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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의 고난과 기도 / 시 77: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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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성도의 고난과 기도
시편77:1-20                                      고통 중의 부르짖음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하나님께 내 음성으로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으며 내 영혼이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1-2)  내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셀라)  주께서 나로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  내가 옛날 곧 이전 해를 생각하였사오며, 밤에 한 나의 노래를 기억하여 마음에 묵상하며 심령이 궁구하기를,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 인자하심이 길이 다하였는가, 그 허락을 영구히 폐하셨는가, 하나님이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 긍휼을 막으셨는가 하였나이다.(셀라)(3-9)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연약함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곧 여호와의 옛적 기사를 기억하여 그 행하신 일을 진술하리이다.  또 주의 모든 일을 묵상하며 주의 행사를 깊이 생각하리이다.(10-12)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큰 신이 누구오니이까?  주는 기사를 행하신 하나님이시라. 민족들 중에 주의 능력을 알리시고, 주의 팔로 주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구속하셨나이다.(셀라)  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며 깊음도 진동하였고, 구름이 물을 쏟고 궁창이 소리를 발하며 주의 살도 날아 나갔나이다.  회리바람 중에 주의 우뢰의 소리가 있으며 번개가 세계를 비취며 땅이 흔들리고 움직였나이다.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첩경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종적을 알 수 없었나이다.  주의 백성을 무리양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13-20)"


苦痛과 懷疑

  금년도 4월호 Reader`s Digest에 보면 마이클 J. 폭스가 쓴 "내 인생에 좌절은 없다"라는 글이 실려 있습니다.  마이클 J. 폭스는 "Back to the future"라는 유명한 영화의 주인공입니다.  그는 캐나다 출신으로 1977년, 16살의 나이에 데뷔하여 방송과 영화에서 큰 명성을 얻은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는 1991년 20대 후반의 나이에 파킨슨병에 걸렸습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손가락 떨림 현상이 있어서 병원에 가서 진단해 보니 파킨슨병이라는 겁니다.  파킨슨병이란 뇌 속에서 도파민이라 불리는 신경전달 물질의 분비가 부족해지면서 생기는 병으로, 1817년 영국 의사 파킨슨이 처음 발견해 붙여진 병명입니다.  파킨슨병 환자는 손을 덜덜 떨고 얼굴 표정이 굳어지고 행동이 굼떠지고 꾸부정한 자세와 짧은 보폭으로 팔을 흔들지 않고 걸어다닙니다.  마이클 J. 폭스는 현재 이 병 때문에 배우 생활을 더 하지 못하고 고통스런 투병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병명을 알고 나서 크게 낙심했습니다.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내가 그 병에 걸릴 수 있단 말인가?  50대나 넘어서 걸릴 수 있는 병이 20대에 나타나다니!  괴로운 것은 그 병을 나만 홀로 앓고 있다는 고독감이었습니다.  한창 잘 나가던 인생이 끝장났다는 절망감, 더 이상 뭘 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날마다 술에 취해 현실을 잊으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고통을 당할 때 "왜 하필이면 나인가?"(Why me!)라고 반문합니다.  마이클 폭스도 처음에는 반발했습니다.  왜, 다 멀쩡한데 나만 홀로 그런 병에 걸려야 하는가?  그러나 파킨슨 병은 특별한 병은 아닙니다.  연세대 의대 김진수 교수에 의하면 현재 한국의 65세 이상의 인구 가운데 약 1% 정도가 파킨슨병 환자라고 합니다.  숫자로 따지면 약 10만 명이나 됩니다.  유명한 권투 선수였던 무하마드 알리도 파킨슨병 환자입니다.  마이클 폭스는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있는 그대로 현실을 받아들이자!  실제로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의 대부분은 육체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것입니다.  마음가짐이 중요해요.  저도 20대 초반에 병상에서 괴로워 한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몸은 그렇게 아프지 않습니다.  몸보다는 마음이 백 배 천 배 더 아픕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심, 하고싶은 일을 하지 못하는 데 대한 좌절감, 미래에 대한 불안감, 가족에 대한 미안함, 뭐 그런 것들이 더 고통스럽습니다.  사업에 실패했다든지, 돈이 떨어졌다든지, 실직했다든지, 혹은 시험에 낙방했다든지, 부부관계가 좋지 않다든지, 다 마찬가집니다.  육체적으로 당하는 고통은 별로 없습니다.  고통의 핵심은 마음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시42:5)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고난과 고통은 나만의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다 각기 모양은 다르지만 한 가지 이상의 고민들을 안고 있습니다.  그 고통의 대부분은 육체적인 것보다는 주로 정신적인 것들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신자들이 고난을 당할 때 추가되는 고통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앙의 懷疑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세요.  "내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셀라)  주께서 나로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  내가 옛날 곧 이전 해를 생각하였사오며, 밤에 한 나의 노래를 기억하여 마음에 묵상하며 심령이 궁구하기를,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 인자하심이 길이 다하였는가, 그 허락을 영구히 폐하셨는가, 하나님이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 긍휼을 막으셨는가 하였나이다."(3-9절)  과연 하나님은 계시는가?  하나님이 계신다 해도 나와는 상관이 없지 않는가?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내 고통을 보고만 계시는가?  영적인 고민입니다.  영적인 고민은 육체의 고통보다도, 다른 어떤 정신적 고통보다도 우리를 괴롭게 만듭니다.  신앙은 인간이 기댈 수 있는 마지막 수단입니다.  하나님께 인생의 해답을 얻지 못한다면 인생에는 해답이 없습니다.  절망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회의는 가장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면 이제 문제를 풀어봅시다.  인생의 고통은 과연 그렇게 해결 불가능한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분명히 해답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모든 고통의 근원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고난을 당하고 있다 해도 육체적인 고통은 그렇게 큰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고통에 대한 해답도 육체에 있지 않고 영혼에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그 해답이 몇 가지 나옵니다. 


