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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들음으로 믿음을 얻는다 / 사 53:1, 롬 10: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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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음으로 믿음을 얻는다
                          이사야 53:1, 로마서 10:16~17
 
듣기는 더디 하고 말은 빨리 하는 오늘의 세태는 불신 풍조로 치솟고 있으며 사회의 모든 질서는 혼미해 가고 있음을 개탄한다. 인간은 언어를 가진 유일한 동물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에 비해 영특하고 위대한 것은 바로 이 언어 즉 말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 말을 통해서 인간은 온갖 문화를 이룩해 왔다. 그래서 구약의 창세기에 "태초에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곧 말은 모든 창조의 근원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이토록 영특한 말도 함부로 하면 그 가치가 떨어진다.

말은 함부로 하는데 그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삼가며 할 때 그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감정이 흥분했을 때 입을 열면 평소에 다정하던 친구에게도 실례되는 말을 하기도하고 자신의 보잘것없는 속셈을 드러내 보이기에 이른다. 또 인간은 곧잘 불확실한 판단을 제 주견으로 삼을 수도 있는 존재이므로 그것을 말로써 나타낼 때는 남과 다투는 결과를 가져온다. 특히 감정이나 사사로운 이해에 사로잡혀서 명분이나 정의를 내세우지 말아야하며 남한테 언짢은 소리를 할 때에는 절대로 성내며 말하지 말아야 위엄이 선다.

말은 정확하고 성실하게 해야 가치가 있다. 아무리 우렁차고 기고 만장한 말일지라도 그 속에 정확성과 믿음이 결여되어 있으면 그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 사람은 누구나 그가 하는 말로써 그 자신의 뜻을 전한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말한 마디에 따라서 남 앞에 초상을 그려 놓는다. 그러므로 말은 잘 듣고 살펴 마음으로 깨닫고 난 후에 자기의 뜻을 말로 전하여야 한다. 신뢰 없는 말, 믿음 없는 전함은 아무 소용이 없다. 

믿음은 궁극적으로 어디에서 생기는가? 오늘의 본문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했음에 유의해 본다. 
한국인의 얼굴 원형에 대해 어느 작가가 한 말이 생각난다. 우리의 얼굴 원형은 불상. 동자석, 단군상, 산신도, 초상화, 풍속화, 민속 탈, 각종 수렵도와 제주의 돌하루방 같은 자료에서 쉽게 짐작된다. 이들 자료에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곧 커다란 귀와 자그마한 입이다. 너무 길고 커서 무겁게 늘어진 귀에 두툼한 귓밥, 작은 입을 가진 훈훈하고 푸근한 분위기에 은은한 미소가 햇살처럼 번지고 있는 두툼한 얼굴이 우리 선조의 얼굴인 동시에 선조들이 가장 좋아했던 얼굴이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많이 듣고 적게 말하라는 선인들의 소망과 기원과 이상에서 만들어진 믿음의 표준된 얼굴로서 그 이미지가 있다. 그래서 다언(多言)이 칠거지악(七去之惡)의 하나였고 유창함보다는 더듬거리는 눌변이 무거운 입으로 인식 되어온 게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 선인들이 하는 말 가운데 "그만 떠들어라 접시 깨질라!"며 딸애들의 수다를 나무랐으며, 두터운 귓밥이 복 있다 해서 귀밝기 풍속도가 말 해준 듯 하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그러므로 믿음은 궁극적으로 말씀으로부터 생산되어 나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원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덮어놓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하는 것에 대한 성서의 교훈인 것이다.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들으라"는 부탁의 말씀을 생각해 본다. 그리스도의 말씀 듣기를 거부한 자에게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있을래야 있을 수 없다 하겠다. 2세기의 순교자 저스틴 마티((Justine Martyr)는 증언하기를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혹은 도시인이든지 농민이든지 마차를 타고 가는 사람이든지 걸어다니는 사람이든지 그들 가운데는 언제든지 두 손을 모으고 하나님 아버지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었다"고 했다.

20세기의 한 역사가는 사도 시대의 말기의 그리스도인의 수효가 약 50만을 상회하였을 것으로 추정했다(R. H. Glover). 근래에 와서 복음 전파의 속도는 19, 20세기 들어 급성장하였다. 특별히 한국 교회와 중국 교회의 성장 속도는 사상 유례로 급성장하였다. 예수님께서도 70인의 전도자를 파송하시면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니라(눅 10;16)"고 했다. 또한 구약의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고 함을 알게 된다.

5만번 응답 받는 "뮬러"의 기도 비밀을 보면 믿음을 성장시켜 주는 지침들 중에 응답 받는 기도의 비밀이 있다.

