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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상이 싫어진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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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싫어진 사람


  오늘 말씀 첫머리에 보면 "엿새 후에" 라고 하는 시간적 표현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 말은 지난주일 설교 말씀 드린 그 일이 있은 지 엿새 후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난 16장에서 일어난 일주일만에 일어난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세 사람만을 데리고 가신 기록이 성경에 세 번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그 중에 하나이고 또, 겟세마네에서 밤새워 기도하시던 현장에도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가셨고 또,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그를 살리기 위해서 그 시체가 있는 방에 들어가실 때에도 오늘의 세 제자만 데리고 들어가신 기록이 분명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마 그럴 때마다 다른 제자들이 조금은 불평을 하였을지도 모릅니다.  또, 우리가 볼 때 상식적으로 예수님도 편애를 하시나 그런 생각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산을 올라가는 제자들의 마음은 매우 무겁습니다. 왜 우리들을 데리고 또 산을 가시는 것인지, 또 엿새 전에 나는 고난을 당하고 죽을 것이라는 선언을 하신 그 이후라서 오늘은 또 무슨 말씀을 하시고 무슨 일이 생길는지 이 제자들은 매우 불안한 심정으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베드로는 더욱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일주일 전에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사탄 소리를 들은 상태라서 또 말을 잘못했다가는 더 큰 책망을 받을 것 같기도 하고 영문을 모른 채 시키는 대로 하고있을 뿐입니다.

  오늘 말씀의 내용을 보면 성경에 나타난 여러 가지 신비적 사건 중에 하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과학적 사고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기록에 속합니다. 그 내용을 몇 가지로 분석을 해보면 예수님의 얼굴이 별안간 변형을 이루었는데 얼굴이 해같이 광채가 났다고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 얼마나 달라졌고 얼마나 밝게 보였으면 해같이 되었다고 표현했겠습니까? 그 다음에, 얼굴뿐만이 아니고 예수님이 입고계신 옷도 빛이 나는데 "아주 희어졌더라". 다른 복음서에 보면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희어졌다", "최고의 빛나는 흰 색깔이 되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그 자리에 모세와 엘리야가 거기 와서 예수와 더불어 이야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때를 기준으로 해서 모세가 죽은지는 1,400년이 지났고 엘리야가 승천한지도 850년이 지났는데, 죽어 하늘나라에 간 사람들, 승천한 사람이 제자들의 육안으로 분명히 알아볼 수 있게 나타났다고 하는 것이 신비의 사건이 됩니다. 또,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그랬습니다. 구름까지도 빛이 달라졌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황홀한 신비적 사건인지 우리가 상상을 할 수가 있습니다. 또,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 분명히 자기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그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의 기록을 가르쳐 "산상의 변모"라 "변화산상사건"이라는 제목을 붙여서 설명을 합니다.

  우선 이 예수님의 사역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은 산(山)이고 또, 성경
전체에 하나님의 역사는 이 산에서 이루어진 고산지대의 신 개념을 성경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인류는 에덴 동산에서 처음 시작이 되었다고 성경에 처음에 산과 인류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노아를 통한 하나님의 심판의 역사 때에는 방주 건축의 장소가 아라랏산이라고 하는 그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에서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집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던 그 장소도 모리아산이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곳도 시내산이요, 엘리야가 비의 불을 내린 곳도 갈멜산이요, 이스라엘 왕국 기초는 시온산이라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 유명한 8복 설교를 하신 곳도 산이라 했고, 밤새 철야기도를 하신 곳도 겟세마네 동산이라 했습니다. 마지막 돌아가신 곳은 갈보리 산이라고 했습니다. 승천하신 곳도 산에서 이루어졌고 오늘도 이 말씀은 높은 산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숨결을 찾으러 갈 때 산
을 찾아갔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람은 거의 산으로 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고산지대의 신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중세기의 수도원이라든가 기도원 같은 것이 모두 산에 마련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자연을 만드시고 인간은 도시를 만들었다고 누가 그랬는데 확실한 것은 영혼의 새로움은 도시보다 자연 속에서 맑아짐을 우리가 느끼고 있습니다. 산은 거짓이 없고 거룩하며 신성이 있고 생명력이 있고 하나님의 숨결이 있습니다. 산을 찾아가는 의미는 어느 면에서 세속을 잊어버리려는 노력입니다. 가능하면 산을 가는 것은 건강에도, 영적 신앙생활에도 도움이 된다고 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이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 가셨는가? 이 문제는 그렇게 어렵게 생각이 안됩니다. 쉽게 짐작이 갑니다. 바로 오늘 일어난 이 사건을 보여주기 위해서 가신 겁니다. 신비의 체험을 한번 주기 위해서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앞으로 해야 할 자신들의 사명이 확실해지고 로마를 때려부수고 유대인의 왕이 되어서 권세를 부릴 것으로 기대하는 제자들에게 예수의 사명이 무엇이며 제자들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확인시켜주는 예수님의 영적 작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난주 이 시간에 베드로를 보고 사탄이라고 그랬습니다. 이럴 때는 또 수련회를 통해서 베드로의 마음을 용기를 주어서 새롭게 변화시켜야 되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세 사람을 데리고 산에 오르신 것입니다.

