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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망으로 점프 (히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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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으로 점프
히11:38

  여름 어린이 성경학교 중고등부 수련회가 시작 됩니다. 금년 주제는 소망으로 점프입니다. 총회 교육부에서는 금년 교단 공과의 전체 주제가 이스라엘의 소망을 위하여 (행26:7)이므로 이 주제에 맟추어 이러한 주제를 정하였다고 설명하며 덧붙여 이 땅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소망이 믿음으로 사는 토대의 근본이며 구별된 삶을 추구하여 교회를 이루고 살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소망이 삶을 뛰어 오르게 하고 도약하기에 외국어지만 널리 알려진 점프라는 말을 쓰게 되었다고 설명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은 하나님의  이름 안에서 고통을 받으며 믿음 안에 살았던 선진들을 소개 하면서 이런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히11:38)고 말씀합니다. 고문을 받고 어떤 이들은 채찍질을 당하고 또 어떤 이들은 투옥이 됐고 돌에 맞아 죽고 톱으로 두 토막으로 잘리고 창으로 살해되기도 하였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고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면서 신앙을 지킨 이유가 바로 소망 때문이었음을 말씀 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언약에 대한 소망은 보이는 세상을 넘어서 이뤄질 영광스러운 세계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바램 때문입니다. 의를 위해 고통을 받는 이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고 하십니다. 세상은 죽음으로 권세를 쥐고 위협하나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을 세상은 감당하지 못합니다.

신앙이 도약하고 뛰어오르는 점프를 하되 삶의 수준이나 질을 조금 높이려는 육적 차원이 아니라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세상은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점프를 살피게 합니다. 그래서 선진들을 부르시고 신앙으로 뛰어 오르게 하신 하나님께서 부르신 부름을 굳게 붙잡고 소망으로 점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나아가 자녀들도 점프하도록 지도해야 합니다. 


먼저 베드로처럼 함께 하심으로

베드로는 갈릴리 바닷가에 살면서 어부 생활을 하다가 예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갈릴리는 가나안 땅 중에서 북쪽 변방에 속한 곳으로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갈릴리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비천한 자와 같이 취급되었습니다( 사 9:2). 그 곳에 살던 베드로는 고기잡이로 생계를 이어 가던 평범한 어부였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은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날따라 밤이 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베드로와 그 형제는 고기를 한 마리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고기잡이를 포기하고 있을 때 예수께서 깊은 데로 그물을 던질 것을 명하셨습니다. 물이 깊은 곳에는 물고기가 모이지 않는 것이 상식적인 일이었으나 베드로는 예수의 말씀을 의지하여 그물을 깊은 곳으로 던졌습니다. 그때에 그물이 찢어질 것같이 많은 물고기가 그물에 걸려 올라왔습니다. 베드로는 그 순간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즉시 예수 앞에 엎드려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며 자신을 떠나 달라고 간구하였는데 이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자신 같은 죄인이 감당할 수 없음을 고백한 것이었습니다. 그때에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시며 자신을 따를 것을 명하셨습니다. 즉 고기 잡는 어부 베드로를 복음 사역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의 부르심을 받은 베드로는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즉시 좇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의 부르심을 받고 순종하여 역사에 남는 복음 사역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의 수제자로서 사랑을 많이 받았으나 한때 예수를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실수를 범하기도 했으나 예수 부활 후 성령의 능력을 받아 담대하고 헌신적인 신앙으로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베드로가 성령 충만을 받아 예수의 복음을 담대히 증거 할 때에 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정죄하여 십자가에 처형한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 시며, 부활하셔서 승천하셨다는 제자들의 주장이 사람들에게 사실로 받아들여질 경우 자신들이 하나님을 대적한 악한 세력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을 함부로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놀라운 표적과 기사를 행하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보았으며, 자신들도 부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복음이 더 이상 사람들에게 퍼지지 못하도록 복음 증거자들을 협박하여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을 막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때에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고 하였습니다. 또한 자신들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단호히 말하였습니다. 베드로의 담대함은 생명을 건 순교의 신앙으로 말미암은 내용이었습니다.  예수의 부활하심 속에서 영생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소유할 때 세상의 어떠한 위협도 그의 신앙을 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담대한 신앙은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복음 증거자들의 신앙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며 자신의 물과 피를 다 쏟으시기까지 사랑하심같이 예수의 양들을 사랑하여 헌신적으로 복음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베드로는 결국 예수를 따라 복음 사역을 위해 순교하기까지 헌신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도들의 헌신이 기반이 되어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되어 세상 모든 만민이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본받아 점프하며 자녀들도 점프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다음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아브라함은 하란에 거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땅으로 가고자 하여 하란에 이르렀다가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자신이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부르심은 그로 인하여 세상 만민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복을 내리셔서 그 이름을 창대케 하여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실 것을 언약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편이 되시어서,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시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저주를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으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약속은 곧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또한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을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메시야를 보내시어 세계 모든 민족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겠다는 구원에 대한 언약입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은 믿는 자의 본보기로서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는 믿음의 삶을 인하여 믿음의 조상이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얻게 되었으며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가나안 땅을 그와 그의 후손에게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서 이삭과 야곱과 같이 장막에 거하였는데, 이는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비록 자신의 시대에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대로 자기의 후손이 큰 민족을 이루어 가나안땅에 충만히 거하면 그 곳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할 날을 고대하였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대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던 모리아 산에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세워졌고 하나님 백성인 이스라엘이 그 곳에 거하며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소망은 이 땅의 도성에 관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후손에 대한 약속과 가나안 땅 기업에 대한 약속을 주셨지만 이는 하나의 예표로써 아브라함이 실제로 바라고 소망한 것은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이었습니다.(히11:10) 비록 희미하지만 자기 씨로 오시는 그리스도(갈 3:16)

