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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낙심과 회복 ♣ - 왕상 19: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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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심과 회복 ♣
왕상 19:1-18,

할렐루야!!
오늘도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와 우리 주님의 사랑이 이 시간 성도 여러분에게 말씀을 통하여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24일 오전 8시 20분경 서울 문래동 자신의 방에서 목매 숨진 서울 K고 2학년 방모(16)군의 자살 원인은 성적 비관. 방군은 개인택시와 옷수선 등으로 자신을 어렵게 뒷바라지해주는 부모를 생각해 남들 못지 않게 열심히 공부했으나 성적이 오르지 않는 데다 어머니 박모(44)씨로부터 성적 문제로 꾸중까지 듣자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방군은 유서에 “나는 아무래도 공부와 인연이 없는 것 같다. 부모님께 미안하다”고 적었다.

경북 포항시 흥해읍 김모(32?여)씨는 남편 박모(37)씨로부터 시어머니의 살림 솜씨를 따라가지 못한다며 자주 야단을 맞자 지난 11일 갓 돌이 지난 아들과 세 살배기 아들을 천으로 덮어 숨지게 한 뒤 스스로 목을 매 숨졌다. 김씨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 당신은 집에만 들어오면 고함을 치니 시어머님의 빈자리를 채우기에 너무나 부족한 사람”이라는 유서를 남겼다.

24일 오후 10시경 부산 광안동 최모(46)씨 집 안방에서 최씨와 최씨의 부인 이모(45)씨가 아들이 일정한 직업도 없이 놀면서 카드를 무절제하게 사용해 올해 초 2000만원을 대신 갚아주었으나 최근 다시 예금통장까지 훔쳐 저축한 돈을 빼내 써버리자 이를 비관해 극약을 마시고 숨져있는 것을 최씨의 동생이 발견하여 경찰에 신고한 사건이 있었다.

이처럼 어이없는 자살은 하루 평균 36명으로 1시간에 1.5명 꼴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셈이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자살 건수는 1만3055건으로 2001년 1만2277건에 비해 6.3% 증가했으며, 경기 침체로 인한 생활고 비관형 자살이 2000년 786건,2001년 844건,2002년 968건 등으로 증가하고 있지만 성적 비관 등으로 인한 10대들의 자살도 지난해 273건이나 발생, 간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생명의 전화 하상훈(45) 원장은 “자살을 기도하는 사람은 자살자보다 10배∼20배 많다는 통계가 있다”면서 “자살 미수자와 자살자의 가족들에게 미치는 엄청난 영향을 생각하면 자살은 사회적으로 다뤄져야 할 문제”라고 그 심각성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며 낙심 중에 있는 것일까요?

전문가들은 “경제 및 취업난, 사회적 소외 등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근본적으로는 궁지에 몰린 사람들을 보호하는 사회 안전망이 부실한 탓”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회복이란 주제로 세 번째 시간을 갖습니다.

성경으로 돌아와 봅니다. 본문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저의 이야기를 써놓은 듯한 착각을 일으킵니다. 오늘 나는 이 본문 앞에 진실하게 나 자신을 드러내기를 원합니다. 말씀 앞에 솔직히 나 자신을 드러내기를 원합니다. 그러면서 저도 치유 받고 여러분도 치유 받고 회복되는 은혜의 시간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심리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인간에게는 살고 싶은 본능이 있는 한편 죽고 싶은 본능도 있다고 합니다. 살려고 하는 의지가 있는가 하면, 동시에 죽으려하는 의지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 본래의 모습입니다.

아합의 왕후 이세벨은 자신이 섬기던 바알 신과 아세라 신의 선지자들을 수장시킨 선지자 엘리야에 대한 복수심에 들끓어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선언합니다. "반드시 죽이겠다."고 맹세까지 합니다. 이 사실을 통보 받은 엘리야는 살기 위하여, 목숨을 건지기 위하여 광야 길로 도망합니다. 멀리 멀리 도망합니다. 그런데 천신만고 끝에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자 이번에는 죽고 싶어합니다.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 보다 낫지 못하니이다."(4절)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속에서도 이런 영적 침체가 임한 적은 없습니까?
몸과 마음이 탈진상태가 되어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된 경험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회리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도 경험한 이 탈진의 모습이 왜 인간에게 일어나는가?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어느 때 이런 탈진(영적 침체)을 경험하게 되는가? 질문해봅니다.


Ⅰ. 엘리야의 영적 침체는 왜 왔는가?


"엘리야가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여 주시옵소서"(4절) 엘리야는 심연의 깊은 고독감속에서 죽기를 간청하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이렇게 인생을 포기할 작정을 하고 이런 기도를 드린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엉터리 협박 때문입니다.

