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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눔의 감사” / 레 23: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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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감사” / 레23:15-22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가운데 22절에 있는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그것을 가난한 자와 거류민을 위하여 남겨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룻기에 보면 룻이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주워서 가난하고 어렵게 살았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맥추감사절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사를 드리라`, 지난 시간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 감사제사, 헌신제사, 서원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15-22절까지 말씀을 통해 같이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이것을 드림의 감사라고 한다면 오늘 맥추감사절에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나눔의 감사제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에 어려운 사람도 생각하는 것, 그것이 또한 우리가 드려야 할 제사입니다. 왜 제사라고 했습니까? 제사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제사인데,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이렇게 감사, 헌신, 서원으로 드리는 제사뿐 아니라 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들을 도와주는 것도 하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셨고, 이런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은혜를 주신다 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은 그냥 돕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요, 예배요, 감사절에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임을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있는 것과 같은 말씀이 신명기 24:19-22에 기록되어 있는데, 제가 읽겠습니다.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너는 애굽 땅에서 종 괴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이름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밭에서 추수를 하다가 일부를 남겨두어 그 일부를 가난한 사람, 고아와 과부와 지나가는 나그네가 먹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감사절에 드리는 또 하나의 제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만나시겠다는 것입니다.
과수원에 다 익은 과실, 오늘 성경에 보면 감람나무, 올리브 열매, 포도열매를 딸 때에 어느정도 남겨두라고 했는데, 우리 나라에도 과수원에서 열매를 따다가 꼭대기에 있는 것은 끝까지 따지 않고 남겨두는데, 그것을 까치밥이라고 합니다. 짐승도 먹고 살게 남겨두라는 것인데, 같은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꽃도 보면, 먼저 피는 꽃, 나중에 피는 꽃이 있습니다. 열매도 먼저 익는 것, 나중에 익는 것, 다 딸 때까지 파란 것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남겨두라는 것입니다. 끝물 열매들은 남겨두어 가난한 사람들이 와서 그것을 가져가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성서학자인 매튜헨리는 유대교 전통에 의해 남겨두는 양이 어느 정도인가? 60분의 1정도이다라고 했습니다. 전체 수확량 가운데 1.6-1.7% 정도 되는 것을 남겨두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것을 남겨두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그것을 기쁘게 여기시고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돕는다고 했을 때 이것이 단순히 돕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보시는 제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우리가 제사를 드릴 때에 이 제사가 진정한 제사가 되려고 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두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추수한 것에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나는 청지기이고 주인의 자세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남을 구제할 때에 주인처럼 느껴지는 것이 아니고, 가난한 사람과 눈높이를 낮추라는 의미에서 구제라는 말보다 나눔이라는 말이 나은 것 같습니다.
「제자입니까?」라는 책을 쓴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목사님이 `오늘 세상에는 두 종류의 무신론자들이 있는데, 첫째 말 그대로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하는 무신론자가 있고, 둘째,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자.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무신론자와 같습니다. 사실 우리는 모든 것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싱가포르 한인교회에서 있었던 일을 잡지에 실은 것을 보았습니다.
부인이 암 말기로 죽음의 고통 속에 있는데, 남편이 이 아내를 데리고 교회에 등록을 했습니다. 이 부부는 굉장히 잘 살은 사람들입니다. 시골집에서 자랐지만, 좋은 대학 나오고, 카이스트에서 근무하다가 지금 싱가폴에 간 사람입니다. 주위의 인정도 받고 사회적 지위도 있고, 무엇이든 자신의 힘으로 인생을 개척한 자수성가한 분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아내가 암에 걸려 죽음의 투병을 하고 있습니다. 남편이 아무것도 해 줄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동안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박사학위도 소용이 없습니다. 사회적 지위도 소용이 없습니다. 좋은 직장도 소용이 없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해 줄수 있습니까? 이 남편이 목사님께 와서 하는 말이 "목사님, 저는 무엇이든 제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 아내가 암으로 죽어가고 있는데, 저는 아무것도 해 줄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목사님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영접했으니, 부인을 위해 진정으로 해줄 수 있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주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남편은 그 아내를 위해 극진히 기도하고, 온 교회가 이 가정을 위해 기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때에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고 내가 다 살 것처럼 하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나를 버리지 않고 하나님을 만날 길이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하나님의 손에 내 모든 인생의 계획이 달려 있는 줄로 믿습니다.
내 몸은 내가 가졌다고 내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가 일을 얼마나 했느냐, 얼마나 많은 능력을 가졌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마21:23에 예수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하늘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와서 내게 이르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십니다.

