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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생활은 장거리 경주입니다. / 히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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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히브리서 12:1-3
설교제목 : 신앙생활은 장거리 경주입니다. 

  오늘은 『신앙생활은 장거리 경주입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문 1절을 보겠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신앙생활은 경주입니다.  그러나 100m, 1,000m 정도의 단거리가 아니라 장거리 경주입니다.  마라톤 경주와 같습니다.  우리는 이 경주에 벌써부터 동참하고 있습니다.  구경꾼이 아니라 경기자로 달리고 있습니다.  이 경기에 동참하는 자는 오직 승리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경기를 혼자만 해서는 안됩니다.  부부가 같이 해야 합니다.  형제가 같이 해야 합니다.  친구와 같이 해야 합니다.  이웃과 같이 해야 합니다.  우리 동족 모두가, 나아가서 전 세계가 이 경주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래서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입니다.  농어촌 미자립 교회를 도우는 것입니다.  선교기관을 지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혼자서만 경주에 참가하고 있는 분은 없으십니까?  가족과 같이 해야 합니다.  하루 빨리 동참하도록 해야 합니다.  미루면 안됩니다.  제일 먼저 해야 될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신앙의 경주에 승리할 수 있는 네 가지 비결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 비결은 신앙생활에는 많은 증인들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본문 1절 상반절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이라 했습니다.  이 말을 경주장에 비교하면 관람석을 가득 메운 관중을 말합니다.  좋은 경기에는 관중들이 많이 몰립니다.  초만원을 이룹니다.  입장객이 많아서 경기장에 다 입장할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신앙생활도 증인들이 많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증인들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신앙생활의 증인들과 경기장의 증인들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경기장의 관람객은 구경꾼 밖에 될 수 없습니다.  직접 경기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자신은 직접 참여하지 못한 채 구경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의 증인들은 구경꾼이 아닙니다.  모두 승리자들입니다.  모두 월계관을 쓴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증인들을 살펴보겠습니다. 
  형님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린 아벨입니다.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던 에녹입니다.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방주를 지었던 노아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던 아브라함입니다.  100살에 얻은 아들이지만 하나님이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에 그대로 순종했던 아브라함입니다.  그래서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항상 화평을 도모하던 이삭입니다.  큰복은 하나님 아버지가 주시는 것을 확실히 믿은 야곱입니다.  그래서 그는 야곱이라는 이름대신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어떤 일에도 낙심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으면서 어려움을 이기고 그 부모와 형제와 민족을 흉년에 도움을 주었던 요셉입니다. 
  민족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이끌어낸 모세입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12지파를 그 땅에서 살 수 있도록 인도한 여호수아입니다.  믿음을 가졌던 라합입니다.  300명의 군사로 민족을 구원한 기드온입니다.  믿음의 사람 사무엘입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입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입니다.  우상숭배를 거부하다가 사자굴에 들어간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입니다.  풀무불도 믿음을 가진 그들을 태우지 못했습니다. 
  세례요한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사도바울입니다.  디모데입니다.  바나바입니다.  성 어거스틴입니다.  성 프란시스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입니다.  칼빈입니다.  쯔빙글리입니다. 
  18세기 영국을 복음으로 구원한 요한 웨슬레입니다.  죠지 와싱톤입니다.  에이브라함 링컨입니다.  슈바이쳐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입니다. 
  안창호선생님입니다.  김구선생입니다.  이기풍 목사님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입니다.  조만식 장로님입니다.  그 증인들의 이름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무명의 수많은 증인들이 있습니다.  기독교 2,000년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들은 핍박을 이겼습니다.  악형을 이겼습니다.  칼날을 이겼습니다.  희롱을 이겼습니다.  결박과 투옥을 이겼습니다.  궁핍과 가난과 고통과 괴로움을 이겼습니다.  신앙의 승리자들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지키겠노라고■, 우리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었다고■”
  뿐만 아니라 우리와 같은 믿음을 가진 자에게 같은 은혜를 주신다는 말입니다. 


