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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의 원하시는 바 / 마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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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원하시는 바
마 8: 1-4

  오늘은 마태복음 8장 1절에서 4절까지 있는 말씀가지고 “주의 원하시는 바”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3절을 보면 ‘내가 원하노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 미가서 6장 8절을 보면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 가지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첫째로는 공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일인데 내가 하면 괜찮고 네가 하면 나쁘다고 하는 것은 공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표준하여 내가 해도 나쁘면 나쁜 것이고 네가 해도 좋으면 좋은 것이라 해야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표준으로 삼아서 살아가는 생활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둘째로는 인자를 사랑하며 라고 하셨습니다. 인자라고 하는 말을 은혜라고 해도 좋습니다. 다시 말해서 은혜를 좋아하라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은혜와는 담을 쌓고 원수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흥회 때에는 교회에 나오는 적이 절대 없습니다. 은혜를 좋아하는 사람만이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셋째로는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생활을 요구하십니다. 교만하면 하나님과 함께 행할 수가 없습니다. 겸손한 자만이 하나님과 함께 행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겸손히 하나님과 행하는 것을 요구하십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본문에 의지하여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고백하는 삶 (1-2)

  사랑은 반드시 고백하는 성질이 있어서 사랑하게 되면 반드시 그 사랑을 표현하고 고백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믿음은 반드시 고백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고백을 안 하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요, 써먹을 데가 없는 믿음입니다. 고백하지 않는 사랑은 죽은 사랑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가 평생에 세 마디를 고백하지 않습니까? 첫째는 갈리리 바다에서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께서 하라는 대로 했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잡습니다. 그리고는 배에서 나와 엎드려 첫마디로 고백하는 말이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합니다. 나는 죄인이라는 고백을 할 때 하나님과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나는 죄가 없다고 하면 하나님과 관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나는 죄인이라는 고백이 있을 때 믿음은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제자가 되어 얼마쯤 따르고 난 후에 주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묻습니다. 즉 신앙고백을 하라는 뜻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고백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합니다. 그 고백을 받은 예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십니까? 신앙고백을 주님은 기뻐하시고 또 원하십니다.
  셋째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로 가셔서 베드로를 만난 후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때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얘기하면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 고백을 받고 주님께서 크게 기뻐하시고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향해서 사랑한다고 하는 고백이 필요합니다.

  다윗은 시편 18편 1절에 '나의 힘이 되시는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듣고 싶어하시는 신앙을 고백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신앙고백을 삶에 옮겨야 하겠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절부터 2절을 보면,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팔복산에서 산상보훈을 마친 다음에 산 아래로 내려오셨더니 허다한 무리가 좇았습니다. 그 중에 문둥병자 한 명이 예수님 앞에 나아와 절을 하며 고백하기를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신앙고백입니다. 문둥병에 걸리면 아무도 못 고치기에 가정에서 쫓겨나고 동네에서 쫓겨나고 후미지고 비탈진 곳에서 혼자 외롭게 버림받아 살아가다가 죽으면 송장도 안 찾아가는 비참한 신세가 됩니다. 이런 문제를 누구도 해결할 수 없지만 주님께서는 해결하실 수 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병을 고쳐주시기를 원하시면 깨끗함을 받을 수 있지만 능력이 아무리 많아도 고쳐주시기를 원치 않는다면 고침을 받을 길이 없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병을 고쳐주실 능력이 있는 것을 꼭 믿는데 주님께서 원하시면 고쳐달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주님의 절대적인 능력을 고백하는 신앙고백입니다. 주님께서 그 고백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내가 원하노니’라고 즉시 말씀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상대방의 사랑고백을 얼마나 기다립니까? 그리고 고백을 받으면 그 날밤에 잠을 못 이룰 정도로 기뻐하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문둥병자의 고백을 받고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신앙고백을 원하십니다.

