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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감사하며 삽니다 (마 6:2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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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감사하며 삽니다(마6:25-30)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우리가 잘 아는 대로 1620년 영국의 청교도들이 배를 타고서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배를 타고 가는 도중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최종적으로 미국 땅에 도착한 사람의 수는 남자가 78명, 여자가 24명, 합계 102명이었습니다. 나중에 이들을 기념하기 위해서 뉴욕의 맨하탄에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102층으로 지어진 것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들 102명도 대부분 도시 출신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농사짓는 방법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고생이 심했겠습니까? 그들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이 어려움 속에서 우리를 구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시시때때로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때 그들이 또 다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다시금 금식을 해야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모두가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이러한 제안을 했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는 힘들 때마다 금식을 선포하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한 번쯤 우리의 생각을 고쳐볼 필요가 있는 줄 압니다. 물론 우리가 영국에서 살 때보다도 형편이 어려워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할 조건들을 찾을 수 있는 줄 압니다. 우리에게는 신앙의 자유가 있습니다. 정치의 자유도 있습니다. 또 우리의 눈앞에는 광활한 대지가 펼쳐져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얼마든지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금식을 선포하지 말고 차라리 감사를 선포하십시다. 우리가 감사의 주간을 정하고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더 많은, 더 큰, 더 깊은 감사를 하나님께 드려보면 어떻겠습니까?”
그의 말에 그곳에 있는 모두가 깊은 감화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금식주간을 선포하지 않고 대신 감사주간을 선포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그들이 감사주일을 지키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4:6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염려하지 말고 감사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염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감사입니다. 우리가 감사할 때 염려에서 출애굽 할 수 있습니다.
영국의 작가 다니엘 디포가 쓴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탔던 배가 파손이 되었습니다.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 모두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홀로 살아 남아서 무인도에 이르렀습니다. 그 무인도에서 그는 28년 동안이나 생존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극적으로 구조를 받았습니다. 그가 어떻게 해서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서 28년 동안이나 홀로 살 수가 있었습니까? 그의 정신력이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한 마디로 감사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내게 이런 불행한 일이 생겼다는 말인가?”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죽었지만 그래도 자기는 죽지 않고 살아 남았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그는 감사했습니다. 아무도 없는 무인도였습니다. 그러나 따먹을 수 있는 과일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감사했습니다. 아무데서도 옷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옷을 입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날씨가 따뜻하다는 사실에 그는 감사했습니다. 그에게는 총 한 자루 이외에는 변변한 무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섬 안에는 자기를 해칠만한 짐승이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그는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런 귀한 깨달음을 스스로 얻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은 무인도에 홀로 남은 사람이 아니라, 어디에서든지 감사할 조건을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염려하지 말라는 교훈으로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염려하지 말라.” 이 말씀을 달리 표현하면 무슨 뜻이 되겠습니까?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염려하지 않아도 될 여러 가지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드릴 조건들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뜻깊은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형식적인 감사, 습관적인 감사, 마지못해서 억지로 드리는 감사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정한 감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어떠한 지 세 가지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우리에게는 에벤에셀의 은혜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목숨이 유지되고 있는 것과 지금도 건강한 몸으로 이 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해 주신 에벤에셀의 은혜입니다. 25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바로 앞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신다는 사실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재물을 섬깁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들이 재물을 섬기는 세상 사람들처럼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좇아간다면 잘못된 일일 것입니다.