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받을 복을 바라보았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땅에 임할 새 예루살렘 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모든 성도가 소망해야 할 하나님의 도성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거룩하게 행하는 자들은 예수의 재림과 함께 도래하게 될 이성에 참예하게 됩니다. 그러나 불신앙 속에서 가증한 범죄를 행한 자들은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도성을 바라보는 자는 이 땅에서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 되었습니다.(롬4:3)  이로 인하여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롬 4:23)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롬 4:24) 하신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모든 이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체가 신앙의 점프의 시작이나 믿음으로 순종하고 나아가므로 더욱 아름답게 이루어진 사실을 확신하며 점프하고 신앙의 유산을 물러 주어야 합니다.


  또한 다니엘처럼  바라보며

유다 왕 여호야김 삼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포위함으로써 여호야김의 항복을 받아 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여호야김을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잡아가며, 환관장 아스부나스에게 명하여 이스라엘 중에서 왕족과 귀족 즉 흠이 없고 아름다우며 모든 재주를 통달하며 지식이 구비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모실 만한 소년을 데려오게 하여, 그들에게 갈대아의 학문과 방언을 가르치게 하였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자국민이 아닐지라도 인재를 발굴하여 양성함으로써 관직을 맡기려고 했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그의 세 친구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와 함께 바벨론의 궁정에 거하면서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여호와께 대한 철저한 신앙을 소유한 자들로서, 하나님께서 유대 민족을 징벌하시는 가운데서도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긍휼과 자비를 베푸셨음을 보여 줍니다. 다니엘의 포로 생활 중에 왕이 여러 번 바뀌었지만 그들은 언제나 다니엘을 인정하여 귀히 여겼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의 결과였습니다.

다니엘은 우상에 바쳐진 왕의 진미를 단호히 거부하며, 자신이 위험에 처할 줄 알면서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쉬지 않는 담대하고 결단력 있는 신앙의 소유자였습니다.  또한 민족의 죄를 대표하여 회개하는 투철한 하나님 중심의 역사의식을 소유한 경건한 자였습니다.

다니엘이 모함을 당하여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이유로 사자 굴속에 던져진 사건은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다니엘은 모든 행사에 거짓과 실수가 없었으므로 그를 모함하려는 자들은 다니엘의 신앙을 가지고 다니엘에게 올무를 씌우려고 했습니다.  바사의 총리들과 방백들은 다니엘을 고소하기 위하여 계략을 꾸미고 다리오 왕에게 나아갔습니다. 그들이 꾸민 계략은 다니엘을 사자 굴에 잡아넣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왕에게 나아가 법령을 세워 공포하되 삼십 일 동안에 왕 이외의 다른 신에게 경배하는 자는 사자 굴에 던져 넣자고 하였습니다. 다리오 왕은 악인들의 꾀임에 넘어가서 조서에 어인을 찍어 금령을 내렸습니다. 악인들의 궤계는 일단 성공을 거둔 셈이었습니다. 다리오 왕은 별 생각 없이 자신만을 숭배한다는 말에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악인들이 이러한 방법으로 다니엘을 잡으려 한 데에는 다니엘이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이 다니엘의 신앙은 악인들이 인정하는 신앙이었습니다. 비록 목숨을 빼앗긴다 해도 하나님께 경배 드리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순교의 신앙을 다니엘은 악한 자들로부터 인정받았습니다. 다니엘은 의로운 일로 인하여 악인들에게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다니엘이 던져진 사자 굴속에 있는 사자들의 입을 제어하심으로써 다니엘을 구원하셨습니다. 왕이 심히 기뻐서 명하여 다니엘을 굴에서 올리라 하매 그들이 다니엘을 굴에서 올린즉 그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 하나님을 의뢰함이었더라 (단 6:23)고 하시니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나오도록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언제나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널리 증거 해 줍니다. 다니엘이 사자 굴속에서 살아 나오자 다리오왕은 온 땅에 있는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민족들에게 조서를 내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 것을 명하며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찬양했습니다. 다니엘은 순교의 신앙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보이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신앙점프의 시작이었고 하나님의 나라만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뢰함으로 더욱 분명하여졌음을 확신하며 점파하는 모두가 되고 자녀들을 인도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처럼 주님을 만남으로