  윌리스라고 하는 사람은 철저한 무신론자입니다. 이 사람이 쓴 작품을 가지고 영화를 만든 것이 “벤허”입니다. 벤이라고 하는 말은 아들이라는 말이요, 허라는 말은 성씨입니다. 즉 허씨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본래 그 작품의 본명은 “그리스도 이야기”입니다. 철저한 무신론자인 윌리스의 친구들도 모두 무신론자 아니겠습니까? 한번은 한 친구가 윌리스에게 반기독교적인 작품을 쓰라고 권유했습니다. 예수쟁이들의 꼴을 보기 싫어서 못 견디겠으니 윌리스가 반기독적인 작품을 써냈다 하면 날개 돋힌 듯이 팔리고 기독교인들의 코가 납작해 질 것이므로 책을 쓰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윌리스는 반기독교적인 작품을 쓰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기독교를 반대하는 작품을 쓰려면 성경을 열심히 봐야하지 않습니까? 성경은 보지도 않고 기독교를 반대하는 작품을 쓴다면 무식하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 뻔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기 시작하는데 보통으로 읽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독교를 반대할 목적으로 읽기 까닭에 구구 절절이 정독을 합니다. 한번만 읽어서는 기독교를 다 알 수가 없으니까 계속 읽기를 세 번... 다섯 번을 읽습니다. 그러다가 이 사람이 성경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써낸 책이 “그리스도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를 반대하려다가 그리스도 이야기를 써냈습니다.

  그 작품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벤허라고 하는 사람은 예수님과 같은 시대의 유대인입니다. 이 사람이 총독을 위해하려고 생각하고 총독을 반대하는 운동에 가담하였다가 붙잡히고 중노동형에 처합니다. 중노동을 하고 있는데 그들을 관리하는 호민관이 위기에 빠졌을 때 이 사람이 달려가 구출해줍니다. 호민관이 너무 고마워서 벤허를 자신의 아들로 삼았습니다. 호민관은 로마사람이 아닙니까? 로마사람의 호적에 아들로 오르니까 로마군대에 나갈 수 있게 됩니다. 군대에 가서 이름을 날립니다. 그러면서 전차경주가 있을 때 옛날에 자기의 원수를 보기 좋게 눌러버리며 우승을 합니다. 한번은 빌라도 총독에 대해서 갈릴리 사람이 반란을 일으키는데 벤허가 갈릴리 사람을 도왔습니다. 그러다가 자기의 부모와 동생을 만나게 됩니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문둥병에 걸렸었는데 지금은 아주 건강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벤허가 어떻게 이렇게 건강해졌냐고 묻자 그들이 예수님께 고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벤허가 개종을 하고 기독교인이 됩니다. 철저하게 기독교인으로 살고 기독교인으로 죽는다고 하는 것이 벤허의 내용입니다.

  윌리스는 철저하게 반기독자였다가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만났고 그 예수님을 만나고는 나는 예수님을 이렇게 만났다, 예수님이 이렇게 좋다, 예수 때문에 우리 가정에 살길이 열렸다고 작품을 통해서 고백을 했습니다. 한번쯤은 읽어두면 참 좋은 내용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은 이래서 좋고, 예수님 때문에 나와 내 가정에 살 길이 열렸다라고 하는 고백적인 삶을 주님은 원하시고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건강한 삶 (3-)

