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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순결한 삶, 하나님의 뜻] 살전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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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결한 삶, 하나님의 뜻> 살전4:1-8
새문안교회 2003. 8. 3 주일예배

요즈음 사람은 사람인데 "고양이족"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인종이 우리나라 젊은이들 사이에서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했답니다. 최근 최고의 인기를 누리다가 종영된 TV드라마 "옥탑방 고양이"에서처럼 혼인하지 않고 남녀가 같이 살거나 동거를 희망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드라마 때문에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동거를 위해 "묻지마 휴학"이 늘어난다고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동거라는 현상은 사실 새로운 풍조는 아닙니다. 이미 지금 40-50대의 사람들의 학생시절에도 대학가 주변에 동거하는 하는 학생들이 꽤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동거를 하되 주로 경제적인 이유에서 했고, 쉬쉬하면서 했으며, 내놓고 동거가 뭐가 나쁘냐고 주장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공공연히 동거를 찬성하고 나서는 사람들이 많아질 뿐 아니라, 찬성의 주된 이유가 이혼이라는 위험부담을 줄이기 위해서 미리 살아보면서 상대방을 테스트하려는 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지금 동거 중에 있는 사람들이 혼인 후 가정의 지속적인 행복을 위해서 진지하게 테스트하며 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명분을 그렇게 내세울 뿐 혼인하여 가정을 꾸밀 생각은 전혀 없으면서 단지 즐기기 위해서 동거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한국사람들보다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훨씬 솔직한 서구사람들을 보면 적어도 대학생 때의 동거는 거의 대부분 성관계를 편하고 부담없이 자유롭게 즐기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한 학년이 끝나고 방학이 되어서 집에 돌아갈 때면 동거관계는 자연히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면 또 새로운 상대들과의 동거가 시작됩니다. 이렇게 동거하는 학생들에게서 혼인생각은 애당초 없는 것입니다. 동거하는 어떤 학생들은 "너 걔를 사랑하느냐?" 물으면 어깨를 들쑥이면서 "모르겠어" 대답하면서 "그래도 혼자 있는 것보다는 낫다고" 말합니다.

지속적인 행복을 위해서 동거기간을 갖는다는 말을 믿는다 하드라도 그 결과는 기대하는 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동거가 젊은이들 말대로 쿨하고 멋지고 행복을 위해 실효성이 있는 것처럼 여겨질지 모르나 서구에서는 이미 동거가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것임이 밝혀졌습니다. 영미에서의 사회학자들에 의하면 혼인하여 사는 사람들이 동거하는 사람들보다도 더 건강하게 오래 살며 돈도 더 잘 벌고 생활수준도 높다고 합니다. 최근 영국 사회조사연구소의 발표에 따르면 동거하는 사람들은 생활형편과 건강정서가 불안정하고 바람도 더 피운다는 것입니다. 동거하는 부모들 밑에서 자란 혼인 외 자녀들은 혼인했다가 이혼한 부모들의 아이들보다도 공부도 못하고 비행에 빠질 가능성이 많다고 하는 것은 동거와 혼인의 법적 차별이 없는 스웨덴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살아보고 혼인하는 것이 안전하다는 주장이 한낮 환상이라는 것은 동거를 거쳐 혼인한 부부들의 이혼율이 훨씬 더 높다고 하는 사실에서 확실히 입증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여대생들 사이에서 동거를 반대하면 수구 꼴통에 반개혁 반여성적이라고 찍히는 분위기라고 합니다. 서구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시험해보고 동거가 행복과 거리가 먼 것임이 밝혀졌는데도 그것을 새롭고 안전한 행복방식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수구 꼴통에 반개혁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요즘 젊은이들은 "사랑하면 같이 살아도 좋다"는 말을 쉽게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사랑이 정말 사랑인지를 진지하게 물어봐야 합니다. 단순히 일시적 감정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젊은이들을 많이 봅니다. 지금 내 감정이 진짜 사랑인지 아닌지를 가늠할 수 있는 3대 요소가 친밀감, 열정, 헌신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동거에는 헌신이란 없습니다. 마음 안 맞으면 언제든지 쉽게 갈라서기 위해서 하는 동거 속에 헌신이라는 것이 설 자리는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4-7) 했습니다. 가정의 행복은 상대방을 잘 아는 것이 보장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간의 상대방에 대한 책임감과 배려와 양보와 헌신과 인내가 가정의 행복을 지켜가는 열쇄임을 알아야 합니다.