생각하라 사색하라

  첫 번째 해답은 사색하는 일입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입니다.  요즘 세대는 생각을 싫어합니다.  느낌으로만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명심하세요.  느낌대로 살면 반드시 망합니다.  느낌이란 영적인 것보다는 육체적인 감각에서 옵니다.  육체의 감각대로 살 때에 인생은 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8:13)  영적인 삶의 첫째는 사색입니다.  생각을 잘 해야 합니다.  생각을 바로 하면 행복을 느끼면서 살 수 있습니다.  생각을 잘못하면 불행에 빠져 살게 됩니다.  특히 고통의 시기는 사색을 해야만 되는 시기입니다.  하나님께서 괴로운 날에는 사색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7:14)  그러면 어떤 사색을 해야 될까요?  망상을 해서는 안 됩니다.  허황된 꿈을 꿔서도 안 됩니다.  사색에도 주제가 있습니다.  무엇을 사색해야 할까요?  신자의 사색에는 언제나 두 가지 중요한 주제가 있습니다. 

  첫째로 내가 걸어온 인생의 발자취를 사색하는 일입니다.  먼저 나는 과연 제대로 된 삶을 살았는지 살펴 보세요.  나는 과연 하나님 앞에 큰 소리 칠만큼 올바른 신앙 생활을 했습니까?  과연 하나님 앞에 복 받을 만큼 경건하게 사셨어요?  나의 불신앙과 소행들을 생각해보세요.  "이는 나의 연약함이라!"(10절)  이 말의 뜻이 뭡니까?  "모든 원인을 생각해보니 내 자신이 문제다!"  바로 그런 말입니다.  나의 연약성, 나의 죄악성, 나의 불신앙이 문제입니다.  든든히 섰다고 생각한 순간에도 내 인생은 허점 투성이입니다.  다윗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시39:5)  내 인생의 자취를 생각하면서 먼저 바른 삶을 살았는지 생각해 보세요. 

