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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승자와 패자의 갈림길 (민 13: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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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와 패자의 갈림길
(민13:25-33)

흔히들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합니다. 마라톤 경주에서 끝까지 완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낙오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도 건강을 위해 뛰어 보지만 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중간에 몇 번이고 고비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그만 뛰고 싶습니다. 포기하고 싶습니다. 사는 것도 그렇습니다. 많은 고비가 있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성공적으로 완주하는 사람도 있고 중간에 낙오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성공하고 싶어합니다.

성공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유 없는 성공은 없습니다. 횡재와 성공은 다릅니다. 로또 복권으로 인생역전 하는 것은 횡재라고는 하지 성공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횡재는 땀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공은 피와 땀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횡재한 사람을 보고 부러워하기는 해도 존경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횡재는 부러움의 대상이 될지 몰라도 존경의 대상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횡재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않습니다. 그 대신에 인생을 성공적으로 사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고비를 만나더라도 인생의 낙오자가 되지 않고 끝가지 완주하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12명의 정탐군 중에서 2명은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10명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들은 패자, 낙오자가 되었습니다. 무엇이 이들을 승자와 패자로 갈라놓았을까요? 본문을 통하여 승자와 패자는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인생에 승리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봅니다./같은 것을 봐도 보는 관점 다르다

12정탐군들은 똑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똑같이 가나안 땅을 가서 보았습니다. 기름진 땅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원주민들의 몸집이 거인같이 크다는 것도 보았습니다. 똑같은 것을 보았으나 보는 관점이 달랐다. 시선을 두는 곳이 달랐습니다. 인생의 패배자인 열명의 정탐꾼은 시선을 사람에게 두었습니다. 덩치 큰 가나안 족이 눈에 확 들어옵니다. “네피림”은 “대장부”라는 뜻이고, “아낙”이란 “거인”이라는 뜻입니다. 그 눈으로 자기를 보니까? 꼭 메뚜기 같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승리자인 여호수아와 갈렙은 시선을 하나님에게 두었습니다. 그 기름진 땅을 보면서 하나님이 약속을 떠올립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14:9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민14:9 ) 여호수아와 갈렙은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보이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다. 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보이는 세계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다. 물질계와 영계가 있다. 물질계는 영계의 지배를 받는다. 몸은 마음의 지배를 받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문제를 푸는 방법은 영적으로 풀어야 한다. 영적인 문제가 꼬이면 삶이 꼬인다는 거다. 영적인 문제가 풀리면 인생의 문제가 풀린다는 거다. 인생의 문제는 기도로 풀어야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문제를 만나면 문제를 묵상합니다. 문제를 묵상하면 좌절합니다. 질병, 부도, 자녀문제, 부부문제 등 문제를 생각하면 힘만 더 듭니다. 세상을 바라보면 혼란스럽습니다. 성실한 사람 보다 수완이 좋은 사람이 잘 되는 것 같습니다. 착한 사람은 고만 고만하게 사는데 악한 사람은 떵떵거리며 삽니다. 불공평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보면 혼란스럽습니다. 나를 묵상하면 어떻습니까? 내가 가진 것, 내 능력이 보잘 것 없어 보입니다. 낙심이 됩니다. 기가 죽습니다. 실망이 됩니다.

방울뱀이 다람쥐를 잡는 법이 참 흥미롭다. 다람쥐가 노는 나무 밑에 가서 따락 따락 따르륵 소리를 내며 꼬리를 흔든다. 다람쥐는 무슨 소린가 궁금하여 호기심이 발동한다. 호기심에 고개를 내밀고 나무 아래로 내려온다. 내려오다가 방울뱀의 독기 어린 눈과 마주친다. 그 순간 다람쥐는 오금이 저려 벌벌 떤다. 방울뱀의 눈을 쳐다보지 않으면 될텐데 오금이 저려 마음먹은 대로되지 않는다. 얼마 후, 다람쥐는 그만 나무 아래로 떨어진다. 방울뱀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다람쥐를 한 입에 삼킨다. 이때 다람쥐가 사는 길은 방울뱀의 눈에서 눈을 떼는 것입니다. 문제를 바라보면 문제에 먹힌다. 믿음의 사람은 문제를 보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나 자신을 보지도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봅니다. 하나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습니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시42:5) 복음 성가 중에서 이런 노랫말이 있습니다. “너는 무엇을 보았길래 그렇게도 놀라느냐 너는 무슨 소리 들었길래 근심 속에 빠졌느냐 믿음의 눈을 떠라 믿음의 길을 열어라 세상 모든 풍파를 믿음의 눈으로 보라.”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문제를 보지 마십시오. 나를 보지도 마십시오. 사람을 보지도 마십시오. 하나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2. 인생에 승리하는 사람은 믿음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 사용하는 언어가 다릅니다.

