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위대한 조연 (요 1:36-42)

  • 잡초 잡초
  • 395
  • 0

첨부 1



위대한 조연(요1:36-42)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멀티 플레이어'라는 새로운 포지션이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어느 정해진 한 자리만을 고수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여러 자리를 두루 감당하는 선수를 일컫는 말입니다. 공격도 하고 수비도 하고, 맨 전방에 있기도 하고 맨 후방에 있기도 하고 어디서 무엇이든 감당할 수 있는 그런 자를 선별하고 우대하는 세상입니다.

스포츠에서 뿐만 아니라 예술 분야에서도 이런 경향은 짙어가고 있습니다. 영화나 연극 분야에서도 주연과 조연의 경계가 점차 희미해져 가고 있습니다. 옛날처럼 주연이면 주연, 조연이면 조연, 엑스트라면 엑스트라로 뚜렷히 구분되는 게 아니라 점점 그 경계나 비중의 차이가 미약해지고 있습니다. 작품의 성패가 주연 못지 않게 조연에게서 판가름나는 경향도 없지 않아 때로는 유명 배우가 '까메오'라는 이름으로 한 장면에만 나오기도 하고, 조연도 주연 못지않은 비중과 관록을 지닌 배우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춘향전이 성공하려면 이몽룡이나 성춘향 못지 않게 걸출한 조연 방자와 향단 그리고 변학도가 있어야 하는 겁니다.

성경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살펴봐도 그렇습니다. 훌륭한 주연 못지 않게 훌륭한 조연이 필요하고, 위대한 주연의 배후엔 언제나 위대한 조연이 있습니다. '독불장군'이라는 말처럼 혼자서 영웅되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지원과 배려 그리고 후원이 있어 스타가 되는 겁니다. 아론과 훌이 있어 모세가 되고, 사무엘이 있어 다윗이 되고, 바나바가 있어 바울이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안드레는 주님을 따라간 첫 번째 제자입니다. 열 두 제자 중에 가장 먼저 예수를 따른 제자였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그를 '프로토클레토스'라고 불렀습니다. '첫 번째로 불려진 자'라는 뜻입니다. 가장 먼저 예수의 제자로 부름받은 자라는 영예로운 이름을 그에게 달아주었습니다.

그런데 마 10:2-4절과 눅6:14-16절의 사도 명단에 보면 안드레는 베드로 다음으로 두 번째 나오고 있고 막3:16-19절의 사도 명단에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 행1:13절의 사도 명단에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 그리고 안드레입니다. 특히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모두 누가가 쓴 글인데 앞에서는 베드로 다음에 오던 안드레가 뒤에서는 야고보와 요한 형제 뒤로 위치가 바뀌어 있습니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형제끼리 묶는다면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이렇게 묶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언제나 함께 가는데 안드레만은 형 베드로에게서 떨어져서 서열 4위로 내려앉습니다. 같은 서열 4위라도 '야고보, 요한, 베드로, 안드레' 하면 별 상관없지만 왜 베드로, 야고보, 요한 그리고 안드레냐 하는 겁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막3:16-19절에서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인데 반해 행1:13절에서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경우 사도행전에서는 동생인 요한이 먼저 언급되는데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는 늘 형의 뒷전에 묻히고 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는 그에게 '프로토클레토스', '첫 번째로 불려진 자'라는 영예로운 이름을 주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가 어떤 자였기에 이런 영광을 그에게 부여한 걸까요? 생각하기에 따라 참 기분 나쁜 일일 수 있습니다. 아니 분명 유쾌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점에서 안드레는 가룟 유다와 비교됩니다. 가룟 유다가 주님을 배반한 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 공감되는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그는 애초에 주님의 총애를 받던 제자였습니다. 공동체의 살림살이를 맡을 만큼 신뢰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주님을 배반한 것은 제자 공동체 내의 인간적 역학관계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람 차별에 대한 보복심에서 주님을 배반했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님은 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당신 곁에 가까이 두었습니다. 저들 세 사람은 주님의 핵심 제자들로 언제나 특별한 자리에 따로 불리움을 받았습니다. 요즈음 청와대 386 세대에 대한 논란이 뜨겁습니다만은 이 세 제자도 그런 위치에 있었습니다. 대통령이 자기 곁에 가까이 두고 있는 안모, 이모, 박모, 세 386 세대 출신 참모들을 실세라고 부릅니다. 그러니 사이드로 밀려나는 감을 느낀 정권창출의 일등공신인 여당 대표가 푸르락 불그락 하는 겁니다. 서열이 잘못되었고 대우가 뒤집혔다는 겁니다. 386 세대의 핵심 측근인 안 모씨가 검찰수사를 받을 때는 '동업자'라고 옹호하고, 이모 후원회장이 곤경에 처했을 때는 인터넷에 '개인적인 편지'까지 쓰며 적극 방어하던 대통령이, 자기의 체포 동의안엔 주저없이 사인을 하니깐 그 서운함과 야속함에 '비밀을 터뜨려 공멸도 불사하겠다'고 나오는 겁니다. 인간적으로 공감이 가지 않습니까?

