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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안주의 땅에서 모험의 땅으로 / 히 11: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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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의 땅에서 모험의 땅으로
히브리서 11:28-29

  2000년 7월 여러분은 뉴스에서 한 사건을 들으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공부를 마치고 오빠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던 한 여대생이 음주 운전자에 의해 일어난 6중 추돌 사고로 55%의 3도 화상을 입고 병원에 실려 간 사건입니다. 불이 붙어서 타고 있는 동생을 꺼낸 오빠는 엠블란스 안에서 이내 동생을 살려낸 자신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고, 동생과 작별인사를 해야만 할 줄로 알았습니다. 병원에 도착했지만 병원에서 조차 받아주지 않을 만큼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번 코스타 집회에 가서 그 사건의 주인공인 이지선 자매를 만났습니다. 화면을 보시면 이지선 자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졸업앨범사진과 수술 후의 모습입니다. 제가 만나보니까 피부이식을 잘못해서 땀을 흘리는 부분이 목 부분밖에 없었습니다. 옛날 모습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일그러진 인생이라 할지라도 그 얼굴에서 나오는 맑고 투명한 모습,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음성과 마음은 모든 사람의 가슴을 울렸습니다. 불쌍해서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그 하나님, 그 인생으로 하여금 찬양하게 하시고, 그로 하여금 복된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드신 그 하나님을 찬양하는 눈물이었습니다. 자매의 간증 속에서 알 수 있었던 그가 살아가는 존재의 이유는 바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흔히 우리가 그냥 주일날 교회에 왔다가 예배만 드리고 가고, 일반 종교생활을 하듯 대강 믿는 그런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이지선 자매에게 믿음은 자신이 살아야 하는 이유, 생존의 근거였습니다. 인생을 살아갈 이유가 없었습니다. 힘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쁘고 꿈도 많았던 여대생은 5분도 채 안되던 순간의 사건으로 운명이 바뀌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비극과 고통을 극복하는 사람으로만 기억되고 있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고, 왜 살아야 되는지 인생을 포기한 사람들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보여주는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세의 믿음도 추상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취미생활, 믿어도 좋고 안 믿어도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소유하고 있었던 믿음의 선택과 결단에는 죽음과 삶의 교차점이 있었습니다. 그의 믿음 속에는 세상 부와 귀, 고통과 핍박과 좌절이 양분되어서 그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모세의 믿음은 개인뿐 아니라 민족의 운명을 바꾸었고, 개인의 한계를 벗어나 구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며, 우리로 하여금 이 땅을 살아가면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지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노예로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애굽 땅을 떠날 때 그가 보여준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을까요? 진정한 자유와 구원을 이루어 내었던 모세, 그것은 어쩌면 죄로부터 자유와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는 오늘날 우리가 되돌아 보아야할 믿음이 아닐까요? 모세로 하여금 모세 되게 하고 구원을 이루게 했던 믿음, 그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첫째 성경에서는 모세의 믿음을 견고한 믿음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본문 27절을 보면 모세가 애굽을 떠날 때에 믿음으로 떠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떠나’라고 번역된 ‘카텔리펜’이란 단어는 ‘카탈레이포’의 부정과거로서 과거의 단호하고 분명한 행동을 나타낼 때 사용한 단어입니다. 구약 헬라어 번역 성경 70인 역에서 300회 이상 사용되었는데 주로 ‘남은 채로 놓아두다’, ‘돌보지 않다’ 등 한번 정한 것 외에는 돌아보지 않는, 견고한 믿음을 표현합니다.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모세가 출애굽할 때에 주위의 수많은 유혹과 흔들림 속에서도 타협하지 않고 말씀과 그 약속을 굳건하게 지켰기 때문에 세워진 믿음이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약속하신 그 말씀을 가감하지 않고 약속대로 믿고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약속하신 말씀은 무엇이었을까요? 출애굽기 3장 10-12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애굽 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게 할지라 너희가 갈 때에 빈손으로 가지 아니하리니 여인마다 그 이웃사람과 및 자기 집에 우거하는 자에게 은 패물과 금패물과 의복을 구하여 너희 자녀를 꾸미라 너희가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리라(출 3:21-22)” 계속해서 출애굽기 6장 8절,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다 하라”,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온전히 구원하여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기업이 되게 하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약속의 말씀을 가지고 모세는 바로 앞에 섰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자유하게 하셔서 광야에서 예배하게 하실테니, 이제 자신과 함께 떠나게 하라했습니다. 바로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랍니다. ‘무슨 소리냐 너는 어디서 왔느냐? 한번만 그런 소리를 하면 다시는 너를 가만두지 않으리라.’ 그리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 크고 어려운 일을 맡겨서 불평과 불만이 가득 차게 합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열 가지 재앙이 시작됩니다. 열 가지 재앙 중 4번째 파리 떼 재앙이 왔을 때에 바로는 항복합니다. 출애굽기 8장 28절을 보면 “바로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희생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기도하라” 요청합니다. 당시 신문이 있었다면 이렇게 기사가 났을 것입니다. ‘바로 사실상 항복하다’ 왕이 이만큼 타협했습니다. 430년 동안 노예처럼 편리하게 부리던 이 백성을 내보내겠다고 자신의 입으로 말했을 때는 스스로 얼마나 못 견뎠을까요? 어둠의 영이 우리를 내보낼 때도 이와 같이 완악합니다. 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지요. 자기 노예로 사용하다가 그랬으니까요. 여기서 바로가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나를 위해서 기도하라.’였습니다.