바울은 바리새파에 속한 정통 유대인으로서 예수를 믿는 자들에 대한 핍박에 앞장섰던 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와의 만남을 기점으로 하여 복음의 증거자로 바뀌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 중에서도 자랑할 만한 신분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 중에는 이방인이었으나 유대교로 개종함으로써 유대인에 속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혈통적으로 순수한 유대인 출신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 당시 율법에 있어서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는 가말리엘의 문하생이기도 했습니다. 이는 곧 바울의 율법에 대한 열심과 지식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음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속한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려는 자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예수와의 갈등 중 대표적인 것이 안식일 준수의 문제였는데,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예수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일을 행하시는 것에 대해 정죄하였던 것입니다. 바울도 그러한 사상 때문에 예수를 이단의 괴수로 판단했고, 예수를 좇는 자들을 박해하는 일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은 있었지만 잘못된 지식에 근거하였기에 오히려 그 열정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율법에 대한 지식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용되어질 때 구약성경을 복음 안에서 해석할 수 있는 귀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순절 성령 충만 사건이 일어난 후부터 복음은 급속도로 유대인 사회에 퍼져 나갔습니다. 사도들은 예수의 부활을 담대히 증거 하였고, 유대인들 중에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자들이 많아졌습니다. 복음이 왕성하게 전파됨과 비례하여 복음을 방해하려는 사단의 움직임도 더욱 활발해져 갔습니다. 유대인들은 복음이 증거 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정죄하여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믿게 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복음에 대한 유대인들의 박해는 스데반 집사의 순교로 절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셨음을 담대히 증거 하다가 유대인들의 돌에 맞아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그때에 그 자리의 책임자는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는 각 집에 들어가 예수를 믿는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겼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나자 사도 외에는 모든 성도가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졌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를 잡아 가둔 뒤에 다른 지역으로 피신한 자들을 잡으려고 마음먹었습니다. 바울은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찾아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였습니다. 그 곳에 가서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오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함에 있어 뜨거운 열정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이단들을 박멸해야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의 대 박해 이후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진 성도들을 잡으려고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비취는 강한 빛으로 인해 바울은 눈을 뜨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엎드리고 말았습니다. 바울이 '주여 뉘시오니까' 라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고 답하셨습니다. 바울은 그 순간 자신이 핍박하던 복음이 진리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신앙과 모든 가치관이 순식간에 정반대로 바뀌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 후로 복음의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화려했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오직 복음 증거만을 위해 일생을 바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회심은 사도들도 의심하며 경계할 정도로 갑작스러운 변화였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며 오직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의 바울의 변화가 급격했던 것만큼 그의 사명도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있어서 획을 그을 만큼 파격적이었습니다. 그것은 이제까지 유대인들에게만 속했던 것같이 인식되어져 왔던 하나님의 구원 언약이 이방인들에게도 증거 되었습니다. 바울은 특별히 자신이 이방인들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이방세계에 복음을 증거 하는 일에 전념하게 되었다고 증거 하였습니다. 바울의 변화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와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남으로 이제까지 자신의 삶을 막고 있었던 장벽을 뛰어넘는 점프를 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정죄하는 율법에 매여 있었고 유대교의 편협한 장벽에 갇혀 있었으나 예수님을 만났을 때는 율법의 세계를 넘어 놀라운 점프로 하게 되었습니다. 율법의 세계를 넘어선 바울사도는 그가 율법 안에서 자랑스럽게 여겼던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빌 3:8-11)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바울 사도의 신앙의 점프를 확신 하며 점프 할뿐 아니라 아이들도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유명한 템플대학교를 창설한 러셀 콘웰 박사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의 백만장자들을 조사해 보았다고 합니다. 적어도 백만불 이상을 모은 사람들을 4043명의 생애를 조사한 결과 놀라운 것은 이들 중  고졸 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은 불과 69명밖에 없었습니다.  크게  성공해서 수 백만장자가 된 사람들은 그들이 백만장자가 되기까지 교육과  정규훈련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부족한 생활을 했다는 결론이 추론 되었습니다.  그러나 콘웰 박사는 그들의 생애가 평범한 다른 사람들과는 같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삶을 출발할 때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뛰었으며,

둘째로 그들은 그 마음속에 열화 같은 소원을 가지고 있었으며,

셋째로 그들은 뒤로 물러서지 않는 굳은 결의의 기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재산이 성공의 표준이 될 수 없으며 권력이나  명예가  성공의 표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방면에서 성공을 하는 사람들의 생애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재산이나 명예나 권력에 성공을 하였을지라도 참 만족과 기쁨과 평안과 소망이 없다면 그는 인생의 성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부족할지라도 참 기쁨과 만족과 평안과 소망을 얻게 되었다면 이는 세상을 이긴 사람입니다.(예화뱅크-세상을 이긴 사람)

신앙의 선진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기쁨과 만족함과 평안과 소망을 누렸습니다. 베드로처럼 주님과 함께 함으로, 아브라함처럼 믿고 순종함으로, 다니엘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의뢰함으로, 바울처럼 주님을 만남으로 우리의 신앙이 소망으로 점프해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의 신앙이 소망으로 점프하도록 가르쳐야 할 줄 믿습니다. 이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고 협력하는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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