우선, 외부적인 문제로 이세벨의 협박이 있었습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는 정말 화려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싸워 한번 기도해서 하늘에서 불이 떨어짐으로써 온 백성들이 여호와께서 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다들 인정하게 되었고, 그 하나님 앞에 저들의 그 거짓된 모습들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결과로 850명의 거짓 선지자들은 기손 강가에서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아합 왕은 이 사실을 아내 이세벨에게 고합니다. 이 얘기를 전해 듣고 이세벨이 분노합니다. 그리고는 사자를 보내어서 엘리야에게 협박 편지를 전합니다.

그 내용이 2절입니다.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850명 떼죽음을 당한 자가 자기의 거짓 선지자들, 그 선지자들처럼 너도 죽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만일 그렇게 되지 않으면 내가 섬기는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무서운 장담과 호언을 했습니다. "내가 너를 내일이면 죽이리라" 이 무서운 협박 공갈 앞에 엘리야는 그만 낙심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도망했습니다. 그리고 그 낙심과 절망 속에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데려가 달라고 지금 자살 기도(prayer)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 역시 지금 우리 늘찬양교회가 올해를 끝으로 내년부터는 1억4천만 원에 대한 이자와 원금을 10년 동안 갚아나가야 합니다. 그동안도 겨우 이자 내는 것도 제대로 막지 못하여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데 그리고 이것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육신 적인 고통과 수고를 해왔는데...... 다음 해 부터는 원금과 이자를 갚아나간다는 것은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전혀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조금만 힘이 들어도 금방 탈진하여 힘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둘째: 문제만 보고 그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은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엘리야의 문제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세벨의 협박이라고 하는 외부적인 문제 외에 더 중요하고 실제적인 원인이 있었는데 그것은 사건을 바라보는 엘리야의 잘못된 시각에 있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은 엘리야가 문제에 부딪혔을 때 한 첫 번째 행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본문이 지적하는 엘리야의 첫 번째 모습입니다. "저가 그 형편을 보았다" 지금 자기 앞에 발생한 그 문제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제 곧 이세벨에게 잡혀 죽게 될 것이라는 상황을 살펴보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가 보기는 보았습니다. 그러나 잘못 보았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한다면 정말 죽게될 상황이 아니라 자기가 그렇게 본 것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판단한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엘리야가 정말 죽을 상황입니까? 아닙니다. 갈멜산 싸움으로 인해서 모든 백성들은 결국 누구편이 되었습니까? 엘리야 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850명을 다 죽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는 민심을 잃어버리면 반란이 일어나서 왕을 쉽게 갈아 치워버리는 그런 때였습니다. 열왕기 상하를 보시면 이런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합과 이세벨은 엘리야를 쉽게 해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상황은 엘리야에게 유리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세벨이 더 불리한 입장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세벨은 지금 엘리야에게 협박 메시지만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엘리야를 죽이길 원했다면 몰래 자객을 보내거나 군대를 파송하거나 하지 왜 죽이겠다는 사람에게 편지를 보냅니까? 엘리야를 죽일 수는 없고 다만 협박 공갈로 엘리야가 멀리 떠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문제는 엘리야가 이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아니, 엘리야가 보기는 보았어도 잘못 보았습니다. 이 잘못된 시각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특히 엘리야의 눈에 마땅히 보여야할 한 분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누굽니까? 엘리야의 하나님이십니다.
엘리야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엘리야의 하나님은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3년 동안 비를 내리지 아니하시고, 까마귀를 보내어 떡과 고기를 주시고,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가루와 기름이 그치지 않게 하셨던 그 하나님, 갈멜산 꼭대기에서 기도 한 마디로 하늘에서 불을 내리셨던 그 하나님, 이적과 능력을 베푸시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를 가지신 그 하나님, 엘리야가 이제까지 믿었던 그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이 죽음의 문제에 위기의 문제에 부딪치자 갑자기 엘리야의 시각에서 생각에서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엘리야만 그렇습니까? 오늘 우리도 이런 모습 아닙니까? 하나님 잘 믿는다고 하다가 어느 날 어떤 문제를 만날 때 갑자기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겁니다. 마치 안 믿는 사람처럼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과 비교해 볼 때 이세벨이라고 하는 여자는 도무지 비교가 되지 않는 상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엘리야의 눈에는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고 이 하찮은 여인의 허황된 협박만 눈에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이 잘못된 시각, 오늘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정말 문제 자체가 해결하기 어려워서 그래서 내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내가 문제를 그렇게 보는 시각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저는 이 시간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나름대로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직장의 문제 때문에 이 자리에서 고민하는 분들 있습니다. 가정문제 때문에 갈등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부부간의 문제 때문에, 자녀들의 문제 때문에, 아니 신앙생활, 사회생활, 여러 가지 종류의 문제 때문에 갈등하고 낙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영적 침체와 탈진이 바로 참 목자이시며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돌보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잊어버린 결과라고 ......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하고 다닌 것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문제를 다시 한번 되짚어 봅시다. 지금 당하고 있는 여러분의 문제가 그렇게 여러분을 낙심하게 만들만큼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까? 아니면 내가 그렇게 보는 것입니까? 문제는 내가 어떻게 보고 느끼고 대처하느냐? 에 따라서 모든 것을 달리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보십시오. 정작 두려워할 사람은 엘리야가 아닙니다. 이세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문제를 당할 때 그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 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믿음의 눈으로 문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인생 자체를 온통 문제로 보면, 우리가 사는 인생은 문제 투성이입니다. 온통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을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 문제를 해결할 때 찾아오는 놀라운 축복을 쟁취하는 도전의 현장으로 보면 신나는 것입니다. 인생사는 맛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부정적인 시각, 그 시각이 문제입니다. 인생은 살만 합니다.