  여기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유대인들은 즉,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그들이 살아가는 가장 큰 힘을 두 가지에서 찾습니다. 하나는 율법이요, 하나는 선지자입니다. 그들은 국가적인 헌법도 따로 없습니다. 율법이 헌법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법이라고 생각해서 "다른 법이 뭐가 필요하냐? 이것 가지고 살자!" 그래서 율법이 곧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작용까지 일어나게 된 것이 율법주의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율법이 어떻게 그들에게 주어졌느냐? 그들은 철저하게 믿고 있는 것,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주는 율법을 주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말을 모세 율법이라고 쓰는 것입니다. 모세가 누구인가? 확실히 그는 율법의 대표자입니다. 율법 앞에 그들은 순종합니다.

  그 다음에는 하늘의 음성을 들려주는 선지자가 없으면 살수가 없는 것
이 히브리 민족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르치는 음성! 어느 날 광야에서 외치는 선지자의 음성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세례 요한이 나타나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그에게 나아가서 그 설교를 듣고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선지자의 소리가 없으면 살수 없는 민족! 없으면 못살고 선지자가 회개하라고 마음을 찌르면 핍박하는 관계! 이것이 선지자인데 선지자 중에 대표적 인물이 히브리 민족에게는 엘리야입니다. 에녹과 엘리야는 인간 중에 유일하게 죽음을 피하여 살아있는 육체로 승천한 선지자로 성경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도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의 해석은 유대인들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이 구원관이
란 선지자들을 통한 율법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맨 나중을 보면 모세와 엘리야는 간 곳이 없고 오직 예수만 있습니다. 선지자들과 율법이 목적한 초점은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성을 밝혀주는 것입니다. 5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예수의 메시아성을 확실하게 해줍니다. 제자들은 1,500년 전의 모세와 850년 전의 전설 같이만 들어오던 모세와 엘리야를 직접 보고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왜 그들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예수만 그 진리에 남고 하늘에서 예수를 향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예수의 메시아성을 확실하게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신비한 영적 사건은 제자들에게 또 다른 문제를 불러오게 되었습니다. 그 문제가 바로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라고 하는 새로운 문제의 등장입니다. 이 말은 간단히 해석될 수 있습니다. 지금 베드로는 세상이 싫어졌습니다. 사람이 없는 이 산 위에서 이렇게 예수님과 함께 신비적 황홀감을 가지고 이대로 살다가 이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그냥 간다면 그것이 얼마나 좋은 일이 되겠느냐? 그는 그렇게 순간적으로 판단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산밑으로 내려갈 때는 예수님은 이미 나는 그들에게 잡혀서 죽을 것이라고 예언을 했습니다. 그러면 자기들은 어떻게 해요? 자기들도 죽을 것이 분명하고 자들에게 나타나는 고난의 역사가 무엇인지를 짐작하게 됩니다. 아무 보장된 생활 대책이 없는 제자들의 공동체! 날마다 고난스럽게 예수님 주위에는 몇 여인들의 헌신적 노력으로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또, 나라의 최고의 권력 실세들이 자기들만 보면 날마다 못살게 구는 괴로운 현실에다가, 뛰쳐나온 집을 찾아가는 길도 자존심이 허락하지를 않아요. 이렇게 계산을 맞추어봐도 싫고, 저렇게 머리를 써봐도 도저히 계산이 안나와요. 귀찮은 일만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도피의 유일한 기회가 오늘 생겼다는 겁니다. "예수여! 잘됐습니다. 제발 여기다 초막이라도 짓고 여기서 살다가 이대로 여기서 죽읍시다."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세상이 귀찮아 진 거예요.
  지금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 자신들도 그런 생각을 얼마든지 할 수가 있습니다. 교회 밖의 세상을 나가면 항상 즐거운 약속이 있는 성도들도 많이 있겠지만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전 밖 세상에 가면 항상 괴로운 일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매우 불행한 자리에서 현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교우들의 고난의 현장을 우리 목회자들은 항상 심방하고 상담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녀들의 말할 수 없는 신체적 고통을 끝까지 지켜보는 그런 부모들도 우리 중에는 허다히 많고, 그렇게 건강한 삶을 사회적으로 훌륭히 계획했는데 어떤 날 불의의 사고로 신체적 불균형을 만나서 신체 장애인이라고 하는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형제도 우리 중에는 너무나 많고, 어떤 어머니는 자기의 두 아이를 데리고 고층 건물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심한 충동의 믿기 어려운 자기 마음의 무서운 갈등도 상담하기도 하고, 젊음의 아름다운 꿈의 실현을 위해 노력한 것이 오히려 그것이 법적 문제가 되어서 쇠고랑이라고 하는 무서움으로 다가오는 형제도 우리는 지금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 형제들이 오늘 이 변화산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 무슨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 여기 밖에 좋은 곳이 없습니다. 제발 여기 있게 해주세요. 세상은 나가기 싫어졌습니다. 이대로 예배나 드리고 여기서 찬송하고 성도끼리 교제하고 여기서만 있게 해주세요." 그런 것이 우리들의 소원이 됩니다. 그러면 그러한 고통의 자녀들을 보시고 예수님은 어떤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아마 이렇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자. 그렇게 하는 것이 너와 나의 목표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세계는 그러한 영광의 세계이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은 우리가 고난을 당해야할 사명이 있다. 나는 골고다로 가서 십자가를 져야 하고 너희들도 각자 너희들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할 길이 있다. 지금은 너와 내가 해야될 일이 십자가이다."

