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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마 6: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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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마 6:31-34)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6:31-34)

주후 10세기경에 성 브루노라는 훌륭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대주교로서, 수도원의 원장으로서 사람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젊은 시절 수도사로서 훈련에 전념할 때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한적한 곳을 찾아서 그곳에 작은 움막을 쳤습니다. 그리고는 그 속에 들어가서 조용히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기도에 힘썼습니다.
어느덧 저녁이 되었습니다. 그는 등불을 켰습니다. 그는 또 다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움막 밖에서 개구리들이 개굴개굴 거리면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개구리들의 울음소리 때문에 도무지 집중되지를 않았습니다. 그는 움막 밖으로 나와서는 개구리들을 향해서 이렇게 고함을 질렀습니다.
“야. 이 녀석들아! 수도사가 기도하려고 하는데 왜 이리 시끄럽게 떠드느냐? 너희들 때문에 내가 시끄러워서 기도를 할 수가 없다. 그러니 좀 조용히 해라. 알아들었느냐?”
그러자 개구리들은 알아들었다는 듯이 일제히 잠잠해졌습니다. 그래서 브루노는 움막 속으로 다시 들어가 하던 기도를 계속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이제는 언덕 너머에서 잠자던 개구리들마저도 다 깨어나서 더 시끄럽게 울어대는 것이었습니다.
브루노는 다시금 움막 밖으로 나와서 더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개구리들은 다시금 잠잠해졌습니다. 그가 움막 속으로 들어가서 기도하려고 하면 개구리들은 또 다시 시끄럽게 울어대기 시작했습니다. 브루노는 나오고 들어가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습니다. 급기야 그는 너무나도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자기의 심경을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께 좀 더 깊은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이렇게 산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저 개구리들의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제가 도저히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저 개구리들의 입을 좀 막아주시면 안되겠습니까?”
그때 번개같이 그의 머리 속을 스쳐가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너는 왜 너 혼자서만 기도한다고 생각하느냐? 저 개구리들은 기도할 자격이 없고, 찬송할 권리도 없다는 말이냐? 저 개구리들을 누가 만들었는지 생각해 보아라. 너 혼자서만 기도한다고 하지 말고, 네가 저 개구리들과 더불어서 함께 기도하며 찬양한다고 생각하면 안되겠느냐?”

브루노는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자기 혼자만 기도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개구리들이 함께 기도하고 함께 찬송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는 감격에 찬 음성으로 개구리들을 향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오, 개구리 형제들이여. 내가 잘못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 함께 하나님께 기도하십시다. 마음껏 소리 높여 하나님께 찬송하십시다.”
그랬더니 개구리들이 그 소리에 화답이라도 하는 듯이 더 큰 소리로 개굴개굴 거리면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개구리의 소리가 변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무엇이 변한 것입니까? 개구리들의 울음소리를 듣는 수도사의 시각과 관점이 달라진 것입니다. 개구리들의 울음소리를 받아들이는 수도사의 마음가짐이 달라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의 고질적인 문제가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든지 그저 우리 자신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고 해석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기 보다는 그저 우리의 주장, 우리의 고집만을 내세우면서 그것을 관철시키려고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일을 하면서도 마치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처럼 착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세우는 것이 아니고 자기들의 의를 고집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를 허물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기들의 의가 온전한 것처럼 주장을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기들의 의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마저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의 관심사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일깨워주셨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나라를 구축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의를 내세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일깨워 주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간단하게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세상 사람들의 관심사입니다. 31-32절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의 관심사입니다. 33절입니다.
셋째로, 우리의 삶의 자세입니다. 34절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는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우리의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날마다 하나님의 축복을 풍성히 누리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세상 사람들의 관심사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31-32절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여기서 이방인이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들, 곧 세상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기에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돌보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자기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그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대해서 염려하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히 그들의 관심사는 먹고, 마시고, 입는 등 온통 육신적인 일에만 쏠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 자들입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인 우리들에게 있어야 할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 사실을 마6:7-8에서도 밝히신바 있습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이방인들은 자기 신들에게 기도할 때 중언부언하면서 말을 많이 했습니다. 그렇게 한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함으로서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를 해결함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괜히 헛수고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지시고 돌보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할아버지 한 분이 살고 계셨습니다. 홀로 사시는 분이었습니다. 하루는 그 할아버지가 놀이터의 의자에 앉아서 잠시 쉬고 있었습니다. 그때 동네 꼬마 아이들이 그 할아버지를 알아보고서 뛰어왔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졸랐습니다. 
“할아버지, 옛날 이야기 하나 해 주세요.”
할아버지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옛날 어떤 마을에 한 청년이 살고 있었단다. 이 청년은 건너마을에 사는 한 여자를 매우 사랑했단다. 하루는 그가 용기를 내어서 그 여자를 찾아갔었지. 그리고는 이렇게 요청했단다. ‘나와 결혼해 주십시오. 내가 어떻게 하면 당신과 결혼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좀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자 그 여자는 얼굴을 붉히면서 이렇게 대답을 했단다. ‘제게는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그저 두 마리의 말과 다섯 마리의 소만 준비되면 언제라도 제게 오십시오. 그러면 제가 기꺼이 댁과 결혼하겠습니다.’ 청년은 그 말을 듣고 너무나도 기뻤단다. 그래서 두 마리의 말과 다섯 마리의 소를 준비하기 위해서 그때부터 열심히 일을 했단다. 그렇지만 생각처럼 돈은 쉽게 벌리지 않았단다. 그래서 결국 그 청년은 그 여자와 결혼하지 못하고 혼자서 늙어갔단다. 어느덧 세월이 50년이나 흘러서 그 청년도 이제는 할아버지가 되고 말았단다. 그렇지만 그는 아직도 그 여자만을 사랑하며 그리워하고 있단다.”