선지자 노릇하는 것이 얼마나 귀합니까? 귀신 쫒아내는 것이 얼마나 큰 역사입니까? 권능을 갖고 많은 일을 행하는 것이 얼마나 큰 일입니까? 그러나 주님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내가 한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인데, 하나님의 뜻대로라 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 분이 모든 것의 주인이시고, 그 분이 모든 것의 결정권을 갖고 계시고, 그 분이 가져 가실려면 가져가실 수 있고, 그 분이 우리를 심판하실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 나눔의 제사를 바르게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하는 봉사도 같은 의미입니다. 내가 잘 나서 봉사합니까? 내가 힘이 있고, 내가 한다고 생각하니까, 늦게 와도 아무 잘못이 없는 것입니다. 빠져도 내가 나머지 도와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봉사하셔야 합니다. 잘나서 봉사한다고 생각합니까? 저와 여러분이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 재난 당해서 어려움을 당한 사람보다 나아서 더 좋은 일 많이 해서 이 자리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생명, 우리의 삶,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 것이 다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내가 산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의 청지기로 살라고 합니다. 청지기라는 말은 주인의 것을 위탁받아 관리하는 일군이요, 종인 것입니다. 청지기에게 중요한 것은 주인의 것을 얼마나 주인의 뜻에 맞게 관리하느냐는 것입니다.

마태25장에 달란트비유가 나오는데, 착하고 충성된 종이 나오고, 악하고 게으른 종이 나옵니다. 이 두 종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얼마나 많이 일을 했느냐가 아닙니다. 주인을 의식했느냐? 안 했느냐? 주인의 소유권을 인정했느냐? 안 했느냐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의 한 달란트를 허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인은 인색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주인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주인이 원하는 대로 하지 않습니다. 일하다가 잘 될수도 있고, 안 될수도 있습니다. 주인이 보고 싶은 것은 내가 너에게 맡겼는데, 관리를 잘했느냐입니다. 내 생각대로 묻었다가, 내 생각대로 갖다 주는 것입니다.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눔의 제사는 봉사할수 있는 것은 그래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주인이시고, 나는 청지기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인생의 주인이시고, 나는 그의 종이라는 시험에 합격합니다.
외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바칩니다. 히브리서 11장19절에 이삭을 왜 바쳤느냐?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능히 살리실 줄을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식이지만, 죽이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살리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 마음대로 쓰시라는 것입니다. 그때에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독자라도 아끼지 아니하였더니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언제입니까?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할 때에 나는 관리인이요, 하나님은 모든 것의 주인입니다. 때에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4장7절에 `내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우리가 받은 것은 다 하나님께 받은 것입니다.

역대상 29장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건축을 못 하자, 내가 하나님의 성전건축을 위해 건축헌금이라도 하겠습니다. 건축헌금을 바치며 내가 바친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을 바친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니까, 그 많은 것을 바치고도 자기의 것은 없고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주인이시고 모든 것의 주인이시고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사람, 하나님의 청지기로 사는 사람이 신앙인이고, 이런 사람에게 은혜 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선 수입이 많으면 많을수록 높임받고, 적으면 적다는 것 때문에 열등의식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신앙인 가운데도 수입이 많으면 축복받은 것 같고, 훌륭한 사람 같고, 수입이 없으면 형편이 없고 축복을 받지 못한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지난 6개월동안 수입이 좋으셨습니까? 그래서 감사합니까? 혹은 지난 6개월동안 별로 된 것이 없어서 감사 못하겠습니까?
이것은 철저한 세상적 가치관입니다. 내가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삶이란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부할때도 있고 가난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입이 좋을 때도 바울이고, 나쁠 때도 바울이고, 그는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고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마음에 따라 물질에 따라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빌4장12-13절에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서 모든 일에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우리의 가치는 수입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요, 적게 벌었다고 가치없는 사람도 아니요, 많이 벌었다고 훌륭한 사람도 절대 아닙니다. 우리의 가치는 하나님이 주인이요, 나는 그의 청지기라고 하는 사실을 아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파스칼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가난을 사랑한다. 왜? 예수님이 가난하셨으니까.
나는 부를 사랑한다. 왜?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으니까.

