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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원망을 중단하라 / (출 16:7-9, 요 9: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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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망을 중단하라
(출 16:7-9, 요 9:1-7 )

 
우리 집의 두 아이를 키울 때 보니 사람들의 원망은 인간의 죄 속에 자라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기들이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합니다. 문지방에 걸려 넘어집니다. 그러면 아기들은 문지방을 손으로 가리키며 울어댑니다. 의자에 걸려 넘어집니다. 의자를 손으로 가리킵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피가 납니다. 돌부리를 가리키며 웁니다. 어른의 눈에 볼 때는 자기의 걸음마가 미숙해서 넘어지는 것인데 아기들은 자신은 잘 걷고 있는데 이것들이 걸려 넘어지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죄성입니다. 어릴 때부터 내 탓, 네 탓을 따지는 것이 인간의 죄입니다. 어릴 때부터 인간은 원망을 타고납니다. 원망게임은 우리가 어릴 때부터 본성적으로 타고난 것입니다. 어릴 때 학교 가기 전부터 하던 스스로 배워서 하는 게임입니다. 자기가 운전을 잘 못해서 차가 구덩이에 빠집니다. 그런데 운전자는 차에서 나와서 발로 차를 찹니다. 은근히 차를 원망합니다. 운전이 서툴러 생긴 일인데 마치 운전은 잘 했는데 차가 다른 데로 굴러간 것처럼 행동합니다. 이런 모든 것이 인간의 원망게임입니다. 원망게임은 가장 우스운 게임이며 가장 파괴적인 게임입니다.

나면서 소경된 자가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시각장애인이 누구 탓에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누구의 죄를 인함입니까? 자기입니까? 자기 부모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경우에 꼭 누구의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모두가 누군가를 원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구 때문에 문제가 생기고, 결과를 누구에게 탓하고, 자신의 책임을 전가하는 이것이 인간성입니다. 예수님은 원망을 중단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모든 원인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고자 하는 목적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모든 삶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인간 스스로에게 어떤 문제의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십니다. 누가 묻습니다. 이목사의 키가 작은 것이 누구 때문입니까? 아버지 때문입니까? 어머니 때문입니까? 저의 어머니가 늘 그러세요. “나 때문에 너들 키가 작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입니다. 키 커서 다른 것 하면 어떻게 합니까? 모든 것의 원인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면 원망은 중단됩니다. 이걸 알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흔히 하는 원망게임을 중단하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 원망을 중단하십시오.

제자들은 나면서 시각 장애를 가진 사람이 “뉘 죄로 인함이니오니까?”고 묻습니다. 이 질문 자체가 이미 죄의 결과란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죄의 결과란 결국 죄 때문에 하나님이 소경 되게 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죄 때문에 소경 되게 한다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눈감고 살아야 합니다. 죄 안지은 사람이 있습니까? 이 말엔 은근히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죄와 그 결과에 대한 인과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현재의 고통스런 상태는 원인이 죄라는 단순한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인가 실수하지 않았나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절대로 실수가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갑자기 집안에 엄청난 재난을 당하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이 이럴 수 있습니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내가 한번 주일을 안 지켰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큰 어려움을 주실 수 있습니까?” 이렇게 해서 결국 하나님의 곁을 떠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정신적 고통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나님께 대한 불평이나 원망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란 책은 일본 카톨릭의 초기 교회 한 신부의 이야기입니다. 이 책의 말미에 보면 배교한 신부와 그리스도와의 대화가 나옵니다. “주여, 당신이 침묵하고 계시는 것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라고 배교한 신부가 말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함께 괴로워하고 있었는데...”라고 답하십니다.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원망은 불신앙이며, 작은 믿음이며, 우리 편의 문제이지 하나님 편의 문제가 아닙니다.

