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부리는 자들이 되려 하면 안됩니다.  오히려 더 존중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 공동체가 영원히 번성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특히 섬기는 것을 싫어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섬김을 받으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섬기는 자가 성공합니다.  이 세상에 섬김을 받으려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잘 들으십시오.  일찍부터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싸가지(싹과 가지)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큰 인물이 되기는 다 글렀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을 보세요.  천한 일, 섬기는 일 가리지 않고 다 한 사람들입니다.  요즘 취직이 안된다고 합니다.  제가 볼 때에는 안되는 것이 아니라 안하는 겁니다.  기꺼이 종이 될 결심을 해 보세요.  누가 마다하겠습니까?  구인 광고에 내 보세요.  "나는 종노를 하려고 합니다.  나를 써주세요!"  그러면 당장 취직이 될 겁니다.  요셉을 보세요.  우리는 요셉이 아무 일도 안하고 그저 금식기도만 해서 출세한 줄로 알고 있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요셉은 평생을 섬기는 일에 충실했던 사람입니다.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창39:4)  30세에 총리가 된 것은 우연이나 행운이 아닙니다.  그는 13년 동안의 비참한 신분을 다 참고 섬겼습니다.  노예 신분으로 보디발의 집을 섬겼습니다.  죄수의 신분으로 죄수들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섬길 줄 아는 요셉을 한 나라의 총리로 세우셨습니다.  섬기는 자들을 소중하게 여기세요.  그리고 섬기는 자들에게 복종하세요.  그것이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첫 번째 비결입니다. 


숨은 봉사자들을 알아주라

  둘째로, 숨은 봉사자들을 알아주는 일입니다.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의 온 것을 기뻐하노니 저희가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니라.  저희가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자들을 알아 주라."(17-18)  스데바나, 브드나도, 아가이고, 다 잘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사도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 사이에서 큰 역할을 했습니다.  서로의 오해를 풀게 하고 마음을 시원케 했습니다.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말하자면 성도들 사이에서 架橋 역할, 중재 역할, 좋은 媒介體 역할을 했습니다.  바로 이런 점을 인정하고 알아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자들을 알아 주라!"  알아주라는 말은 "επιγνωσκετε" 즉, 그들의 노고나 업적을 정확히 알아주라(recognition -NIV,RSV), acknowledge -KJV))는 뜻입니다.  공동체를 강화시키려면 숨은 일군들을 정확히 알아줘야 합니다.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는 것 중에 하나는 인정받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인정받을 때 행복감을 느낍니다.  결혼하신 여자들만 한 번 따라 해 보세요.  "당신은 내게 특별한 사람이예요!  당신은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참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매일 남편에게 그렇게 말해보세요.  무척 좋아하고, 행복을 느끼고, 만족할 겁니다.  아마 매일 퇴근할 때마다 손에 뭘 사들고 올지도 몰라요. 

아내도 마찬가집니다.  남편에게 인정받는 아내는 가장 행복한 아내입니다.  남자들만 한번 따라 하십시오.  "당신은 정말 좋은 아내요!  나 같은 사람 만나서 얼마나 고생이 많습니까?"  가끔 이런 말 한 마디씩만 한다면 눈물 흘리면서 감격할 거예요.  매일저녁 메뉴가 달라질지도 모릅니다. 

아이들도 그렇습니다.  부모에게 인정받는 자녀는 행복합니다.  모든 것을 공부로 판단하지 마세요.  매일 공부 못한다고 나무라면 공부 못하는 사람은 존재 가치도 없는 사람인줄 알아요.  저는 아내가 가끔 우리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듣습니다.  "너희들이 잘 자라 줘서 얼마나 고마운 줄 아니?"  "아빠는 너희들 때문에 너무 너무 행복해 한단다!"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말로 해 주세요.  대개의 부모들, 특히 아버지들은 자녀들이 강하게 자라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웬만큼 잘하지 않으면 칭찬을 하지 않습니다.  평균 95점을 맞아 와도 좋은 기색이 없어요.  "야, 98점이 될 수 있는 놈이 왜 95점이냐!"  정 떨어집니다.  이런 부모들에게 자녀들은 오해합니다.  "우리 부모는 나를 사랑하지 않나 보다. 혹시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는 아닐까?"  사람은 인정받을 때 행복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세요.  말로 해도 좋고 이벤트를 벌여도 좋습니다.  "펄떡이는 물고기처럼"이란 책이 있습니다.  아주 얇은 책인데 경영자들이나 중견급 간부들에게 많이 읽히는 좋은 책입니다.  주인공은 메리 제인이라는 여성입니다.  그녀는 갑자기 남편을 잃고 두 아이와 함께 의기소침해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녀는 금융회사의 중견 간부로 승진을 했지만 그가 맡은 부서는 "유독성 폐기물"이라고 불릴만큼 형편없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럴 때에 우연히 로니라는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로니는 제인에게 시애틀의 파이크 플레이스 어시장에 가보라고 합니다.  평범한 어시장인데 거기에는 모든 일이 활기 넘치게 벌어집니다.  고기를 운반하는 사람들은 마치 농구 선수가 공을 던지듯이 멋진 동작으로 고기를 던지고 받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재미 있어하도록 큰 소리로 구호를 외칩니다.  그 어시장의 하이라이트는 그 날의 주인공을 뽑는 이벤트입니다.  평범한 손님들 중에 그 날의 주인공을 뽑습니다.  예를 들면 그 날이 생일인 사람이라든지, 노란색 모자를 쓴 사람이라든지...대수롭지 않은 조건을 가진 사람을 주인공으로 선발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높이 치켜세우고 가장 특별한 사람으로 축하해줍니다.  만일 그 사람이 평생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살아왔다면 그 날 만큼은 가장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교회는 드러난 봉사자보다 숨은 봉사자들이 많습니다.  진실한 봉사자들은 대개 주님의 뜻을 따라서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정받지 않아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는 것에서 행복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을 먼저 마음에서 인정하세요.  그 다음은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십시오.  저는 저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서로 숨어서 봉사하고, 서로 인정하고 알아주는 데서 강하게 뭉쳐집니다.  알아주고 인정해주는 것!  그것이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두 번째 비결입니다. 