  승리의 둘째 비결은 모든 장애물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본문 1절 중반절입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경기자는 무거운 의복을 입으면 뛰기 불편합니다.  가벼운 운동복을 입어야 합니다.  수영선수들에게는 긴 머리카락도 장애가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항상 모자를 씁니다.  아예 머리를 미는 선수도 있습니다.  만약 우리나라 한복을 입고 갓을 쓰고 경기를 한다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경기자는 경기에 가장 적합하고 가뿐한 옷차림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신앙생활의 경기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생활에 방해되는 요소가 많으면 안됩니다.  인생의 모든 무거운 짐이 있으면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승리한 신앙의 증인들이라고 해서 그들의 인생에 조그마한 잘못이나 죄가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들도 모두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잘못했을 때 회개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피로 씻음 받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혼자 고생하면 안됩니다.  주 예수님께 모두 맡겨 버려야 합니다.  주님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오늘 주님께 나오신 성도 여러분!  여러분 중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지 못하고 그냥 지고 계신 분은 없으십니까?  주님께 다 맡겨 버리시기 바랍니다.  주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 짐을 대신 져 주실 수 있습니다.
  찬송가 487장 1절입니다.
  죄 짐 맡은 우리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주께 고함 없는 고로 복을 얻지 못하네
  사람들이 어찌하여 아뢸 줄을 모를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에 방해가 되는 요소는 없으십니까?  우리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취미생활을 즐깁니다.  그러나 어떤 것은 신앙생활에 크게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 것은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친구와 교제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어떤 친구는 신앙생활에 큰 방해를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복 있는 자는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음악감상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어떤 음악은 잘못된 것이 있습니다.  인생을 한탄합니다.  사랑의 실패를 노래합니다.  슬픔을 노래합니다.  죽음을 찬미합니다.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록음악 중에는 사탄을 찬양하고 사탄을 위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러한 노래를 많이 들으면 마음이 흐트러집니다.  범죄에 빠지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신령한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책 읽기를 좋아합니다.  영화감상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어떤 책들은 읽어도 이익이 없는 책이 있습니다.  어떤 영화는 쓸데없는 자극만 줍니다.  범죄를 일으키는 충동을 줍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잘못된 책은 읽지 않아야 합니다.  그와 같은 영화를 보지 않아야 합니다. 

  인간들은 누구나 약점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탐욕입니다.  성경의 다른 명령은 모두 마음에 받아들이면서 십일조는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탐욕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책임 회피합니다.  남편이 불신자라서 못 드린다고 합니다.  액수가 많아서 못 드린다고 합니다.  그러면 내 것은 더 많습니다.  왜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합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게 붙어있는 탐욕을 제거해야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내게 달라붙어 있는 얽매이기 쉬운 죄는 없으십니까?  지난 죄를 모두 주님 앞에 털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모두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깨끗이 씻음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깨끗해지시기를 바랍니다.  자유로움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전파되고 사회를 변화시킨 제일 큰 공헌은 술과 담배를 금한 것입니다.  외국의 개신교 교회들 중에는 금연, 금주하는 교회가 많습니다.  그래서 지금 불신자들이 신자들을 볼 때 금연과 금주를 당연한 것으로 인정합니다.  귀한 일입니다.  담배는 대량살상무기입니다.  담배로 인해 1분에 8명이 사망합니다.  암으로 죽는 사람 중 1/3명이 담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신 분 중에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분들이 간혹 있습니다.  숨어서 피우고 마십니다.  “주님 성령을 주시옵소서.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모두 끊을 것은 끊고, 하지 않을 것은 하지 않는 은혜를 받으셔서 모두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경기의 세 번째 승리비결은 인내입니다. 

