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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합시다. / 마 5:43 -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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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마태복음 5장 43절 - 48절
제    목 : 사랑합시다.


'에모트 마사루'라는 일본 과학자가 쓴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을 보면

신비한 일이 증명되었습니다.


물에게 좋은 음악과 나쁜 음악을 들려주었습니다.
또한 각국의 말로 '사랑,감사'를 들려주고
'미워,바보'라는 말도 들려주었습니다.


좋은 음악과 좋은 말을 들은 물은
결정체가 아름다웠습니다만,
나쁜 음악과 나쁜 말을 들은 물은
그 결정체가 흉했습니다.

이제는 글을 써서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좋은 글과 나쁜 글이 었습니다.
여기에도 똑같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들을 수 없고 볼 수 없는 물이 이렇다면
듣고 보고 느끼는 사람이야 어떻겠습니까?

1) 현대

오늘날 보고 듣는것이 너무나 험합니다.
이것이 사람들을 흉하게 만들고
그 흉한 사람들의 문제와 고통이
또 다른 사람과 세상을, 고통 주고 흉하게
만든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도의 새계명은 "사랑하라" 입니다.

왜 '믿어라'가 아닌 '사랑하라'일까요?
여기에도 심오한 경륜이 담겨져 있는데
이 사람만이 사람을 치료하고 바꿀 수 있는
묘약인 만큼 일그려진 세상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사랑의 주파수

이 사랑에는 힘이 있습니다.
어느 분은 사랑의 진동이라고 하고
어느 분은 사랑의 주파수라고도 합니다.

한 예로, 좋은 분위기 속에 친구나 가족이
있는데 누군가 그 자리에 끼어 든다면
어색하고 심지어는 냉랭하기도 합니다.

반대로 어느 사람이 들어오면 분위기는
더욱 밝게도 됩니다.

이 차이가 무엇인가요?
이 분위기를 바꾸는 힘은 무엇인가요?
그 분위기에 끼어든 사람의 기운이고
힘아닙니까?
자연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그 좋은 사람이, 그 밝은 사람이,
그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오직 성도라고 가리키고 있으며,
그 구체적 사랑의 힘을,
고전 13장의 오래 참는것, 온유한 것,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않는것, 자랑하지 않고
교만 하지 않고 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왜 새 계명을 '서로 사랑하라.'로 주셨을까요?
왜 말세는 '사랑이 식어진' 시대일까요?

여기에 교회와 성도의
존재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2) 교회와 성도

많은 복음 성가중,
가사가 못 마땅한 곡이 있습니다.
'축복송'인데
그 가사 중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어요'
하는 가사입니다.

좀 바꾸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어요'

똑같은 성도인데도
받는 사랑에 익숙한 이가 있고
주는 사랑에 익숙한 이가 있습니다.

받는 사랑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주는 사랑을 능가 할 수는 없습니다.
주는 사랑이야 말로 받는 사랑보다
성숙하고 지고지순한 사랑이기에
성경은 끊임 없이 '사랑하라' 였지
'사랑을 받아라.'하지 않았습니다.

눅 6: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요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성도가 누구입니까?
하나님꼐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아닙니까?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 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을 구현하고
나누어 줄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요 5:17)  내가 이 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성도는 사랑의 종입니다.
사랑의 사도입니다.
사랑에 목말라 헉헉 거리면서 찾는 종이 아니라
풍성한 하나님 사랑에 빠져 나누어 줄 수 있는 종이요 사도입니다.


3) 사랑의 대상

그렇다면 성도가 사랑해야 할 대상은
누구인가요?

① 하나님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대해서는
별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사랑의 기원이시고
날 먼저 사랑하셔서 지옥에서 건져 주시고
만가지 복을 주시는 분이기 떄문입니다.

고전 8: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느니라.

또한 교회, 복음, 말씀,
주의 종 들에 대한 사랑과 존경은
하나님 사랑으로 고백되고 증명됩니다.


② 형제 사랑입니다.

이웃 사랑이기도 합니다.
참 가까운 사람입니다.
일주일이면 서너번씩 만나는
믿음의 형제도 해당됩니다.

교회의 경우,
교회가 속해 있는 지역의배려,
또 이웃 교회들에게 경쟁의식이 아닌
형제의식을 갖는 것이 해당됩니다.

③ 원수까지 사랑해야합니다.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
        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반면 사랑치 말아야 할 대상이 있습니다.

① 세상과 세상의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아야 합니다.

② 불의의 삯을 사랑치 말아야 합니다.

③ 돈을 사랑치 말아야 합니다.