여러분, 무엇 때문에 행복하십니까? 무엇 때문에 불행하십니까? 하나님은 주인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주시기도 하시고, 가져가시기도 합니다. 건강하게도 하시고, 병들게도 하시고, 그러나 우리를 진토에서부터 끌어올려 귀족의 자리, 영광의 자리에 앉게 하시는 하나님이신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살아있다는 이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께 소유권을 인정하고, 주님이 주신 생명과 시간과 믿음과 이 교회를 잘 섬겨서 정말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우리 모두 진정한 나눔의 제사를 돌리셔서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나눔의 제사는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세상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준 제물을 갖고 은사로 사용해야 합니다. 은사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선물을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사람 살리우는 데, 교회를 세우고, 봉사하는데 사용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성령의 선물 가운데,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인내와 양선과 자비와 충성과 온유와 절제, 이 모든 것들이 다 다른 사람을 위해 세워지는 일에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에릭프롬이 쓴 책 가운데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우리 사람이 물질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두가지로 사용하며 그것을 갖고 그 사람의 삶이 판가름이 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소유지향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욕구를 충족하는 것에 만족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남보다 더 좋은 것을 갖고 싶어하고, 더 맛있는 것을 먹고 싶어하고, 필요하지 않아도 사야 하는 사람. 우리 나라가 돈 좀 벌기 시작하니까, 소유지향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내 돈 벌어서 내가 쓰는데, 누가 뭐라고 하는가? 비싼 게 더 잘 팔리고, 만원 써 놓으면 안 사가도 백만원 써 놓으면 사간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습니다.
명품에 빠져 있습니다. 그것이 소유지향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존재지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존재지향이라는 것은 내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인생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나을 도와주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구두쇠 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놀부, 베니스 상인에 나오는 샤일록, 크리스마스 캐롤에 나오는 스쿠르지 가 생각납니다.

그런데, 조지 엘리엇이 쓴 「사일러스 마이너 1861」라는 책에 대한 글이 신문에 실렸습니다. 이 마이너라고 하는 사람이 어느 마을에 살다가 도둑누명을 쓰고 더 살지 못하게 되어 다른 마을에 갔습니다. 새로운 곳에 가서 생각하는 것이 돈을 벌어야겠다 생각해서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하루 열여섯시간 씩 잠자는 시간 외에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었습니다. 그 돈을 벌어 금화를 만들어 갖고 밤마다 그 금화를 꺼내어 보는 것으로 만족을 느끼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누가 들었는지 도둑이 들어와 그것을 훔쳐갔습니다. 얼마나 절망했겠습니까? 그래서 이 도둑을 찾으려고 열심히 다녔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다시 집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 집에 누가 두 살배기 어린아이를 버리고 갔습니다. 이 상황에 무슨 아이를 키우겠습니까? 그러나 아이가 울자, 달래주고 배고플 때 먹을 것 주고 하다 보니, 정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도움을 받아야 하니까, 마을 사람들에게 말을 붙이고, 사람들이 도와주고 살다 보니, 세상에 인생이 이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전엔 금화를 보면 이것이 그렇게 행복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주면서 얻는 행복이 너무나 커서 이 세상엔 선과 악의 고통이 있는데, 그러나 선이 더 많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남을 도와 주는 것이 행복이고 과거엔 소유지향적인 삶을 살았는데, 그것을 잃어 버린 후에 절망적이고 살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이제는 아무것 없이도 살아가다 보니 삶에 기쁨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 때문에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사람들이 불교를 많이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불교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저기 티벳산골마을에 불교인들이 하는 호흡 수련법 가운데 `통렌` 호흡법이라고 있습니다.

