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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목회자와 함께 하는 건강한 신앙 생활 (고전 9: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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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와 함께 하는 건강한 신앙 생활
고전 9:1-14

교회는 세 가지 목적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위해서이고, 둘째는 세상을 위해서이고, 셋째는 교회자체를 위해서입니다.

교회의 하나님을 위한 목적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있습니다. 세계를 창조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전 인격적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고 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세상을 위한 목적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 나라를 성취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최고의 방법은 복음을 전하여 뭇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는 데서부터 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복음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가운데 실현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 이것은 교회가 세상을 향해 가지는 중요한 목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실 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고 말씀 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라는 교회에 주신 명령의 말씀은 절대적이고 분명한 것입니다

교회의 교회자체를 위한 목적은 성도들을 은혜 중에 양육하고 훈련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19-20)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를 삼는 것, 세례를 주는 것, 가르쳐 지키는 것은 양육과 훈련에서부터 입니다. 이 양육과 훈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 끝 날까지 교회에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일인 것입니다.

교회의 목적인 이 세 가지는 어느 하나도 소홀히 다룰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배만 치중한 교회라든지, 세상을 향한 복음전파 목적에만 치중한다든지, 교회자체를 위한 일에만 치중한다든지 하는 것은 교회를 불균형스럽게 만들며 그것이 심할 때는 교회가 기형적 모습을 드러내게 합니다. 교회는 이 세 가지 모든 목적을 이루어 가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을 위한 예배의 목적을 다하기 위해서는 제사장적인 사역이 있어야 합니다. 또 교회가 세상을 향한 복음전파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도적 사역(선지자적인 사역)이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자체를 위한 양육과 훈련의 목적을 위해서는 목자적인 사역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이 세 가지 사역은 교회의 존재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이 세 가지 사역을 이루기 위해 특별히 목회자의 사역이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사역은 중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러한 목회사역과 함께 하는 생활입니다. 목회사역을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이 목회사역에 함께 참여하는 믿음의 삶은 목회자를 향한 바른 이해와 신앙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목회 사역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목회자의 목회사역과 함께 하는 아름답고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다짐을 가져야 합니다. 그럼 목회자의 목회사역은 무엇입니까?


목회자의 사역은 교회의 사역이며 그리스도의 사역

목회사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우리교회에 주신 교회사역이며 그리스도의 사역임을 인식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해야하는 사역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엡4:11)라는 바울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러한 직책 중,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는 초창기에 세우셨던 직책으로 보았고, 목사와 교사 둘만이 교회내의 평상직으로 보았습니다. 바로 칼빈은 목사와 신학자로서의 교사를 교회에서 없어서는 안될 직책으로 본 것입니다. 칼빈은 "성직자들을 교회를 다스리며 유지하는 방식으로 보면서, 곧 주께서 영원히 제정하신 이 방식이 우리들의 무시와 멸시 때문에 폐지되어서는 안 된다"(기독교 강요 하p62)고 했습니다.

바울은 목회자의 사역을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는 것이라 말했습니다(엡4:12). 목회자를 세우신 하나님의 역사는 분명하고 단호한 것임을 보게 됩니다. 그 사역자를 세우신 하나님의 방법은 "택하여 세웠다는 것" 입니다. 바울은 이 소명 의식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목회 사역자를 택하여 세울 뿐, 아니라 목회자의 목회 사역과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1절에서 예수님의 모습은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분"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설명하기를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계1:20)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교회의 목회 사역자들을 붙들고 계시며 함께 하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목회 사역자를 택하여 세우시고 함께 하셔서 목회사역을 바로 이루게 하십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영광을 받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목회사역은 절대적인 교회사역이며,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우리모두가 함께 하여야 하는 사역입니다.

목회 사역의 권위는 지켜주어야 할 소중한 것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세우신 목회사역의 권위를 지켜 주어야 합니다.
모세를 지도자로 세워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은 르비딤에서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함께 하셨습니다. 이 전투에서 모세의 손이 올라가야만 승리하도록 하나님은 모세에게 독특한 권위를 부여 하셨습니다. 이 권위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고귀한 권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손이 내려오지 않도록 모세의 손을 받쳐주었던 아론과 훌의 손이 모세의 손을 대신해서 올라가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손이 올라감으로 승리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만든 권위였습니다.(출17:8-16)

부모에게는 자식에 대해 부모의 권위가 주어져 있습니다. 이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권위입니다. 물론, 인간생활에서 존경과 업적으로 만들어지는 권위도 있습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권위는 이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권위입니다. 하나님의 만든 권위는 하나님의 권위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권위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인고로 지켜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모의 권위를 바르게 지키는 자녀를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고 하신 것입니다

홍수심판 이후 노아는 포도농사를 지어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벌거벗고 잠이 들었습니다. ''함''은 아버지 노아의 하체를 보고 나가 ''셈''과 ''야벳'' 두 형제에게 이 일을 고했습니다. ''셈''과 ''야벳'' 두 아들은 뒷걸음질쳐 들어가서 아버지 노아의 하체를 덮어드렸습니다. 성경은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받았으나, 아버지의 하체를 본 ''함''은 저주를 받았음을 말씀했습니다. 아버지의 권위를 경시함에 대한 경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여하신 권위는 결코 쉽게 경시될 수 없는 귀한 것입니다.