이 구별의 이유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지시대로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면 나와 모두는 삽니다.

예컨대

* 하나님을 사랑하면 할 수록
  경건심이 증가하면서 믿음이 성숙됩니다.

* 또한 형제나 이웃을 사랑하면 할 수록
  신뢰가 생기고 연합하게 됩니다.

* 가장 힘든 원수를 사랑하게 되면
  용서가 선행되어야겠기에
  내 속에 담긴 화가 지워집니다.

이런 일들은 종합해 보면

사랑 받는 상대방보다
사랑하는 내가 먼저 새로워지고
성숙해지고 고침을 받습니다.

반대로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사랑하면 사랑하라는 것의
반대 현상이 일어납니다.

* 세상과 세상의 것들을 사랑해 보십시오

내 신앙은 죽습니다.

거룩치 못하다가 마침내 하나님을
떠납니다.


* 불의를 사랑해 보십시오

그 불의의 번성으로 결국 나와
내형제가 죽습니다.


* 돈을 사랑해 보십시오

영혼을 팝니다.

구약의 발락 선지자와 신약의 가롯유다가
그 경우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가려서 해야됩니다.
말씀따라 해야 됩니다.
이러한 사랑을 '믿음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딤전 1"5)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사랑은 세상에도 있습니다.
타 종교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사랑은 본질상
그것들과 다릅니다.
경건이 있는, 보혈의 공로에서 부터
흘러 내려오는 하나님의 사랑이어야 합니다.

요 4:2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였음이라.

조건이나 관계나 상황을
초월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나 너그러울때는 온 세상을 품을 것같다가도
나 화나거나 불리하면 바늘 끝초차 꽃을 수
없도록 하는 그런 사랑은 아닙니까?

우리가 실천해야 할 사랑은
변덕스런 사랑이 아니라
'온전한 사랑' 입니다.

세상과 타종교인 보다
차별되고 우월해야 합니다.

마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사랑만큼
  더이상 쓸 것이 없다고 할 만큼
  서로를 사랑했던 교회였고
  교인들이었습니다.

우리 이 사랑 실천해야 됩니다.


4)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

왜 우리들은 사랑의 힘을 알고
사랑의 가치를 알면서도 사랑하지 못할까요?

① 사랑의 환상과 착각 떄문에

환상이란,
사랑만큼 별난 사람들의 별난 행동으로
오해 했기 때문입니다.

또 착각이란,
대단한 것을 주고 얻는 것만으로
오해 했기 떄문입니다.

메스컴의 부정적 영양 탓 입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도 사랑 할 수 있습니다.
펑범한 것을 주고 나누면 됩니다
작은 괌심, 격려,칭찬,배려입니다.

어느 은행의 조사입니다.

좋아하는 말이,

" 내가 도와줄께, 일찍 퇴근합시다.
  오늘 수고 많았어요, 감사합니다.
  아주 잘 했어요 등 입니다."

듣기 싫어하는 말은,

"내일이 아닌데, 벌써 퇴근하네,
아무개는 잘하는데...당신은?"

교회나 이웃간에 사랑을 주려면
먼저 말솜씨를 기르고
얼굴의 근육부터 펴야 합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치 말라고 했는데
이는 사랑의 시작이지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② 사랑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우리들의 교육은 유교 사상에
일본식 교육이었습니다.

실천적이고 본을 보이기 보다는
" 조용히해, 밥먹는데 떠들면 안돼, 암기해"

*어느 누구도 사랑은 이런거란다.

*사랑은 이렇게 해야 된다고 보여 주지
  않았습니다.



이제 이 귀한 사랑을 주님께 배울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희생은 무조건적이고
무한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주님은 죽음의 고통속에서 조차 자신을못박은 원수를 끌어 안으셨습니다.

눅 23:34)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리고 사마리아인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다.
사고를 당한 자가 아무런 상관이 없는자 였지만
오직 강도 만난자 이기에, 죽어가기에,
그를 위해서 자기와 자기의 모든것을
희생했습니다.

그의 위대한 말이 있습니다.

* 부비가 더들면.....

과연 우리에게는 이런 사랑의 실천이
있습니까?
아니 다짐이라도 있습니까?

관계를 따지고 형편을 따지고 기분을 따지다가
오늘까지 오지 않았습니까?

이제 핑계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그 사랑에 모두가 감탄하고
감격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 사랑이야 말로
실천적 예배이고 하나님 경외이고
주님에 대한 찬양입니다.

" 사랑받는자가 아닌 사랑하는자가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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