`통렌`이라는 말은 주고 받는다는 뜻입니다.
대개의 호흡법은 들숨과 함께 깨끗하고 좋은 기운을 받아 마시고 날 숨과 함께 더럽고 나쁜 기운을 내보낸다고 상상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통렌 호흡법은 반대로 더럽고 나쁜 기운을 받아 마시고 맑고 좋은 기운을 내보낸다고 상상하는 것입니다.
이 호흡법의 효과는 물론 해 본 사람만 알겠지만 뚜렷하고 놀랍다고 합니다.

의학적이나 건강학적으로는 모르겠으나, 굉장히 행복하답니다. 집안에 심기가 불편한 사람이 있을 때, 구석진 곳을 찾아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그가 내뿜고 있는 나쁜 기운을 들숨과 함께 마시고 반대로 맑고 좋은 기운을 날숨과 함께 토하여 그에게 보냄으로서 그의 불편한 심기가 내게로 전염되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막을 수 있고, 나쁜 기운을 받아 마시면 마실수록 네 몸 안에 맑고 좋은 기운이 가득 찬다는 이론입니다. 그럴 듯 합니까?
한번 해보시겠습니까? 이것이 사실 그런지 안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통렌 호흡법이 가지는 정신은 귀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말만으로 원수사랑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내가 죽어서 네가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이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은사적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것이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 밥 퍼 최일도 목사님 ` 청량리 굴다리에서 노숙자들에게 밥을 해 준다고 해서 `밥 퍼` 목사님 아닙니까? 제 후배 목사님이지만 참 존경하는 목사님입니다.
그 분이 쓴 책 가운데 `이 밥 먹고 이 밥 주고`라는 책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떡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분을 먹지 않았습니까? 그분의 살 먹고, 그 분의 피 먹고, 우리가 구원받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우리도 세상에서 밥이 되어 살아야지, 우리는 세상 사람을 내 밥으로 보고 삽니다. "저거 먹어서, 내가 저 사람 이겨 가지고"
우리는 세상을 밥으로 보지, 우리가 예수님의 밥 때문에 우리가 살았는데, 우리가 왜 이 세상에 밥이 되어 살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나 먹고 너 살아라", "나쁜 공기 마시고 좋은 공기 마셔라"가 아니고 "나 먹고 너 살아라." 이것이 바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살아야 할 삶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 갈 때에 내게 주신 복,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선 목표가 나를 위해 가지고, 나를 위해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이 소유라고 하는 것이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좋은 차 타고, 좋은 옷 입고 대접받으려 합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티벳불교의 `통렌 호흡법`을 이야기했지만 이
세상 종교라는 것도 다른 것 없습니다. 남에게 나누어 줄때에 자기를 높이는 것이 세상 종교입니다.