본문 1절 하반절입니다.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장거리 경주 승리는 인내에 있습니다.  특히 마라톤은 힘의 배분을 잘했다가 마지막 순간에 잘 사용해야 합니다. 
  마라톤은 정말 힘든 경기입니다.  42.195km를 2시간 조금 넘는 시간 안에 달려야 합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황영조씨를 인터뷰한 글을 읽은 일이 있었습니다.  “연습할 때 얼마나 힘들었던지 차에 뛰어들어 죽고 싶을 때도 있었고, 어떤 때는 가슴이 너무 조여들어 그냥 이대로 죽고 싶을 때도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인내했습니다.  참고 견디었습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견딘 결과 금메달의 영광을 차지했습니다.  인내의 결과가 주는 복입니다.

  신앙생활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인내 없이는 면류관을 받아 쓸 수 없습니다.  면류관은 인내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쉽게 포기하고 불평하고 남의 말하고 쉽게 절망하는 자는 하나님이 예비한 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인내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천국의 복을 주십니다.  인내는 계속적인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고독과의 싸움입니다.  지위가 높을수록 더 참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인내를 이사야 선지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장 7절)

  예수님은 가룟유다의 배신을 보면서도 참으셨습니다.  희롱을 당하면서도, 모욕을 당하면서도 참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면서도,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도 그는 인내하셨습니다. 
  잡히시던 날 밤, 예수님을 잡으러 온 대 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드로가 쳐서 떨어뜨렸을 때 예수님은 그 귀를 붙여주시면서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을 위하여서는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인내하시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구세주가 된 것입니다.  속죄주가 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이 힘드십니까?  괴롭습니까?  “No Cross, No Crown!”입니다.  십자가 없이 는 면류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 9: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승리의 넷째 비결은 분명한 목표를 정하는 것입니다. 

경기에는 반드시 목표가 있습니다.  골인지점입니다.  경기자가 아무리 출발을 잘해도, 아무리 잘 달려도 골인지점에 제대로 도착하지 못하면 면류관의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 이야기는 우리가 배울 점이 많습니다.  끝까지 잘 달려야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골인지점은 예수님입니다.  천국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본문 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말씀해 줍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은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눈앞에는 누가 보입니까?  하와는 선악과를 바라보다가 죄 지을 생각을 했습니다.  롯의 처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왜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까?  그는 구원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히 2:10) 주님만이 우리가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고, 빛을 주시고, 희망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만 인류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창시자요 개척자요 회개와 사죄의 근원이십니다.  우리를 온전케 해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구원을 얻습니다.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①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주님의 얼굴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첫째도 사랑이셨고, 둘째도 사랑이셨고, 셋째도 사랑이셨습니다.  말구유 탄생도 사랑이셨고, 십자가를 지신 것도 사랑이셨습니다.  십자가의 그 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피는 구원의 피이기 때문입니다. 

  ② 용서의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세상에서 인간취급 받지 못했던 자의 죄도 용서하시고 새 길을 허락하셨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나 삭개오 같은 탐관 오리도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새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③종으로 사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주님의 겸손과 봉사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직분자 여러분!  교역자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직분은 목에 힘주라고 주신 직분이 아닙니다.  명령하는 직분이 아닙니다.  겸손해야 하는 직분이고 철저하게 낮아져야 하는 직분입니다.  순종하는 직분입니다.  섬기는 직분입니다.  봉사하는 직분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대접받으려 하지 마십시오.  섬기십시오.  철저하게 섬기시기 바랍니다.

  ④ 주님의 십자가의 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죄의 확증을 확신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찔림은 나의 허물을 인함이요 예수님이 상함은 나의 죄악을 인함이라 예수님이 징계를 받음으로 내가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사야 선지의 예언을 나로 바꾼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일찍이 신앙의 경주를 시작했습니다.  모태에서 출발했고 50년 전, 30년 전, 10년 전, 5년 전, 지난달에 출발했습니다.  장거리 경주에 들어섰습니다.  금년의 신앙의 경주를 6개월 달려왔습니다.  바른 코스를 달려왔습니까?  자꾸 옆길로 빠지지는 않으셨습니까?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무거운 짐을 오늘 벗어버리십시오.  어려움이 있어도 인내하십시오.  천국이 앞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믿음의 주님이십니다.  온전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이 은혜가 있으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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