물론 요즘은 모든 것이 풍부합니다. 그래서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에 대해서 별로 염려하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만 해도 사정이 달랐습니다. 우기인 겨울철에도 비가 오지 않을 때가 있었습니다. 산에는 눈이 쌓이지 않습니다. 여름 농사철이 되어도 개울에 눈 녹은 물이 흘러가지 않습니다. 그러면 농사짓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마실 물을 찾기도 쉽지 않습니다.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하니까 형편이 어렵습니다. 옷을 사 입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늘 염려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러한 것들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25절 하반부입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하나님은 그들과 우리에게 음식보다도 더 중한 목숨을 지켜주셨습니다. 의복보다도 더 중요한 몸과 건강을 지켜주셨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먹을 음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건강한 몸으로 살아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몸을 따뜻하게 할 수 있는 의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아무리 창고에 곡식이 많이 쌓여있은들 목숨이 붙어있지 않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가 그러했습니다. 창고에 곡식이 가득 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영혼을 도로 불러가 버리셨습니다. 그러니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 아무리 우리에게 값비싼 옷이 많이 있은들 우리에게 건강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지금도 병원에 가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질병으로 몸져 누워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한 벌의 환자복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지켜주셨습니다. 건강을 지켜주셨습니다. 이 한 가지 사실만 생각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밤에 잠이 오지 않아서 힘들 때가 있습니다. 왜 밤에 잠이 오지 않습니까? 커피를 많이 마셨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사실 그런 것보다는 무엇인가 신경이 쓰이는 문제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문제를 잊고 푹 잤으면 좋겠는데 머리에 맴돌면서 떠나지를 않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계속해서 그 생각에 빨려 들기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엎치락뒤치락하게 됩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떤 사람은 이럴 때 잠을 청하기 위해서 숫자를 세기도 합니다. “하나, 둘, 셋, 넷…” 계속해서 숫자를 세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잠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방법이 모든 사람에게 다 통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숫자를 세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잊으려고 했던 그 문제에 다시금 빨려 들어가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때는 한 번 이렇게 생각을 바꿔보시기 바랍니다. 염려를 감사로 바꾸어보는 것입니다. 어두운 생각을 밝은 생각으로 바꾸어보는 것입니다. 예컨대 아들 때문에 걱정이 되십니까? 그래도 딸아이는 건강하고 착하고 예쁘게 잘 자라고 있음을 생각하면서 감사해 보십시오. 돈 때문에 걱정이 되십니까? 과거에 더 어려운 때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서 그 어려움을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셨음을 생각하면서 감사해 보십시오. 그러면 이번에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 속에 고요와 평안이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달콤한 잠에 빠져들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에벤에셀의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우리의 목숨을 지켜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숨을 지켜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음식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우리의 건강도 지켜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건강을 위해서 입을 옷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지금까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에벤에셀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할 줄 아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에게는 임마누엘의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고아처럼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임마누엘로 같이 하시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을 눈동자와 같이 지켜주시고 돌보아주십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설명하시기 위해서 두 가지 예를 들으셨습니다.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산상설교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산 위에서 지금 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공중에는 새들이 날고 있었을 것입니다. 들에는 이름 모를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새를 가리키면서 공중의 새를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들에 피어있는 아름다운 꽃들을 가리키면서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지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공중의 새에 대한 예를 들어주셨습니다. 26절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는 농사 짓는 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농사 짓는 일을 세 단계로 나누어서 말씀하셨습니다. 공중의 새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않습니다. 이와 같이 공중의 새는 농사를 짓지 않지만 결코 염려하는 법이 없습니다. 언제나 즐겁게 노래를 부르면서 잘만 살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26절 하반부에 보니까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천부이십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고 해서 그 팔이 짧으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언제나 그 팔로 섭리하시면서 돌보고 계십니다. 새들이 자라는데 필요한 풀을 키워주시고 새들의 먹이가 되는 벌레를 길러주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은 새들을 기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새들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26절 끝부분에 보니까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라고 했습니다. 눅12:24에 똑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서는 “공중의 새”가 “까마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까마귀는 어떤 새입니까? 부정한 새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증히 여기도록 되어 있는 새입니다. 그 보잘 것 없는 새 한 마리라도 하나님은 잊지 않고 먹이십니다. 하물며 우리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함을 받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들입니다. 그렇다면 공중의 새를 먹이시는 하나님이 그 자녀들인 우리를 왜 먹이지 않으시겠습니까?
예수님의 공중의 새에 이어서 들의 백합화를 예로 들어서 설명하셨습니다. 28절입니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예수님 당시만 하더라도 옷 한 벌 해 입기가 정말 어려운 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는 사람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요즘은 어떻습니까? 옷이 너무 흔합니다. 한 두 번 입고 나서 집안에 걸어놓은 옷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잘못된 일일 것입니다.
