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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잔치가 있는 생활` / 욥 1:1~5 (눅 14:15~2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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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잔치가 있는 생활" 
본문 : 욥기 1:1~5 (누가복음 14:15~24 참조)

 
  옛날에 선비가 열심히 공부를 해서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돌아오면 그 동네에는 큰 동네 잔치가 벌어져서 기쁨을 함께 나누곤 했습니다. 작년 6월에 한일 월드컵이 있을 때 한동안 우리 국민은 잔치하는 기분으로 살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잔치 집은 즐거운 곳입니다. 잔치 집에 찾아가는 사람들은 그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입니다. 어릴 때 어머니를 따라 잔치 집에 가곤 하던 때를 기억합니다. 어릴 때 친척집에서 벌이는 잔치는 늘 많은 기대감을 갖게 하였습니다. 가장 큰 기대감은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맛있는 잡채와 감주, 고깃국, 그 다양한 음식들은 평소에는 거의 먹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어머니를 따라 잔치 집에 가면 마당에는 의레 천막이 쳐져 있었고, 멍석을 깐 마당에서 어머니가 가져다 주시는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어른이 된 지금은 어릴 때의 부푼 기대감을 느끼기는 어려운 듯 싶습니다.

  잔치 집은 근심 걱정이 없고 즐거움이 가득 차 있는 곳입니다. 잠언 15:15 말씀에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잔치 집의 특징은 즐거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잔치 집의 즐거움을 생활 속에서 맛보고 싶어합니다. 사람들의 내면 속에는 잔치의 즐거움이 생활 속에 일어나기를 고대합니다. 잔치가 없는 삶은 고단하고 지치고 힘들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골 사람들은 동네에 잔치가 열리는 날이면 그 집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잔치 집에 들어가서 함께 즐거움을 나누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지방에도 잔치 문화가 많이 발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생일, 결혼, 포도를 수확할 때, 양털을 깍을 때,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큰 잔치를 배설할 때는 주인이 잔치 기간에 하인들을 시켜 두 번씩 초청하기도 하였습니다. 주인은 손님들을 위해 예복을 준비하였고, 손님들은 영광으로 알고 예복을 입었습니다. 때때로 잔치는 7일 동안 계속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가나 혼인 잔치에 참여하신 적이 있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어 잔치 집 기쁨을 더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잔치 집 즐거움이 슬픔으로 바뀌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즐거워하는 사람들과 함께 즐거워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셔서 삭개오가 베푸는 잔치에 참석하시기도 했습니다. 또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잔치를 잡히시기 전날 밤에 열었습니다. 마지막 잔치는 슬픈 잔치였습니다. 큰 의미를 나누기 위한 잔치였습니다. 둘째 아들이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잔치를 열었습니다. 돌아온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는 기쁨이 너무 컸기 때문에 온 동네 사람들을 모두 초청하는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생활에 잔치 집의 즐거움이 있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잔치하는 기분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참 신나는 삶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즐거움이 없는 삶이란 고단한 인생이 되는 것이지요. 험난한 한 주간의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잔치 집에 간다는 기대감이 있다면, 고통과 괴로움을 한결 가볍게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 말씀 누가복음 14장에는 잔치에 대한 비유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미리 청하였던 사람들에게 종을 보내어 오도록 초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초청받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사양을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새로 밭을 사서 밭에 나가 보아야겠다고 하고, 또 한 사람은 소를 사서 들에 나가 소를 시험해 보아야겠다고 하고, 또 한 사람은 장가들었으니 못가겠다고 합니다. 잔치 집에 사람이 없다는 것은 보통 난감한 일이 아닙니다. 잔치 참석을 거절하는 행위는 잔치 집 주인을 모독하는 행위요, 남의 성의를 무시하는 일이요, 남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려고 하지 않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모습은 현대인들과 아주 흡사하다고 할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극단적인 개인주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남의 잔치는 남의 잔치일 뿐입니다. 남의 잔치에 관심을 가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기만 있을 뿐입니다. 남의 슬픔에 참여하는 것도 사랑이지만, 남의 잔치에 참여해서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도 굉장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천국 잔치에 사람들이 참석하지 않겠다고 자기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잔치가 어떤 것인지 무지해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잔치가 얼마나 즐겁고 얼마나 소중한 잔치인지를 알지 못해서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잔치는 생활 속에 가장 큰 희망의 자리요, 소망의 자리요, 희열과 기쁨의 자리가 아닙니까?

  잔치가 없는 사회는 삭막한 사회입니다. 희망을 잃어버린 사회라고 할 수 있지요. 전쟁을 하고 있는 나라를 보십시오. 그들에게 웃음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참혹한 슬픔과 고통만 있을 뿐입니다. 죽음과 삶의 갈림길에서 불안에 떨고 있을 뿐입니다. 이라크 국민들이나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얼마나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또 독재가 판을 치는 사회를 보십시오. 북한 사회도 그 중 하나입니다. 인간다운 진정한 평화와 자유가 없다면 독재 속에는 항상 긴장된 삶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잔치가 없는 사회는 인간다운 사회가 아닙니다. 사랑이 없고 기쁨이 없고 구름이 가득 낀 장마철 같은 답답한 사회일 뿐입니다.