  바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넘어지는 걸림돌이 황홀경에만 머물고 싶은 그 자리입니다. 오늘 말씀 9절을 보면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라고했습니다. 내려가지 말자고 했잖아요? 여기서 살자고 말하는 제자들을 설득해서 마을로 데리고 내려오신 것입니다. 왜 내려옵니까? 지금은 너와 내가 해야할 십자가 사명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내려오자마자 제일 먼저 하신 일이 귀신들린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일입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이것 봐라. 우리를 기다리는 인간 고난에 참여하는 이런 구원의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않느냐? 우리는 내려가야 한다. 이 산에서만 살 수 없다."

  저는 불교 지도자들하고 이야기를 할 때 그분들의 자성의 소리를 기억합니다. "우리 한국 불교가 실패한 것은 민중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갔기 때문이오. 민중 곁으로 오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이렇게 성공한 것은 기독교는 민중 속으로 파고들었습니다. 민중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불교 지도자한테 들은 소리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세상 속으로 오신 것입니다. 골치 아픈 고난이 많은 세상 속으로 오셔서 인간의 모든 아픔을 부둥켜안고 몸부림치면서 피땀을 흘려 자기 몸을 번제 양으로 던져 버릴 때 거기서 이루어진 구원의 열매, 그것이 곧 십자가요 구원의 진리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내려가야 할 때다! 장차는 이 산과 같은 신비 속에서 우리는 영생하며 살게 될 것이다." 