저는 가룟 유다와 안드레를 생각할 때 이런 기분을 십분 이해하게 됩니다. '참 기분이 그랬겠다...' 그렇지 않습니까? 왜 언제나 베드로, 야고보, 요한입니까? 주님께 첫 번째로 부름받은 자는 안드레입니다. 그분께 신뢰를 받을만큼 충성을 다했던 가룟 유다를 주님은 무시해선 안됩니다. 그런데 왜 이들은 핵심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변두리로만 밀려나는 겁니까?...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이유 중에는 이것이 큰 이유였다고 생각됩니다. 기분 나쁜 겁니다. 왜 차별대우 하는 겁니까?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예수님의 입장에선 차별이 아닌 역할분담이었겠지만 가룟 유다의 입장에선 차별대우로 느껴졌을 겁니다.

가룟 유다의 심정이 이러했을진대 안드레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따져보면 수제자 대우받는 베드로는 자기가 인도한 신앙의 후배입니다. 교회 공동체적인 표현을 한다면 자기보다 초신자입니다. 늦게 믿은 자입니다. 그런데 그는 수제자요 자기는 네 번째 위치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안드레의 입장이라면 어떠하겠습니까? 베드로는 형이라 예우상 그렇다 쳐도 야고보와 요한은 뭡니까? 왜 그들은 형제 대우하면서 자기는 형과 떨어뜨려 외톨이가 되게 하는 겁니까?

보십시오.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러 회당장의 집에 들어갈 때도 주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외는 아무도 못들어오게 하십니다. 그것도 안드레 바로 앞에서 끊습니다. 이게 참 견디기 어려운 겁니다. 차라리 등외로 처져버리는 게 낫지 바로 앞에서 탈락이면 안타까운 겁니다. 한번이 아닙니다. 안드레는 번번히 그런 수모를 당했습니다. 변화산에 올라갔을 때도 그랬고,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갈 때도 그랬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만 데리고 가서는 당신 곁에 있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안드레는 제일 먼저 주님을 따랐던 프로토클레토스임에도 불구하고 최측근 그룹에 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나라 개국 공신이면서도 실세에 끼이지 못하고 가장자리로 밀려나 지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이런 처지라면 어떠했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인간적인 입장에서 보면 가룟 유다, 충분히 공감이 가는 사람입니다.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자기처럼 충성하는 자를 알아주지도 않고 안드레처럼 우선권이 있는 자를 묵살하고... 예수님의 그러한 처사가 이해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서운하기 이를 데 없었던 겁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가룟 유다와 안드레의 차이가 있습니다. 안드레라는 이름의 뜻은 '남자답다'는 뜻인데 정말 그는 남자다웠고 성숙했고 통이 컸습니다. 그는 배신을 때리고 뛰쳐나간 가룟 유다와는 달리 자기가 '넘버 3'에 못든다고 기분 나빠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다 알아서 하시는 것이라고 그분의 처사를 십분 이해했고 소화했습니다. 이게 바로 가룟 유다와 안드레의 다른 점입니다. 그랬기에 가룟 유다와는 달리 그는 끝까지 성실하게 제자의 길을 갈 수 있었고 그런 그에게 프로토클레토스 위대한 영예를 초대교회가 부여해 준 것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뒤쳐지는 걸 기뻐할 사람이 있을까요? 옆에 있는 사람이 칭찬받고 승진할 때 사심 없는 마음으로 함께 칭찬하고 축하해 주기, 쉽지 않습니다. 한 형제가 받는 칭찬만큼이나 자기는 위축되기 십상인 게 보통 사람의 성정이요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리에서 가룟 유다는 돌아섰지만 안드레는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사실 서운한 마음이나 소외감이야 안드레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 겁니다. 야고보 요한 형제는 가는데 왜 자기 형제는 못가는 겁니까? 그것도 함께 못가는 게 아니라 언제나 자기만 못가는 겁니다. 이렇게 따질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주님, 왜 야고보 요한 형제와 우리 형제를 차별하십니까? 재들 어머니가 찾아와 당신께 특별히 뇌물을 쓰고 청탁을 해서 그런 겁니까? 재들이 부자라서 그런 겁니까?..." 정말 주님의 그러한 처사가 안드레의 입장에선 참을 수 없는 모욕일 수 있습니다. 이 정도면 배신 때릴만 하지 않습니까? 가룟 유다보다 더 심하게 돌아서서 앙갚음이나 해꼬지를 할만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안드레는 그러질 않았습니다. 끝까지 묵묵히 순종하며 주님을 따랐습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인격의 소유자며 넓은 마음의 소유자입니까?... 비록 그는 주연 인생은 아니었지만 위대한 조연 역할을 잘 감당한 멋진 인생이었습니다.

