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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마음의 그림은? / 시 119: 49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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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내 마음의 그림은?
본문 : 시편119: 49 -56

어떤 회사에 근무하던 20대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교양이 있고, 얌전하고 착했으며, 밉지 않게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별로 말이 없고,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으며, 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 잘 웃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한달 휴가를 내고 난 후 회사에 출근했는데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외적인 모습에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그런 성품은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명랑하고 자신감이 가득하고 친구들이나 이웃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얼굴에 수심이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그가 변화가 왔는지 알고 싶어 했으나 거기에 대해서는 전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녀는 그의 존경하는 사람에게 변화의 이유를 말해주었습니다.

이유인즉 그녀는 오랫동안 자기 코가 못생겼다고 생각하고 그로 인해 미운 자화상을 그려 놓았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이 그를 이상하게 본다고 생각하고 열등의식과 좌절감에 쌓여 생활했습니다. 자기는 코 때문에 사람들에게 조롱감이 되고 애인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늘 우울하고 사람을 피하고 근심어린 얼굴로 지냈습니다.

결국 그녀는 돈을 모으고 휴가를 얻어 성형외과에 가서 코수술을 받고 마음에 드는 코를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자화상이 확 달라졌습니다. 자기의 마음속에 예쁘고 사랑스런 자기 모습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여러분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자신에 대한 어떠한 자화상을 가지고 있는가? 거기에 따라서 우리의 사고와 행동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한 자매는 자신의 부모님이 이혼하는 것을 보고 자신은 절대 어머니처럼 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자신도 이혼할 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눌려 살다가 결국 똑같은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잘못된 자화상을 가진 데 따른 결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했습니다(잠언 4:23).그러므로 우리는 실패의식과 가난의식의 자화상을 버려야 합니다. 자신의 집안에 병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그 병을 끌어들여 고난을 당합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가 던져다주는 저주의식인 것입니다.

남미 국가들은 대부분 자연의 풍요가 가득합니다. 칠레와 아르헨티나는 안데스 산맥이 주는 자연의 혜택이 풍성합니다. 우리나라의 4,5배가 되는 긴 길이의 산맥에는 구리가 가득 매장되어 있습니다. 캐도 캐도 끝없이 많은 매장량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풍요를 누리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늘 백인보다 연약하며 늘 가난하다는 의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보다 나은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열등의식과 패배 의식의 자화상을 깨뜨려야 합니다. 늘 천국의 자화상을 가져야 합니다. 성령께서 하나님 나라의 권세자로 우리를 도우시고, 천군 천사가 우리를 곁에 진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약한 자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예수 이름의 권세가 있으니 우리는 강한 자입니다. 승리하고 복된 삶을 살 수 있으며 또한 반드시 그러한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패배에 물들지 말고 믿음의 자화상을 가집시다. 이것이 승리의 삶을 사는 비결인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참으로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우리 마음속에 감추어진 '마음의 그림'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속에 어떤 그림을 그리고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점가의 인기 있는 책제목이나 강연의 주제 같은 것을 보면, 마음의 그림에 대한 단어들이 유독 많은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아름다운 여인상(像), 훌륭한 아버지상(像), 바람직한 어머니상(像), 탁월한 지도자상(像), 아내상(像), 남편상(像) 등이 있습니다. 사람이 코끼리를 그리듯이 그림을 그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마음속에 어떤 그림을 품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교회 나와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일 년, 이 년, 십 년, 이십 년이 지난 다음에 "하나님 아버지! 저는 이런 모습의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하는 여러분 속에 어떤 그림이 있으십니까? 그 그림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그림을 가졌느냐에 따라서 그러한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빼앗기는 것과 나누는 것

어느 아가씨가 공원벤치에 앉아 고즈넉이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노신사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조금 남아 있는 책을 마저 보고 갈 참 이었습니다. 벤치에 앉아서 방금 전 가게에서 사온 크레커를 꺼냈습니다. 그녀는 크레커를 하나씩 집어 먹으며 책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얼마쯤 흘렀는데 크레커가 줄어가는 속도가 왠지 빠르다 싶어 곁눈질로 보니, 곁에 앉은 그 노신사도 슬며시 자기 크레커를 슬쩍슬쩍 빼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아니 이 노인네가..’ 화가 은근히 났지만 무시하고 크레커를 꺼내 먹었는데, 그 노신사의 손이 슬쩍 다가와 또 꺼내 먹는 것이었습니다.

