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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스라엘의 현주소 / 호 13: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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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호세아 13: 9- 16
제목- 이스라엘의 현주소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삶을 지탱할 수 있는 많은 원동력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위로 때문에 살 수도 있고, 자식들이 잘 되는모습을 바라보는 희망때문에 살 수도 있습니다. 혹은 우리의 직장이나 사업들에 대한 희망넘친 미래를 기대하며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삶의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요 기초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너무나 사랑하셨기에, 그들을 부르셔서 거룩한 백성 곧 성민으로 삼으셨고, 어느 민족보다도 풍성한 은혜와 은총을 부어 주셨습니다. 감사로 말하면 누구보다도 커야 하고, 감사의 제목을 헤아려본다면 누구보다도 감사의 제목이 많아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에브라임지파는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고 존귀하게 쓰셨기에 우상숭배와 불의의 삶을 살아가는 에브라임지파에게 하나님께서는 강력한 어조로 경고의 말씀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너를 도와주는 나를 대적하였으므로 너희가 패망할 수 밖에 없노라’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 지파가 멸망할 수 밖에 없는 분명한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래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왕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할렐루야! 여호와 하나님은 세상의 왕과 구별되기에 왕의 왕이라고 그들은 고백하며 전쟁에 능한 왕, 어떠한 시련에도 항상 가까이 계시는 왕으로서의 하나님을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그랬던 이스라엘이 사사기에 보면 끊임없는 외국의 침략을 받으면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우리에게도 왕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삼상 8:6) 자신들이 이웃나라에게 침략을 당하거나 어려움을 당하는 이유가 단지 왕이 없어서라는 생각에 이르자 그들은 사무엘에게 몰려가 왕을 세워주도록 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선지자는 이러한 자세는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이 아님을 누차 권면하였지만 막무가내였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패망 원인은 여호와 앞에서의 악이었습니다. 그것도 숨어서 행하는 악이 아니라 여호와의 목전에서 행하는 악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하시는 방법으로 이웃나라들을 선용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매 여호와께서 하솔에 도읍한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는지라" (삿 4:1-2) 그들을 이스라엘을 깨우치도록 하시는 채찍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20년간 수없이 많은 학대와 고난의 세월을 보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제서야 여호와께 나아옵니다. "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짜오되 우리가 범죄하였사오니 주의 보시기에 좋은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오늘날 우리를 건져내옵소서" (삿 10: 15) 결국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금식하며 눈물로 돌아옵니다. 그럴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한 종을 사사로 세워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평화를 회복하게 하시는 역사가 사사기에 끊임없이 반복되는 패턴입니다.

그 사이클 속에서 우리는 삶의 실패의 모습도 볼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의지와 하나님의 요구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영적 분별력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실패의 삶과 성공의 삶의 내용이 모두 소개된 이유도 바로 그 실패와 승리 속에서 영적 진리를 깨닫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담겨져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특별히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그 승리의 삶을 잃어버리지 아니하도록 유지하는 지혜를 말씀 속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사무엘이 왕을 세워달라는 백성의 요구를 기뻐하지 않자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말씀하십니다. "백성이 네게 한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삼상 8:7)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닌데... 하지만 그들은 막무가내였습니다. 완전히 분별력을 잃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동체가 오직 그들만의 고집과 편견만이 지배하는 군중 집단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실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어거지를 쓰면 그렇게 들어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분명히 잘 못된 길인데... 자식들이 부모에게 생떼를 쓰면 그 길이 바른 길이 아닌 줄 알면서도 부모가 허락해 주는 경우가 있지만, 사실 그건 부모가 동의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길로 가면 실패요 고난이요 어려운 일인줄 알지만, 네가 직접 체험해보고 깨달으라는 의미이지요. 탕자는 좋아서 그 길을 갔지만 결국 얼마 있지 못하고 뼈아픈 상처들을 가지고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세워 졌지만, 왕이 그들을 하나로 묶어 주지는 못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스라엘의 초대왕은 사울입니다만 사울은 처음 얼마의 기간을 제외하고는 줄곳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종들을 죽이고 핍박하는 일들을 인해 그를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께서 후회하기에 이를 정도였습니다.