모세는 구스 여자를 새로운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덕스럽지 못한 것입니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과 ''아론''은 이 일에 대해 비난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미리암''과 ''아론''을 책망했습니다. ''미리암''은 이 일로 문둥병이 걸렸습니다 그 이유는 ''모세''의 권위를 함부로 경시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신 권위는 ''모세''의 잘못된 처사로 인하여 쉽게 경시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민12:1-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은 목회자가 여러분께 군림하여 지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목회 사역자의 권위도 바로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권위로 지켜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학식이나 덕망 이런 것 때문에 존경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권위를 부여해주셨기 때문에 목회자를 존경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것이라고 믿고, 그 권위를 인정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데서 은혜롭고 바른 믿음의 삶이 이루어집니다. 목회자의 학력과 인격과 실력 때문에 그 권위를 인정하고 존경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쉽게 그 목회사역에 대하여 실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목회자의 학력이나 인격은 곧 한계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부여하신 권위를 인정할 때는 하나님의 권위이기에 존경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기독교 고사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평양의 어느 목사님은 말썽 많은 교회에 부임했습니다. 그 교회는 도대체 목회사역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기에 목회자의 지도력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이 무엇을 하자고 해도 목사님의 말씀에 바로 순종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목사님은 목회하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하루는 심방을 가다가 속이 텅 빈 고목 나무를 보자 이렇게 말했답니다. "아뿔사, 너는 목회도 하지 않는데, 왜 그렇게 속이 다 썩어 아예 구멍이 났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목회사역의 권위를 인정하는 신앙생활로 은혜롭고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교역자를 ''섬김의 직''이라고 합니다. 이 섬김은 천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도로, 말씀으로, 사랑으로 섬기는 그러한 섬김을 뜻합니다. ''만인 제사장설''이란 말은 누구나 예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 나갈 수 있음을 말한 것이지, 결코 목회사역의 권위를 부인하고자하는 의도에서 말한 것이 아닙니다. ''평신도 운동''이란 말은 모두가 함께 교회사역에 참여함을 중시한 운동이지, 목회사역자의 권위를 부정하는 운동이 아닙니다. 평신도 운동이라는 목회사역의 본래의 권위를 빼앗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권위를 함께 세우기 위한 것이다. 목회사역의 권위가 바로 세워지는데서 그리스도의 사역이 교회 안에서 바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목회사역의 권위를 소중하게 여겨 인정하는 데서 우리는 은혜롭고 건강한 신앙의 생활을 이루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해하며 함께 하는 것

목회사역은 이해하며 함께 해야 하는 사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목회자의 사역에 기쁨으로 지원해 주기를 원하십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6장 6절에서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레위기서에 보면, 하나님은 그의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들에게 제공되는 것을 "지극히 거룩한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지극히 거룩한 제물과 같이 여기셨던 것입니다. 목회자의 사역을 위해 기쁨으로 돕는 지원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고린도 교회에 대한 섭섭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중에는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무시하며, 바울이 교회에서 받을 당연한 권리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바울의 마음은 불편했습니다.

바울 자신은 교회에서 받을 당연한 권리를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바울은 천막을 제조하는 일을 하면서 자비로 자신의 생계를 해결하면서 복음사역을 감당해 나갔습니다. 그 이유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장애가 되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사역자의 깊은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고 곡해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고전9:11-14)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고전9:12)
이러한 말씀은 목회의 사역을 이해하며 도와야 하는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목회사역과 함께 하여 돕는 것은 명령적임을 보게 됩니다.

어느 젊은 목사님이 새로운 목회지 인 교회에 부임했습니다. 교회에서 신임목사님을 환영하는 만찬회가 열렸는데 어떤 부인이 젊은 목회자에게 다가가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떻게 목사님께서는 7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요구를 만족시켜주어야 하는 힘든 일을 맡으실 생각을 하시게 됐는지 이해가 안가는 군요." 그러자 젊은 목사님은 주저함이 없이 말했습니다. "제가 이 도시에 온 것은 7백명의 교인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단 한 분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온 것입니다. 그 분을 기쁘시게 해드리면 나머지 모든 것은 잘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목회사역이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목회사역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목회사역과 함께 하는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R. W. Dale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목사가 효과적으로 일을 하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그 주간에 목사를 위해 기도를 해야 한다. 그리고 목사의 성공은 당신의 관심에 달려있다. 목사가 회중들의 양심과 영적인 생활에 미치는 특별한 힘이 있는 것처럼 보여지는 설교를 했다면, 그것은 그 주간 동안 목사를 위해서 교인들이 특별한 기도를 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목사가 어떠한 성공을 했든지 간에 그것은 목사의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교인들의 것이라고 하겠다. 그 주간 동안에 당신이 목사의 성령충만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결코 설교를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목회사역과 함께 하며 목회사역을 사랑하는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목회자의 목회사역을 이해하며 참여하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목회자와의 즐거운 관계로서 은혜로운 신앙생활이 되도록 하십시오. 교회에서 신앙 생활하는 우리모두는 목회사역에 대한 관계가 은혜롭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신앙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목회사역을 기뻐하며 존귀하게 여기며 힘써 도움으로 우리의 신앙의 삶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기뻐하시는 삶이 되도록 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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