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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란 무엇인가?(8) :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는 것 / 마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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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란 무엇인가? “왼편에 있는 자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는 것
마25:41-46

며칠 전에 기독교 티비에 방영된 시대인물이란 대담 프로에 나온 손봉호 교수님의 대담을 재미있게 듣고 본 일이 있습니다. 진행자가 오늘의 젊은이들에게 주고 싶은 말씀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손봉호 교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오늘의 젊은이들이 너무 자기 평안과 자기 안일과 자기 쾌락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은 동물적인 아주 저급한 본능적인 추구입니다. 사람의 가치는 자기의 평안이나 자기의 안일이나 자기의 쾌락을 추구하는데 있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면서 사는데 즉 가난하고 병든 자들에게 사랑과 봉사의 손길을 펴면서 사는데 있습니다. 철학의 진정한 목적도 고통을 줄이는데 있고 특히 기독교의 목적은 이 세상의 고통을 줄이는데 있습니다. 나의 쾌락과 나의 행복을 조금 희생하고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줄이면서 사는 것이 참다운 가치 있는 삶입니다. 오늘의 젊은이들이 좀 높은 좀 고상한 삶의 이상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마음에 깊이 새길만한 귀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젊은이들뿐 아니지요. 우리 늙은이들도 너무 자기 몸의 평안 자기 몸의 안일 자기 몸의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고 있지요. 희생은 싫어하지요. 주일 하루를 종일 하나님께 드리는 것도 힘겨워 하지요. 이웃에게 조그만 사랑을 베푸는 것도 아까워하지요. 하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축복의 수단으로 삼지요. 이웃을 사랑과 섬김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성공과 행복의 수단으로 삼지요. 하나님이 첫째이고 이웃이 둘째이고 내가 셋째가 되어야 하는데 내가 첫째이고 하나님이 둘째이고 이웃이 셋째가 되지요. 우리는 지금 너무나 나의 평안 나의 안일 나의 쾌락을 추구하며 살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죄란 무엇인가?” 라는 주제로 8번 째 설교를 합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죄란 나의 평안 나의 안일 나의 쾌락을 추구하며 사는 것입니다. 죄란 잘못된 짓을 하는 것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마땅히 해야 할 옳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 오늘 본문은 주리고 목마른 자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지 않는 것을 죄라고 규정합니다. 고통을 당하는 자들에게 동정의 마음과 사랑의 손길을 펴지 않는 것을 죄라고 규정합니다. 보통 죄가 아니라 저주 받을 죄라고 규정합니다. “또 왼 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라고 말씀했습니다.

물론 구원은 우리의 선행이나 사랑의 행위로 받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동시에 선행과 사랑의 행위를 강조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규정했습니다(약2:26). 사랑이 없는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는 헛된 것이라고 규정했습니다(고전13:2). 예수님은 선행을 강조했습니다. “이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선행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말씀했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는 표식이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히13:16). 

오늘 본문은 선행이 구원과도 밀접하게 관련되는 것을 가르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왼편에 있는 자들은 선한 일을 일체 행하지 않다가 결국 영벌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동정과 사랑의 손길을 펴지 않는 것을 저주 받을 죄라고 규정했습니다. 눅16장도 선행이 구원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것을 가르칩니다. 한 부자가 자색 옷과 고운 베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운 생활만 하고 선한 일을 일체 행하지 않다가 결국 지옥 불에 떨어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 나타난 왼편에 있는 자들이 범한 죄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세가지로 나누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왼편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과 주인을 굳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마25장에는 세가지 비유가 나오는데 서로 보완되는 비유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과 왼편에 있는 자들을 같은 종류의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나 왼편에 있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을 ‘굳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마25:24). 누가복음 19:21은 ‘엄한’ 사람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왼편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굳은’ 사람, ‘엄한’ 사람, ‘무서운’ 사람, ‘무정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염소는 주인과의 관계가 옳지 못했습니다. 주인에 대한 애정도 없었고 존경도 없었습니다. 물론 순종도 없었습니다. 주인을 두려워했습니다. 주인이 앞으로 가자고 하면 염소는 앞발을 땅에 굳게 버티고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염소는 고집쟁이이고 굳은 사람이고 불순종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존경과 순종의 관계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굳은 분으로 생각하며 하나님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살면 어느덧 그 사람은 염소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을 굳은 분으로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회개와 죄 사함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애정의 관계 존경의 관계 순종의 관계가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목회자를 굳은 사람으로 무정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불행한 사람입니다. 목회자와의 사랑과 존경의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나의 인생이 좌우됩니다. 내가 목회자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나의 인생이 좌우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굳은 사람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어느덧 자기 자신도 굳은 사람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을 부드러운 분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어느덧 자기도 부드러운 사람이 되고 맙니다. 