서로 문안하라

  마지막을 말씀드릴 것은 서로 문안하는 일입니다.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19-21)  바울의 편지를 보면 전후에 항상 문안의 말씀들이 나옵니다.  오늘 말씀에도 다양한 문안의 말씀들이 나옵니다.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여기서 아시아의 교회들이란 에베소, 골로새, 라오디게아, 히에라볼리 등에 있는 교회들입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는 로마에서 난 유대인 부부입니다.  글라우디오 황제(41-54)의 유대인 추방령으로 로마에서 쫓겨나 고린도에 와서 바울의 전도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세울 때에 함께 했고, 바울의 전도 여행에 함께 했습니다.(행18:18,26)  고린도서를 쓸 당시 바울과 함께 에베소에 있었고, 글라우디오 황제가 죽은 후에 로마에 가서 전도했고(롬16:3), 목회 서신 기록 당시에는 다시 에베소에 있었습니다.(딤후4:19)  그의 집에는 작은 가정 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인들이 지금 고린도 교인들에게 문안을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에베소 교회의 모든 형제들과 마지막으로 바울 자신도 친필로 문안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서로 문안하는 공동체입니다.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당시 중동 지방에서는 서로 입맞추면서 문안하는 것이 일반적 관습이었습니다.  그 관습이 초대 교회의 관습이 되었습니다.(롬16:16,고전16:20,고후13:12,살전5:26,벧전5:14)  13세기에 이르러 서방교회에서는 이 관습이 폐지되었습니다.  어떤 문화권에서는 모르는 남녀가 서로 붙잡고 입맞추면 이상하게 여기잖아요?  그러나 동방교회에서는 지금도 이 풍속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무튼지 교회원들은 항상 서로에게 문안해야 합니다. 

  문안이란 관심을 의미합니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관심을 가지세요.  현대인에게 가장 큰 불행은 바로 무관심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어요.  옆에서 사람이 굶든지 죽든지 관심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지독한 고독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최근 미국에서는 "멘토링"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멘토링(mentoring)이란 다른 사람에게 멘토(mentor)가 되어주는 운동입니다.  멘토란 그리스 신화에서 오디세우스가 자기의 아들의 교육을 부탁했던 先導者입니다.  거기서부터 다른 사람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조언해 주는 사람에게 멘토라는 명칭을 붙였습니다.  우리 평생에 가장 큰 멘토는 물론 부모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부모가 멘토가 되어주지 못하는 사람들이 허다하게 많습니다.  신앙 지도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신앙을 키워주는 것은 부모가 아니라 바로 목회자를 비롯한 다양한 멘토들입니다.  구역장, 교사, 성가대원, 전도회 임원들...뿐만 아니라 모든 교인들은 서로에게 멘토가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세요.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아픈 사람은 없는지?  고생하는 사람은 없는지?  고민이나 걱정에 빠진 사람은 없는지?  신앙이 거꾸로 가고 있는 사람은 없는지?  서로 관심을 갖고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매주 만날 때마다 서로에게 문안을 해야 합니다.  다 함께 해 봅시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아무도 관심이 없는데 성도들끼리 이런 인사를 한다면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이 인사 한 마디만으로도 교회에 속한 보람을 느낄 겁니다.  항상 서로 문안하시기 바랍니다. 

  교회 공동체는 서로 문안하는 공동체입니다.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도와주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세상 나라들이 다 망해도 교회 공동체는 든든히 세워지는 겁니다. 

  오늘 교회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세 가지 원리들을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섬기는 자들을 섬기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숨은 봉사자들을 인정하고 알아주라고 했습니다.  셋째는 항상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이런 원리를 실펀함으로 말미암아 교회 공동체가 견고하게 세워집니다.  교회가 견고할 때에 그 구성원들인 교인들도 안정되고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좋은 원리로써 좋은 공동체를 세우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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