  그 다음으로 아무 일 없이 평안하게 지낸 날들을 생각해 보세요.  무사히 지냈던 날들이 과연 우연한 시간들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 모든 날들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축복의 날들이었습니다.  건강한 날에, 건강이 얼마나 고마운 선물인지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까?  식욕이 왕성할 때에 배부르게 먹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속병 들면 식욕이 떨어져 먹는 것이 고역입니다.  배부르게 먹고 소화 잘 시키던 날들은 축복의 날들이었습니다.  졸려서 잠을 잘 자는 날에 단잠을 자는 것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 생각해 보셨어요?  불면증은 참 괴로운 겁니다.  오늘 말씀에도 나옵니다.  "주께서 나로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4절)  밤에 잠이 오지 않으면 그 지루함과 초조함을 이루 말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단잠을 이룬 날들이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날마다 일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이 세상에는 일을 하고싶어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육체 건강하여 일할 수 있다면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의 평범한 삶도 다 그렇습니다.  함께 지낼 수 있는 가족이 있는 것, 삶을 나눌 수 있는 이웃이 있는 것, 다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다가올 앞날도 그래요.  지나온 날들을 축복하신 하나님께서 앞날을 坐視 하실까요?  걱정 마십시오.  앞날이 걱정되시거든 우선 지난 날로 만족하세요.  우리는 이미 지나온 날들만으로도 충분히 축복된 삶을 살지 않았습니까?  그만큼 은혜를 받으셨으면 됐지 뭘 더 바라십니까?  저는 20대에 병들어서 히스기야를 부러워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만일 15년을 더 산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40이 넘은 후에 저는 매년 덤으로 사는 인생으로 생각합니다.  인생의 날들을 덤으로 주신 하나님!  지위가 없으면 어떻습니까?  유명하지 않으면 또 어떻습니까?  사는 것 자체가 고마운 일 아닙니까?  미래의 시간은 우리 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셔야만 살아갈 수 있는 시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일 부르실지, 모레 부르실지 모르는데 무슨 1년 후, 10년 후를 걱정하십니까? 

우리가 사는 날들의 99%는 사실상 별 문제가 없는 날들입니다.  실제로 정말 힘든 일은 전체 인생의 단 1%도 안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1%를 지나치게 확대 해석한 나머지, 인생 전체를 불행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1%의 문제점 때문에 99%의 삶을 망칠 수 있습니까?  어떤 명언집에 보니까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해답이 없는 인생 문제는 문제가 아니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 해결 될 일일뿐이다."  오늘 내 삶을 정직하게 살펴보세요.  내가 생각하는 불행은 그다지 큰 불행이 아님을 아시게 될 겁니다. 

  둘째로 사색할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총입니다.  본문 10절은 흠정역에서 이렇게 번역됩니다.  "이는 나의 약함이라. 그러나 나는 지극히 높으신 자의 오른손의 해들을 기억하리라."(KJV)  나의 연약성, 그 반대편에 항상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있음을 기억하세요.  내 인생의 연약성에도 불구하고 내 인생을 지금까지 지탱해 준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고난을 당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내 소행대로 다 벌을 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하나님을 잊고 산만큼 벌을 받으셨습니까?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하나님 뜻을 순종치 않은 만큼 벌을 다 받으셨어요?  하나님 계명을 지키지 않은 만큼, 내가 음란한 짓 하고, 거짓말 하고, 위선을 떨고, 교만하고, 남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만큼 하나님이 다 징계하셨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만일 내 소행대로 다 응징하신다면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불행한 처지에 있어야만 합니다.  예레미야는 나라가 망하는 슬픔을 당했습니다.  예루살렘이 바빌론 군대에 짓밟히던 날, 왕과 귀족들은 볼모가 되어 끌려 갔습니다.  노인들이 존경받지 못하고 부양할 사람이 없어서 노역에 동원됩니다.  부녀자들은 敵軍의 노리개가 되어 종으로 끌려갑니다.  부모 잃은 아이들이 울부짖으며 거리를 왕래합니다.  굶주린 사람들은 숯처럼 검게 탄 얼굴로 죽어갑니다.  이런 비참한 현실을 목격하면서 예레미야가 뭐라고 말한지 아십니까?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3:20-22)  그래도 다 죽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때문이다!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주의 긍휼이 크시므로 저희를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느9:31)  고난에 대해서 원망하기 전에 하나님 은총을 생각하세요.  은혜가 될 겁니다.  "내가 이같이 우매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시73:22-25)