이전에 거지들이 동냥할 때에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적선합쇼." 그것이 무엇입니까? 선을 쌓는 일입니다. 나를 도와 주는 것은 선을 쌓는 것이고, 죽으면 좋은 데 갈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 종교는 좋은 일을 하면서도 자기를 높이는 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자기 덕을 세우고, 자기가 높아지고, 인정받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내가 높아지려는 데 사용하고, 이런 사람을 대우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세상에는 차별이 있습니다. 높은 사람은 행복할 수 있지만, 낮은 사람은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나라 대학 중에 제일 좋은 대학이 서울 대학 아닙니까?
그런데, 서울대학생이 자살했습니다. 열등의식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서울 대학 다니면 최고인줄 알았는데, 왜 열등의식에 빠집니까? 서울대학 안에도 좋은 과가 있고, 나쁜 과가 있다고 합니다. 주신 것을 언제나 자기만을 위해 사용하다 보면, 언제나 뛰는 자 위에 나는 자가 있는 법입니다. 나보다 더 잘난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다 보면 차별이 생긱고, 차별 때문에 교만해 지거나 비굴해 지고 열등의식에 사로잡히고 이것은 정말로 잘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이 잘 되는 것은 내 것이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하나님의 은사로 정말 사람 살리우는 데에 이것을 사용할 때에 여기에 하나님의 은사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있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리차드 포스터 가 쓴 책 가운데 「영적성장과 훈련」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두 주간 동안 열심히 읽었던 책인데, 그 내용 가운데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지위의 권위보다 기능의 권위를 원하신다. 지위의 권위라는 것은 내가 돈 많이 벌고, 힘과 권력이 생겨서 남을 이리 저리 다스리는 것인데, 기능의 권위라는 것은 내가 섬기는 자가 되어서, 다른 사람이 감동을 받아 나와 협력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의 섬김과 참된 섬김의 차이를 이야기합니다.
자기의 섬김은 인간적인 계획과 노력에 의해서 하는 것입니다.
참된 섬김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되는 것이라 합니다.
자기의 섬김은 광고에 관심을 둡니다. 내가 얼마나 드러나는가, 그러나 참된 섬김은 조용합니다.
자기의 섬김은 외적인 상급을 요구합니다만, 참된 섬김은 섬김 자체에 만족을 합니다.
자기의 섬김은 결과에 관심을 두지만, 참된 섬김은 섬김 자체를 기뻐합니다.
자기의 섬김은 대상을 선택합니다. 특히 권세자를 섬기고 차별을 합니다.
그러나 참된 섬김은 차별이 없습니다.
자기의 섬김은 마음의 감정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나 참된 섬김은 단순하고 성실합니다.
자기의 섬김은 일시적 감정에 의해서 하지만, 참된 섬김은 생활방식입니다.
자기의 섬김은 기회를 요구하지만, 참된 섬김은 항상 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섬김은 공동체를 금가게 하지만, 참된 섬김은 공동체를 튼튼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남을 섬기고 세우려는 진정한 방법이 무엇입니까?

열가지를 이야기합니다.
① 윤리규정이 아니고 생활방식이 되어야 한다.
② 숨은 섬김도 있다.
③ 작은 섬김이 있다.
(꼭 돈을 주는 것만이 아닙니다. 길가의 종이를 줍거나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것.)
프랑수아 드 살르 라고 하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큰 덕행은 설탕과 같고 작은 덕행은 소금과도 같다.`
④ 관용의 섬김이 있다.(남을 헐뜯거나 비판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봐주는 것입니다.)
⑤ 섬김을 받는 섬김이 있다. (시어머니들이 며느리들이 무엇을 갖고 오면 그냥 받을줄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발을 씻기실 때에 아니라고 했는데,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⑥ 예절의 섬김이 있다. (누가 우리에게 인사하거나 반길 때에 그것도 하나의 섬김이라는 것입니다. 심방을 받을 때에 방 한번 쓸어놓고, 옷 입고 기다리는 것도 섬김입니다.)
⑦ 대접하는 섬김이 있다. (교회의 감독, 목사님, 장로님, 딤전3:2, 손 대접하기를 즐겨야 합니다.)
⑧ 듣는 섬김이 있다. (남의 이야기를 잘 듣는 것입니다. 설교를 잘 듣는 것도 목사님을 섬기는 것이 됩니다.)
⑨ 서로 짐 지는 섬김(같이 울고, 같이 웃고 - 저는 밥을 늦게 먹는 편인데, 우리 구역이 아닌데도 들어가서 설거지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좋은 섬김입니다.)
⑩ 생명의 말씀을 나누는 섬김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갖고 높아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 가진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사용하는 데에 쓰지 말고, 이웃을 세우는 데에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진정한 복입니다.
이 말씀을 정리하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첫째, 검소하게 살아야 겠다.
바리새인들이 좋은 경건의 신앙의 삶을 위해 세가지를 생각했는데, 매일 하나님 앞에 기도로 예배하는 것, 이웃을 향해 구제하는 일, 자기 자신을 향해서 금식을 했습니다.

우리가 남을 돕는 데에, 있어서 돕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내가 안 먹고 안 써야 남을 도울 수 있습니다. 내가 희생해야, 어려운 사람의 마음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검소해야 겠습니다. 시간도 나를 위해 쓰는 것을 줄이고, 능력도 나를 위해 쓰는 것 줄이고, 너무 바쁘면 안 됩니다. "늘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겠다."