동거에 대한 의식의 변화를 말하지만 사실 그러한 변화를 이끈 것은 순결에 대한 의식의 변화라고 봅니다. 어떤 동기에서 동거를 하던 동거하는 사람들이 그 대가로 내던지는 것이 순결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아니 동거를 위해서 순결을 못 지키는 것이 아니라, 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없기 때문에 쉽게 동거를 하거나 동거를 꿈꾸는 것이라고 봅니다. "결혼하기 전에 한번 살아보면서 서로를 테스트하는 기간인 동거를 직접 체험했다"는 "옥탑방 고양이"의 작가 자신이 모 일간지에 실은 글에서 "순결이라는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으로 족쇄를 채우고 있다"고 불만을 터뜨렸다고 합니다.

순결이 전근대적인 것이고 족쇄로 여겨지는 사람들은 그 작가뿐 아니라 많이 있습니다. 문제는 전근대적인 것이 과연 다 나쁜 것이고 현대에 유행하는 것은 다 좋은 것이냐 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족쇄"라는 표현을 수용한다 하드라도, 미혼의 젊은이들에게 순결이라는 족쇄를 채우는 것이 과연 나쁜 것이냐 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들의 생각과 논쟁을 통해서 결론을 내리려 해서는 안 됩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1절에서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상기시키고, 2절에서는 "주 예수로 말미암아 준 명령"을 언급하면서, 3절에서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밝혔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설명하기를 "음란을 버리고 ...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라 ...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라 "(3, 5, 7)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에서는 이 가르침을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바꾸어 말해서, 우리의 순결한 삶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순결한 삶이 하나님의 뜻임은 일찍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십계명 속에서 밝혀진 바 있습니다. 십계명의 제7계명인 "간음하지 말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간음의 성경적 정의는 아주 분명합니다. 간음 혹은 성경이 음행이라고 부르는 것은 합법적으로 혼인하여 부부가 된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서의 성관계 외의 일체의 의지적 성행위입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자기의 아내나 남편 외의 다른 사람과의 성관계, 아내나 남편이라 할지라도 결혼 이전의 성관계, 동성 사이의 성행위, 짐승과의 성행위가 다 포함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음행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고 반복해서 분명히 밝힙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가증스럽게 여기시고 단호하게 금하신 것이 우상숭배인데, 하나님 자신이 우상숭배를 종종 간음에 비유하신 것은 간음 또한 하나님께서 극히 혐오하시고 정죄하시는 것임을 말합니다. 다음 몇 구절들을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레 20:10)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레 20:13)
"남자가 짐승과 교합하면 반드시 죽이고 너희는 그 짐승도 죽일 것이며 여자가 짐승에게 가까이 하여 교합하면 너는 여자와 짐승을 죽이되 그들을 반드시 죽일지니 그들의 피가 자기들에게로 돌아가리라"(레 20:15-16)
조금 길지만 신22:13-26의 말씀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아내를 맞이하여 ... 그 처녀에게 처녀의 표적이 없거든/ 그 처녀를 그의 아버지 집 문에서 끌어내고 그 성읍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는 그가 그의 아버지 집에서 창기의 행동을 하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행하였음이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희 가운데서 악을 제할지니라/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동침하면/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죽일 것이니 그 처녀는 성안에 있으면서도 소리 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가운데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만일 남자가 어떤 약혼한 처녀를 들에서 만나서 강간하였으면 그 강간한 남자만 죽일 것이요/ 처녀에게는 아무것도 행하지 말 것은 처녀에게는 죽일 죄가 없음이라 이 일은 사람이 일어나 그 이웃을 쳐죽인 것과 같은 것이라"

간음에 대한 단호한 입장은 예수님에게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실제적 간음행위뿐만 아니라 마음에 품기만 한 간음행위까지도 정죄하고 있습니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7)

신약성경 전체의 입장도 아주 단호합니다. 몇 구절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히13:4),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롬13:13),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6:9)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8-20)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고전10:8)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19, 21, 24)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3:5) 했습니다.