눈은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이미 그녀의 신경은 크레커와 밉살스러운 노신사에게 잔뜩 쏠려 있었습니다. 크레커가 든 케이스는 그 둘 사이 벤치에서 다 비어갔고, 마지막 한 개가 남았는데 그녀는 참다못해 그 노신사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 뭐 이런 웃기는 노인이 다 있어?" 하는 강렬한 눈빛으로 얼굴까지 열이 올라 쏘아 보았습니다.

그 노인은 그런 그녀를 보고 부드럽게 씨익 웃으며 소리 없이 자리를 뜨는 것이었습니다. 별꼴을 다 보겠다고 투덜대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녀가 사가지고 온 크레커는 새 것인 채로 무릎위에 고스란히 놓여져 있었습니다. 자신이 그 노신사의 크레거를 집어 먹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았습니다.

오히려 자기 것을 빼앗기고도 부드럽게 웃던 노신사. 하지만 그 노신사는 정신없는 그 아가씨에게 크레커를 빼앗긴 게 아니고, 나누어 주었던 것입니다. 제 것도 아닌데 온통 화가 나서 따뜻한 햇살과 흥미로운 책의 내용조차 잃어버린 그 아가씨는 스스로에게 이 좋은 것들을 빼앗긴 것입니다.

이러한 차이가 오백 원짜리 크래커가 아니라 아주 중요한 일에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상황을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빼앗기는 것과 나누는 것"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는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말씀과 동행했던 시절을 회고함

오늘 본문에서 시편 기자는 말씀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추억하면서 다시금 용기와 믿음을 새롭게 합니다. 그는 현재 고난 속에 있지만, 그 고난의 풍파에 함몰되지 않고 어려움 중에서 말씀으로 은혜를 입었던 과거를 회상하며 위로받습니다. 그리고 과거에 말씀으로 함께하신 하나님이 지금도 자신을 말씀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습니다. 이와 같이 말씀에 대한 신뢰가 시편 기자로 하여금 주님의 도에서 떠나지 않게 하고(51절), 스스로 위로하며(52절), 밤낮으로 주님의 뜻을 회고하며 그 뜻을 따라 살아가도록 이끌었습니다(54절). 사람마다 특별한 가치를 두고 일평생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 학문적인 명성, 지위, 자기애, 성취감, 가족 등에 자신의 모든 가치를 부여합니다. 하지만 시편 기자는 주님의 법을 지킨 것이 그의 분깃이라며 말씀을 자신의 재산으로 삼고 있습니다(56절).

여러분의 신앙상은 어떻습니까? 오늘 본문은 우리가 마음속에 꼭 품고 살아가야 할 신앙인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다 품고 살아야 할 신앙의 모습, 마음에 품어야 할 모습, 내 마음의 그림은 어떠합니까?

첫째로 주의 가르침을 삶의 위로로 삼는 모습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언제나 위로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우리 인생에는 언제나 낙심이 찾아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위로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아마 여기 계신 분들 가운데 누군가를 위로해 본 사람이 있을 것이고, 또 누군가로부터 위로를 받아 보기도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위로를 주고받는 사람들인데 문제는 무엇을 위로로 삼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신앙의 성숙도를 알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무엇이 늘 여러분 자신의 위로인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부부싸움을 할 때 남편이 잘못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아내가 낙심을 하고 마음이 탁 가라앉습니다. 그런데 이럴 때 남편들이 가장 많이 쓰는 위로의 방법이 무엇인가요? 타임지에 이 기사가 나왔어요. 아내가 무엇에 위로를 많이 받는지에 대해 여섯 가지를 얘기했습니다. 첫 번째, 먹을 것에 위로받는다고 합니다. 부부싸움을 하고 나서, 케이크를 사 주면 마음의 위로를 받는다고 합니다. 두 번째 방법은 꽃을 사다 주는 것이고, 세 번째는 화장품이고 네 번째가 옷, 다섯 번째가 반지를 사다 주면 위로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여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현금입니다. 돈을 잔뜩 넣은 봉투를 갖다 주면 굉장한 위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한국 여성들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선물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때론 선물이 우리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위로는 오래가지 않고 일시적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위로받는 방법이 다릅니다. 여러분, 오늘 한번 질문 해보세요.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위로로 삼고 이 세상을 살아가나요? 여러분의 마음이 낙심되었을 때, 진정 누구를 찾아가는가요? 무엇이 여러분의 삶의 위로인가요?