출애굽기 16장에는 출애굽한 이스라엘백성들이 양식이 없다고 원망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었습니다. 이 원망을 들은 모세는 16:8에 “모세가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의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니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라고 합니다. 모세와 아론을 향한 원망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원망을 그들은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0장에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있습니다. 아침 첫 시간에 와서 종일 일한 품꾼이 저녁 마지막 시간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품꾼과 똑같은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받고 주인을 원망합니다. 20:11에는 “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라고 합니다. 먼저 온 자가 원망한 것입니다. 그 때 주인은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라고 원망하는 품꾼을 꾸짖습니다. 선한 하나님을 악한 하나님으로 생각하면 원망하게 됩니다. 이게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하나님이 실수하셨다고 하는 생각, 하나님이 잊으셨다고 하는 생각, 하나님이 악하다고 하는 생각,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조건이며 이것이 곧 독신죄입니다. 베다니의 마르다와 마리아를 보십시오. 마리아는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 예수님의 발아래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르다는 부엌에서 부지런히 예수님의 음식을 장만했습니다. 부엌에 있던 마르다가 혼자 열심히 일하다가 은근히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왜 내가 혼자 일하게 하는 것을 보시고 동생으로 하여금 나와서 도와주게 하시지 않습니까”라고 원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말에는 동생을 원망하는 뜻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절대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로마서 8:28에는 말씀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종래 이루시는 것은 선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크나큰 우리편의 실수입니다. 행여나 하나님을 원망할 만한 일이 생기더라도 원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편이시고 신실하십니다.

둘째, 다른 사람 원망을 중단하십시오.

제자들은 “자기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미 죄의 결과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나 부모 둘 중의 하나의 죄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좁은 생각이었습니다. 이 말은 소경에게 부모를 원망하게 만들고, 부모에게 아들을 원망하게 만드는 말입니다. 마귀는 이런 장난을 칩니다. 서로 원망하는 경우에 부모는 “아이구, 내가 무슨 팔자로 너 같은 자식을 낳았어? 너 때문에 부끄러워 못살겠다. 차라리 죽기나 하지”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자녀는 “왜 나를 이 모양으로 낳으셨나요? 차라리 죽게 놔두지 왜 살려두셨나요?”라고 할 것입니다. 이런 서로에 대한 원망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오래 전 어느 교회에 있을 때 제가 맡은 교구에 한 집의 두 자매가 청각장애인 가정이 있었습니다 어릴 때 두 자매가 같이 홍역을 앓아서 해열 주사를 놨는데 그 부작용으로 딸 둘이 함께 청각장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모가 그 딸들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누가 방문하게 되면 한 쪽 방에 가두어 두고 나오질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구역을 맡은 분들도 그 딸들의 얼굴을 못 봤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애들 때문에 내가 죽고 싶고 부끄럽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 집에 가서 그 딸들을 나오게 했습니다. 처음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제가 절대 그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고 설득했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는 장애를 가지고 살지만 하늘나라에는 같이 가야 되고 같이 갈 권리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장애를 가지고 사는 것도 억울한데 하늘나라도 못 가면 더 억울하지 않느냐고 달랬습니다. 그래서 결국 두 자매가 나와서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오래 전 일반적인 부모의 생각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조롱하는 것은 하나님을 조롱하고 판단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판단하여 단죄하고,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과 전혀 다릅니다.

하와가 뱀에게 꼬임을 받아 죄를 지었습니다. 하와는 아담에게 다시 선악과를 얻어먹고 죄를 지었습니다. 만약 하와만 선악과를 먹고 아담이 먹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징벌과 인간 구원의 계획은 달라졌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똑같이 선악과를 먹고 죄를 지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아담에게 나타나시고 죄를 지은 경위를 물으십니다. 그 때 아담은 하나님을 먼저 원망합니다. “왜 잠자는 사람의 갈비를 뽑아서 여자를 만들어 이렇게 곤란하게 만들었습니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를 원망했습니다. “하와가 먼저 꼬임을 받아 내게 주었습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와는 다시 뱀을 원망합니다. 서로 원망하고 책임을 전가합니다. 그런데 그 전에 하와에게는 말을 하던 뱀이 이 때 이미 벌을 받아 말을 못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원망도 하지 않습니다. 원망이란 차원에서 볼 때에 뱀이 사람보다 조금 낫습니다. 그만큼 사람의 원망은 큰 죄악입니다. 강철 왕 카네기는 리더로서 다른 사람과 만날 때 좋은 관계를 만들어 가는 법칙을 ‘3C 법칙’이라 했습니다. 비판하지 않는다(criticize), 비난하지 않는다(condemn), 불평하지 않는다(complain)는 세 가지입니다. 남을 비판하고, 비난하고, 불평하는 것은 지도자로서 자격이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마르다가 자기 동생을 원망하는 것을 보세요. 자기보다 약해 보이는 자를 원망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사도행전 6:1에는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라고 합니다.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구제하는 일로 교회에 원망과 문제가 발생합니다. 교회는 꼭 좋은 일로 시험에 들고, 문제가 생깁니다. 만일에 구제에 빠졌다면 사도들이 뺐을 텐데 원망은 히브리파 사람들에게 합니다. 사도들에게는 감히 원망을 못하니까 자기 보다 약해 보이는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했습니다. 야고보서 5:9에는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고 합니다. 원망이 얼마나 큰 죄인 것을 아시겠지요?. 원망은 심판을 초래할 만큼 큰 죄입니다. 형제는 원망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와 사랑의 대상의 대상입니다.