첫째가 말씀을 주의 깊게 읽고 깊이 묵상해 보라고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비로소 주님의 성품과 그 인격을 파악하며 닮아 가게 된다. 또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로우심 외에 친절하심, 사랑, 은혜, 자비, 전능하신 힘, 지혜, 믿음이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된다. 가난 고난 사랑하는 이의 죽음, 봉사의 어려움, 재정의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이 도와 주시는 능력을 더욱 의존하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지혜가 무궁하시고 그 자녀들을 기꺼이 도와 주신다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믿음을 강하게 하는 최선의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것을 묵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을 강화해 주는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이지 우리 스스로가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뮬러"의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곧 하나님을 향하는 자세임을 말한다.

"들음으로 믿음을 얻는다"는 비결은 먼저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지혜를 갖는 것이다. 말과 행동이 같은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외롭지가 않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말은 항상 믿어도 되므로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람에게 의지하고 기댈 수가 있기 때문이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며, 신뢰성이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우리들은 든든한 사람이라고 한다. 든든한 사람은 어디서나 존경을 받는다. 가벼운 사람은 어디를 가나 따돌림을 당하고 뒷전으로 밀리게 된다. 그러므로 말로 기교를 부리지 말아야 한다. 철철 흐르는 물처럼 말만 번지르르 할수록 소문만 난 잔치 집처럼 된다. 입이 무겁다 함은 삼갈 줄 안다는 것이며 삼가 할 줄 아는 자라면 말이 행동을 부른다는 속뜻을 안다. 그러므로 생각 없이 말하고 생각 없이 행동한다면 비탈에서 굴러 내리는 돌덩이와 다를 것이 없다. 굴러 떨어지는 돌덩이는 짓눌러 버리고 굴러간다. 함부로 하는 말이나 무모한 행동은 굴러 내리는 돌덩이와 같다. 굴러 갈 때라면 굴러가고 멈출 때라면 멈출 줄 안다는 것은 마음의 중심을 잡는 것이 된다. 중심을 잡은 마음은 허튼 짓을 범하지 않는다. 이 마음은 들음에서 나며 그 중심으로 마음은 행동에 이른다.

옛날 농촌에서 살았던 삶의 정서가 이 여름밤의 추억을 어리게 한다. 여름밤에는 여름의 새인 소쩍새가 "소쩍 소쩍쩍"하고 울어줘야 귀가 아닌 가슴이 시원해진다. 잘잘 소리내며 흐르는 냇물 소리보다 더 시원하게 씻기는 듯 여유로워진다. 유난히 정자에 앉아 자연을 경관했던 우리 조상들은 눈으로 보거나 몸소 만져 보기보다는 귀로 듣고 상상하기를 더 좋아했다. 그래서 봄밤에는 두견새 울음을, 여름밤엔 소쩍새 울음을 즐겼고, 가을밤에는 섬돌 밑의 귀뚜라미 소리에 돌아눕고 싶어했으며, 겨울 한밤중엔 부엉이 울음으로 텅 비어 시린 가슴 안의 근심을 쓸어내고 싶어했다.

" ......봄부터 소쩍새는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라는 시구가 생각난다. 늘 배고픈 서러움으로 봄날의 높고 높은 보릿고개를 넘겨야 했기에 논바닥같이 질펀하고 흥건하게 가슴 적시는 듯한 소쩍새 울음으로서도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기도 하였으니 즉 "소쩍다 소쩍다"하는 듯이 들리면 풍년이 들고 "소쩍 소쩍"하는 듯이 들리면 흉년이 든다고 전해 졌다. 그래서 진종일 농사일이나 그 뒷바라지에 뼛골이 녹착지근한 잠자리에서조차도 두 귀는 소쩍새 울음에다 열어 놓아서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쳐왔던 조상들에 비하면 왠지 우리는 모두 죄인 같기도 하다.

긴긴 봄 내내 허기져 올라붙은 배를 소쩍새 울음으로나마 상상해 가며 배부르고 싶었던 조상들은 노부모님이나 처자식을 위해서나 막가는 도둑질을 했지만 요즘은 기가 막히는 부정 부패 사례들에 익숙해진 나머지 차라리 안쓰럽다 느껴지고 내다 버리지 않는 강한 책임감마저 느끼면서 오히려 가상할 일이었지 않나 잠깐 엇갈리기도 하기에 시대풍조를 놓고 꿈꾸어 보기도 한다.

주역(周易)은 이렇게 말한다. "학이 보이지 않는데서 울어도 그 새끼는 알아듣고 화답한다". 명학재음 기자화지(鳴鶴在陰 其子和之).
오늘의 사회가 믿음으로 구축되려면 상생의 원칙 하에 사랑이 통하고 정이 오가며 주고받는 상관 관계가 이루어져야 한다. 서로 이해하고 서로 껴안고 돕고 사랑하는 것을 부드럽게 해야 한다. 그 부드러운 사랑, 부드러운 이해, 부드러운 아낌, 부드러운 도움, 이것보다 더 강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것은 들음에서 난다. 들으려는 마음에 기인한다. 만물과 더불어 사는 삶은 서로 교감하는 것인데, 이 교감은 목숨을 서로 나누는 생명이다.

오늘날과 같이 메마른 시대일수록 "들음으로 믿음을 얻는 지혜"를 간직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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