결국 사울왕은 블레셋과의 전투가 한창이었던 길보아 산 전투에서 비참한 죽임을 당했습니다. 왕만 세워 놓으면 다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던 그들이었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는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전에 너희가 왕과 방백들을 저희에게 주소서 하였느니라. 하지만 이제 너희 왕이 어디 있으며, 네 재판장들이 어디 있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왕처럼 세우고 섬기고 있는 다양한 것들, 즉 인간관계, 자녀들, 부모와 친척들, 그리고 명예와 돈, 다양한 경험들이 여러분들의 왕이 되어 군림하고 있지않습니까? 그런 왕들만 세운다면 우리의 인생은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셨습니까? 지금도 그 왕을 세우기 위해서 온갖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에브라임은 하나님 앞에 그러한 삶을 살다 보니 결국은 12절과 같은 내용이 나왔습니다. ‘에브라임의 불의가 봉합되었고 그 죄가 저장되었나니.....’ 이제는 죄가 너무나도 많아 창고에 쌓일 만큼 되었습니다. 처음엔 가리고 했지만 이제는 가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바늘 도둑이 소 도둑된다는 말처럼, 작은 죄악의 점점 커져서 이제는 쌓아놀 만큼 커졌다는 것입니다.

죄가 쌓인 결과는 무엇입니까? 오늘 성경은 죄의 결과에 대해서 강력하게 경고하는 말씀이 소개되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는 13절입니다. ‘해산하는 여인의 어려움이 저에게 임하리라. 저는 어리석은 자식이로다. 때가 임하였나니 산문에서 지체할 것이 아니니라.’ 산문이란 자궁을 의미합니다. 어린아이가 자궁에서 나오는데 나오질 않고 지체하고 있는 거예요. 무슨 말입니까? 산모는 아이가 나오지 않으면 않을수록 고통이 더하는 거예요.

해산 달이 되면 임신한 여성들은 아이 낳을 준비를 합니다. 그 대표적인 신호가 통증입니다. 산통이라고 그럽니다. 처음에는 몇 시간 주기로 오다가 점점 간격이 줄어드는데 한시간, 30분, 10분 등으로 주기가 빨라지면 해산이 임박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남자목사가 어떻게 그런 걸 잘 아느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점은 제가 조금 알아요. 어머니께서 세브란스 간호대를 나오셔서 목회하시는 아버님을 따라서 농촌이나 섬 같은 지역에서 사역 하시던 60-70년대 만해도 병원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 보건사회부 장관이 지역을 위하여 공중의로 임명을 해주어 치료할 수 있었기에, 어머니께 치료받은 주민이나 해산 때 받아준 아이가 수만명이라 국회의원 나와도 당선된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어머니께서 출타 중이시면 조산원에서 제가 전화를 받을 때가 있는데, ‘ 선생님 빨리 불러 주세요. 곧 출산할 것 같습니다 ' 하고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오면 ‘진통이 몇 분마다 옵니까?’ 하고 물어보면 처음에는 젊은 남자가 물어보니까 그 쪽에서 기가찬 모양입니다. ‘아니 젊은 사람이 뭘 안다고 그래요?’ ‘글쎄 진통이 몇 분마다 오냐니까요?’ ‘지금 1시간 마다 오고 있어요.’ ‘아직 멀었어요. 내일쯤 다시 연락주세요....’ 제가 엉터리 의사 노릇을 할 때도 있었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산모는 해산의 때가 가까워 올수록 진통이 심해지고 주기도 빨라지는 것을 보면서 느끼는데, 어찌 이스라엘 에브라임은 그것을 모르고 있는냐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고 보면 스스로 고통을 자초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아버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미워서 여러분들에게 실패를 주십니까? 우리를 미워해서 우리에게 어려운 곤경을 주십니까? 때때로 시험을 위해 고난을 허락하실 때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 에브라임처럼 스스로 고통을 자초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두 번째는 15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가 형제 중에서 결실하나 동풍이 오리니 그 근원이 마르며 그 샘이 마르고 그 적축한 모든 보배의 그릇이 약탈되리라.’ 열심히 일했습니다. 땀흘려 노력했습니다. 남들보다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리고 가득 가득 쌓아 놓았습니다. 이 정도면 노후까지 혜택을 보면서 이제는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그 모든 수고의 열매가 형제나 이웃 가운데 가장 많이 저축을 했다고 자부심도 가졌었는데 알고 보니까 빈그릇 이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2장 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는데, 첫째는 생수의 근원인 나를 버린 것과 둘째는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 웅덩이는 물을 담을 수 없는 터진 웅덩이로다.’ 결국 헛수고 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웅덩이 파느라고 얼마나 수고가 많았습니까? 깊은 웅덩이 파느라고 얼마나 고생도 많았습니까? 좀 더 크게 파자. 좀 더 넓게 파자. 좀 더 견고하게 파자. 그런데 주님이 보시니까 터진 웅덩이예요. 담아도 담아도 새어 버리는 겁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와 호세아 선지자의 말씀이 일치합니다. 저들이 형제들 가운데에서 탁월하게 열매를 맺었다고 생각했지만 동풍이 와서 그 근원조차 남겨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동풍은 곧 여호와의 바람이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허무합니까? 정성을 다해서 쌓아놓은 우리 인생의 열매들이 다 사라져 버렸으니 말입니다. 이 말씀은 죄의 결과는 우리의 어떤 수고의 열매도 허사로 만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말씀은 16절에 있습니다. ‘사마리아가 그 하나님을 배반하였으므로 형벌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질 것이라. 어린아이는 부숴뜨리우며 아이 밴 여인은 배가 갈리우리라.’ 이 말씀은 너무나도 강력해서 설교 전에 봉독을 하질 못했습니다.