할아버지가 이야기를 마치고 나자 동네 꼬마아이 중 한 아이가 대수롭지 않은 듯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에이, 할아버지. 그 뜻도 모르세요? 두 마리의 말과 다섯 마리의 소라면 ‘두 말 말고 오소’라는 뜻이잖아요.”
그 할아버지는 그 아이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렇구나! 바로 그런 뜻이었구나. 내가 그것도 모르고 50년 동안이나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었구나.”
그러면서 그 할아버지는 땅을 치면서 통곡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물론 우스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두 마리의 말과 다섯 마리의 소를 스스로 마련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괜히 고생하며 헛수고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문제를 쉽게 해결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두 말 말고 오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오기만 하면 됩니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오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자녀가 된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지시고 돌보아주십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이 단순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서, 어리석게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스스로 구하며 고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의 관심사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33절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의 관심사가 그의 나라와 그의 의, 곧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에 있어야 함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사도 바울의 삶을 예로 들어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사도 바울은 셋째 하늘, 곧 낙원에 이끌려 갔던 사람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찬란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자기의 두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오직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쳤습니다.

그가 세 번째 선교여행을 마치고 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말렸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마십시오. 당신의 생명이 위태롭습니다. 그곳에 있는 유대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지금 무섭게 칼을 갈고 있습니다.”
그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행20:24입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 바울의 관심은 오직 한 가지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죽고 사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롬8:18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생각하면, 이 세상의 것들은 너무나도 시시하게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잠시 잠깐동안 이 세상에서 받는 고난들은 언제라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더불어서 영원토록 하나님의 나라에 살아갈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관심도 마땅히 하나님 나라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이 세상에 우리의 지나친 관심을 두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우리의 관심이 하나님의 의에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습니다. 뗄래야 뗄 수가 없습니다. 누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의 의를 받은 자만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마5:20에서 이 사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서는 천국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더럽고 냄새 나는 인간적인 의를 가지고서는 결단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옛날에 바보 삼형제가 살았습니다. 하루는 이들 삼형제가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여행 도중 어느 동굴 입구에 이르렀습니다. 그 동굴의 입구에는 이러한 팻말이 쓰여있었습니다.
“이곳은 침묵의 동굴입니다. 이 안에서는 절대로 말하지 마십시오. 말하면 죽습니다.”
그들 삼형제는 동굴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첫째는 아무래도 동생들 때문에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동생들에게 이렇게 주의를 주었습니다.
“얘들아, 이 속에서는 말하면 죽는다. 그러니 절대로 말하지 말아라.”
그 말과 함께 첫째는 쓰러져서 죽고 말았습니다. 둘째가 그 모습을 보면서 막내에게 주의를 주었습니다.
“얘, 봤지? 말하면 저렇게 죽는거야! 그러니까 너는 말하지 말아라.”
둘째도 죽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셋째는 혼자서 중얼거렸습니다.
“나는 아무런 말도 안 했어.”
결국 셋째도 죽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제일 답답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무식한 사람입니다. 무식하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경우 없이 무슨 일이든지 행하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자신의 소신까지 더하면 이보다 골치 아픈 일은 없습니다. 무조건 자기만이 옳습니다.

