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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마 7: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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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마7:7-11)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19세기 말 영국의 런던에는 세 분의 유명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리스도 교회의 프레데릭 마이어 목사님, 뉴파커 스트리트 교회의 찰스 스펄젼 목사님, 웨스트민스터 교회의 캠벨 몰간 목사님이셨습니다. 이들 세 분의 목사님들은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각자가 섬기고 있는 교회를 크게 부흥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 분들 가운데서 교회의 교세면에서나 영향력이 조금은 뒤지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교회의 프레데릭 마이어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이어 목사님의 마음 속에 열등의식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스펄젼 목사님만큼 설교를 잘 하는 것도 아니고, 몰간 목사님처럼 카리스마적으로 권위있는 목회도 못하는구나."
이러한 생각이 그의 마음 속에 생기면서 그는 다른 두 분의 목사님에 대한 시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강단에서 사랑을 외치는 설교자가 이래서는 안 되는데…" 그러면서 그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습니다. 그러다가도 누군가가 옆에서 스펄젼 목사님이나 몰간 목사님에 대해서 칭찬하는 소리를 들으면 그의 마음이 다시금 불편해 지고는 했습니다. 그는 아무리 시기심을 떨쳐버리려고 애를 써도 자기 힘으로는 그 문제를 풀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그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제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되겠습니다. 제 마음에서 불 듯 일어나는 시기심을 없애주시기 바랍니다."
어느 날 그는 간절히 기도를 드리던 가운데, 그의 마음을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너는 어떻게 기껏해야 시기를 없애는 것으로 만족을 삼으려고 하느냐? 그 두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 줄 수는 없다는 말이냐? 그들과 그들이 섬기는 교회가 잘 되도록 축복하는 기도를 해 줄 수는 없단 말이냐?"
마이어 목사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다른 두 분 목사님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무조건 무릎을 꿇고, 그들이 섬기는 교회를 위해서 축복하는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때때로 공식석상에서, 심지어는 자신의 교회에서 대표기도를 할 때도 이렇게 기도할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 스펄젼 목사님과 몰간 목사님의 목회사역에 큰 복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목회하시는 두 교회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크게 부흥할 수 있도록 채워주시옵소서. 그래서 그 교회들이 넘치도록 채워지고 나서 남은 사람들이 있거든 우리 교회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에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마음에 자유함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 뒤부터 이 세 분의 목사님은 친구처럼 아주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들은 함께 힘을 합쳐서 런던의 복음화를 위해 애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세 교회 모두를 크게 복 주셨습니다. 세 교회 모두가 아주 크게 성장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마이어 목사님에게 글을 쓰는 좋은 재능을 주셨습니다. 그는 좋은 책을 많이 저술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쓴 책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읽혀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마7:1-5에서 우리에게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7:6에서는 "다투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고 그 대신에 칭찬하고 격려해 주어야 한다는 것, 우리가 서로 다투지 말고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왜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생각대로 우리의 뜻대로 그렇게 쉽게 되던가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마이어 목사님처럼 훌륭하신 분도 자기의 힘대로 되지 않으니까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자연인의 힘으로는 결코 되지 않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야지 나와 너 사이의 불편한 관계가 비로소 화목한 관계로 바뀌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에 관한 교훈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기도의 응답성입니다.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기도를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7-8절입니다.

둘째로, 응답의 당연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왜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의 비유를 들어서 이것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른바 떡과 생선의 비유입니다. 9-10절입니다.

셋째로, 응답의 여러 가지 형태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11절입니다.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크신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행여 나와 너와의 불편한 관계 때문에 힘들어하십니까? 괴로워하지 마시고 기도하십시오. 불편한 관계를 화목한 관계로 성령께서 바꾸어주실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기도의 응답성입니다.

7-8절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와 관련해서 세 가지 표현을 하셨습니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본시 세 번 반복해서 기도하는 것은 그만큼 간절하게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예컨대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에 놓으시고 세 번 동일한 제목으로 반복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만큼 간절하게 기도하셨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자기의 육체를 찌르는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세 번 반복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만큼 간절하게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의 말씀하신 의도는 분명합니다.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기도를 거절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우리에게 응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얻지 못하는 것은 기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 힘으로 무엇인가 하려고 하기 때문에 실수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있었던 경우를 예로 들어서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으시고 세 번 동일한 제목으로 반복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첫 번째는 구하는 심정으로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첫 번째 기도를 마치시고 난 뒤에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시간에 기도하지 않고 잠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깨우시면서,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어 기도하라."

