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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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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눅 17: 11-19

  오늘은 누가복음 17장 11절에서 19절까지 있는 말씀가지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5절 하반절을 보면,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라고 하였고 또 18절을 보면,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온 자가 없느냐"라고 하였습니다. 두 곳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라고 제목을 정했습니다.

  오늘은 맥추감사절로 지키는 날입니다. 지나온 6개월도 하나님덕분에 살았고 또 앞으로의 6개월도 하나님덕분에 살게 될 것을 믿고 감사 드리는 절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땅을 기업으로 받고 농사를 지어 제일 처음 거두는 밀을 추수한 후에 제일 좋은 것을 가지고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한 가정도 빠짐없이 일주일동안을 맥추감사절로 지킨 것을 유래로 해서 오늘날에도 우리가 지키고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은 열 명의 문둥병자인데 그 중에서도 사마리아인 문둥병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내용이 기록됩니다. 그래서 오늘의 주인공은 열 명 중에서도 이방인으로 취급받는 사마리아인 문둥병자입니다. 사마리아인 문둥병자는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는가를 본문에 의지하여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섞임으로 영광 (11-14)

  섞임으로 영광이라는 말은 어울림으로 주께 영광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1절부터 14절까지를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마지막으로 올라가고 계시는 때입니다. 이번에 올라가시면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죽게 됩니다.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이의 길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다가 열 문둥병자를 만났는데 그 중에 아홉 명은 유대사람이었고 한 명만이 사마리아인, 즉 이방인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 한 명이 아홉 명의 유대사람과 어울리고 섞인 것이 결과적으로 큰 은혜를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예수님도 분명히 밝히시기를 이방인이라고 하셨는데 이방인은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이요, 유대인이 아닌 사람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본래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족속이었지만 앗수르 대제국이 북왕국을 점령한 후에 식민정책을 써서 거기에 사는 유대인의 일부를 옮기고 다른 나라 사람들을 그곳에서 살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피가 섞여서 그만 잡족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순수한 유대혈통을 가진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 취급을 하고 상종을 안 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도 이방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마리아인 한 사람이 문둥병을 인연으로 했을지라도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유대인과 어울렸다는 것이 참 복된 일이었습니다.

  본문의 사마리아인은 어떤 사람들과 섞였는지 상고해보면 첫째로, 믿는 사람들과 섞였습니다. 이방인은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유대인은 문둥병에 걸렸지만 하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안 믿는 사람이 믿는 사람과 어울리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우리가 도둑놈과 자꾸 어울리면 도둑놈이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깡패들과 어울리면 깡패가 됩니다. 그런데 예수를 잘 믿는 사람과 어울리게 되면 예수장이가 됩니다.
  둘째로, 기도하는 사람들과 섞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침 그곳을 지나가실 때에 멀리 서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기도가 아닙니까? 아홉 명은 본래 믿는 사람들이요, 기도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기도할 줄 모르지 않습니까? 그 사마리아인이 믿는 사람 중에서도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들과 어울린 것입니다. 우리교회 성도가 4만 2천명 아닙니까? 4만 2천명 중에서도 일년동안을 합쳐도 단 한시간을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지금 예배하는 이 가운데에는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기도 안 하는 사람과는 어울려봤자 배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과 어울려야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리고는 결국에 모두가 은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순종하는 사람들과 섞였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면서도 절대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무조건 내 뜻대로만 되게 해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자신이 알 바가 아니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적이 없습니다. 기도는 많이 하면서도 순종은 안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부르짖는 열 명의 간구를 들으시고 제사장들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 당시 문둥병자들은 병원에서 의사가 진찰하지 않고 제사장에게 진찰을 받습니다. 몸이 좀 안 좋아서 제사장에게 가서 진찰을 받은 결과 문둥병이라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문둥병이라고 진단을 내리면 그 시간부터 집과 동네에서 쫓겨납니다. 그 당시에는 문둥병을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곳에 가서도 못 고칩니다. 무슨 약을 써도 고칠 재간이 없습니다. 문둥병에서 고침을 받는다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을 뿐입니다. 문둥병이 나은 것 같아 제사장에게 다시 가서 재진찰을 받아본 결과 문둥병이 나았습니다. 그러면 제사장이 결례라는 제사를 드려준 끝에 이 사람은 문둥병이 나았다고 공포합니다. 그 다음부터는 자신의 집에도 들어갈 수 있고 동네에도 들어갈 수 있고 자유롭게 활동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이 제사장들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는 것은 너희의 몸이 나았으니 제사장의 진단을 받고 결례를 드리고 제사장이 선포한 후에 자유롭게 활동하라는 말이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제사장에게 가라고 말씀하셨을 때 문둥병이 낫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그때 믿음으로 제사장에게 가기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열 명은 문둥병이 지금 당장 나은 것은 아니지만 주님이 가서 제사장에게 진단 받으라고 하셨으니 그 말씀을 믿고 갔습니다. 즉 믿고 순종했습니다. 이방인으로서 사마리아인이 순종하는 그 무리들과 어울린 것입니다. 가다가 깨끗함을 받고 큰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이 어울림이 이 사람에게는 얼마나 복된 것입니까? 그러기에 잘 믿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기도 많이 하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기도 많이 하는 중에서도 순종을 잘 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니 은혜를 받고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렸습니다.