저를 아주 좋아하는 어린이들이 있습니다. 승준이는 저를 보면 달려와서 가슴에 안깁니다. 백기, 범기는 제가 아플 때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성혜진이는 예쁜 편지를 자주 써서 보내곤 합니다. 다원이, 재은이는 조그만 선물을 가지고 제방에 자주 오곤 합니다. 경민이는 저를 보면 그저 웃으며 좋아합니다. 어린이들이 주님과 목사님을 좋아하는 것은 저들의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왼편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주인을 굳은 사람, 무정한 사람, 엄한 사람으로 보는 죄를 범했습니다. 하나님이 좋고, 목사님이 좋아야 되는데, 하나님도 굳은 분으로 목사님도 굳은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둘째 왼편에 있는 자들은 고난 당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굳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세상 만사에 대해서도 굳은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사람들이 귀하고 아름답게 보이지도 않고 동물과 식물들이 귀하고 아름답게 보이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이 배고파서 죽어가도 불쌍한 생각을 가지지도 못하고 동물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죽어가도 불쌍한 마음을 가지지도 못합니다. 마음이 굳어지고 무디어졌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무정하게 보는 사람은 사람에게도 무정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느끼지 못한 사람은 사람에 대한 사랑도 나타내지 못합니다. 사랑을 받고 사랑을 느끼는 사람만이 사랑을 나타낼 수 있고 사랑을 베풀 수도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고난 당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을 품지 못하고 굳은 마음과 무정한 마음을 품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눅10장에는 강도를 만나 매를 맞고 거의 죽게 된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간 무정한 제사장과 레위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눅16장에는 문전걸식하는 병든 거지 나사로에 대한 관심이나 동정심을 품지않은 무정한 한 부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눅18장에는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못한 무정한 부자 관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들의 공통적인 가르침은 고난 당하는 사람들에게 동정심도 사랑의 손길도 펴지 않는 것은 죄라는 것입니다.

왼편에 있는 사람들은 고난 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이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품지 못했습니다. 고난 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도 아무런 동정의 느낌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은 그 영혼이 위태로운 상태에 처해 있다고 하겠습니다. 여기 지극히 작은 하나는 우리와 가까운 이웃이나 동족을 의미하기보다는 우리와 문화나 습관이나 가치관이 다른 외국인 노동자나 북한 사람들이나 모슬렘권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까이 하신 세리나 창기나 죄인들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남편 다섯을 두었던 사마리아여인을 가리킬 수도 있고 죄인인 한 여인을 가리킬 수도 있고 수로보니게 여인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여기 지극히 작은 자 하나는 인종적으로 문화적으로 종교적으로 무시와 멸시를 당하는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지난 주일 고통 당하는 아프가니스탄 어린이들에 대한 말씀을 전했을 때 눈물을 흘리며 동정과 사랑의 마음을 표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제 방에 와서 그들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고 싶다고 말을 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고난 당하는 외국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도 아무런 동정의 느낌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영혼이 위태로운 상태에 처해 있다고 하겠습니다.


셋째 왼편에 있는 자들은 고난 당하는 자들을 찾아가지도 돕지도 않았습니다.

왼 편에 있는 자들은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손과 발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행동이 있었는데 비해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행동이 없었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아주 보잘 것 없는 인간 하나가, 주릴 때 찾아가서 먹을 것을 주지도 않았고 목마를 때 찾아가서 마시게도 하지 않았고 나그네 되었을 때 찾아가서 영접하지도 않았고 벗었을 때 찾아가서 옷을 입히지도 않았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 찾아가서 돌아보지도 않았습니다. 오네시보로는 옥중에 있는 사도 바울을 여러 번 찾아가서 돌아보았으나 부겔로와 허머게네는 찾아가지도 않았고 나중에는 바울을 버렸습니다(딤후1:15). 여러분들이 지난 1년 동안 고난 당하는 자들에 대한 아무런 사랑의 손길과 발길을 펴지 않았다면 여러분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위태로운 상태에 처해있다고 하겠습니다.

청교도들은 자신이 믿음에 서 있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자신이 주님과 올바른 관계에 서 있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일부러 고행도 했고 일부러 선행도 했습니다. 그것은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 문화를 창조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습니다. 장기려 박사도 일부러 선행을 힘썼습니다. 손봉호 박사도 일부러 장애인들을 돌보고 일부러 약자들을 격려하는 선행을 힘쓰고 있습니다. 저도 이번에 고통 당하는 사람들에게 조그만 위로와 사랑을 전하기 위해 일부러 아프가니스탄에 다녀왔습니다. 사실 저는 여러분들이 헌금한 사랑의 헌금을 가지고 가서 저들에게 전달하고 왔습니다. 여러분들이 드린 헌금은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을 먹이고 마시게 한 귀한 헌금이 되었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값싼 은혜(cheap grace)의 종교도 아니고 형식적이고 의식적이고 명목적인 믿음(formal, ritual, nominal faith)의 종교도 아닙니다.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를 강조하는 종교입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살전1:3). 기독교는 눈물과 사랑을 강조하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구제와 봉사를 강조하는 종교입니다.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느니라”(행10:4). 왼 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구제의 손길과 발길이 없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난 1년 동안 고난 당하는 자들에 대한 아무런 사랑의 손길과 발길을 펴지 않았다면 아무런 구제 헌금도 드리지 않았다면 여러분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위태로운 상태에 처해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는 것이 여러분들과 저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죄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굳은 마음을 품고 이웃에 대해서 무정한 마음을 품는 것이 치명적인 죄가 될 수 있습니다. 눅7장에 나오는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은 예수님에 대해서 굳은 마음을 가졌고, 죄인인 한 여자에 대해서는 무정한 마음과 함께 그를 정죄하는 냉혹한 마음까지 가졌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향해 굳은 마음뿐 아니라 문화와 종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들을 정죄하는 냉혹한 마음까지 가질 수도 있습니다. 북한 사람들은 고난을 당해서 싸다는 무정한 생각을 가질 수도 있고 모슬렘권 사람들은 고통을 당해서 싸다는 냉혹한 마음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잘못이 치명적인 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롬12:20)고 분부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부드러운 마음, 감사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을 품으시기를 바랍니다. 고난 당하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 대해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는 마음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손과 발을 움직이고 물질을 동원하여 사랑을 실천하시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조만간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 오른 편 아니면 왼 편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주님으로부터 두 말씀 중의 한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주님을 향한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이웃을 향한 동정과 사랑의 마음을 품으시고 사랑과 구제의 손과 발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천국을 준비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오른 편에 서는 복된 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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