애굽은 성경에서 가끔 사탄의 상징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확실한 사탄의 음성은 무엇입니까? ‘예배도 드려! 교회생활도 하고 헌금도 하고 모임도 하고 다해! 그러나 너무 깊게 들어가지는 마. 교회는 알면 알수록 상처받아. 살짝 들어가서 예배만 드리는 거야. 그건 광신자들이나 하는 것이야. 중보기도 세미나 왜 들어? 새가족반은 왜 들어? 주일날 예배만 드리고 맘 편하면 되지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니?’ 우리는 스스로 그런 판단의 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이런 속삭임을 듣습니다. 불가피하게 모이게 되면 나를 찬양하라는 소리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안에서 주님 주신 구원의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탄의 음성에 속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많은 분들이 예배만 드리고 갑니다. 모임에 깊게 들어오려고 하지 않고 밖에서 구경만 하고 갑니다. 예배드리고 은혜만 받고 돌아갑니다. 그리고 모임에서도 보면 재밌게 합니다. 찬양도 하고 기도도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자기 속에 있는 욕망과 경험이 주인이 되고 영광이 되어 있어, 알게 모르게 사탄의 영광을 찬양하고 이롭게 하는 것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모임 중에 별로 없습니다. 주님 이름으로 모였는데, 그 모임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예배의 현장에서도 그러합니다. 예배를 드릴 때, 정말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옵소서’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듣기 좋고, 재미있고, 내 생각과 맞으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계획할 때도 모여서 많이 의논하지만 하나님 뜻은 없습니다. 자신의 경험과 세상에서 자신의 지위와 고집이 나타나고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탄이 우리에게 나타날 때에 흰 옷을 입고 머리는 산발을 하고 케찹을 바르고 칼을 물고 ‘나는 귀신이다’라고 나타나면 좋죠. 그러나 귀신은 그렇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지성을 이용합니다. 우리의 감성을 이용하고 우리 의지 속에 들어와 교묘하게 속삭이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도록 유혹하는 일이 많습니다. 거기에 많은 그리스도인이 속고 있습니다. 그 말이 사실인줄 알고 아직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 신앙은 온전한 신앙이 아닙니다. 견고한 믿음이 아닙니다. 흔들리는 믿음이며, 왜곡된 믿음입니다. 모세는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왕이 이만큼 항복했구나. 좋습니다. 일단 나가게 해주십시오. 첫술에 배부르랴.’ 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는 내 백성과 우양과 염소새끼 한 마리도 남김없이 다 데리고 가야합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 모세에게 바로는 ‘무슨 소리냐 내 앞에서 나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재앙이 계속됩니다. 바로는 꼼짝도 하지 않다가 다시 8번째 재앙인 메뚜기떼 재앙 앞에서 항복합니다. 출애굽기 10장 9-11절까지의 이야기입니다. 가긴 가되 어린 것들은 남겨두라는 것입니다. 어른들만 가라는 것입니다. 바로는 이들을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계속해서 타협합니다. 여러분 사탄은 오늘 우리에게 다가와서 ‘그래, 어른들은 너희들 마음대로 해라. 예배를 드리던 찬양을 하던 너희 맘대로 해라. 그러나 어린 것들은 그렇게 하지 말게 하라. 저 아이들 공부해서 대학가야 하지 않니, 건드려 봐야 시끄럽다고 그러잖아. 저 아이들에게는 나름의 인생이 있는 거야. 이야기 해봐야 신앙이 먹혀 들어갈 리가 없어. 우선 대학가게 내버려 두고, 철이 들고 자기 인생을 살 때 필요하면 하나님이 저들의 인생을 지켜주실거야.’하며 포기하게 만듭니다. 청소년과 청년들을 포기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우리의 미래는 없는 것입니다.

