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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관용(寬容)의 부재중(不在中) / 민 13:30~32, 눅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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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寬容)의 부재중(不在中)
민수기 13:30~32, 누가복음 19:1~10
                                 
오늘날 우리 사회의 상호 관계는 가장 비관용적이며 배타적이고 적대적이라는데 오늘날 한국 사회의 병폐적 심각성이 있다. 또한 가장 관용적이어야 할 기독교인들의 마음이 가장 비관용적이고 배타적이며 독선적이라는 현실을 목도 할 때마다 전투적인 행동, 편협한 마음은 무슨 때문일까? 신앙인의 가치관과 사회적 존재의 의미를 어디에 둘까?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면서 기독인의 자세가 오늘의 사회에 필요한 존재로 요구되고 있음을 본다.

포스트모던사회, 정보화사회, 다원화사회로 불리는 현대사회는 인간의 존재 방식과 문화 체험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눈부시게 발전해 왔다. 이러한 사회적 삶의 화해의 공동체가 자가당착에 빠지기 쉬운 우려 속에 갈등의 구조와 각자의 입장에서 이기적인 현상을 우리는 보게 된다. 지금 우리는 이러한 위기 앞에 경제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국민들이 한숨을 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계는 총파업 투쟁에만 몰두하고 있다. 누구를 위한 그리고 무엇을 위한 총파업인가? 노사불안 때문에 외국인 직접투자가 원천적으로 봉쇄되고, 국내기업들이 다른 나라로 생산지를 옮긴다면 그리고 노조의 요구대로 모든 것을 풀어 준다면 우리는 다시 기업 경쟁력 약화와 수출 경쟁력 저하로 IMF사태와 같은 총체적 위기를 맡게 될 것이며, 여기서 초래되는 피해는 결국 모든 국민과 근로자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정치 9단이라는 어느 정치인이 토로하는 말 가운데 "무슨 나라가 이러냐?"한 말이 사회의 유행어가 된 적이 있었다. 오늘의 사회 현실을 보고, 하다 못해 나온 절규의 말이라 생각한다. 현 노 대통령도 어느 사석에서 "대통령 못해 먹겠다" 한 말은 오죽하면 나온 말일까? 모두가 현실을 직시하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누가 용서를 구해야하고 누가 용서를 베풀어야 하는가? 용서를 운위할 자격이 없는 자들은 누구인가? 이쯤에서 우리는 보다 더 정직해져야 한다. 우리는 누구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며 누구를 용서해야 하는가? 아니 우리는 용서를 구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또한 우리는 누구를 용서할 수 있을 만큼의 사랑을 갖추고 있는가? 용서가 사랑이라면 새롭게 시작할 용기도 그 사랑 속에서 싹이 터져 나와야 한다. 새롭게 시작할 결의도 용기도 없으면서 화해를 말한다면 용서를 우롱하는 자인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이기적인 집단체제로 집단이기주의가 팽배해 있으며, 서로간의 이해 관계로 입장과 관점에 따라 갈등구조가 지역간 세대간, 교회와 국가간의 시국관이 보수 진보 논리로 서로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정치와 경제 문제에도 서로의 정치공세로 과거 회귀전으로 폭로를 일삼고 거기서 오는 반사이익을 얻어 자기 합리화를 정당화하고 있다. 툭하면 특검이요 국정조사요 장관해임안 대통령 탄핵을 정가의 보도처럼 외친다. 그것이 집단 세력을 견제하는데 도움이 될지는 모르나 실제로 쓰지도 못하는 "칼"을 자주 휘두르기만 하면 칼날도 무디어 진다. 노무현 정부나 민주당이 잘하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한나라당 인기가 민주당에 비해서도 떨어지는 것은 변화 할 필요성이 있음을 국민들은 보여 주고 있다. 국회 수첩을 통해서 나온 자료에 의하면 거대 원내 제1야당인 한나라당의 소속 의원 153명중 78명이 환갑을 넘긴 분이다. 지난 대선 때 한나라당이 패배한 요인 중에 "변화를 싫어하는 정당"이라는 이미지와 당의 연령적 분포와 관련이 깊다고 본다. 문제는 실제로 한나라당이 변화를 추구하느냐 하는 여부에 달렸다. 판단의 잣대 역시 "노인당"의 색깔을 확 벗어버리는데 있다. 이들은 대체로 탄탄한 지역 기반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지역성 중심의 인물 구조가 시대의 흐름인 "세대성" 이란 중요 요소를 무시하고 있다. 새 대표를 젊은 사람으로 뽑으라는 말이 아니다. 앞으로 거대 야당을 이끌 대표가 추구해야 할 지향점이 무엇인가를 말하자는 것이다. 미래를 내다보는 정책 경쟁을 외면하고 그들 자신이 변하지 않아도 먹고사는 현재의 안일이 지역성을 내세워 당선된다고 하는 착각증에 빠져 있는 것이다.