먼저 패배자들인 10명의 정탐군의 말을 보겠습니다. 31절입니다.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그리고 10명의 정탐꾼들은 27절에서 처음에는 그 땅은 아름다운 땅이라고 칭찬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다음에는 악평합니다.(32절) 말을 바꿉니다. 그리고 그 사용하는 말이 부정적입니다. 그럼 인생의 승리자인 여호수아와 갈렙의 말을 보겠습니다. 30절입니다.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승자와 패자는 사용하는 말이 다릅니다. 승자는 매사에 긍정적으로 말합니다. 패자는 매사에 부정적으로 말합니다. 핑계거리를 찾습니다. 불평과 원망거리를 찾습니다. 그리고는 안된다. 죽는다, 죽겠다, 불가능하다, 절망이다 이런 말을 사용합니다.
말에는 파장이 있습니다. 에모토 마사루가 쓴 “물은 답을 알고 있다”는 책을 읽었습니다. “망할 놈” 이라는 말을 들려주고는 물의 결정을 사진으로 찍었습니다. 그랬더니 물의 결정이 완전히 찌그러지고 망가져 버렸습니다. 이번에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들려주면서 물의 결정을 찍었더니 물의 결정이 아주 선명하고 뚜렷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말의 파장이 물에 영향을 미쳐서 물의 결정이 부서지기도 하고 아름답고 선명한 모습을 하기도 한다는 겁니다.

몇 년 전에 농촌진흥청 (잠사곤충 연구소 생체활성 연구실)에서 연구한 것입니다. 음악이 식물에게 미치는 영향을 연구했습니다. 식물을 두 집단으로 나누고 한 집단에는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고, 다른 집단에는 음악을 들려주지 않았습니다. 4년의 연구 결과,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자란 식물의 생육이 최고 44%나 더 증가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식물도 말이나 음악에 따라 반응을 한다는 것입니다.

신경의학계에서는 뇌 속의 언어중추신경이 모든 신경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우리 인간의 뇌는 언어에 따라 98%가 움직인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를 근거로 언어치료(Word Therapy)가 생겼습니다. 미국의 위스콘신 주의 한 병원에서 말기 암 환자를 대상으로 언어치료를 실시했습니다. 매일 2-3차례, 10-15정도 “내 세포는 정상이 되고 있다”는 말을 반복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3주 후에 진통이 사라지고 암의 흔적이 깨끗이 사라졌다는 임상보고가 나왔습니다. 악한 말은 무질서하고 파괴적인 파장이 나온다. 선한 말에서는 질서정연하고 창조적인 파장이 나온다. 부정적인 말에는 파괴적인 파장이 나온다. 긍정적인 말에는 창조적인 파장이 나온다. 부정적인 말을 하고 들을 때, 우리 몸의 세포는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망가집니다. 파괴됩니다. 위축됩니다. 오금이 저립니다. 긍정적인 말을 하고, 칭찬하는 말, 격려하는 말을 들을 때, 우리 몸의 세포는 활짝 웃습니다. 세포가 살아납니다. 쭉쭉 뻗어 갑니다. 힘이 납니다. 자신감이 생깁니다.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마가11:23) 말이 씨가 된다는 겁니다. 씨 정도가 아니다 말이 열매가 됩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성공하는 말을 갖고 있다.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행복한 말을 갖고 있다. 불행한 사람은 불행하게 만드는 말을 갖고 있습니다. 우울한 사람을 우울하게만드는 말을 갖고 있습니다. 잘한다 잘한다 하면 더 잘합니다. 못한다 못한다 하면 잘 하던 것도 못합니다.

이해인의 시에
“나를 키우는 말”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소개합니다.
행복하다고 말하는 동안은 / 나도 정말 행복해서 / 마음에 맑은 샘이 흐르고 ...
고맙다고 말하는 동안은 / 고마운 마음 새로이 솟아올라 / 내 마음도 더욱 순해지고 ...
아름답다고 말하는 동안은 / 나도 잠시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 마음 한 자락이 환해지고 ...
좋은 말이 나를 키우는 것 / 나는 말하면서 다시 알지 ...