공석에서 자세히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중국에서 사역하는 어느 자매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중국 공산당이 어른에게 전도하는 것은 어느 정도 받아준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전도하는 것은 엄하게 다스린다고 합니다. 자신들의 미래인 아이들을 잘못 가르치면 공산당의 미래가 없어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우리의 미래입니다. 저들에게도 분명한 하나님의 구원을 가르쳐야 합니다.

저의 경우는 청년과 청소년들을 가르쳐 보면 재미가 있습니다. 왜 재미가 있냐하면, 그들은 말씀을 듣고 감동이 오면 헌신하고 결단합니다. 자신을 드립니다. 다른 것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헌신하여 좋은 직장 그만두고 선교사로 떠나기도 합니다. 직장에서 선교사로 하나님을 위해 살겠노라고 하는 그 결단이 청년들에게서는 이루어집니다. 그에 반해 어른들은 어떤지 아세요? 감동을 받았어요. 눈물을 흘렸어요. 그러나 바로 현실을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다간 집안 들어먹게 생겼어. 안돼!’ 타협을 하기 때문에 어른들은 변화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제자훈련의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55세가 넘으면 훈련생으로 받지 말라고 하는 원칙입니다. 이것은 제 얘기가 아닙니다. 변화가 되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특별한 역사 없이는 힘듭니다. 그만큼 우리 경험과 경륜, 지식이 단단해 졌다는 뜻입니다. 청년들은 이렇듯 변화되면 헌신과 결단을 하게 되는데, 한 가지 문제는 청소년들과 청년들이 한번 받아들인 것에 대해서는 좀처럼 바꾸기 힘들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이 포기하면 세상이 그들을 점령합니다. 요즘 백화점도 마케팅 전략을 어른들에게 맞추지 않습니다. 10대 20대 중심으로 판매 전략을 맞춥니다. 모든 세상의 것들도 청소년들을 공략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잘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늦춘다면 우리 미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청년들과 우리의 청소년들을 포기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러기에 교사들의 존재는 매우 중요합니다. 복음의 중요한 본질을 가르칠 수 있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분명하게 가르칠 수 있는 그런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사는 더 많이 훈련되어야 합니다. 더 많이 구원의 확신 속에 젖어들어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의 미래를 타협하고자 계속해서 다가오고 있습니다. 모세는 역시 타협하지 않습니다. 이만큼 하면 됐지, 일국의 왕이 저 정도로 양보해 오면 돼지라고 타협하지 않습니다. 우양 한 마리도 남겨두고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바로는 모세를 다시 돌려보냅니다.