  예레미야 애가 3장 33절을 보면,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심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죽을 고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고생하고 근심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믿는 사람 중에 특별히 잘 믿는 사람에게도 그런 고생이 있습니까? 그것은 고생과 근심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기 까닭에 그런 일도 있을 수 있으나 그런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큰 축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축복이 하나님의 본심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어렸을 때 죽어도 천국에 가고 젊었을 때 죽어도 천국에 가고 늙어서 죽어도 천국에 가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일찍이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오래오래 살면서 손자, 손녀를 보고 건강하게 살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많이 하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건강한 삶을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안식일을 지키신 다음에 베드로의 집에 심방을 갑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주일예배 마치면 병원에 입원한 사람에게 심방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이 나서 헛소리를 합니다. 깨끗이 고쳐주니까 소문이 나서 각색 병든 자들이 다 모여들었습니다. 주님께서 한사람도 남김없이 다 고쳐주셨습니다. 마태가 마태복음을 쓰면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저가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시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함이라’는 말씀이 기억하고 인용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우리의 죄만 짊어지셔서 죄만 해결해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채찍에 맞으시고 온갖 고난을 당하시다가 죽으신 것은 우리의 질병까지라도 짊어지고 해결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본심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건강하게 장수하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 가정에 어느 한 사람이 병들어 고통스러운 사람이 있습니까? 가정에 우환질고가 떠나지 않아 너무 괴롭습니까? 하나님의 본심이 절대 아닙니다. 그 질고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건강했을 때 받지 못하는, 병들었을 때만 받을 수 있는 엄청난 은혜를 베풀려하심인데 그 은혜가 본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여러분들의 건강한 삶을 원하십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3절을 보면,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 진지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에서 문둥병자가 주님께서는 능력이 무한하셔서 내 문제는 주님만이 해결해 주실 수 있음을 믿었지만 문제는 주님께서 원하시느냐가 문제라고 말합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주님께서 ‘내가 원하노니’라고 대답하십니다. 얼마나 주님이 그 고백을 기뻐하셨으면 그리 하셨겠습니까? 그리고 이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말씀으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셨습니다. 손을 대셨다고 하는 뜻이 무엇입니까? 누구도 해결 못하는 문제에 주님께서 개입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개입하시면 됩니다. 주님께서 개입을 안 하시니 문제이지 개입을 하시면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랬더니 즉시로 문둥병이 떠나 깨끗해졌습니다. 주님은 문둥병자의 건강을 원하셨습니다.
  문둥병자의 건강만 원하십니까? 오늘날 우리들도 건강하게 사는 삶을 주님은 원하십니다. 육신의 건강만을 원하십니까? 생활이 병든 자가 있습니다. 생활에 절제가 없어서 돈은 제법 벌어도 항상 빚지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것은 생활이 병든 것입니다. 인격이 병든 사람, 믿음이 병든 사람, 가정이 병든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모든 병든 자들에게 주님께서는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방면에 깨끗하고 건강한 생활로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증거의 삶 (4-)

  옛날 유대지방에서는 문둥병에 걸리면 본인도 모르고 3년을 살았습니다. 그 후에는 본인만 알고 3년을 삽니다. 몸에는 이상이 없는 것 같은데 살을 푹푹 찔러도 감각이 없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알겠습니까? 그리고 다른 사람이 알고 3년을 산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알게 되었을 때에는 가족밖에 모릅니다. 그럴 때에는 가족이 먼저 쫓아냅니다. 안 쫓아내는 경우에는 동네사람들이 달려들어서 그 집을 엎어버리고 불지르며 그 가족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문둥병자는 가족에게 먼저 버림을 받게 됩니다. 가족에게 버림받으면 동네 근처에 얼씬합니까? 동네에서도 쫓아냅니다. 그러면 먼 후미진 곳에 가서 자기와 똑같은 신세인 문둥병자를 만나면 어울려 말이라도 나누면서 위로 받지만 못 만나면 혼자서 살다가 죽게 됩니다. 사람이 지나가면 한 손으로는 입을 가리고 한 손으로는 손짓하며 부정하다고 소리칩니다. 문둥이가 여기 있다고 하는 말과 같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기가 막힌 말입니까? 그러다가 죽으면 송장도 안 찾아옵니다. 이렇게 불쌍하게 되는 것이 문둥병자입니다. 이것은 병원에 가도 누구도 못 고치는 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고침을 받습니다.

  문둥병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병고침을 받은 후에는 제사장에게 달려가서 그전에 제사장께서 문둥병이라고 진단을 내려 쫓겨나 살았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았으므로 그 제사장을 찾아 진찰을 받아야 합니다. 진찰해 보니까 정말 나았습니다. 그러면 병고침을 받은 자에게 제물을 가져오게 합니다. 병 나은 자가 가지고 온 제물로 결례라고 하는 제사를 드리고 난 후에 제사장이 만천하에 이 사람은 문둥병에서 깨끗해졌다고 공포합니다. 그러면 동네에 들어가도 되고 가정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후부터는 자유롭게 활동하게 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4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결례라고 하는 제사를 드리고 제사장이 만천하에 공포한 후에 동네에 들어가고 집으로 들어가면 동네사람들이 집으로 몰려오지 않습니까? 또 먼 곳에 있는 친척들과 친구들도 찾아옵니다. 그리고는 모두들 어떻게 살아 돌아왔는지 궁금해서 묻습니다. 이 사람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그때 예수라고 하는 분을 만났는데 그분이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만 하셨는데도 문둥병이 도망가듯이 떠나가 버리고 내가 어린아이의 살같이 되었다고 말하며 자신을 보라고 내보입니다. 또 예수님이 이렇게 좋고, 자신은 예수님 때문에 살았고, 우리 집안이 예수님 때문에 살 길이 열렸다고 하며 말끝마다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렇게 증거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남자 성도 여러분, 전화비 많이 나온다고 절대로 아내에게 윽박지르지 마십시오. 전화비가 많이 나오지 않으면 오히려 아내를 야단치십시오. 여자들은 하루에 3만 마디의 말을 하지 않으면 우울증에 걸리게 됩니다. 문제는 3만 마디를 하는 중에 예수님 얘기를 몇 마디나 합니까? 해도 되는 소리, 안 해도 되는 소리는 그렇게 많이 하면서 예수님 얘기는 왜 안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증거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좋고, 예수님을 만나서 살 길이 열렸으니 나를 보고 예수 믿으라고 증거해야 합니다.