오늘의 이러한 집단이기주의, 데모만능의 세태를 보면서 "관용의 부재중"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고자 한다. 관용이란 상대방의 잘못이나 죄를 범하였을 때 상대방을 그의 행위에 따라 응징하지 않고 넓은 마음으로 받아 주며 그 잘못이나 죄를 참고 견디는 것을 관용이라 말할 수 있다.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의 관용의 태도와 정신은 예수 당시에 죄인이라 불리고 있는 사람들 소외되고 힘이 없는 사람들의 잘못과 죄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관용의 태도와 정신을 보여 준다. 그는 아무 조건 없이 그들의 죄를 용서한다. 그리고 예수는 그 사회의 힘있고 부유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소위 관용의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들의 욕심과 거짓과 위선을 냉철하게 비판한다. 이 예수는 죄된 사람들을 그들의 행위에 따라 응징하지 않는다. 그렇게 할 수 있는 힘도 그에게는 없었다. 이점에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이려는 악한 세력들을 저주하지 않으며 그들에게 폭력으로 저항하지 않는다. 그것을 피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들이 자기에게 행하는 폭력을 당한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자기에게 가해지는 죄악을 허용하며 그것을 참고 견딘다. 이런 점에서 예수는 죄와 악의 세력을 관용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관용은 죄와 악의 세력을 방치하거나 허용하기 위함이 아니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에 나타나는 관용의 정신이 죄와 악의 세력의 방치와 허용을 뜻한다면 그의 고난과 죽음은 구원의 사건일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죄와 악의 세력에 대한 협조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죄와 악의 세력이 자기에게 폭력을 행하도록 허용하며 그것을 소위 관용하는 것은 그것을 궁극적으로 극복하기 위함이다.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그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인간의 역사를 극복하는 길은 폭력에 대하여 맛 대응하는데 있지 않고 그것을 당하는데 있다. 오늘의 신약성서 본문에서 삭개오의 용기를 통하여 구원을 본다. 삭개오는 예수를 만나 집으로 모신 후에 자신의 재산 중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줄 것과 민중들로부터 토색한 것에 대해 네 배로 갚겠다고 선언한다. 사실 율법을 따르자면(출22;1이하) 삭개오가 토색한 것에 대해 네배로 갚겠다고 한 것은 배상법상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으나 더 나아가 자기 재산 중 절반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내 놓겠다고 선언한 것은 법적 차원을 넘어선 신앙적 차원에 그가 눈 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자신을 옭아매고 있던 사슬이 바로 물질에 대한 탐욕이었고 이것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 및 사람들과 차단시켜 버리는 장벽이 되었음을 알았던 것이다. 동시에 무슨 욕을 먹더라도 재물을 포기할 수 없었던 사람이 포기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것보다 더 큰 가치를 발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것이 관용을 갖는 마음인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큰 신발 공장에서 아프리카에 시장을 개척할 계획으로 두 사람의 사원을 현지 답사시켜 시장 개척의 가능성을 살펴오게 했다. 그런데 현지를 살펴보고 돌아온 두 사원의 보고서 내용이 서로 달랐다. 한사람은 아프리카 현지 주민들이 신발을 신지 않는 습관 때문에 그 지역에 시장을 개척하여 승산이 있을 전망은 흐리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또 다른 사람은 현지 주민의 대부분이 신발을 사용하고 있지 않은 점으로 보고 저들에게 신을 신도록 계몽하면서 신발 판매에 착수한다면 굉장한 수요가 생겨 날 것이고, 따라서 큰 전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결국 관점의 차이, 입장의 사고방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구약에서 가나안을 40일간 정탐한 여호수아와 갈렙과 10지파의 대표들의 정탐한 보고의 비유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는 알 수 있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사과 한 상자를 먹는데도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한사람은 매일 그 상자에서 나쁜 것부터 하나씩 먹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 한 상자를 다 먹기까지 매일 가장 나쁜 사과만을 먹는 셈이다. 그런데 또 다른 사람은 매일 그 상자 안에서 가장 좋은 것부터 하나씩 먹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 한 상자를 다 먹어 치우기까지 매일 가장 좋은 사과만을 먹는 셈이다. 똑같은 한 상자의 동질의 사과를 가지고 매일 가장 나쁜 것만 먹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매일 가장 좋은 것만 먹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차이는 크다. 결국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이다. 우리가 인생을 너무 낙관적으로만 보는 것도 문제이지만 너무 비관적으로만 보는 것은 더 큰 문제이다. 우리는 어떤 태도 어떤 생각 어떤 관점을 갖고 자기 입장을 세우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성서의 교훈으로 말하면 "우리가 해를 정면으로 대하면 우리의 그림자가 우리의 뒤로 가지만 우리가 해를 등지게 되면 그림자가 우리 앞에 생긴다"는 교훈은 이 시대에 새겨 볼 말씀이다.

