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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통치속에 살라 (눅 11: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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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나님의 통치속에 살라 (눅11:24-26) 
 
현대인들의 특징은 속박 당하기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도 안할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교회도 등록을 안하고 다니겠다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또 종교가 자신을 속박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를 가지기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여러분들은 교회에 소속됨을 속박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교회는 여러분을 마귀와 세상으로부터 보호하는 울타리가 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내가 너희와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혼자 독불장군처럼 외롭게 살지 말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 주변에 '나는 교회에 다니지 않을 뿐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라 고 말하는 분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신앙은 매우 위험합니다. 어떤 군인이 총을 메고 전쟁에 나갑니다. '당신이 소속한 부대는 어딥니까?' 라고 물을 때 '나는 부대 같은 것은 없습니다. 나는 혼자 싸울 것입니다.' 이 군인이 온전한 싸움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영적 전쟁을 치루는 영적 군사들입니다.
이런 나홀로 신앙은 언제나 외롭고 사단의 공격목표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 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5:8)했습니다.

‘동물의 왕국’에서 보면 사자에게 먹히는 짐승들은 언제나 무리에서 이탈하여 홀로 풀을 뜯는 짐승들입니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하는 오늘 현대인들의 생각은 참 잘못된 생각입니다.

오늘 본문과 마태복음 12장 43-45절의 내용은 같은 내용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있던 귀신이 쫓겨났습니다. 어디 살만한 곳을 두루 찾아봤으나 마땅한 곳이 없어서 옛날 살던 그 집이 그리워서 다시 그 사람에게로 와서 보았습니다. 집이 텅 비어 있는데,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거기로 들어오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과거에 그 사람에게서 쫓겨났으니, 이제 다시 들어거려면 자기 힘만으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여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와서 그를 억제하고 들어 갔습니다.

그 곳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의 형편이 전보다 훨씬더 비참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영적인 원리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우리 영혼의 통치자로 모셔야 합니다.

미국 뉴욕 맨해튼에 흑인지역 할렘가가 있습니다.
그 곳은 18C에 네델란드 사람들이 만든 마을인데 지하철 계획으로 땅값이 폭등했다가 폭락하게 되자, 흑인들이 싼 땅을 사서 들어오므로 백인들은 흑인들을 피하여 떠나버려서 그 좋은 집들이 페허가 되었습니다. 빈집의 벽들이 다 무너져 있고 그 곳은 흑인들과 걸인들, 깡패, 노숙자들, 강도들의 천국이 되었습니다. 90년대에는 뉴욕의 택시 조수석에는 손님을 태우지 않았다고 합니다. 운전석 뒤에는 방탄유리를 설치할 만큰 택시강도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무서워서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무리 새집이라도 비워두면 먼지와 쥐가 들끓게 되고 이상한 냄새가나고 으스스한 기분마저듭니다.
교회에 다니다가 마음에 시험이 든 사람들 대부분이 교회를 쉬는 경우가 많습니다.
처음에는 그 뵈기 싫은 사람들을 안보니까 마음이 시원할지 몰라도 그런 사람 대부분이 나중에는 마음에 사단이 들어오게 되고 신앙을 영 멀리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입니다. 바로 천국의 삶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요셉은 비록 몸은 애굽의 바로 밑에 있어도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포로지에 끌려가 있으면서 느부갓네살, 벨사살, 다리오 왕의 왕국에 몸이 있었으나 그를 통치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 신상에게 절하지 않고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고 기도했습니다.
베드로 같은 사람,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도 비록 감옥에 죄수로서 갇혀 있었지만 그는 감옥 안에서도 주님의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주님과, 주님의 제자들과 함께 동행했지만 그는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신앙의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도 욕심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통치는 영광입니다. 기쁨입니다.
힘들고 괴로운 환경속에서도 하나님의 통치속에 살면 기쁩니다. 행복을 느낍니다.
시97:1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곳에는 축복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바울은 ‘주안에서’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주안에서’라는 말은 다른 말로 주님의 통치를 받는 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었기에 감옥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 ‘기뻐하라’고 권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이 위험합니다.

시인 엘리어트는 말하기를 "현대인의 심중에 없어야 할 것은 차고 넘치고 있으며, 있어야 할 것은 텅 텅 비어있다"라고 했습니다.
현대인이 삶의 공허를 느끼는 이유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보람이 없는 삶은 아무리 풍요롭게 살아도, 공허감이 있기 마련입니다. 인간 삶은 소유보다 존재 가치에 더 큰 비중이 있는 것입니다. 삶의 공허는 삶의 질적 빈곤에서 오는 것입니다. 비어있는 상태는 위험합니다. 사람의 질을 높여야 합니다. 어떻게? 삶의 목적이 분명한 삶을 살아야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 이를테면 집안이 비어있는 상태, 마음이 비어있는 상태를 ‘공허’라 합니다. 인생이 그 심중에 공허감을 느낄 때 고독하게 되며, 그 고독을 메우기 위하여 무엇을 채우기 원합니다. 그리하여 탐욕, 정욕, 향락을 채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내면을 공백상태로 두어서는 안됩니다.
쉽게 말한다면 멍- 하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것은 참 위험합니다.
비어있는 마음과 생각에 마귀가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입니다. 생각은 중요합니다. 생각이 사람을 만듭니다. 즉 좋은 생각을 하면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 됩니다. 나쁜 생각을 하면 나쁜 사람이 됩니다.
멍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엄밀히 따져보면 멍한 사람들의 마음에는 매우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생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정신분열증에 걸릴 위험이 높습니다. 우울증에 걸릴 위험이 큽니다. 이 우울증은 또한 위험합니다. 이 우울증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긍정적인 사고가 장수의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노인의학연구소 소장인 레너드 푼 박사가 100세 이상 장수한 중노동자, 사무원, 부모가 장수하지 않은 사람, 등 다한 조건 속에서 노인 350명을 대상으로 10년 동안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점을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건강하고 장수하는 사람들은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대다수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생각에서부터 축복을 심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에 주님은 귀신이 나간 집은 깨끗하게 소제된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청소를 했는데 주인은 살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뭘 의미합니까?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서 죄를 회개하고 성령과 말씀으로 심령이 청소된 마음이라 하도라도 은혜충만, 성령충만, 말씀충만을 계속하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은혜받았다는 것만 자랑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회색분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편도 아니고 저편도 아니 중간지대에 있는 자를 가리킵니다. 주님은 이런 자를 가장 싫어합니다. 미국에 남북전쟁이 한창일 때 한 농부가 윗도리는 북군의 옷, 바지는 남군의 옷을 입었습니다. 이 사람은 남군이 이기면 빨리 남군의 옷으로 갈아입고. . .그는 남군으로 오해를 받아 북군의 공격을 받고. . . .