지난 주 TV에서 인간극장을 보았습니다. 남편은 `김동덕`씨이고, 부인은 `박완금`씨입니다.
그런데, 이 부인이 결혼해서 아이 둘을 낳고 재미있게 잘 살다가 그만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그 교통사고로 목 아래를 전혀 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이동섭 목사님이 생각났습니다. 우리 이목사님은 손이라도 쓰시지만, 이 부인은 전혀 못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어디를 갈 때면, 이 부인을 옆에 묶어 놓습니다. 집에 있을 때도 누워 있을 때 외엔 묶는 것을 해서 있습니다. 밥도 떠 먹여 줘야 하고, 책을 보고 싶어도 누가 펴주어야 합니다. 남편이 직장을 다니다, 아내 때문에 고향에 내려가서 개를 키우며 살자 해서 식당에서 짬밥을 얻어 다니는데, 그때마다 부인을 데리고 다닙니다. 남들이 오해합니다. "왜 부인을 묶어 두는가?" 묶어 놓지 않으면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짬밥을 얻어 가지고 개를 먹일 때는 -어디서 주워온지 모를 스피커와 마이크를 놓고 밖에서 일할 때 들리게- 부인이 부르면, 일하다 말고 들어 와, 부인의 일을 돕는 데, 성경 한페이지 넘겨달라고 하면, 그것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넘겨주고 금방 가면, 한 삽 뜨자 마자 또 부릅니다. 귀가 간지러우니까, 긁어줍니다.
"이왕 온 김에 성경책 한 장 넘기고 가자.", "안돼, 아직 남았어." 모르겠다 하고 후닥 넘기고 도망갑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부인이 부를 때마다 화나고 짜증나지 않냐고 묻습니다. 저는 짧은 순간 보는데도 짜증이 나던데, 정말 어떻게 저렇게 할까? 도망갈 것 같은데, 어떻게 저렇게 하고 살까? 너무나 가난하게 사는데. 이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라고 왜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내가 웃어야지. 안 그러면 저 사람은 상처를 받을 것 아닙니다. 저 사람이 상처를 받으면 어떻게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은혜받았습니다. 머리하는 것도 이렇습니다. 내 마음대로 하면, 나는 티셔츠 바람에 설교도 하고 싶고, 심방도 하고 싶고, 이 더운 여름에 왜 넥타이를 매고 다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상대방을 배려하기 때문에 이 옷도 입는 것 아니겠습니까?
말 한마디도 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에게 진정한 존재가치가 있고, 이런 사람이 진정한 나눔의 감사를 드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께 감사제사를 드리면서 어려운 이웃들도 생각하는 감사제사,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제사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너무나도 있는 것, 없는 것에 짓눌려 살며 차별화 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교만하고, 그것 때문에 비굴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소유권이 하나님에게 있고,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것이 사용되는 존재론적인
삶, 그런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시 하나를 소개 하고 끝마칠까 합니다.
제 아내가 쓴 편지 중에 있는 글입니다. 어디서 퍼온 글 같습니다.

1. 세상에서 내가 가장 많이 생각했던 열 글자. ▷항상 내 곁에 있어 줬으면
2. 세상에서 내가 가장 많이 바랬던 아홉 글자. ▷너와 하나 될 수 있다면
3. 세상 모든 것이 달라진다 해도 달라지지 않는 여덟글자 ▷항상 너를 향한 마음
4.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생겼을 때 해 줄 일곱 글자 ▷항상 널 지켜줄게
5. 세상의 모든 것 중 가장 아름다운 여섯 글자 ▷너의 밝은 미소
6. 세상의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다섯 글자 ▷너를 위해서
7. 세상에서 나를 가장 기쁘게 하는 네 글자 ▷너의 사랑
8. 세상에서 너에게만 들려줄 세 글자 ▷사랑해
9. 세상 끝날 때까지 우리에게 없을 두 글자 ▷ 이별
10.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한 글자 ▷ 너

너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이 한주간도 주님의 은혜 받은 자로 이 세상에서 너를 위해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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