드디어 9번째 재앙이 왔을 때 다시 모세를 부릅니다. 그리고는 항복합니다. ‘데리고 나가라. 그러나 너희 양과 염소는 가지고 나가지 마라.’ 합니다. 바로는 다시금 타협점으로 물질에 관한 영역을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물질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 물질로 헌신하지 않고, 물질로 드리지 않는 사람 치고 신앙 좋은 사람이 없습니다. 제가 짧게 목회를 했고, 제 신앙의 선배들도 동일하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물질의 진정한 헌신이 없이는 신앙이 온전하다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어떤 침례교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침례를 하는데, 어떤 성도분이 들어오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들어오라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분이 말하기를 ‘목사님 제 지갑을 어디다 두어야 하지요?’, 목사님은 ‘아니요, 지갑까지 같이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들어오십시오!’했답니다. 어떤 신학자는 돈지갑의 회심이 없이는 진정한 회심은 없다고 말합니다. 통계적으로 신앙인들이 가장 많이 생각하는 시간이 언제냐고 할 때, 헌금하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얼마를 할까, 뺄까 넣을까, 좀더 넣을까……. 그만큼 물질이 소중합니다. 사탄은 철저하게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물질적인 영역은 타협하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믿음을 온전한 믿음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견고한 믿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인내하는 믿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확실한 말씀, 주님의 백성으로 받은 사명이 있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백성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그 사명에서 타협하지 않고 분명하게 서서 사탄의 유혹 앞에 귀 기울이지 않고 주 말씀에 또다시 결단하며 세워나가는 믿음, 그것이 바로 출애굽 할 때 구원을 위하여 보여준 모세의 믿음이었습니다. 모세의 믿음이 어떤 믿음이었다고요? 견고한 믿음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모세의 믿음은 어떠한 믿음이었습니까?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믿음은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모세의 생애를 보면 두려움이 그 마음속에 가득차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애굽 사람을 때려죽인 후에, 발각돼서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미디안 광야로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모세는 예전에 사건으로 무서워했던 바로 왕의 분노를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젠 두려워하는 대상이 바뀌었습니다. 누구입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했습니다. 이것을 거룩한 두려움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창조적인 두려움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내가 정말로 무서워할 대상이 누구인가를 깨달은 것입니다.

아더 핑크 목사는 모세가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극복하게 된 것이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둘째는 사람들 중에 가장 큰 사람인 왕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셋째는 무엇보다도 왕의 분노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잠언 19장 12절을 보면 왕의 노함은 사자의 부르짖음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두려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보편적인 감정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두려움 때문에 일을 못합니다. 정말 두려워해야할 대상이 누구일까요? 우리의 영혼을 움직이고 우리 인생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주인 되신 그 분을 두려워해야 되지 않을까요? 모세는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 전에는 바로가, 권력이, 지식이, 돈이, 자기에게 영향을 주고 자기의 운명을 바꿀 것이라 생각해서 두려워했는데 참 믿음을 발견하고 나니까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방백들과 사람들을 의지하지 말라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니라’ 모세는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지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그는 바로 앞에 나아가게 됩니다. 바로는 군대가 있었습니다. 지켜주는 조직이 있었지만, 모세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변명해줄 무엇도 없었습니다. 그에게 있는 것은 역사를 주관하신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는 믿음밖에는 없었습니다. 아더핑크 목사님은 모세가 이런 분명한 믿음을 갖기 위해서 분명한 두 가지 사실을 알고 있어야 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어디에나 존재하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는 신학적인 신앙고백이며, 또 하나는 하나님은 오늘도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나와함께 동행하신다는 확신입니다. 모세는 그 확신이 있었기에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성경대로 표현하면 모세는 보이는 자보다는 보이진 않지만 하나님을 보이는 것처럼 믿었다고 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하나님이 보입니까? 안보이죠? 그러나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보면 우리의 신앙 속에 그리고 이 자리에 임재해 계십니다. 내 기도를 들으십니다. 이것이 믿음의 눈입니다. 우리는 오늘 두려워하지 말아야할 환경과 내 자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일을 못합니다. 맥아더 목사님은 사단이 우리로 하여금 주의 일을 하지 못하게 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이 두려움이라고 했습니다. 두려움은 우리에게 압박을 주면서 주님의 일을 할 때 뒤로 물러서게 합니다. 허무하고 위험한 일로 만들며 쓸데없는 일처럼 만듭니다. 또 두려움은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게 만들 뿐 아니라, 하지 못하는 이유와 변명을 많이 만들고 자기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 일을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153전도 운동에 대해서도 굉장히 많은 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말 속에 두려움이 있습니다. 믿음은 두려워해야 될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12명의 정탐꾼중 10명은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정말 두려워해야할 대상은 두려워하지 않은 채 그곳의 아낙자손을 두려워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모세에게 주어진 이 모든 일들 속에 그가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다시 한번 반복해서 말씀드리면, 보이지 않는 자를 보이는 것처럼 믿었던 것입니다. 출애굽기 14장 13절을 보면 모세가 출애굽하고 난 다음에 바로의 군대가 뒤따라옵니다. 앞에는 홍해입니다. 방법이 없었습니다. 사람은 방법이 없을 때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원망합니다. 그럴 때 모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잠잠히 기다리라.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시는지를 보라’라고. 그 백성들에게 평안 가운데서 말했습니다. 앞은 막혀있고, 뒤는 적이 쳐들어오는 상황에서 현실만을 볼 수밖에 없는 우리 육신의 눈 위에 모세는 보이지 않는 자 하나님이 지금 이 자리에 함께 계시고, 우리를 인도하시고, 지켜주신다는 것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주셨습니다.