그리고 난 뒤에 예수님은 다시금 나아가셔서 두 번째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찾는 심정으로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은 두 번째 기도를 마치시고 난 뒤에 다시금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때도 제자들은 역시 기도하지 않고 잠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그대로 두시고 다시금 세 번째 나아가셨습니다. 아마도 이번에는 문을 두드리는 심정으로 간절하게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번에도 동일한 제목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애써 기도하셨는지 흐르는 땀이 피방울처럼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심정으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게 되셨습니다. 십자가는 바로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주신 잔이셨습니다. 예수님이 마셔야 할 잔이셨습니다. 그 잔을 예수님이 마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백성이 죄에서 구원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잔을 기꺼이 마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즐겁게 순종하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을 받은 예수님의 마음은 지극히 평안했습니다. 예수님은 평안한 마음으로 십자가를 향해서 담대히 나아갈 수 있으셨습니다. 그때 가룟 유다가 큰 무리를 이끌고 예수님을 붙들기 위해서 나아왔습니다. 그들은 검과 뭉치로 무장을 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무장한 사람들에게 신호를 보내기 위해서 예수님에게로 다가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거짓 입맞춤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예수님에게는 참기 어려운 순간이셨을 것입니다. 3년 동안 온갖 사랑을 다 쏟아준 제자에게서 지금 배신을 당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한 마디도 책망하거나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다만 불쌍히 여기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베드로는 어떻게 했습니까? 베드로는 기도하지 않고 밤새도록 잠만 잤습니다. 그런 그가 갑자기 검을 빼어서 예수님을 붙들러 온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한쪽 귀를 잘랐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충성하기 위해서, 제자로서의 의분을 발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기도하지 않고 잠만 자다가, 쓸데없는 혈기를 부린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 상대편은 검과 뭉치로 무장을 한 큰 무리입니다. 그런데 칼 한 자루를 가지고 무슨 예수님에게 도움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또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셔야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말고의 한쪽 귀를 잘라버렸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붙여주셨기에 망정이지, 만일 베드로가 검을 잘못 휘둘러서 말고의 목에라도 찔려서 말고가 죽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베드로는 살인죄로 체포될 것이고, 예수님도 베드로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두해야 하는 등 문제가 복잡하게 얽히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한 일은 예수님의 일을 돕는 것이 아니라, 더욱 난처하게 만드는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말하자면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쓸데없는 만용과 객기를 부린 것입니다. 베드로는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때로는 괜한 일에 화를 벌컥 낼 때가 있습니다. 거친 행동을 할 때가 있습니다. 큰 소리로 고함을 칠 때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심정으로 기도해 보십시오.
"오, 주여! 나의 마음에 사랑을 심어주시기를 바랍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기에 앞서서 먼저 내 눈에 있는 들보를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주께서 제게 허락하신 십자가를 기쁨으로 끝까지 지고 갈 수 있는 인내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이와 같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 보십시오. 우리의 마음에 평강이 넘칠 것입니다.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마음에 자유함이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응답의 당연성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른바 떡과 생선의 비유입니다. 9-10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떡과 생선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주로 섭취하던 음식이었습니다. 예컨대 예수님은 오병이어, 곧 떡 5개와 생선 2마리를 가지고 5,000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거두니까 열 두 광주리에 차게 되었습니다. 또 예수님은 떡 7개와 생선 2마리를 가지고 4,000명을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거두니까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셨습니다. 그 당시의 유대인들, 특히 가난하게 살던 사람들이 주로 먹던 음식이 바로 떡과 생선이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떡을 비유로 들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아들이 배가 고프다고 아버지에게 떡을 달라고 보챕니다. 그때에 누가 떡 대신 돌을 주겠습니까? 유대 광야에 있는 둥근 돌은 언뜻 보면 떡과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크기도 모양도 색깔도 비슷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실 때, 마귀가 제일 먼저 무엇을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했습니까?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그곳에 있는 돌이 떡과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비슷하게 생겼다 할지라도 아들이 배가 고파서 떡을 달라고 하는데 아들에게 돌을 주는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만일 아들이 그 돌이 떡인 줄 알고 씹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가 다 부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의 잔인함 때문에 아들의 마음은 큰 상처를 입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생선을 예로 들어서 말씀하셨습니다. 10절입니다.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아들이 배가 고프다고 아버지에게 생선을 달라고 합니다. 그럴 때 생선 대신에 뱀을 줄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뱀은 땅위를 기어다니는 짐승입니다. 구약성경 레위기 11장을 보면 땅에 기는 것은 가증히 여기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먹지를 못합니다. 또 수중생물 가운데 뱀하고 비슷하게 생긴 것이 있습니다. 예컨대 뱀장어나 메기 등입니다. 이들은 먹지 못합니다. 지느러미도 없고 비늘도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것들을 아무리 잘 요리해서 생선처럼 보이게 한들, 만일 그것을 아들에게 먹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을 먹는 아들은 스스로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부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기 자식을 그렇게 만들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아버지는 있을 수 없습니다.