기독교의 말씀의 종교다. 하나님은 말씀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용하는 말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내 삶은 불행하다고 생각하는가? 언어를 조사해 보자. 부정적인 말을 많이 쓰고 있을 거다. “내 인생은 왜 이렇게 안풀리나?” 이런 말을 자꾸하면 풀릴 것도 안풀린다는 겁니다. 말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 말을 고쳐야 합니다. 신앙적인 말로, 긍정적인 말로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가 쓰는 말을 컨설팅합시다. 그리고 말을 바꿉시다. 언어를 리모델링합시다. 불신의 말을 믿음의 말로 바꾸자. 운명론적인 말을 버리고 성경적인 말로 바꿉시다. 비관적이고 절망적인 말을 소망이 담겨 있는 말, 긍정적인 말, 격려하는 말로 바꿉시다. 불평하는 말, 원망하는 말을 감사하는 말고 바꿉시다. 우리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3. 성공적으로 인생을 사는 사람은 통시적 사고한다.

가나안의 거인족을 보고 겁을 먹은 사람들은 자포자기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14장 4절을 보면 무리들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소리를 쳤습니다. 반면에 여호수아 갈렙, 2명의 정탐꾼은 아니다. “능히 이기리라”(30절)고 했습니다. 그리고 14장 9절에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고 했습니다. 실패자의 공통점은 끊어서 생각한다는 겁니다. 어려움이 닥칠 때, “돌아가자” “끝났다” 이게 실패자들, 패배자들이 사는 방식입니다. 삶이란 한편의 드라마와 같습니다. 언제나 좋은 일만 있는 것도 아니고 나쁜 일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순풍에 돛단 듯이 승승장구로 잘 나갈 때도 있습니다. 예기치 못했던 산더미 같은 풍랑을 만나 곤두박질 칠 때도 있습니다. 살다보면 올라설 때도/ 오르막을 달릴 때도 있고 내리막을 걸을 때도 있습니다. 일이 잘 풀릴 대도 있고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질 때도 있습니다. 사는데 어떻게 항상 좋은 일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저도 오래 살지 않았지만 고비가 있었습니다.

좌절감에 몸부림치며 울 때도 있었습니다. 새벽기도 가시던 어머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신앙이 송두리채 흔들리는 고비를 맞기도 했습니다. 외국에 나가 공부하고 싶은 꿈이 좌절되었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통시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끊어서 생각했다면 슬럼프에서 헤어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왜 낙심합니까? 끊어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 자살합니까? 끊어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 갈라섭니까? 끊어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 끝이라고 생각합니까? 끊어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끝어서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성형수술하고 실패했다고 자살합니다. 카드 빚 좀 많이 졌다고 자살합니다. 그러면 수도 없이 자살해야 합니다. 지금 실패할 수 있습니다. 길이 막힐 수 있습니다. 시험에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미래까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의 모습으로 미래를 판단하고 결정하고 재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깊은 좌절감을 느끼십니까? 좌절하지 마십시오. 지금의 좌절은 단지 좀 더 기도하라는 주님의 음성일 뿐입니다. 지금의 실패는 좀더 기다리라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이 있다. 내일이 아니면 또 모레가 있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예레미야 33장 3절)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기뻐하라”고 외쳤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마음에 여유를 가지라는 겁니다. 왜? 그게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끊어서 생각하지 마십시오. 통시적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통시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지금 실패했다고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좀 성공했다고 거들먹거리며 교만에 빠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종말론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미래학은 과거로부터 미래를 추론하는 것이다. 종말론의 핵심이 뭡니까? 미래로부터 현재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종말론을 믿는 다는 것이 뭡니까? 끝까지 가 봐야 안다는 겁니다. 성경은 원래 장, 절이 없었습니다. 통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장, 절은 후대 사람들이 편의상 끊어 놓은 것입니다. 신구약의 장 구분은 1228년 스데반 랭톤( Stephan Langton)이 했고 절의 구분은 구약은 1448년 나단(R. Nathan)에 의해, 신약은 1551년 로버트 스테파누스(Robert Stephanus)에의해 구분되었습니다. 장과 절로 구분된 최초의 성경은 1560년 제네바에서 출판된 제네바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잃을 때, 통으로 잃어야 됩니다. 끝까지 읽어 봐야 안다는 겁니다. 끝까지 가봐야 안다는 겁니다. 끝까지 가봐야 안다! 이게 종말론적인 신앙입니다. 지금 어렵습니까? 끊어서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이제 정리하겠습니다.

승자는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은 세계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압니다. 보이는 세계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하나님을 봅니다. 하나님을 묵상합니다. 승자는 언어의 위력을 압니다. 그래서 믿음의 말, 긍정적인 언어를 사용합니다. 승자는 인생을 끊어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통으로 생각합니다. 통시적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 승자와 패자의 갈림길에서 승자의 길을 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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