아람군대가 엘리사를 치기 위해서 그의 집을 둘러쌌습니다.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들어와서 펄쩍 뛰면서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기도하면서 게하시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그가 영안을 떠보니까 엘리사 주위에 하나님의 군대가 더 많이 지키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눈입니다. 혹시 여러분 속에 두려움이 있습니까? 정말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사람이, 상사가, 물질이, 여러분을 두렵게 합니까? 이 세상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 신실하게 우리를 일으켜 주시는 그 하나님이야말로 우리가 정말 무시하지 못할, 두려워할 존재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 믿음에 대해서 정의하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여러분 오늘 내 삶이 하나님을 보는 것같이 살아갈 때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모세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구원의 길을 순종하면서 받아들인 믿음입니다. 본문 28절을 보면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뿌리는 예를 하나님께서 정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겠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니까 9번이나 했는데도 먹혀들어가질 않습니다. 뭔가 변화는 있는 것 같은데, 바로의 마음이 꿈쩍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쓰신 마지막 방법은 이스라엘이나 애굽이나 사람이나 짐승이나 맨 처음 태어난 것은 하나님이 죽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구원의 길을 열어놓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면, 양을 잡아다가 그 피를 문의 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바른 집은 죽음의 신이 지나갈 때에 그냥 지나가겠다고 하셨습니다. 유월하겠다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구원의 길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신학자가 말하기를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설득하는데는 보통 이상의 신념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따르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모세의 일이 시원스럽게, 순종할 만큼 진행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양을 잡아서 문설주에 바른다고 죽을 사람이 안 죽는다는 것은 이성적으로는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모세는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모세는 우리보다 똑똑한 사람입니다. 피라미드를 만든 문화라면 당시 수학과 철학은 엄청나게 발전되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현대철학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범주를 넘지 못합니다. 그 시대의 물리학과 수학과 철학 등 훈련을 받은 사람이 모세입니다. 이성과 지성이 뛰어난 그 사람에게 주어진 구원의 방법은 싸움이나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차라리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라고 하면 좀 말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아니고 양을 잡아 그 피를 발라야만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오늘날에야 어린양 피에 대한 개념이 있기 때문에 이해가 될지 모르겠지만, 당시 사람들은 인식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모세의 말을 믿을 수가 없는 상황에서 어려운 일들은 전개 되었습니다.

모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3가지로 반응했을 것입니다. 첫째는 양의 피를 잡아서 죽을 사람이 산다면 수천마리를 잡아다가 집집마다 다 바르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교회 나와서 복 받는다면 교회 나오지 말라고 해도 밤낮 교회에서 살겠다고 하시는 분을 보았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안 될 말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양을 잡으라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사람들 보는데 문에다 칠해야 하느냐고 했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아버지에게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아버지는 아이에게 하나님이 바른다고 구원해주고 안 바른다고 구원하지 않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우리가 어떻게 해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설명했을지 모릅니다. 어떤 가정에서는 미련해 보이지만 시키는 대로 문설주에 다 발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날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피를 바르지 않은 집의 장남과 첫 것은 다 죽었습니다. 바로집의 것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 밤에 회개하고 철야하고 금식하고 기도하며 이 민족을 살려주시라며 외친 가정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또 말씀을 공부하면서 공동체를 위해 기도한 가정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나님은 그 피를 볼 때에 넘어가겠다고. 그 집에 양심이 있었건, 이성과 지성을 가지고 있었건, 상식과 미신을 구별하건 간에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방법은 양의피를 잡아 문설주에 바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넘어가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구원의 방법입니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잘 이해되지 않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내가 받을 저주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받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내 죄를 위해서 돌아가시고, 그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는 자에게만 구원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방법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지성을 가진 우리 사람들은 우선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구원의 방법이라면 그것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셔서 주님은 구원의 역사를 베풀어 주십니다. 이성으로 구원받을 것 같으면 똑똑한 사람은 다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피 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느니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천하 인간의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느니라. 그래도 선한 일을 좀 해야 하지 않나, 교회에서 봉사도 해야 하고 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으시다면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하지 마십시오. 차라리 구도자라고 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은 그 피의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인치 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입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이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이 옮겼느니라’ 믿을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다면 내 지성과 이성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해도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모세를 믿음의 영웅으로 귀하게 여기는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하신 구원사역의 위대한 길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양심으로, 열심히 섬김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부족하고 연약할지라도, 때론 그 안에서 싸움이 있을지라도, 말씀에 순종해서 피를 발라놓은 그 가정은 유월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입술과 가슴에 살아계신 주님께 대한 고백, 나의 죄를 위해서 보배로운 피를 흘려주시고 구원받은 백성으로 삼아주셨다는 고백을 보시고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이것은 직분과 연륜에 관계없습니다. 누구든지 이 사실을 믿는 자들에게 구원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어떤 믿음을 보여주었습니까? 견고하고 흔들림 없는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정말 두려워해야 할 자가 누구인지 아는 믿음이었습니다. 바로 왕이 두려운 존재가 아닙니다.