  우리들은 가끔 산 위에 올라가서 영적 신비를 체험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 체험은 그 체험 속에 머물러 있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으로 내려오라는 것이요 군중 속으로 들어가서 구체적으로 민중 속에서 나의 사명의 고난을 십자가로 수행하라고 하는 사명감을 고취시켜 주기 위해서 영적 신비의 세계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가끔 수양회를 합니다. 그때는 뭐, 경치 좋은 산이나 물이 있는 곳에 시설이 좋은 수양관을 빌려서 갑니다. 노래를 부르고 기도하고 예배를 통해 말씀으로 무장하고 또, 마음 통하는 사람들끼리 날마다 우리 그렇게 산에서 즐겁게 살 수만 있으면 좋을 것 같은 생각도 합니다. 수양회 목적이 뭐예요? 마을로 내려오기 위한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 내려가서 십자가 고난을 더 훌륭하게 지기 위한 수단으로서 수양의 산을 오르는 것입니다.

  세계 제2차 대전 중에 유럽에서 전쟁터에 한 소녀가 아버지를 잃어버렸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살아갑니다. 그는 잿더미가 된 전쟁의 폐허 위에서 굶주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식량을 구하기 위해 그 사회에서 가장 처참한 자리에서 헤매고 결국은 굶어죽기 직전까지 갔습니다. 그럴 때 세계 아동구호 재단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고 식량을 얻어서 그가 살아났습니다. 그 소녀는 그때 이렇게 결심을 합니다. '만약 내가 여기서 살아남는다면 이후에 나는 나의 일평생을 오늘의 나와 같은 어린이 구호를 위해서 노력하겠다.' 마침내 전쟁은 끝이 나고 그 소녀는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과거의 그 고통을 잊지 아니하고 피나는 노력을 해서 와신상담(臥薪嘗膽) 마침내 그는 세계가 바라보는 유명인이 됩니다. 부와 명예를 한 몸에 지니고 온 세계인이 바라보는 정상의 산에 아주 우뚝하게 섰습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내가 이 정상의 산에, 신비적 황홀의 세계에 서 있는 것은 내려가기 위한 것이다. 어디로 내려갈 것인가가 문제이다. 2차 대전 중에 나는 굶어죽을 뻔한 어린이였으니까 그때 결심한 것 지금 내가 해야겠다!" 그는 유니세프라고 하는 아동구호단체를 위해서 자원봉사자로 나서서 혼신의 힘을 다해서 노력하고 살아가고 "나는 이 일을 위해서 세상에 왔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화배우 오드리 햅번입니다.

  이 싫어진 세상을 내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진 삶의 책임이 있다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삶 자체가 사명의 완수입니다. 예수와 바울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깃들일 곳이 있지 아니하냐?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는데 네가 나를 따라오겠느냐?" 바울 선생은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헐벗고 굶주렸다." 라고 했습니다. 왜 사는가? 삶 자체가 사명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큰 일은 하지 못했어도 내게 주어지는 나의 삶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살았다면 그것이 그 사람의 사명의 완수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아니다. 그러나 후에는 네가 원하는 대로 될 것이다." 만약에 우리 중에 어떤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하다가 죽은 학생이 있다면 그는 자기 사명의 완수자가 된 사람입니다. 불을 끄다가 죽은 소방관이 있다면 그는 훌륭한 삶의 마침표를 찍은 것입니다. 누구든지 황홀의 산에 있고 싶어합니다. "지금은 아니다. 너희들의 사명이 남아있다."

  이 황홀을 체험하고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산에서 내려오므로 그들
을 기다리고 있는 사명의 완수가 이루어지게 되지 않았습니까? 베드로는 이 땅에 교회를 세운 기초자가 됩니다. 야고보는 이 땅에 주님을 위해서 피를 흘리는, 최초의 순교자의 피를 흘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한은 장래 일을 예언하는 요한계시록을 썼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위해서 그들을 황홀의 신비 산으로 초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여기가 좋잖아요? 우리 내려가지 말고 여기서 살아요. 나는 세상이 싫어졌어요. 우리를 기다리는 아무 좋은 계획도 없습니다. 여기서 살게 해주세요." "아니다! 마을로 내려가자! 죽으러 가자! 지금은 우리가 이 길을 가야한다. 장차 주어지는 하늘 나라를 생각하며 오늘은 괴롭지만 저 골고다를 향해서 길을 떠나자." 주님이 우리에게 물려주신 유일한 유산! 그것은 십자가입니다. 살기 싫은 세상이지만 그 십자가를 지고 이 한 주간도 사순절로서 믿음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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