  특히 하나님이 주셨던 기쁨의 날들을 생각해 보세요.  고난도 있었지만 행복한 날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즐겁기만 했던 유년기가 있었습니다.  신나게 놀던 소년기가 있었습니다.  꿈 많은 청년기가 있었습니다.  결혼을 앞두고 설레이는 시절이 있었습니다.  자녀들과 함께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앞날은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앞날은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실 때에만 내 시간이 될 뿐입니다.  오직 지난 날들을 생각하세요.  정말 은혜롭지 않습니까? 

  오늘 말씀에 보면 저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연약함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곧 여호와의 옛적 기사를 기억하여 그 행하신 일을 진술하리이다.  또 주의 모든 일을 묵상하며 주의 행사를 깊이 생각하리이다.(10-12)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큰 신이 누구오니이까?  주는 기사를 행하신 하나님이시라. 민족들 중에 주의 능력을 알리시고, 주의 팔로 주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구속하셨나이다.(셀라)  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며 깊음도 진동하였고, 구름이 물을 쏟고 궁창이 소리를 발하며 주의 살도 날아 나갔나이다.  회리바람 중에 주의 우뢰의 소리가 있으며 번개가 세계를 비취며 땅이 흔들리고 움직였나이다.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첩경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종적을 알 수 없었나이다.  주의 백성을 무리양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13-20)" 

  이 말씀에 보면 저자는 과거의 두 가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창조 역사요, 둘째는 섭리의 역사입니다.  천지 만물을 지으시던 날, 얼마나 위대한 역사가 이루어졌는가!  하늘과 땅이 창조되었습니다.  궁창이 만들어지고 물들이 나뉘었습니다.  태양과 달과 별들이 만들어지고 빛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하늘에는 새들이, 물에는 물고기가, 땅에는 온갖 짐승과 생물들로 채워져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낮과 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절기, 일년의 시간, 기후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내 인생이 창조되던 날을 생각해 보셨어요?  내가 어머니 뱃속에서 세상에 나오던 날, 얼마나 감격적인 일입니까?  그 뿐입니까?  그렇게 많은 생명체들을 먹여 살리십니다.  번식하고 대를 잇게 만드십니다.  끝 없이 세포 분열을 하게 하고 자라고 성장하게 만드십니다.  천체들을 움직이십니다.  인류 역사를 움직여 가십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또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내가 우상 속에 헤매다가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된 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사실을 알고 예수님을 믿게 된 날, 얼마나 큰 기쁨이었습니까? 

  이 모든 것들을 생각하면 오늘 내가 당하는 고통은 별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다가올 내 인생도 그렇습니다.  내가 살아 온 지난날들보다 더 불행한 날들은 결코 없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내 음성으로 부르짖으라

  고난에 대한 두 번째 해결책은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하나님께 내 음성으로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으며 내 영혼이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1-2절)  부르짖으라!  이 시편의 주제어입니다. 