그 옛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무조건 자기들만 옳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헐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마저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자기들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천국 문 앞에 서서 다른 사람들조차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그들은 화를 받아서 마땅한 자들이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공손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이 있습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어느 선교사님의 고백입니다. 그는 중동지역에서 40년 동안 복음을 전하고서 은퇴를 하신 분이었습니다. 기자들은 그에게 이러한 질문을 했습니다.
“선교사님, 40여년을 중동의 모슬렘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느라고 얼마나 애쓰셨습니까? 그 동안 선교사님을 후원한 선교단체는 어디였습니까?”
그들의 기사에 그 선교사님을 후원한 단체의 이름을 올리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때 선교사님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를 후원해준 단체는 마6:33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저는 이 말씀을 붙들고 중동지역으로 갔습니다. 저는 지난 40년 동안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만 구하기 위해서 힘썼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신실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내 모든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저는 지난 40년 동안 한 번도 굶어본 적이 없습니다. 한 번도 옷이 없어서 헐벗어 본 적도 없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내 모든 필요를 아시고 때를 따라 도우시는 은혜로 다 채워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공손히 구하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필요를 다 아시고 채워주실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의 삶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 살펴봅니다.

34절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위 문장은 세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입니다. 오늘 일을 위해서도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되겠지만, 내일 일을 위해서도 역시 우리는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히13:8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하나님이 지금까지 우리를 돌보아주신 것처럼 앞으로도 우리를 돌보아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돌보심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둘째 문장에서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둘째,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내일 일은 내일 가서 염려해도 괜찮다는 뜻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영어성경에서는 이 말씀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For tomorrow will worry about itself(내일 일은 내일 그 자신이 스스로 염려할 것이기 때문이니라).” 원문에는 내일이라는 단어가 의인화되어 있습니다. 내일 일은 내일이 알아서 스스로 처리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는 여호와이레의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를 에벤에셀로 돌보아주신 하나님은 임마누엘로 지금도 우리를 돌보아주십니다. 아울러 하나님은 여호와이레로 우리의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앞으로도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내일 일을 위해서 조금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도 돌보는 사람 없이 홀로 살아가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가난한 분이었지만, 늘 밝고 환한 얼굴로 기쁘게 살았습니다. 하루는 목사님이 심방을 갔습니다. 목사님은 할머니의 밝은 얼굴을 보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할머니, 저는 할머니를 자주 찾아뵙지는 못하지만 예수님이 날마다 찾아와주시니까 외롭지 않으시죠?”
그러자 할머니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틀린 말씀입니다.”
목사님은 아무래도 그 할머니께서 귀가 어두워서 잘 못 들으신 줄 알고,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할머니! 예수님이 날마다 이곳을 찾아와주시니까 외롭지 않으시지요?”
그때 할머니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다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틀린 말씀이라니까요. 예수님은 날마다 나를 찾아와주시는 분이 아니라, 여기서 나와 함께 살고 계신 분이시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은 결코 내일 일을 위해서 염려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주와 더불어서 날마다 매순간 마다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셋째,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입니다. 우리의 삶에 늘 평탄한 길이 계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경우에 따라서 고난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고난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한 날 괴로움”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결코 “한 날의 염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당하든지 염려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패러마운트 영화사는 할리우드 최초의 영화제작 회사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영화 「십계,」 「왕중왕」이 바로 이 영화사에서 제작되었습니다. 그 영화사를 이끌었던 셰리 랜싱 회장의 유명한 좌우명이 있습니다.
“결과를 염려하지 말고, 일하는 과정을 즐기자.”
그는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이 잘될 것인가, 잘되지 않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일체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모든 결과를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리고는 그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는 자기도 그러한 마음으로 일하고, 부하 직원들에게도 늘 그렇게 훈시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고, 일하는 과정 자체를 즐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언제나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루는 어린 딸이 자기 어머니에게 하소연을 했습니다.
“엄마, 배가 아파요.”
어머니는 아이의 머리도 한 번 짚어보고 여러 가지 진단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네가 배가 아프게 느껴지는 것은 아무래도 속이 비어서 그럴거야! 뭐 좀 먹어야 되겠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딸 아이에게 맛있는 음식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아이는 음식을 먹고 나니까 정말로 배가 아프던 것이 사라졌습니다. 그날 저녁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퇴근길에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프지?”
그러자 딸 아이가 얼른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머리가 아픈 것은 머리가 비어서 그래요. 머리에 뭘 좀 집어 넣으세요.”

여러분! 마음이 아프십니까? 마음 속에 근심, 걱정, 염려가 가득 쌓여 있습니까? 마음이 비어서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믿음을 집어 넣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눈동자와 같이 지켜주시고, 우리를 돌보고 계신다는 믿음을 집어 넣으십시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힘써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때를 따라 도우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때마다 일마다 하나님의 평강을 허락해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와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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