셋째, 자기 자신 원망을 중단하십시오.

자신에 대한 원망은 하나님의 인간창조에 대한 모독입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얼마나 귀한 천하보다 귀한 존재입니까? 우리 모두는 특별합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만들어 세상에 보내신 존재입니다. 존귀하지 않고 특수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바보야, 내가 못났어”라는 식의 자학적 태도는 자신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잘못을 범하는 일입니다. 켄 셸턴은 ‘리얼 석세스’란 책에서 “자기 경시는 하나의 범죄이다”라고 했습니다. 자기 경시가 아니라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자존감은 교만과 다르며 자신을 사랑하는 애기(愛己)는 자기중심적 사랑인 이기(利己)와도 다릅니다. 자존감이란 개인의 자신의 능력과 가치에 대한 긍정적 생각을 총칭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존감에는 자기 신뢰와 자기 존중이 포함됩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자신의 삶이 자기만의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 삶에 적합하게 산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인생에 있어서 자신의 유능함과 자신의 존재 가치에 긍지를 가집니다. 마이크 머독은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이 당신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며 스스로가 자신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과 공경심이 가장 중요한 자기 사랑입니다. 어떤 여인이 무시무시하고 큰 괴물에게 쫓기는 꿈을 꾸었습니다. 괴성을 지르며 따라옵니다. 계곡으로 도망해 보지만 그 곳으로 따라옵니다. 아무리 도망을 해도 계속 따라와서 막다른 곳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괴물이 코앞에까지 쫓아왔습니다. “야, 괴물아 도대체 나한테 뭘 어쩌려는 거야”. 괴물이 대답했습니다. “그건 너한테 달렸지. 이건 네가 꾸는 꿈이니까”. 자신을 가장 크게 방해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입니다. 항상 자신을 원망하고 자신을 넘어지게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나 어떤 사건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마태복음 22:39에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너 이상’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되 ‘너 몸만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자신을 사랑해야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남도 사랑하지 못합니다. 데일 겔러웨이는 ‘당신의 인생을 다시 시작하라’는 책에서 “하나님이 당신을 용서하셨으니 이제 당신이 당신을 용서하라”고 합니다. 이제 우리가 자신을 용서하고 자신에 대한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남도 세상도 사랑하게 됩니다. 자신의 외형에 대한 불평과 원망도 마찬가지입니다. 외형에 대한 불만, 불평, 원망 이 모든 것은 다 헛된 자화상입니다. 사람이 자신에 대한 사랑과 건전한 자화상이 있으면 외형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건강한 자화상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론

200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를 선정하는 국제 올림픽위원회의에서 우리 나라의 평창이 밴쿠버에 3점차로 패배했습니다. 참 아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선전했습니다. 한편 우리 나라가 대단하지만 너무 욕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아시아 경기는 빼놓고라도 올해의 유니버시아드 그리고 88년의 올림픽, 작년의 월드컵 등 세계적 경기를 골고루 하고 이제 동계올림픽 마저 했으면 했는데 아직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뒤에 들리는 후문이 너무 씁쓸합니다. 무주와 평창이 서로 유치경쟁을 하다가 표를 잃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도시끼리 서로 경쟁하고 서로 깎아 내리고 원망하다 결국 고배를 마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엊그제는 김운용 IOC 위원이 부위원장에 출마하려고 평창 유치를 방해하였다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결과적으로 패배를 맛보았는데 그 뒤에 서로 원망하고 책임을 묻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쩌면 이런 원망이 패배할 수밖에 없는 원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고린도전서 10:10에는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 합니다. 원망 게임은 결과적으로 서로 멸망하게 합니다. 우리는 함께 멸망하는 원망게임을 빨리 끝내야 합니다. 빌립보서 2:14에는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합니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해야 은혜롭고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이 나타내시는 일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한 주간의 삶 속에서도 원망하고 불평할만한 일들이 또 생길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정부를 원망하고, 사회를 원망하고, 이 지구를 원망할 일이 생길 것입니다. 그 때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뜻을 발견하는 은혜로운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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