들의 백합화는 “수고도 아니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들의 백합화는 꽃의 색깔을 무엇으로 하며, 디자인을 어떻게 할 것인가 등으로 머리를 쓰지 않습니다. 들의 백합화는 “길쌈”도 하지 않습니다. 덜컹 덜컹 소리내면서 옷감을 짜는 일도 없습니다. 옷감이 남는다고 해서 가위로 옷감을 잘라내는 법도 없고, 옷감이 모자란다고 해서 실로 기우는 일도 없습니다. 그 자체로 완벽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2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솔로몬은 이스라엘 역대 왕들 가운데서 가장 많은 부귀와 영화를 누렸던 왕이었습니다. 그가 입은 아름다운 옷도 들의 백합화의 아름다움에 견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입은 옷은 아무리 잘 만든다 할지라도 기운 곳이 있습니다. 몇 번 입고 나면 구겨집니다. 염색을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물이 빠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꽃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30절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들의 백합화는 하루살이 들풀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할지라도 그 다음날이 되면 시들어버리고 맙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그런 마른 들풀들을 거두어다가 떡을 굽는 땔감으로 이용했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하루살이 들풀조차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시고 아름답게 입히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루살이 인생이 결코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들입니다.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더불어서 영원토록 살아갈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니 왜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는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어떤 염려가 있습니까? 그러면 그 염려에 빠져들지 말고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공중의 새를 바라보면서 들의 백합화를 바라보면서 잠시 그 생각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우리보다 못한 존재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보다 못한 공중의 새를 먹이시며,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는데 하물며 그 사랑 받는 자녀들인 우리를 왜 돌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면서 예수님은 30절 끝부분에서 이렇게 책망하고 계십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왜 우리가 염려합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임마누엘로 같이 하시면서 우리를 눈동자와 같이 보살펴주신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과 염려는 반비례합니다. 믿음이 깊어지면 염려는 얕아집니다. 그러나 믿음이 얕아지면 염려는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믿음과 감사는 정비례합니다. 믿음이 커지면 감사도 커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적어지면 감사도 적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감사가 부족합니까? 세상 염려로 가득 차 있습니까? 한 마디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임마누엘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눈동자처럼 지켜주시고 돌보아주신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감사하십시다. 그리할 때 우리의 믿음은 깊어질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에게는 여호와이레의 은혜가 있습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은 지금까지 우리를 돌보아주셨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앞으로도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27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여기에서의 키는 우리의 신장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원문상에는 우리의 수명 곧 생명의 길이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 우리말 성경에는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생명을 일각이나 더 하겠느냐.”
인간의 생사화복을 홀로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앞날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내일 일을 염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셔서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우리를 푸른 초장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염려대신 감사하면서 살아갑니다. 찬송가 434장 “나의 갈 길 다 가도록”의 한 부분입니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하나님이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셔서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늘 감사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추운 겨울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습니다. 어느 집 처마에 뾰족한 고드름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 집 앞마당에는 뚱뚱한 눈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고드름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할 때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곧 따뜻한 봄이 올 텐데¼” 그렇게 되면 자기는 녹아서 없어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고드름은 자기의 처지를 생각할 때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습니다. 고드름은 앞날에 대한 염려 때문에 너무 슬퍼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문득 고드름은 자기 앞에 서 있는 눈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 지 궁금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눈을 들어서 눈사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눈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드름은 이상하게 여기면서 눈사람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얘, 눈사람아! 너는 이제 곧 녹아서 없어질 텐데 걱정이 되지도 않니?”
그때 눈사람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왜 쓸데없이 염려하니? 생각해봐. 너의 말대로 나는 녹아서 물이 되겠지. 그러면 나는 흘러가면서 대지에 생기를 불어넣고, 잠든 꽃들을 깨워줄거야. 그리고 나는 계속 노력해서 바다로 흘러갈거야. 바다는 본래 나의 고향이거든! 나는 내 고향으로 곧 돌아간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마음이 설레. 그러니 내가 염려할 필요가 어디에 있겠니?”
그 후로도 고드름은 앞날에 대한 염려 때문에 늘 찡그린 얼굴로 지냈습니다. 몸은 날로 야위어갔습니다. 그러나 눈사람은 소망 속에 늘 빙그레 웃고 지낸 덕에 살진 모습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고드름과 같습니다. 늘 세상 염려 속에 싸여서 살아갑니다. 그들에게는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여호와이레의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예비해 주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신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염려가 아니라 감사를 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바다 위를 걸어갔습니다. 갑자기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물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즉시 그에게 손을 내미셔서 그를 건져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그때 자신의 그 체험을 생각하면서 벧전5:7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여기서 “권고”라는 말은 책임진다는 뜻입니다. 영어로 하면 “take care”로 돌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앞날을 돌보아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예비하시고 앞서 가시면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십니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서 늘 예수님을 바라보며 물 위를 걸어가는 우리의 승리로운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에벤에셀의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임마누엘의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눈동자처럼 지켜주고 계십니다. 우리에게는 여호와이레의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친히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은혜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모든 근심, 걱정, 염려를 눈 녹듯이 깨끗하게 씻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이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감사와 찬양으로 가득 채워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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