계3장에 보면 주님의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책망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교회는 돈이 많았고, 성도들이 부유했고, 어떤 어려움도 없는 가운데 평안한 가운데 신앙생활하는 교회였습니다.
라오디게아는 리쿠스라고 하는 계곡이 있는데 그 계곡은 아주 기름지고 비옥해서 목축과 농사하기에 대단히 좋았습니다. 이 곳에서는 부드럽고 윤택 있는 흑양모가 출산되었는데 이것은 의복을 만드는데 이주 중요한 재료가 되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상공업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금융의 중심지가 되었고 그 당시 가장 부유한 도시중의 하나로 인정되었습니다.
라오디게아에서 약 9Km떨어진 곳에 파묵칼레라는 온천이 있는데 석회석이 굳어 형성된 온천으로 유황과 탄수화물이 함유된 세계적인 온천입니다. 세계 각국에서 찾는 유명온천입니다.

주님은 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 책망의 말씀을 하십니다. 신앙이 미지근하다는 것과 가난하면서 부자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미지근하면 안 됩니다. 미지근하다는 것은 신앙적인 열심이 없다는 말입니다. 무관심은 미지근한 상태의 신앙을 만들어내며, 세상과의 타협과 무사안일주의의 신앙을 일컫는 표현입니다. 미지근한 것은 구역질나는 상태입니다.

신앙은 미지근하면 안 됩니다. 미지근하다는 것은 신앙적인 열심이 없다는 말입니다. 무관심은 미지근한 상태의 신앙을 만들어내며, 세상과의 타협과 무사안일주의의 신앙을 일컫는 표현입니다. 미지근한 것은 구역질나는 상태입니다. ꡒ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ꡓ계3:16) 표현이 그래서 나오는 것입니다. 미지근하면 부패합니다. 신앙도 열심이 없으면 변질되고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게 됩니다. 냉면은 차야 맛있습니다. 뜻뜻한 냉면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셋째,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일도 열심있는 사람이 성공하지만 신앙생활에도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주님이 찾으시는 것은 열심있는 믿음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엔가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선한 일에 미치지 못하면 악한 일에 미치게 마련입니다. 술에 미치든가, 도박이나 오락에 미치든가, 향락에 미치든가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믿음생활에 미쳐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미칠까봐 교회에 발을 들여 놓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잘 못 미친 사람들을 봤기 때문입니다.
흔히 예수에 미쳤다는 사람들은 가정도 돌아보지 않습니다. 자녀도 돌아보지 않습니다.
부부관계도 무관심합니다. 그것은 제대로 미친 것이아닙니다.
제대로 미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정신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사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빌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직장에서도 예수님의 냄새가 풍겨나는 사람입니다. 말에나 행동에 있어서 본이되는 사람입니다.
‘성령충만’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성령충만이 무엇일까요?
우리안에 하나님이 임재하심이라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임재하심으로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이 임하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 공허한 상태에 있던 그들에게 성령하나님이 오셔서 통치하시니 교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가 이땅에 임하게 된 것입니다.
이땅에 교회가 있는 것은 성령님이 임재하신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가 있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넷째, 지속해야 합니다.

교회가 처음에 시작될 때에만 성령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해서는 될까요? 그러면 교회의 기능을 다 할 수없습니다.
지속적이어야 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마음에 상주해 계시고 내주하심으로 우리를 통치하시므로 우리의 신분의 변화를 가져오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충만할 경우에는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데까지 성장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통치로 충만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엡5:16에서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말합니다. 황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 곧 세월입니다. 세월은 돈을 주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선물입니다. 엄청난 이 선물을 우리가 허송해서는 안됩니다. 악하고 어두운 생활, 거짓되고 불의한 생활, 방탕한 생활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악하고 더러운 생활을 위해 시간을 낭비하는 동안 우리의 마음에 사단이 통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면서 살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줄 알 때 모든 생활에 기쁨과 감사와 소망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우리가 뭔가에 취하여 살아가는 존재이지만 우리의 정신을 몽롱하게 만드는 것들에 취하여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몽롱하게 만드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텔레비전, 인터넷, 노름, 환각제, 술, 저질 잡지. . . .
이런 것들에 취하여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통치를 맛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찬송하라고 합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이사야 43:21에 보면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지으신 목적은 하나님의 찬송을 부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20절) 신앙생활은 바로 감사생활의 연속입니다. 감사생활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이루어지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이 때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사탄이 통치하지않고 성령님이 통치하도록 세월을 아끼고, 깨어기도하고,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좋아하지 말고 늘 하나님을 찬송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함으로 성령의 통치를 받으며 성령충만함 속에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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