  부르짖으세요.  기도하라고 하지 않고 부르짖으라고 했습니다.  시편에 보면 부르짖는다는 말이 60여 회나 나타납니다.  기도는 부르짖음입니다.  특히 고난에서 드리는 기도는 다 부르짖음입니다.  심한 고난을 당할 때에 여러분은 어떤 마음이십니까?  해결되어도 그만 안 돼도 그만입니까?  그렇지 않고 꼭 해결되어야만 한다면, 점잖은 모양으로 기도할 수는 없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점잖게 소리냅니까?  "거기 계신 신사 양반, 내가 危境에 빠졌으니 내 생존에 관심을 가져주세요!"  그렇게 공자님처럼 말합니까?  "사람 살려!"  "나좀 살려줘!"  修飾語 다 빼고 크게 외칩니다.  기도도 그래요.  정말 곤경에 처해 있다면 하나님께 부르짖으세요.  저는 곤경에 빠졌을 때 많이 부르짖었습니다.  제가 교회에 출석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예배 시간에 통성 기도를 하는데 어떤 청년이 의자를 주먹으로 치면서 고래고래 소리치면서 기도합니다.  나는 그 청년이 미친 줄 알았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멀쩡해요.  어떻게 지성인 체면에 저렇게 무지막지하게 기도할 수 있단 말인가!  그 후 몇 날이 지나지 않았을 때입니다.  수요 예배 시간에 목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기도를 잘하고 싶으신 분은 앞으로 나오세요!"  지성인의 긍지를 지킬 것인가 말 것인가?  사람이 살고 봐야지.  예라 모르겠다.  무조건 나가보자!  저는 무턱대고 앞으로 나갔습니다.  지성인 체면이 망가지기 시작했어요.  앞으로 나갔더니 두 손을 들고 함께 기도할 때에 크게 외치라고 하더라구요.  시키는대로 했습니다.  한 번 망가지니까 계속 망가졌습니다.(?)  새벽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새벽마다 부르짖었어요.  한 번 부르짖기 시작하니까 부르짖는 게 별 것 아니더라구요.  예배 시간마다 부르짖었습니다.  부흥회 때마다 부르짖고, 산기도 다니면서 부르짖었습니다.  부르짖는 것은 특별한 은혜입니다.  그 부르짖는 기도를 시작한 후에 내 인생의 모든 문제들은 다 풀렸습니다.  할렐루야!  오늘 여러분 가운데 어떤 심각한 문제가 있으시든지, 부르짖는 기도만 시작하신다면 결국은 다 해결될 줄 믿습니다. 

  또 한 가지, 부르짖되 내 음성으로 부르짖으라고 말씀합니다.  부끄럽게 소리치는 기도는 남들이 대신 하고 나는 조용히 있으시렵니까?  남이 나를 위해 천 번 만 번 부르짖는 것보다 내 목소리로 한 번 부르짖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가만히 있고 옆에 있는 사람들만 외쳐요.  "여기 누가 물에 빠졌대요!  좀 살려 달래요!"  어쩐지 이상하지 않습니까?  막상 곤경에 처해 있는 사람은 가만히 있고 남들만 기도하면 되겠느냐구요?  여러분, 세상에서 문제가 있을 때에 변호사만 선임해 놓고 가만히 구경만 합니까?  당사자 자신이 뛰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나 사이에 제3자 끼어 드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비록 성직자라 해도 신자와 하나님 사이에 끼어 들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분 신앙은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의 문젭니다.  자신의 문제를 남에게 맡기지 마세요.  내 인생은 내가 기도해야 됩니다.  스스로 기도하세요.  새벽에 기도하시고, 골방에서 기도하세요.  특별한 시간을 내서 산에 올라 기도하세요.  내 목소리를 낼 때에 하나님은 특별히 들으십니다. 

  오늘 고난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고난은 보편적입니다.  나만 당하는 일이 아닙니다.  고난 당할 때에 우리는 마음이 상합니다.  신앙에 회의를 품게 됩니다.  그러나 고난은 그렇게 불행한 것만은 아닙니다.  고난에도 유익이 있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  고난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사색하는 일입니다.  지나온 인생을 더듬어 보세요.  특히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축복과 은혜들을 생각해 보세요.  둘째는 부르짖어 기도하세요.  잠잠하지 말고 큰 소리로 부르짖으세요.  남에게 기도를 부탁하지 말고 내 목소리로 기도하세요.  내 기도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지기 시작할 때 내 인생의 문제도 다 해결될 것입니다.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하나님께 내 음성으로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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