  피리를 불고 춤을 추고 즐거움이 살아있는 사회가 내일이 있고, 미래가 있고, 생명력이 있는 사회입니다. 개인들의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만 있고 과제만 있고 해야할 의무만 있고 즐거운 잔치는 없다면 그런 삶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하루 하루의 삶을 살아가면서 때때로 만나는 잔치같은 생활이 있어야 활기도 있고, 생기도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철학자가 길을 걸어가는데 아주 남루한 거지가 다가와 구걸을 하였습니다. 그 철학자도 수중에 가진 돈이 많지 않았지만, 그날은 큰 맘먹고 큰 돈을 적선했습니다. 그런데 돈을 받은 거지의 뒷모습을 보니 아주 큰 식당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집에서 제일 좋은 음식을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철학자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거지에게 다시 가서 물어보았습니다. "여보세요. 그 돈이면 여러 날을 굶지 않고 먹을 수 있을 텐데 왜 한꺼번에 돈을 다 써버리는 거요?" 거지는 대답합니다. "나는 이 한 시간을 최고의 시간으로 즐기고 싶었습니다. 내일은 내일이지요." 내일 걱정은 내일하고 오늘을 최고의 시간으로 살아보겠다는 거지의 말이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의 식탁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습니까? 그 순간 순간을 잔치하는 기분으로 보낼 수는 없습니까? 내일을 걱정하기 시작하면 행복이란 없습니다.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잔치가 있는 종교입니다.

  예전에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유교는 제삿집과 같고 불교는 초상집과 같고 기독교는 잔치집과 같다고 말입니다. 일반인이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탕자가 집에 돌아와 아버지와 함께 잔치하는 것과 같습니다. 일 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 나와 주님과의 만남을 갖는 시간은 잔치하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천국에 들어가면 천국의 잔치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천국의 잔치는 이 세상에서 맛보지 못했던 가장 큰 잔치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잔치를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죽은 오빠 나사로 때문에 심히 슬퍼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오빠의 죽음은 그 가정을 초상집으로 만들었고, 희망을 빼앗긴 비극의 가정처럼 만들어 버렸습니다. 죽음이란 인간이 경험하는 가장 큰 슬픔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십니다. 그 가정이 금방 잔치 집으로 바뀐 것입니다. 벳새다 광야에서 수많은 무리들이 굶주리고 있을 때 예수님은 또 한 번의 잔치 자리를 만들어 주셨지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는데 아무리 좋은 말씀을 들어도 배가 고프면 즐거움을 빼앗겨버립니다. 보리떡 5 개와 물고기 2 마리로 수많은 무리들에게 잔치 자리를 만들어 주신 주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곳마다 잔치 자리가 되곤 하였습니다.

  잔치 집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동네에 거의 모든 사람들이 들르게 됩니다. 심지어 가까운 이웃 사람들은 하루 종일 잔치 집에 머물면서 수다를 떨기도 하고, 음식을 먹기도 하고 웃고 즐기게 됩니다. 길가는 나그네나 거지들도 그날은 대접을 받을 수 있는 날입니다. 잔치 집은 인심이 후한 것이지요. 잔치 집은 활기가 넘치는 집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잔치 집과 같은 곳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잔치 집에 비유하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매 주일 만나는 교회는 잔치 집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는 잔치 집이요, 예수님께서 계시는 잔치 집입니다. 교회는 말씀과 진리가 있는 잔치 집이요, 은혜와 사랑이 있는 잔치 집입니다. 잔치 집에 다녀온 사람이 즐거움을 마음에 담고 집에 돌아가듯이,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가는 성도님들의 마음 속에도 즐거움과 평안이 가득하시길 축원합니다.

  우리 교회는 잔치 집이 되어야 합니다. 웃음이 있는 잔치 집이어야 합니다. 사랑이 풍성한 잔치 집이어야 합니다. 인심이 후한 잔치 집이어야 합니다. 우리들 마음 속에 있는 고민이나 근심을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잔치 집이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잔치를 마음껏 즐기는 하객이 되어야 합니다.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했던 헬렌 켈러라는 여인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 여인이 남긴 책들에는 "나는 기뻤습니다. 그리고 행복했습니다."라는 말이 많이 있습니다. 어떻게 고통스런 육체를 가지고 그런 기쁨의 삶을 살았는지 참 신기합니다. 그녀의 자서전 가운데 "내가 만약 사흘을 눈을 떠서 볼 수 있다면"이라는 감동적인 글이 있습니다. "내가 사흘만 눈을 떠서 볼 수 있다면 첫째 날 나는 내 인생에서 참된 사랑을 일깨워 준 고마운 사람들을 먼저 만나서 그들의 얼굴을 정말 오래오래 지켜보고 싶다. 둘째 날 아침에 일어나는 대로 동트는 광경을 바라본 다음 박물관과 미술관을 방문하고 싶다. 셋째 날에는 아침에 일어나는 대로 동트는 새벽의 여명을 한 번 더 지켜보련다. 그 다음에 거리로 나가 사람들의 걷는 모습, 일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저녁에는 내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일인 극장에 가서 희극을 관람하면서 한없이 웃고 즐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웃음과 기쁨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 헬렌 켈러가 앞을 보지 못하는 삶을 살았지만 그 마음 속에 잔치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들에게 잔치가 있는 생활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우리들 모두가 말씀 안에서,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영혼의 깊은 잔치를 맛보기를 바랍니다. 구름이 아무리 두텁게 끼인 날에도 구름 위에는 찬란한 햇빛이 빛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 걱정 근심, 염려 불안의 구름이 몰려온다 할지라도 마음 속에 기쁨의 잔치가 있다면 모든 것을 이기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잔치가 있는 생활, 잔치를 기대하는 생활을 날마다 이루어 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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