얼마 전 제 생활을 가장 잘 아는 집사람이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거절을 잘 못합니다. 누가 저를 찾아와서 부탁을 하면, 약속을 매번 잡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한 주간 집에서 거의 한 끼 내지는 두 끼 밖에 먹지를 못합니다. 건강관리도 잘 못하게 되지요. 집사람이 가만히 보더니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은 사람들의 약속은 소중히 여기고, 사람들은 소중히 여기는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음성은 왜 그리 무시하세요? 하나님께서 교제하자, 만나자, 말씀하실 때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시간이 보다 소중하지 않을까요? 당신이 정말 하나님의 종이라면, 사람들의 약속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더 소중히 여기는 게 본질적인 일이 아닐까요? 사람들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을 내 삶 속에서 보이는 것처럼 고백하고 주님과의 약속을 오늘도 지켜가는 것이 본질적인 신앙의 모습이 아닐까요?’ 아내의 그 이야기는 제게 많은 도전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질문을 던져봅니다. 여러분 혹시 사탄의 음성에 순종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견고한 구원의 확신과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타협하고 서서히 사단의 음성 앞에 순종하며 여러분의 자녀를 방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모임과 만남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보다는 여러분의 지성과 물질과 가지고 있는 개성들이 드러나지는 않습니까?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나요? 사단의 장중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물질과 시간은 어떻습니까? 사단이 기뻐하는 쪽으로 쓰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 보시길 바랍니다. 무엇을 두려워합니까? 환경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환경을 주장하고 바꾸시는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시선으로 우리의 시선이 바뀌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의 구원의 은총을 생각해 봅시다. 예수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지 않으면 구원은 없습니다. 이제는 안전지대에서 머물지 마시고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그 믿음의 영역으로 들어가십시오.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사명을 타협하지 않고 믿음 위에 서서 지켜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 믿음이 있기에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던 이지선 자매의 시를 여러분에게 소개하면서 메시지를 마칩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등이 아파서 벽에 기대야했기 때문에
모두 앞으로 나와 예배드리는데도 저는 맨 뒷자리에 있었어요.
그러나 내 마음은 하나님제일 가까이
십자가 바로 밑에 엎드리고 있었답니다.

다들 찬양하는데 저는 입을 꾹 다물고 있습니다.
잇몸이 다 내려앉을 것 같이 당기는 턱 때문에
도저히 입을 벌려 찬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은 그 누구보다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게 전부라고 생각지 말아주세요.
너무나 못난 얼굴을 갖게 되었지만
예전처럼 예쁘게 화장도 못하지만
이 마음은 그 누구보다 예쁜 것을 좋아하는 스물네 살 여자입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쯧쯧쯧. 불쌍하다 하지 말아주세요.
누가 봐도 세상에서 제일 불쌍하고 불행할 것 같은 모습이지만
그 누구보다 마음이 행복한 천국에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외모가 아닌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는 하나님
나의 하나님
나는 그래서 하나님이 더 좋아요.

내 부족한 외모가 아닌
내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
나는 그래서 하나님이 참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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