이제 다원화된 현대사회에서 관용정신이 가장 요청되어야 할 덕목인 것을 사실로 알게 된다. 관용 정신이 현대사회에서 규범이 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면에서 정당성을 확보하는데 여러 가지 난점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기의 독립성을 보호하고 자율성을 추구하며 살아가게 되어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기의 독립성에 대한 그 욕망에 근거하여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자기 중심적 성향은 인간으로 하여금 지존하려는 의지를 위협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배타적이 되도록 만든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자기 존재를 지속시키고 더 나아가 확대시키려고 하는 본능을 갖고 있는데 여기까지는 도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이러한 자기 중심적인 성향이 사람들을 흑백 논리로 만들고 애증의 카테고리로 분리시키는 데 있다. 더욱이 더 큰 문제는 이렇게 형성된 논리와 카데고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굳어지고 자동 기계와 같이 되어서 자신이 억제하려고 해도 할 수 없게 된다는데 있다.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은연중에 모두 가치 평가를 자기 위주로 고르고 형성하는 습관에 빠지게 되고, 이런 개인적 습관은 어느새 집단화되어 하나의 고정된 사회적 관습이 된다. 이제 나와 내가 속한 집단은 타인 타민족 타종교 타인종들을 열등하거나 아니면 위협적인 적으로 지정하게 되며 또한 나는 그런 행위를 무비판적으로 따르게 된다. 이렇게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집단적 무의식에서 어떻게 인류가 벗어날 수 있겠는가? 이런 이유로 관용이란 이상적으로는 훌륭한 덕목임에 틀림이 없지만 그것을 현실로 옮기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구원이란 관념이 아니고 말의 유희도 아니다. 그것은 가장 소중한 것에 대한 재발견에서부터 시작해서 창피를 무릅쓴 용기로 구체화되고 실천적 해결책의 마련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러한 진행 없이 우리를 향한 예수의 구원선언은 기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된 구원을 위해 진실을 밝히고 무릎을 꿇는 용기로 그것을 실천적으로 구체화할 때만이 진정한 의미가 있음을 오늘 설교의 본문 "삭개오의 비유"에서 본다. 또한 삭개오가 예수와의 만남을 통해 스스로의 문제점을 인지하고 진정한 가치가 물질보다 더 위에 있는 것을 깨달은 뒤 인생의 목표처럼 중시했던 재물들을 과감히 돌려주므로 진정한 깨달음의 의미를 실천한 것은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관념적 구원관에도 매우 강력한 도전으로 다가온다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살면서 하나님과 화해하고 사람들과 화평을 이루며 사는 것만큼 가치 있는 것도 드물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생명을 묻는 율법사의 질문에 주께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씀하신 것은 결국 우리의 신앙 차원이 언제나 수직과 수평 두 차원을 유지해야 함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조화 없이는 기독교 최고의 가치 덕목인 구원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사회는 하나님은 고사하고 사람끼리도 서로 불화하고 사는게 다반사이다. 자기에게 피해를 입은 자들에 대해서는 집요할 정도로 물고늘어져 그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지만 막상 자신이 피해를 입힌 대상에 대해서는 너무 쉽게 잊어버리고 망각 속으로 숨어 버리는 것이 사람 사는 모습이다.

이런 사람사이의 불균형은 하나님과의 균형을 방해하는 가장 강력한 장애물이다. 땅에서 매이고서 하늘에서 풀리기를 바란다는 것은 그 이상 더 큰 모순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를 원망하는 대상을 외면하고 그들의 맺힌 가슴을 풀어 줌 없는 구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 때문에 가슴에 피멍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개인사일 수도 있고 국가적 차원일 수도 있다. 그런데 상처를 입혀 놓고도 자기가 가진 힘이 우월하다는 이유로 용서하기를 거부한다면 양자사이에 무슨 평화와 화해가 있을 수 있겠는가? 생각해 보면서 우리는 하늘의 풀림을 따라 땅의 풀림으로 삶의 현장으로 나가야 한다. 이것이 "관용 부재중"을 치유하는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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