  여러분들도 건성으로 믿는 사람들과 어울려봐야 배우고 얻을 것이 없습니다. 잘 믿는 사람들과 어울려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권사가 되려면 성경공부 하는 것이 첫째 조건이 아닙니까? 성경공부 한다고 해서 권사를 시키면 왜 그 다음 달부터 성경공부를 안 합니까? 그래도 되는 것입니까? 절대로 그러면 안됩니다. 성경공부를 하자고 하면 모두 나와 어울려 성경공부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봉사하자고 하면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과 어울려야 합니다. 또 기도하자고 하면 기도하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전도하자고 하면 전도하는 사람들과 어울려야 합니다.

  사마리아인처럼 여러분들도 잘 믿는 성도들과 열심히 섞여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감사함으로 영광 (15-18)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전혀 없지 않습니까? 전부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 예를 들면 찬란한 햇빛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그 햇빛을 누릴 때 돈주고 누립니까? 또 공기가 없으면 우리가 숨쉬며 살  수가 없는데 맑은 공기를 돈주고 누립니까? 모두 은혜입니다. 그리고 물 값을 내지 않고 씁니다. 수도세는 물 값이 아닙니다. 팔당에 있는 물을 서울시장이 우리들의 부엌까지 길어다 주는 수고비가 수도세일 뿐입니다. 절대로 물 값이 아닙니다. 그런가하면 여러분들의 부인을 돈을 주고 사왔습니까? 남편을 공로 세우고 받아온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공짜로 짝을 정해주시고 가정을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들, 딸을 낳을 때 돈주고 받았습니까? 전부 아들, 딸을 은혜로 받았습니다.
  그것뿐입니까? 우리가 성령을 받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고 천국의 백성이 되고 하늘나라에 가서 영생하는 것이 모두 거저 받은 은혜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가 무엇입니까? 감사라는 말은 '유'라고 하는 '좋다'라는 말과 '카리스'라고 하는 '은혜'라는 말을 합해서 합성어로 된 단어 '유카리스'입니다. 이 말을 번역한 말이 감사입니다. 즉 은혜 중에 최고의 은혜가 감사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햇빛을 누리면서도 감사할 줄 모르고 부모님이 온갖 것을 다 베풀어주어도 그분들은 당연히 나에게 베풀어야 하고 나는 당연히 받아야 한다라고 생각하며 전혀 감사할 줄 모르지 않습니까? 부모님께서 고생하며 밥 한 그릇을 따끈하게 지어 먹일 때 다 먹고 나서 '참 감사합니다'라고 감사할 줄 아는 자녀가 참 아들이요, 딸이 아닙니까? 그래서 모든 은혜 중에 최고의 은혜가 감사입니다. 감사할 줄 알아야 사람입니다.