저는 기도할 기력도 없어서 아침마다 교회에 내려가 부르짖는 탄원의 기도도 하지 못한 채 침묵기도 관상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나는 조용히 내 숨소리를 들으며 느끼며 내 온몸에 감도는 하나님의 손길을 묵상합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내게 베푸셨던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과 기적들을 생각해봅니다. 힘들고 외로울 때 고통스러울 그때에 찾아와 주셨던 하나님을 느껴봅니다. 거기에 어떤 대화도 필요 없습니다. 길 잃어버린 양 한 마리 목자의 손에 겨우 안기어 느끼는 안도감 포근한 쉼의 시간을 침묵 속에서 느끼며 감격하고 울며 기뻐하며 찬양할 뿐입니다. 한 시간 이상을 그렇게 기도하고 나면 왠지 후련하고 기쁘고 신이 나며 용기가 납니다. 특별히 수도원에서 관상 기도하던 추억과 경험들이 내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의 현재 처한 상황을 올바른 눈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습니까? 절망과 좌절의 그늘에서 슬퍼하며 원망 만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특별히 그 가운데 보아야 될 한 분,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분의 숨결과 사랑 무한한 포옹과 기다림의 향수를 찾아내야 합니다.

좌절의 늪에서, 절망의 나락에서, 아무런 소망의 빛을 보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바로 그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믿으십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앙망하는 사람, 하나님을 보는 그 사람은,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가는 것 같은 힘을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셋째: 승리의 영광이 가져다 준 자기 중심적인 기준과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엘리야의 낙심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갈멜산상의 체험 때문이었습니다.

4절을 보면 우리는 엘리야가 이 사건에서 딱 한번 이야기하는 이야기를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하고"(왕상19:4)

자살을 하는 사람이 이렇게 쉽게 한마디, 한 구절만 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제 생각엔 땅을 치며 통곡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붙잡고 막 울부짖으며 매달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경의 기자가 이 한마디만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초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한 말씀 속에서 우리는 엘리야의 근본적인 문제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께 말하는 그 말,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넉넉하오니, 이제 살만큼 살았다는 뜻입니다. 이제 일할 만큼 일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은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 열조 보다 나는 낫지 못하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자기가 자기 선조보다 더 나을 줄 알았는데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설정해 놓은 자기 중심적인 기준이 문제였습니다.

엘리야가 이러한 기준을 가지게 된 이유는 갈멜산의 승리의 영광을 그가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과연 그렇습니까? 일할 만큼 일하고 살만큼 살았으니 이제는 죽어도 된다는 말입니까? 누구 맘대로 그럽니까? 누가 세워놓은 기준입니까? 누가 그 기준을 정했기에 갈멜산에서 그런 일 하고 나면 그냥 끝난다는 것입니까? 그 기준은 누가 세웠습니까? 엘리야 자신이 기준을 세운 것입니다.

"나는 내 열조 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아니 누가 자기에게 자기 선조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했습니까? 이것이 바로 엘리야의 문제였습니다.

