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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 벧전 1: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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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벧전 1:10-17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1. 영웅을 그리워하는 사회

요즘 헷갈리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존경하는 사람은 없는데 모델은 많다는 것입니다. 초등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 학생에 이르기까지 그들에게 "존경하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물론 소수가 손을 들어 표하지만 대부분이 고개를 젓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되려고 하느냐?"고 물으면 답변이 빗발칩니다. "00같은 사람요~"하는데 그 말은 그 00가 가진 '포지션,' '성공담,' '누리고 있는 영화' 등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신학생들이나 젊은 목회자들에게 설문해도 비슷한 결과가 나온답니다. 몇몇 대형 교회의 목사 이름을 거론하며 그런 목사가 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존경하느냐?"는 물음엔 답하기를 주저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하나는 개인의 삶이 전에 비해서 매우 많이 노출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개인 정보가 닫혀진 사회에서는 어느 정도 허물과 실수가 덮여져서 포장된 모습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젠 포장 할 수가 없을 정도로 열려져 있기에 존경이란 차원까지 바랄 볼 깨끗한 사람이 적다는 것입니다. 탈권위주의 시대엔 더 이상 우상으로 포장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개인주의 사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는 나이고 그는 그다"라는 개성을 존중하는 시대이기에, 나에게 필요한 사람은 될 수 있어도 내가 흠모할 만한 대상으로 세우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예측대로 자기 사욕을 좇을 스승은 많이 두지만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키기 때문입니다(딤후 4:3-5 참조).

사실 이런 현상의 책임은 전반적 교육 철학의 부재에서 온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존경할 인물을 그려주지 못했고, 아니 존경할 마음을 갖지 못하도록 만들어 왔습니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지도자에 대한 언어적 폭력이 난무했습니다. 지난 역사를 극복하려는 과정에서 지나칠 정도로 정치 사회 종교 지도자들을 비하시키며 비판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위기가 여기에 있습니다. 영웅의 자리를 없애버리고는 영웅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영웅에 목말라했으면 축구 감독 히딩크가 우리 대한민국의 영웅이 되었겠습니까? 
   
2.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이제 우리는 한 걸음씩 새 걸음으로 새 역사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요즘 "다시 시작합시다" 혹은 "다시 일어납시다"는 부흥의 모토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부흥"이란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일어나는 회복 운동입니다.

신약 성경의 복음서에는 "나를 따라 오너라"는 예수님의 부름과, 그 부름에 응답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에게 일어난 사건 기록입니다. 복음서 후의 서간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11:1)는 것이 중심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보여주는 교육 철학입니다.

우리 기독교 교육은 "본받음"(imitation)입니다. 그래서 중세 시대의 최고 교육서가 바로 "그리스도를 본받아"(De Imitatione Christi) 란 토마스 아 캠피스의 책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 역시 그렇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15-16절)

우리 교회 학교 교육도 이런 교육이 되기를 바랍니다. 복음 교리의 기초를 잘 다진 후엔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가려는 영적 의지를 키워주는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1)그러면 먼저 우리가 본받아야 할 그리스도의 모습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자기를 부수어 우리를 살리신 희생입니다. 11절에 그리스도에 대한 선지자들의 연구에 대하여 말씀하면서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고난을 통하여 영광을 얻으신 분이십니다. 바울은 이 그리스도의 사건을 가장 잘 정리하여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5-11)

그리스도의 고난을 가장 잘 형상화 한 것이 바로 성만찬입니다. 성찬식때 "떡을 떼어"란 말을 쓰는데 영어로는 "break bread"로 표현합니다. 떼어진 떡을 가지고 말씀하시기를 "이는 네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몸은 "부서진 떡"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못박음 당하시고 창 찔리신 정도가 아니라 그 몸이 부서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부서진 대신 우리의 부서진 영혼이 구원을 입은 것입니다. 뿐 아니라 부서짐으로 다시 하나님의 영광 보좌에 앉으신 것입니다.
베드로 청년회 홈페이지에 실린 글입니다.

'하나님은 부서진 것들을 사용하신다' 는 히브리 격언이 있습니다.