엊그제 뉴스를 보니, 삼 남매를 둔 어머니가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결국 아이들을 아파트에서 집어던져 모두가 목숨을 잃는 기가 막힌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 뉴스를 보면서 ‘그래, 저 고층 아파트가 문제지, 아파트에만 살지 않았어도 그 아이들은 살았을 텐데...’ 혹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까? ‘우리나라에 IMF만 안 왔어도 내가 요모양은 되는 않았을텐데....’ 라고 말입니다.

저는 분명히 확신합니다. 사람이 문제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위상이 많이 떨어졌다고 지각있는 분들은 염려합니다만, 사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교회의 지도자들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끊이지 않는 목회자들의 섹스 스캔들, 머니 스캔들 같은 뉴스들이 전해질 때마다 교회는 성도와 사회에서 신뢰와 존경을 조금씩 잃어갔습니다.

이슬비에 속옷 젖는다는 말처럼 이젠 속옷까지 푹 젖은 상태입니다. 아, 이것은 바로 나의 문제이구나! 내가 영적 지도자로써 바로 살지 못했기 때문에 이 사회에서 기독교가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구나......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결과는 우리의 부족함에서 비롯된 것임을 고백하며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 두려움으로 서길 원합니다.

최근 미국의 통계를 보면, 미국은 공립학교에 투자되는 비용보다 교도소를 관리하는 비용이 더 많이 들어간다는 참으로 놀라운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범죄한 사람들을 관리하는 돈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것보다 더 크다는 것이지요. 어린아이들을 위한 시설을 확충하고 훌륭한 교사들을 배출시켜서 교육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는 일보다, 죄를 지은 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관리하는 비용이 더 들어가는 나라라면 파라다이스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새로워져야 할줄로 믿습니다. 분명한 것은 말씀을 통해 죄의 결과를 심각하게 경고하시는 주님의 메세지는 우리가 그렇게 패망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부모가 말 안듣는 자식에게 채찍질 할 때 맞아 죽으라고 때리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한 두대 맞으면 얼른 "어머님 제가 잘못했습니다"하고 돌이켜야 하는데, 자기가 무슨 천하장사라고 버티고 섰으면 부모의 입장에선 기가 막히지요. "이 녀석이 매를 벌어요 매를..."하면서 말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호소합니다. 지금 너희의 현재 상황, 너희의 삶의 현주소가 어떠한지를 알고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거예요. 돌아온다고 하는 말은 지난 삶을 청산하는 회개의 결단이 포함된 겁니다. 유턴하라는 거예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존심 때문에 그냥 우기고 가는 사람이 되지말고 겸손히 갓길에 차를 세어놓고 사람들에게 물어보아 잘못됐으면 얼른 유턴하라는 것입니다. 회개란 결코 창피한 일도 부끄러운 일도 아닌 진정한 믿음의 용기이기에 오히려 존경받을 수 있는 결단인 것입니다.

다윗은 왕이었지만 자신의 잘못된 삶을 하나님의 종, 나단이 지적해 주었을 때, 그는 무릎을 꿇고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어느 누가 다윗이 왕으로서 체면없이 눈물의 회개를 하였다고 평가절하하겠습니까? 오히려 그는 역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위대한 사람이라고 존경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의 현주소는 곧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나의 삶의 모습을 분명히 알아야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청산할 것은 청산하고, 끝까지 목숨을 걸고 유지할 것은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두에 선언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들 삶을 떠나지 아니하여 늘 하나님의 은혜 속에 풍성한 복을 누리시는 성도의 생활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린 어리석은 백성들처럼, 오늘 우리는 땀 흘려 노력하며 일찍 수확을 거두었다고 기뻐하며 저축하였으나, 실상은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한 빈 그릇뿐임을 깨닫고 주님께 고백하며 돌아서기를 원합니다.
이제 순전한 마음으로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주님의 사랑의 메시지가 우리의 심령 깊이 새겨져 주와 동행하며 사는 원동력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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