안드레처럼 섬길 수 있다는 게 쉬운 게 아닙니다. 버젓이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고 사명을 받았음에도 이런저런 말같지 않은 이유로 헌신짝처럼 그것을 팽개치고 돌아서는 미숙한 인생들이 적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정말 눈물겹도록 멋진 인생이 바로 안드레였습니다. 신앙이 깊지 아니하고는, 인격이 고매하지 아니하고는, 시야로 멀고 넓게 보지 아니하고는 감당할 수 없는 그런 삶을 그는 살았던 것입니다.

안드레의 일생을 조명해 보면 정말 그는 위대한 인물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째로 그의 위대함은 먼저 스승의 가르침에 지극히 충실한 자였다는 데서 비롯됩니다. 충직한 제자는 스승이 시키는대로 하는 법입니다. 참 제자는 이유를 달거나 토를 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말이 많은 제자는 훌륭한 제자가 아닙니다. 안드레가 불평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위치에서도 묵묵히 제자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그 인격을 어느 누구에게 배운 것일까요?

원래 안드레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안드레는 세례 요한의 제자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옮겨갑니다. 우리는 혹 '그가 원래 스승인 세례 요한을 떠나 새로운 스승인 예수님을 따라 간 것은 의리없는 행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의 스승이었던 세례 요한이 누구입니까? 그의 사명은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습니다.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는 선구자로서 이 세상에 보냄 받은 자가 안드레의 스승인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왔습니다. 그가 제자들을 키운 목적은 언젠가 메시야가 오실 때 그의 사역을 지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랬기에 예수님이 나타나자 세례 요한은 제자들을 향해 두 차례나 목소리를 높여 외칩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그러니 스승의 가르침을 충직하게 따르던 제자 안드레는 옛 스승을 떠나 새로운 스승을 따라 나서는 게 마땅했고 또 그게 스승인 세례 요한의 희망이었습니다. 즉 안드레는 스승에 대한 변절자가 아니라 스승에 대한 순종자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안드레는 스승에게 철저히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러한 그의 인격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후에도 성숙한 따름의 동력이 된 것입니다. 인간적인 서운함을 가지려면 얼마든지 가질 수 있었고, 마음 상함과 기분 나쁨을 토로하려면 얼마든지 토로할 수 있었지만 그가 불평하거나 원망했다는 이야기가 복음서에는 한 줄도 나타나고 있지 않다는 데 그의 위대함이 있는 겁니다. 그는 이렇게 성숙한 인격과 신앙의 소유자였던 것입니다.