성은 무서운 중독성과 전염성이 있는 것입니다. 레19:29에는 "네 딸을 더렵혀 창녀가 되게 하지 말라 음행이 전국에 퍼져 죄악이 가득할까 하노라" 했습니다. 한 번 둑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겉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사회에 만연한 선정주의에 대해서 단호하고 냉혹한 대응을 해야합니다.

성은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성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부부 사이의 사랑과 신뢰를 깊게 해주는 하나님의 귀하고 고마운 선물입니다. 부부 사이에서 마음껏 편하게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계속적인 창조사역의 도구로 쓰이는 은혜로운 것입니다. 단 정당하게 영위될 때에만 그렇습니다.

정당하지 않은 성은 위험하고 무서운 것입니다. 파괴적이고 온갖 고통과 불행과 후회와 파멸을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잠6:32에서는 "여인과 간음하는 자는 무지한 자라 이것을 행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망하게 하며/ 상함과 능욕을 받고 부끄러움을 씻을 수 없게 되나니" 했습니다. 그리고 정당하지 않은 성은 자기자신뿐 아니라 남에게까지 연쇄적인 피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입니다.

절제와 인내의 덕을 키워야 합니다. 또 그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본능적 욕구를 다스리고 절제하며 인내할 줄 아는 것이 인간이 짐승과 다르게 하는 것입니다. 잘 먹어서 건장하고 힘이 넘치는 요즘 청년들에게 어떻게 참으라고 하느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아도 안 죽습니다. 참는다고 병이 나는 것도 아닙니다. 얼굴이 비뚤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 일 없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특별히 생각해볼 말씀이 있습니다. 롬13:9의 말씀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롬13:9). 이것은 "간음하지 말라"는 부정적 형태의 제7계명의 긍정적 의미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임을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하기만 하면 성관계를 가져도 된다는 사고가 잘못된 것임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면 간음을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면 더더욱 간음을 해서는 안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금하시고 정죄하신 음행과 죄 속으로 끌어들여서는 안 됩니다. 정말 사랑한다면 합법적으로 혼인해서 정당하게 성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위의 사람들에게 사랑이 아닌 그 반대의 결과를 안겨줄 것입니다. 요즈음 "노란 손수건"이라는 TV드라마를 시청하시는 분들은 미혼의 남녀가 성관계를 가졌다가 본인들은 물론이고 주위의 모든 가족들에게 끊임없이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가 하는 것을 잘 보실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에서의 사탄의 가장 음흉하고 무서운 계교는 성윤리를 이완시키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미명하에 음란을 미화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 사탄은 각계각층의 인사들과 언론■방송매체들을 동원해 순결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건전한 성윤리를 파괴하며 하나님의 뜻에 도전하는 일에 광분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요새가 어떤 세상인데 케케묵은 그 꼬막옛날의 계명을 현대인에게 강요하려고 하느냐고 항변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싫어하든 말든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이 계명을 취소하지 않으셨습니다. 제7계명과 이에 관련된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싫다면 성경 전체를 거부해야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 제7계명에 따르는 하나님의 뜻은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제는 세월이 바뀌었으니 본능 따라 감정 따라 자유롭게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죄는 용서될 수 있으며 따라서 간음의 죄도 용서될 수 있음을 우리는 말해야 합니다. 우리도 간음한 사람이 뉘우치고 회개할 때 용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간음한 사람을 용서는 하되 그 행위를 정당화해서는 안됩니다. 간음하다가 붙잡혀온 여인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8:11). 여기서 보듯이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행위를 정죄하지는 않으셨으나 그 여인의 행위는 분명히 죄라고 하셨고 다시는 그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성적으로 문란해진 사회를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으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폼페이 등 다 불로 멸망시키셨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지금 서구사람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음란이 넘쳐흐르고 사람들이 너무나 분별 없이 문란한 삶의 풍조를 몸과 마음을 내맡기고 있습니다. 멸망의 길을 걷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결을 아름답게 여기며 순결한 삶을 삶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심 속에서 우리의 기쁨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죄하시는 일 가운데서 우리의 기쁨을 찾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미혼이든 기혼이든 젊은이들도 어른들도 각각의 순결을 지키며 순결한 삶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서 보장하시는 행복을 누리는 우리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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