  성도가 은혜는 받았는데 감사할 줄 모르면서 은혜 받았다고 하면 그것은 전부 거짓은혜입니다. 잘못 받은 은혜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감사하게 되어 있습니다. 최고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4절에서 18절까지를 보면,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위의 본문의 내용은 사마리아인이 하나님께 감사할 때 주님께서 그 감사를 받으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선포하시는 내용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첫째로, 건강회복을 감사했습니다. 즉, 열 문둥병자가 어디에 가도 못 고치는 병을 제사장에게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 것을 감사하였습니다. 죽을병에서 고침을 받았으니 당연히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죽을병을 걸렸다가 나은 것보다는 1년 365일동안 감기 한번 안 걸리고 건강하게 사는 것이 더욱더 감사할 일이 아닙니까? 그러니 우리의 건강함을 하나님 앞에 감사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큰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즉 공개적으로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 것을 알고 돌아와 누구도 모르게 소곤거리며 주님께 감사 드리고 돌아갔습니까? 큰 소리로 누구나 다 알도록 공개적으로 감사를 드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맥추감사절로 지키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 헌금을 드릴텐데 그것을 공개해볼까요? 제가 몇 년 전에 감사절 헌금을 공개했을 때 얼굴을 붉히며 뒤에서 수군수군하며 왜 공개했느냐며 말이 많았습니다. 왜 말이 많습니까? 헌금이 공개되니까 자신의 체면이 안 선다는 뜻이 아닙니까? 왜 떳떳하지 못하게 하십니까? 스스로가 떳떳하면 공개했다는 것에 대해서 왜 불평을 하겠습니까? 사마리아인은 떳떳하게 공개적으로 하나님께 사례했다는 것을 분명히 아시기를 바랍니다. 사례는 말로 하고 마음으로 끝내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금번 맥추감사절기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는 경배로 감사하였습니다. 본문에 보면 엎드리어 사례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사례는 감사입니다. 엎드리어 사례하였다는 것은 경배하며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경배는 약식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로 감사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반드시 예배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똑같이 병고침을 받았지만 아홉 명은 제가 가고 싶은 곳에 간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와 예배하고 경배하는 사람은 사마리아인 밖에 없었습니다. 나머지 아홉 명은 가다가 병고침을 받자 제사장에게 간 것도 아닙니다. 만약에 제사장에게 갔다면 왜 예수님께서 어디에 갔느냐고 물으시겠습니까? 모두들 자신이 가고 싶은 곳에 간 것입니다. 똑같이 병고침을 받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제가 좋아하는 곳으로 갑니다. 요즘 말로 말하면 주일날 예배드리지 않고 설악산에 갔다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꼭 주님 앞에 나와 경배하고 예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로 드리는 감사를 기뻐하십니다. 사마리아인처럼 하나님 덕분에 건강한 것을 감사하고 공개적으로 감사하고 예배로 항상 감사하는 여러분들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바랍니다.

  셋째, 믿음으로 영광 (19-)

  로마서 4장 19절에서 22절까지를 보면,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는데 믿음이 점점 견고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배경을 설명 드리면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 고향 땅을 떠날 때 하나님께서 '네 자손으로 하늘의 별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많게 하겠고 네 씨로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고 철석같이 약속하십니다. 그때가 아브라함의 나이 75세입니다. 가나안 땅에 와서 살면서 25년이 지나서 100세가 된 것입니다. 그쯤 되면 남자로서는 역할이 끝나지 않습니까? 그리고 아내 사라도 역시 단산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믿음이 점점 견고하여졌는데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셨습니다. 인간의 능력이 한계에 이르렀던 그때에도 아브라함은 믿음을 견고히 하였습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역사하사 이삭이라고 하는 아들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절대 기쁘시게 못합니다.