그랬기에 안드레는 주님의 열 두 제자 중에서 중심인물이 아닌 주변인물로 남는 자유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가장 먼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이고 수제자 베드로를 예수님께 인도한 사람이었지만 베드로와 비교해 볼 때 늘 변두리 인물이었습니다. 항시 베드로가 사람들의 시선을 받을 때 그는 단지 '베드로의 형제'로 소개될 뿐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로 소개됩니다. 이때는 베드로가 아직 등장도 하지 않았을 때입니다. 이렇게 안드레는 독자적으로 소개되지 않고 늘 베드로와 연관해서 소개됩니다. 요6:8절에도 "시몬 베드로의 동생인 안드레'가 예수님께 보리 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를 가진 아이를 소개합니다. 베드로와 관련해서만 그랬던 것이 아니고 야고보와 요한 형제와의 관계에선 더 억울하고 분통터질 노릇이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경거망동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런 스승에게서 배운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커가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했던 사람이 세례요한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예수님은 더욱 커져야 하고 자신은 더욱 작아져야 한다고 했던 사람입니다. 입에 바른 말이 아니었습니다. 진심으로 그는 예수님이 커가심을 기뻐했습니다. 그런 스승에게서 배운 안드레의 인품 또한 그러했습니다. 안드레가 프로코클레토스였음에도 불구하고 중심인물이 아닌 주변인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스승에게서 받은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옛 스승의 가르침에 충실해서 예수님을 새로운 스승으로 모셨던 그가 '너는 흥해야 하고 나는 쇠해야 하리라'는 옛 스승의 겸손한 태도를 그대로 본받아 동료들을 더 섬기는 성숙한 삶을 산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안드레에게서 발견하는 위대함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끄는 힘입니다. 안드레는 요한복음에 세 번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는 아주 중요한 특징을 보여줍니다. 그건 그가 등장할 때마다 다른 사람을 주님께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그는 오늘 본문에서 보았듯이 자기 형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이게 얼마나 큰 일입니까? 이건 그의 일생에 있어 가장 큰 공헌 중의 하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세워갈 열 두 제자단의 수제자요 교회의 반석이요 오순절 성령강림절에 삼천 명의 유다인을 개종시킨 위대한 사도를 주님께 인도한 자가 바로 안드레입니다. 그 뿐입니까? 두 번째는 5병 2어의 기적이 가능했던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를 갖고 있던 소년을 예수님께 인도했던 자가 안드레입니다. 그리해서 굶주린 수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었고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임을 증거하는 동기를 마련합니다. 바로 그 산파역을 감당했던 자가 안드레였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명절에 예수님을 찾아온 헬라인들을 예수님께 인도합니다. 주님이 공생애를 마치고 수난을 길을 걷기 직전에 이방인들을 주님께 인도합니다. 아마 저들은 직접 주님을 뵙진 못했겠지만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이 누구인지를 알고 돌아갔을 것입니다.

이렇게 매번 안드레가 사람들을 주님께 데려올 때마다 거기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조지 밀리건이라는 성서학자는 안드레를 가리켜 최초의 국내외 선교사였다고 칭송합니다. 베드로와 소년을 주님께 인도한 최초의 국내선교사요 헬라인들을 주님께 인도한 최초의 국외선교사였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위대하고 복된 삶이었습니까? 이렇게 안드레는 주연이 아니라 조연으로 인생을 산 인생이지만 위대한 조연이었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인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교회는 바로 이 안드레처럼 스스로 자신이 거물이 되기보다 오히려 거물이 될 인물을 예수님께 인도하는 수많은 안드레가 있을 때 아름답게 세워지고 발전되어 갑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에 안드레 같은 이런 성숙한 신앙의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소원합니다. 머리만 되려 하고 또 머리가 된 후엔 매사에 손놓아 버리는 그런 불행한 인생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비록 주연은 아니지만 주연 못지않은 위대한 조연 인생을 어디서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섬기려 오셨다고 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에게 가장 큰 것을 맡기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작은 것에 충성함으로 큰 것을 받는 조연 인생이 복된 인생입니다. 위대한 조연 안드레, 그는 우리의 신앙의 사표가 되기에 충분한 인물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