자기가 설정한 자기 중심적인 기준 그런 기준이 생기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는 오늘을 살아가는 여러 목사와 교회들 가운데서 나는 제일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갈멜산상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맛보았기 때문에 바로 이런 기준이 생기듯이 내가 이 만큼 큰 교회를 세웠으니 당연히 교회도 더 많이 부흥하고 나도 그 만큼 유명해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큰 교회가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까? 누가 유명한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습니다. 나 혼자의 기준으로 판단으로 모래성을 쌓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래성은 바위성과 달라서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면 금방 무너집니다. 말씀의 기초 위에 성령의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지 아니하면 언제 어느 때 무너질지 모릅니다. 이제라도 늘찬양교회와 나의 신앙과 나의 믿음의 주초를 더욱 말씀의 기초 위에 기도의 역사 위에 찬양의 능력 위에 바르게 세워 나가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보면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운 기준입니다. 승진할 때가 있으면 좌천될 때가 있으며 영예로운 입사를 할 때가 있으면 명예로운 퇴직을 할 때도 있습니다. 넓은 평수에 살며 평안하게 살 때가 있는가 하면 좁은 평수로 이사갈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50평 짜리에 살다가 40평으로 이사가면 자살하려고 듭니까? 1등만 하다가 어쩌다 2등 하면 왜 죽으려고 합니까?

실제로 얼마 전에 뉴스에 이런 일이 보도가 되었습니다. 울산에서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3년 내내 1등만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가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1등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금방 자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영광스러운 체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체험 때문에 잘못된 기준이, 자기 중심적인 기준이 세워진 것입니다. 항상 나는 부요하게 살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가난하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항상 나는 건강할 줄로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불치의 병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준을 따르면 그렇습니다.

당신을 실패의 나락으로 하나님께서 밀어 내셨다면 거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당신의 무엇을 하나님이 빼앗아 가셨다면 거기에도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이것이 바로 엘리야의 근본적인 문제였습니다. 참으로 어려웠던 그릿 시냇가에서도 이런 일이 없었습니다. 참으로 배가 고팠던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도 이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마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것처럼 상승궤도를 타고 올라갔던 엘리야, 어느 날 갈멜산에서 그 절정의 경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이세벨이 굴복할 줄 알았습니다. 이세벨이 자진해서 자기 앞에 와서 머리를 숙이고 엘리야를 받들어 줄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아니한 엄청난 협박 편지가 뜻밖에 그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그 순간 엘리야는 낙담이라는 수렁으로 빠져들고 만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왜 그렇게 되느냐구요?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기준을 세우신 것입니다. 늘 칭찬만 듣던 사람은 항상 칭찬만 들어야 된다는 자기 중심적인 기준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누가 비판을 하거나 비난을 하게 되면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늘 일등만 하던 사람, 늘 부유하게만 살던 사람, 늘 건강하게만 살던 사람, 탄탄 대로만 걷던 사람은 어느 날 하나님께서 필요하다고 생각하셔서 문제를 그에게 던질 때 자기 중심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던 사람은 그 문제 앞에서 낙심하고 좌절하고 절망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중심적으로 살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우리는 모든 것을 다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 가운데서 우리 인생이 더 멋지게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기준 앞에 굴복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청사진 앞에서 한 순간의 실패로 영원한 실패인 양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를 때도 있고 내려갈 때도 있습니다. 얻을 때도 있고 잃을 때도 있습니다. 깨끗하게 인정하고 용납하고 그 속에 숨은 인생의 비밀을 깨달아야 합니다.


넷째: 로뎀 나무 아래서 로뎀 나무를 보지 못했습니다.

보십시오. 엘리야는 로뎀 나무 아래서 로뎀 나무를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로뎀 나무는 팔레스틴 사막지대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입니다. 로뎀 나무는 뿌리가 제일 깊은 나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막에서도 죽지 않고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언제나 굳세게 자라나는 나무라고 합니다. 언제나 변함 없이 뿌리깊은 나무 밑에서 상황에 흔들리는 엘리야의 나약한 모습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꿋꿋하게 자라나는 로뎀 나무를 보며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 있으면서도 로뎀 나무를 보지 못하는 엘리야! 이 모습이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실망하고 낙심한 그 자리에서 한번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멋지게 승리하고 있는 이웃의 모습이 보일 것입니다. 삭개오 곁에 오를 수 있는 뽕나무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마레이 장군은 적군에 패하여 도망하다가 자살하려고 하였습니다. 칼을 들어 자살하려고 할 때, 개미 한 마리가 앞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조그만 먹이를 물고 가다가는 쓰러지고 가다가는 또 쓰러지는 것이었습니다. 다마레이는 재미있어 따라갔습니다. 69번을 떨어 뜨렸습니다. 그리고 70번째 개미굴로 들어갔습니다. 다마레이는 외쳤습니다. "나는 이제 겨우 한번 실패하지 않았느냐." 용기를 얻어 다시 나갔습니다. 그는 승리의 장군이 되었습니다.

낙심에 빠질 때 로뎀 나무를 보십시오. 위를 쳐다보십시오. 당신은 이제 겨우 한번 실패했습니다. 지금까지 잘 승리해 오셨습니다. 또 앞으로도 승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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