엘리야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바알 선지자 800명과 대결해서 갈멜산에서 승리한 선지자였습니다. 바알 선지자 팔백 명이 하루 종일 기도해도 바알신이 응답하지 않았는데, 엘리야가 한번 기도했더니 하늘에서 불이 내려서 제물을 다 태웠습니다. 그렇게 믿음의 승리를 하고 나서 엘리야는 곧바로 낙심에 빠졌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어느 정도로 낙심했나요? 로뎀나무 밑에서 "하나님! 나를 죽여주세요!" 엘리야가 낙심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승리한 다음에 바알 선지자들을 다 죽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세벨이라는 왕비가 엘리야를 협박했습니다. "내가 내일 이맘때까지 우리 선지자들이 당한 것처럼 내가 너를 죽이리라"고 말했는데 이 말에 낙심이 된 겁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위로하셨나요? 능력 가운데서 임하셨던 하나님! 그 능력으로 위로하셨나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태풍 속에서 위로하지 않으시고, 지진 속에서 위로하지 않으시고, 불 가운데서 위로하지 않으셨어요. 그 모든 것이 다 지나간 다음에, 그 뒤에 세미한 음성이 있었습니다. "엘리야야! 네가 왜 여기 있느냐?" 하나님은 이런 방법으로 엘리야를 위로하셨습니다.

병에 걸렸을 때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 우리에게 위로가 아니요, 사업이 흔들릴 때 그 어려움이 해결되는 것만이 우리에게 위로가 아니요, 우리의 참 위로는 우리 마음속에 들려오는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의 말씀 속에 위로를 한번 받아 보세요. 주님과 깊이 교제하는 가운데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 " 주의 말씀 속에 위로를 받으시는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주의 가르침을 삶의 기쁨으로 삼는 모습입니다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무엇을 기쁨으로 삼고 이 세상을 살아갑니까?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콧노래가 터집니까? 어떤 사람은 술 한잔하면 그렇게 좋아하는 분 있습니다. 복권에 당첨되면 물론 기분이 좋은 것 당연하고 더 넓은 주택을 구입하면 기분이 좋겠고 성공을 하면 기분이 좋습니다. 노래가 나오지요. 그러나 참된 신앙인의 모습은 그런 것들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내 몸이 병들어도, 내 사업이 힘들어도,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주의 말씀을 묵상하며, 그 말씀으로 찬양하는 것이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말씀합니다.

미국의 리더스 다이제스트 잡지에 현대 사람들은 무엇을 기쁨으로 삼고 사는가를 주제로 설문조사를 한 다음에 이렇게 경고합니다. "하루를 기쁘게 살기 원하면 이발을 하고, 일주일을 기쁘게 살기 원하면 양복을 사 입고, 한 달을 기쁘게 살기 원하면 차를 구입하라. 그러나 한 달이 지나고 나면 자동차 할부금 때문에 원망스러울 것입니다. 6개월을 기쁘게 살려면, 집을 구입하고, 일년을 기쁘게 살기 원하면 새 배우자를 구하라" 왜 이것을 실었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세상의 기쁨은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것만 있으면 내 인생이 기쁘고 행복할 것 같지만, 막상 그것을 가지고 나면 싫증을 내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 땅을 살아가면서 어떤 환경 속에서도 노래를 부르며 기쁘게 살아가길 원합니까? 그렇다면 주의 말씀을 가까이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우리가 슬픔에 빠져있을 때에, 우리의 마음이 지쳐있을 때에, 우리 마음을 위로할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찬양이 되는 줄 믿습니다.

우리 주위에 이러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 증거로, 대부분의 찬송가들이 기쁠 때 작곡된 것이 아닙니다. 그 찬송가 작곡가들이 가장 어려울 때, 어려운 환경 속에서 그와 같은 찬송가를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노래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주의 가르침을 삶의 지표로 삼는 모습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 이 말씀은 "내가 주의 법을 아무도 안 볼 때에도 지켰나이다."라는 뜻입니다. 아무도 안 볼 때, 홀로 있을 때, 이것이 신앙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사람이 볼 때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지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보지 않을 때, 홀로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미국의 윌로크릭 교회의 빌 하이벨스라는 목사님이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당신은 누구인가?'란 책을 썼습니다. 내용인즉 "홀로 있을 때 당신은 누구입니까? 교회 있을 때 말고, 예배드릴 때 말고, 설교할 때 말고, 여러분 혼자 있을 때, 아무도 당신을 보고 있지 않을 때 당신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요?"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를 불러 모으는데, 빌립이 가서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을 데리고 옵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를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은 참 이스라엘 사람이로다. 그 마음속에 간사함이 없도다" 그랬더니 나다나엘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 저를 아세요? 저는 처음 만나는데……." 그때 예수님이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내가 너를 보았다" 고 말씀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무엇을 했는지 이미 보고 계셨습니다.