육신의 아버지도 자기의 자식을 그토록 사랑하고 아낄 줄 아는데, 하물며 우리 하나님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자녀된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응답해 주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얻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바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시간이 없어서 주일 예배를 드리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는 주일예배를 드리다가도 시간이 없다고 중간에 슬그머니 일어나서 빠져나갈 때도 있었습니다. 그는 시간이 없어서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은 전연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는 시간이 없다고 기도하는 것도 게을리 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그가 급하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습니다. 천사가 생명책을 펼쳤습니다. 천사는 그 책을 살펴보더니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니 당신은 지옥으로 가시오."
그는 깜짝 놀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나는 분명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도 나는 명색이 교회 집사입니다. 그러니 다시 한 번 제 이름을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천사는 그 소리를 듣고 다시금 덮었던 생명책을 펼쳐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이제 생각이 나는군요! 내가 당신의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하려고 했는데 나도 당신처럼 시간이 없어서 깜빡 잊고 기록하지 못했군요. 그러나 어쨌든 당신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으니 당신은 지옥으로 가야되겠소."

그가 놀라서 깨어보니까 꿈이었습니다. 시간이 없다고 핑계를 대는 사람들을 깨우치게 하기 위해서 누군가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간이 없다고 핑계대지 마십시오. 찰스 스펄젼 목사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성공하는 것은 오히려 그 성공 때문에 망하는 것이다."
기도하지 않고 성공하는 것은 참된 성공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반대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기도했는데도 불구하고 잘 되지 않는 것 같습니까? 그것은 실패가 아니고 성공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면 언제나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셋째로, 응답의 여러 가지 형태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11절입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우리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선 자체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악하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악한 자라도 우리의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압니다. 하물며 하나님은 선 자체이신데 사랑하는 그 자녀된 우리에게 왜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기도를 했는데도 아직도 얻지를 못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함이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응답에는 세 가지 주요한 형태가 있습니다.

첫째, "yes"의 응답이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응답하실 때입니다. 예컨대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는 침상에 누운 채 성전 쪽을 바라보면서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생명을 15년 동안이나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사는 날 동안에는 평안함과 견고함이 있게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긍정적으로 우리에게 응답해 주십니다.

둘째, "no"의 응답이 있습니다. 부정적으로 응답하실 때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경우입니다. 그에게 육체를 찌르는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는 너무나도 괴로워서 세 번이나 간절하게 자신의 육체에 있는 가시를 없애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육체에서 가시가 제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족한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자고하지 않도록 그에게 가시를 허락하셨습니다. 또한 바울은 그의 약함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하게 나타날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오히려 자기의 약함을 기뻐하고, 자랑하고,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no"로 응답하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셋째, "wait"의 응답이 있습니다. "기다리라"는 응답입니다. 합2:3의 하반부입니다.

"비록 더딜찌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나사로의 경우를 생각해 봅니다. 그가 병에 걸려 다 죽게 되었습니다. 그의 가족들이 예수님에게 그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즉시 그곳으로 가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죽은 지 나흘이나 경과한 후에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예수님은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경우에 따라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를 우리에게 기다리게 하십니다. 우리를 위해서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때로는 히스기야의 경우처럼 우리에게 "yes"로 긍정적인 응답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또 사도 바울의 경우처럼 우리에게 "no"로 부정적인 응답을 주실 때도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나 나사로의 경우처럼 "wait"로 응답을 주실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분이십니다. 그 어느 경우든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언제나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그런데 눅11:13에 보면 똑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좋은 것"을 "성령"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구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갈5:22-23에 기록된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 9가지의 성령의 열매가 우리의 삶 속에 풍성하게 열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나와 너 사이의 무슨 문제가 생기겠습니까? 우리는 성령 충만한 가운데 언제나 사랑 가운데서 행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성령이 주시는 기쁨과 평강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신령한 분이 길을 가다가 어떤 교회 앞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보니까 마귀새끼들이 교회 지붕에 누워서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상하게 생각하고 교회 안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교인들이 서로 자기가 잘났다고 다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마귀새끼들이 할 일이 없지 않습니까? 마치 교회 지붕이 자기들의 놀이터처럼 생각하고 편안하게 낮잠을 자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조금 더 가다가 다른 교회 앞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마귀새끼들이 비상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그가 교회 안을 들여다보았더니, 어떤 할머니 권사님이 조용히 앉아서 평안한 모습으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한 분이 기도하는데도 마귀새끼들은 비상이 걸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서로 다툴 수밖에 없습니다. 마귀의 놀이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면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사랑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내일부터 기도원에서 전교인 신앙수련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다함께 올라가서 기도하십시다. 그리할 때 우리가 성령 충만함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와 너와의 불편한 관계를 평안한 관계, 아름다운 관계, 화목한 관계로 바꾸어주실 것입니다. 이 은혜를 거절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은혜를 우리 모두가 감사함으로 받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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