  제가 결혼할 때 주례를 서주신 김세진 목사님을 저는 너무 좋아합니다. 그분이 동대문에 있는 동신교회를 시무 하시다가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도 저를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그분이 “꺼져 가는 등불처럼”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을 보면 그분의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랍니다. 그런데 이 분이 열한살 때 무릎이 끊어지게 아프고 퉁퉁 붓고 열이 났습니다. 평안북도에서 서울에 와도 못 고치고 압록강을 건너 안동에 가도 못 고쳤습니다. 병명이 ‘결핵성 관절염’이었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고칠 수 없는 병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 때문에 기적같이 살아났습니다.
  그 후에 열심히 학교를 다니고 대학생이 되었는데 지금의 연세대학교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졸업반이 되었습니다. 자고 나면 식은땀에 자리가 흥건히 젖고 열이 나고 밥맛이 없고 맥이 빠지곤 했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서 진찰을 해보니까 의사가 왜 이제 왔느냐고 하면서 욕을 하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했더니 폐에 구멍이 몇 개씩이나 뚫리고 균이 다 침식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도저히 못 고치겠으니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분이 학교 숲에 들어가서 밤마다 눈물로 기도하기를 “하나님, 나를 죽이시려면 열한살 때 죽이시지 왜 지금까지 살려주시다가 이제 와서 또 이런 병에 걸리게 하십니까? 그때도 살려주셨으면 지금도 하나님의 뜻이 계실텐데 내 어머니가 너무 외롭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살아서 주님의 일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밤을 지새우며 기도하곤 하였습니다. 밤마다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데 손이 하나 나타나서 아무 말도 안하고 안수하며 어루만지는 것입니다. 눈을 떠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날로 열이 내리고 기운을 차렸습니다. 병원에 가서 사진을 찍었는데 의사가 무슨 약을 썼느냐고 말하더랍니다. 그래서 두 가지 약을 썼는데 하나는 구약이고, 또 하나는 신약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깨끗이 병에서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한 후에 결혼하고 아들, 딸을 낳고 안동에서 목회를 하는데 서른 두살에 장질부사에 걸렸습니다. 요즘은 장질부사가 병도 아니지만 그때에는 아주 큰 병이었습니다. 목사안수 받은지 얼마 안된 사람이 정신 없이 앓고 있었습니다. 교인들도 처음에는 철야기도를 해주더니 병이 낫지 않으니까 나중에는 목사가 무슨 죄가 저렇게 많아서 그러나...라고 수군거리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 병도 나았다고 합니다. 그 책을 보면 구구 절절이 예수님 얘기만 나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좋더라, 나는 예수님 때문에 살았고, 예수님 때문에 이렇게 되었노라고 증거합니다. 너희도 그 예수를 믿으라는 뜻입니다. 즉 말끝마다 예수님을 증거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삶도 예수님 때문에 살 길이 열리는, 예수님이 이렇게 좋다고 증거할 수 있는, 예수님만을 자랑하는 증거의 삶이 있기를 바랍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첫째로 고백하는 삶입니다. 본문의 한 문둥병자는 주님이 자기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문제는 주님이 원하시느냐가 문제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절대능력을 고백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둘째는 건강한 삶입니다. 분명히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셨고 문둥병에서 놓여 건강하게 살았습니다. 성도는 건강하여 오래 살면서 봉사생활을 많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증거하는 생활입니다. 주께서 그 문둥병자에게 증거하라 하셨고 그는 그 말씀대로 만나는 사람에게마다 예수님을 높이로 자랑하고 선전하고 증거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삶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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