여러분, 혼자 있을 때 자신은 누구십니까? 홀로 있을 때, 밤에 아무도 안 볼 때의 삶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의 삶보다 가정에서의 삶이 더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의 삶보다 더 중요한 것은 홀로 있을 때의 삶입니다. 공중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개인기도입니다. 교회에 드리는 헌금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개인적인 돈사용입니다.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린 것도 중요하지만 나머지 십 분의 구를 어디에 쓰고 있는가?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는가? 아니면 쾌락을 위해 쓰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믿기보다 돈을 더 믿기 때문에 그 돈을 이 땅에 꼭꼭 쌓아만 두는가? 교회에서의 헌신보다 개인적인 헌신이 중요하며 교회에서의 예배보다 개인적인 예배가 더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참 신앙인은 어떤 모습을 하고 살아야 합니까? 밤에 아무도 안 볼 때, 혼자 있을 때, 주의 말씀을 지켜야 될 줄로 믿습니다. 언제나 주의 말씀에서 위로를 찾고, 주의 말씀에서 참 기쁨을 얻어내며, 주의 말씀을 삶의 지표로 삼는 자입니다. 이 말씀처럼 사셔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모습을 언제나 가지고 사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람들마다 자기 마음 판에 자기의 모습을 그려놓고 그 모습에 따라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만일 그 자화상이 부정적이고 열등하며 패배하면 그 사람은 반드시 그대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그 자화상이 소망차고 낙관적이며 긍정적인 모습이면 또한 그렇게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성공과 실패가 우리의 외면적인 모습이 아닌 내면적인 자화상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로 지음 받은 피로 그린 자화상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 세상이 나를 인정하지 않고 다 버렸다 할지라도 십자가 앞에 나와서 새 사람이 되고 새로운 자화상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마음에 강하고 담대하여 소망차고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고 우리의 생활 속에 위대한 승리를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게 하소서

하루 분량의 즐거움을 주시고
일생의 꿈은 그 과정에 기쁨을 주셔서
떠나야 할 곳에서는 빨리 떠나게 하시고
머물러야 할 자리에는
영원히 아름답게 머물게 하소서.

작은 것을 얻든 큰 것을 얻든 만족은 같게 하시고
일상의 소박한 것들에서 많은 감사를 발견하게 하소서.

누구 앞에서나 똑같이 겸손하게 하시고
어디서나 머리를 낮춤으로써
내 얼굴이 드러나지 않게 하소서.

기쁨이 있는 곳에 찾아가 함께 기뻐하기보다
슬픔이 있는 곳에 찾아가 같이 슬퍼하게 하소서.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게 하시고
내가 상처 입었을 때는 빨리 치유해 주소서.

이전에 나의 어리석음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었거나 상처 입힌 일이 있으면
나를 괴롭게 하여 빨리 사과하고 용서받도록 하소서.

인내하게 하소서.
인내는 잘못을 참고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깨닫게 하고
기다림이 기쁨이 되는 인내이게 하소서.

용기를 주소서.
부끄러움과 부족함을 드러내는 용기를 주시고
용서와 화해를 미루지 않는 용기를 주소서.

투명하게 하소서.
왜곡이나 거짓이나 흐림이 없게 하시고
무엇이 내 마음을 통과할 때 그대로 지나가게 하소서.

약속을 조심스럽게 하게 하소서.
그 자리에서 결정하기보다 잠시 미루게 하시고
순간의 감정에 흔들리지 않게 하소서.

주기로 약속했다면 더 많이 주게 하소서.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 짐이 되지 않게 하시고
나에게는 교만이 되지 않게 하소서.

음악을 듣게 하시고 햇빛을 좋아하게 하시고
꽃과 나뭇잎의 아름다움에 늘 감탄하게 하소서.

사람을 외모나 학력이나 출신으로
평가하지 않게 하시고
그 사람의 참 가치와 의미와 모습을
빨리 알게 하소서.

시간을 아끼게 하소서.
하루해가 길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하시고
내 앞에 나타날 내일을 설렘으로 기다리게 하소서.

나이가 들어 쇠약하여질 때도
삶을 허무나 후회나 고통으로 생각하지 않게 하시고
나이가 들면서 찾아오는 지혜와 너그러움과
부드러움과 안정을 좋아하게 하소서.

가족에 대한 사랑,
가정의 기쁨을 늘 가슴에 품게 하시고
이런 마음을 전할 기회를 자주 허락하소서.

일하는 동안에는 열정이 식지 않게 하시고
열정이 식어 갈 때는 다음 사람에게
일을 넘겨주고 자리를 떠나게 하소서.

질서를 지키고 원칙과 기준이 확실하며
균형과 조화를 잃지 않도록 하시고
성공한 사람보다 소중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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