  예를 들면, 어머니가 자녀에게 남편을 가리키며 네 아버지라고 하였는데 자녀가 "어떻게 믿을 수 있어요? 믿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아버지라 부르지도 않고 아버지로 모시지도 않고 섬기지도 않습니다. 뭐라고 얘기하면 웃긴다고 하면서 믿지 않습니다. 그때 아버지로서는 통탄할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너무도 기가 막혀서 그런 사람이 어디에 있겠냐고 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누구십니까? 영의 아버지요, 참 아버지가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도 않고 모시지도 않고 섬기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면 웃긴다고 하면서 믿지 않습니다. 아버지를 부르지도 않고 섬기지도 않고 모시지도 않는다면 아버지의 기쁨이 되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믿고 따르며 처음부터 끝까지 점점 더 잘 믿는 사람의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고 의로 여기시고 그 믿음으로 영광 받으십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9절을 보면,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그 구원을 그대로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안 믿는다고 하면 예비된 구원은 나와 상관이 없게 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2천년 전에 내 죄 때문에 그 죄 값을 치르시기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으면 예수님의 죽음이 내 죽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으면 예수님의 부활이 내 부활이 됩니다. 우리를 위해 예비하고 계시는 천국에 가서 영생할 줄을 믿으면 그 믿음 때문에 하늘나라가 우리의 것이 됩니다. 믿음이 없으면 이 모든 것과 상관이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가장 복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미국에 어린 소년하나가 집집마다 다니며 또 길거리에서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캔디를 열심히 팔았습니다. 그러다가 한번은 어느 집 대문을 두들겼습니다. 그 집에서 점잖은 신사가 나옵니다. 그 분의 이름이 데이븐 스티븐스입니다. 이분은 목사입니다. 어린아이는 그것을 모릅니다. 그리고는 캔디를 팔아 달라고 합니다. 그 목사님께서 아이에게 "집에 먹을 것이 없니? 어떻게 어린 네가 캔디를 팔러 다니니?"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집에 먹을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목사님은 그럼 왜 캔디를 팔러 다니냐고 다시 묻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말하기를 동생이 어린이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그 어린이병원의 운영이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친구 지미와 함께 캔디장사를 해서 100만불을 벌어 헌납을 하려고 한다고 얘기하였습니다. 100만불이 작은 돈입니까? 결코 작은 돈이 아닙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다시 묻기를 친구 지미와 너는 어느 단체 소속이냐고 묻습니다. 그 소년은 어느 단체의 소속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럼 어떻게 네가 백만불을 벌려고 하느냐고 묻자 그 소년이 대답하기를 "저는 제 친구 지미와 둘이면 충분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때 스티븐스 목사님이 크게 충격을 받습니다. 여지껏 이런 믿음생활을 못했다는 것입니다. '나 더하기 하나님 둘이면 충분합니다'라고 하는 믿음 말입니다.

  나 더하기 천만명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라고 얘기했지만 천만명이 나에게 다 더해진다 할지라도 못하는 것은 못합니다. 그러나 나 더하기 하나님은 충분합니다. 못할 것이 없습니다. 이 믿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처럼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고 주님의 기쁨이 되는 여러분들의 믿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사마리아인은 섞임으로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먼저 잘 믿는 사람들과 섞였습니다. 동시에 기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과 섞였습니다. 그런가하면 순종하는 사람들과 섞이다가 은혜 받고 영광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둘째는 감사함으로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먼저 건강회복을 감사하였고 동시에 공개적으로 큰 소리로 영광을 돌렸는가 하면 경배, 즉 예배로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셋째는 믿음으로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사마리아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구원 얻는 믿음은 최고의 복이요, 믿음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인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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