단단한 곡식이 부서져야 빵이 됩니다.
포도주도, 향수도 잘게 부서짐을 통하여 만들어집니다.

단단하고 질긴 음식도 우리의 입안에서 고르고 잘게 부서져야
소화되어 영양분이 됩니다.

사람도 원숙한 인격과 신앙을 갖추려면
반드시 부서지는 과정을 밟아야 합니다.

부서짐의 size가
성숙의 size이기 때문입니다.

이 맘 때쯤이면 시골에서는
도리개질(?)하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거두어들인 곡식을 앞마당에 펼쳐 놓고
사정없이 도리개로 후려칩니다.

곡식들의 신음소리에도..(왜, 나만 때려?!)
곡식들의 저항소리에도..(이제, 그만 좀 때려?!)
농부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참을 내려칩니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아프라고 때림이 아닙니다.
미워서 때림도 아닙니다.

껍데기를 벗겨내기 위함입니다.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내기 위함입니다.
더 잘게 부수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농부이신 하나님도
우리에게 도리개질을 하실 때가 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말이죠.
우리는 너무 아파, 차마 소리도 못 냅니다.

'왜, 나만 때리냐고?'
불평도 합니다.

'이렇게 힘들고 어려워서야 누가 예수를 믿겠느냐고'
투덜대기도 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도리개질은 멈추지 않습니다.

더 많이 부서지라 하심입니다.
더 많이 깨어지라 하심입니다.
더 많이 죽으라 하심입니다.

도리개질의 강도가
하나님 사랑의 깊이 입니다.

왜냐하면, 부서져야 사용하시고, 부서진 만큼 쓰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베드로 사도의 권면은 이렇습니다.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라"(14b)

우리들이 가장 조심해야할 것이 바로 탐욕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길에서 가장 이기기 힘든 것이 욕심입니다. 야고보는 죄의 시작이 곧 욕심이라고 했습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4-15)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기를 부수는 길은 곧 욕심을 부수는 것입니다. 혹 "파인애플 스토리"란 책을 읽어보셨는지요? 이 책은 뉴질랜드 영인 남태평양의 어느 작은 섬에서 일어난 실화입니다. 주인공은 그 섬에 복음을 전하려 들어간 선교사입니다. 이 선교사 부부는 열심히 원주민들을 위하여 봉사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다가 외지로부터 들여온 파인애플 묘목으로 인해 원주민들과 담을 쌓게 되고, 그들을 모두 잃어버릴 지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즉 열매를 맺은 파인애플을 원주민들이 선교사 몰래 다 훔쳐간 것입니다. 이 일로 서로간에 미움이 싹트고, 불신하며 떠나간 것입니다. 낙심하여 본국으로 돌아간 선교사 부부는 "Basic Life Principle"이란 수련회에 참석하게되었는데, 주제의 내용이 "주라 그리하면 더 풍성히 얻으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은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선교 사역의 실패는 바로 파인애플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복음도 주고, 약품도 주고, 생필품들도 나누어주고서는, 자기들이 좋아하는 파인애플은 주기 싫었고, 그 욕심으로 그들을 미워하게 되었던 것이 지난 여러 해 동안 복음을 위하여 수고했던 그 모든 것을 잃게되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선교사 부부는 다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파인애플 농장에 들어가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제는 이 농장을 주님께 드리겠습니다. 주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 후 원주민들은 그 농장이 선교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알고는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엔 선교사의 것을 훔쳤지만, 이젠 하나님의 것을 훔친다는 두려움에 빠져 훔치기를 멈추게 되었습니다. 그 후 선교사는 자기들이 좋아하는 파인애플을 마음껏 막을 수 있게 되었고, 원주민들도 선교사가 마음껏 가져가도 좋다는 말에 존경을 표하면서 더욱 그 섬의 복음화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는 실화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욕을 버리면 "주라 그리하면 더욱 풍성히 받으리라"는 진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3. 마무리하면서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17b)

오실 이가 속히 오실 것입니다. 아니 우리가 걸어갈 길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우리도 모든 행실에 자기를 주인하고 사욕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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