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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잊지 못할 만남 / 행 3: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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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행 3:6-12
제목 / 잊지 못할 만남

만남이 없는 인생 !
그런 인생은 이 땅에 한 생명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 태어난 이상,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우리 인생의 출발점도 보십시오 !
부모와의 만남 !
그것으로 우리네 인생이 시작되지 않습니까 ?
그 때 이후로 우리는 성장과정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며 인생을 살아갑니다.

게 중에는 차라리 만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했다고 생각되는 만남도 있습니다.
어떤 만남은 <별 의미가 없는 만남>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만남 가운데는 <평생을 통해서 잊지 못할 만남>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
여러분과 저의 만남은 <어떤 만남>이었으면 좋겠습니까 ?
여러분과 여러분 가족의 만남은 또 어떤 것이었으면 좋겠습니까 ?
우리 만남 !
그것은 모두가 참으로 <소중한 만남>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과연 어떻게 우리에게 현실로 다가올 수 있을까 ?
오늘 본문은 바로 그 문제에 대한 대답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도 우리가 보았습니다만 오늘 본문은 평생동안 앉은뱅이로 지내온 한 사람과 사도 베드로의 만남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만남은 태어나서 이제까지 앉은뱅이로 살아온 사람에게는 평생동안 잊지 못할 만남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과연 무엇이 저들의 만남을 그런 만남이 되게 했을까 ?
우리는 그 비결을 이 시간 <세 가지> 정도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비결>은 <시간 나누기>에 있습니다.
베드로가 성전으로 기도하러 올라가던 시간은 <제 9 시>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 9 시>는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시간으로 오후 3 시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
<중동지역>에서의 오후 3 시 !
그 시간은 <어떤 시간>이었겠습니까 ?
그 시간은 모든 사람에게 <쉼이 필요한 시간>이었지 않겠습니까 ?

그렇습니다.
그 시간은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을 만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전적으로 <자기만>을 위해서 사용해야 하는 시간 !
그 누군가를 보살피기에는 너무나도 적절치 못한 시간 !
베드로가 성전으로 올라가던 시간은 바로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십니까 ?
평생동안 앉은뱅이로 살아온 이 사람을 향해서 베드로가 어떤 행동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6절> 말씀에 있는 것처럼 그는 입술로만 <앉은뱅이의 필요>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끝내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렇면 그가 어찌하고 있습니까 ?
<본문 7절> 말씀을 보십시오 !
그가 앉은뱅이의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고 있지 않습니까 ?

두 다리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 사람이 평생동안 앉은뱅이로 살아온 사람의 손을 붙잡아 일으키려면 그냥 <선 자세>로는 불가능합니다.
그가 자세를 낮추어야만 그것은 가능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여기 이 앉은뱅이가 어떤 사람입니까 ?
평생동안 단 한번도 일어서 본 적이 없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
그처럼 선천적으로 불구인 사람을 붙잡아 일으켜 세운다고 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대단한 수고>가 거기에 있어야 그것은 가능한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 !
그는 여기 이 일을 위해서 <자신의 시간>을 기꺼이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
그는 시간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로만 하지도 않았습니다.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 !
그것을 우리는 오늘 베드로의 삶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알고 계십니까 ?
<시간>이라고 하는 것 !
그것은 우리에게 <생명>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이란 곧 시간이다>라고 말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사람이 지금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
그것은 그에게 아직 시간이 남아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 <죽어 가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
그런 사람을 두고 우리가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
그는 지금 시간을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오늘 하루를 산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우리의 생명을 그 무엇인가와 바꾸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그 누군가를 위해서 <시간을 나누는 것>은 곧 그 사람과 우리가 <생명을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런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나의 욕망, 나의 감정만을 따라 살아가는 것 !
그것은 곧 <자기 생명>을 갉아먹는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입니다.

<스페인> 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
그것은 <투우>입니다.
저는 아직 그 <투우경기>를 직접 본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것과 관련해서 알고 있는 <상식>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투우장의 소>는 맨 몸으로 싸우고, <투우사>는 손에 무기를 가지고 싸운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
여기 이런 싸움이라면 <소>가 <사람>을 이긴다고 하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지 않습니까 ?

하지만 여기 <소>가 이길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소>가 자신의 힘으로 무기를 가진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철저하게 <투우사>를 외면하는 것입니다.
<투우사>가 아무리 화를 돋구어도 일체의 대응을 하지 않으면 그 게임에서 <소>는 얼마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문제는 투우사가 흔드는 <붉은 천>을 소가 외면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소는 <붉은 천>을 향해서 끊임없이 달려듭니다.
<붉은 천> 뒤에 무엇이 있기나 한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
<붉은 천> 뒤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붉은 천>이 단지 <자기의 감정>을 건드린다는 이유 하나 !
그 하나의 이유 때문에 소는 <붉은 천>을 향해서 끊임없이 몸을 던집니다.

성도 여러분, 아시지요 ?
그 결국이 무엇인지를 말입니다.
자신의 감정, 자신의 욕망만을 향해서 달려가다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다 소진하고 결국은 피투성이가 되어서 쓰러져 가는 <소> !
우리가 <투우장>에서 볼 수 있는 소의 모습은 바로 그것입니다.

사랑하는 영암의 가족 여러분 !
우리는 이렇게 살 수 없지 않습니까 ?
이제는 우리도 <시간>을 더러 나누며 살자고요 !
<혈육이라는 울타리> 안에서의 <시간 나누기> !
그것은 <동물의 세계>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는 모습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크리스챤이라면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선 <시간 나누기> !
그것을 통해서 이제는 <나와의 만남>이 그 어떤 사람에게 평생동안 잊지 못할 그런 만남으로 만들어 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나와의 만남>이 <잊지 못할 만남>이 되게 하는 <두 번째 비결>은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정신을 우리가 갖는 것입니다.

알고 계십니까 ?
우리가 신앙하는 하나님은 <평등의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늘 우리네 현실도 보십시오 !
어떤 사람은 날 때부터 평생동안 먹을 재산을 거머쥐고 태어납니다.
이 나라 <재벌 집 손주들>이 바로 그런 아이들이지 않습니까 ?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평생동안 <가난>과 싸워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머리가 좋게 태어나서 별로 노력하지도 않는 것 같은데 좋은 학교를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머리가 별로 좋지 않아서 죽으라고 노력하는데 영 시원찮은 학교를 다니고 있습니다.
마치 여기 서 있는 저처럼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대단히 인격적인 부모님 아래서 하루하루 참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부모님으로부터 온갖 학대를 받아가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로 있습니다.

여기 이것이 우리네 현실이라면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
결코 <평등의 하나님>이시라고 우리가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평등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잊지 마십시오 !
우리의 하나님은 <평등의 하나님>이 아니라 <공평의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여기에서 더 가진 사람들 !
그들이 지니고 있어야 모습이 있습니다.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 !
남들보다 더 똑똑한 사람들 !
남들보다 더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 !
그들은 열심히 여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
그 하나님께서 내게는 왜 이렇게 많은 것을 주셨는지를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  잊지 마십시오 !
그 뜻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더 많이 받은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적게 받은 사람들과 나누라는 뜻이 거기에는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을 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등에 업고 살아가는 것 !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노브리스 오블리제> 정신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을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미국으로 이민 가셔서 지금은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삶을 살아가는 여인이 있습니다.
한국전쟁 때 그녀의 가족들은 부산으로 피난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녀의 나이는 <7살> !
하지만 그녀는 그 이런 나이에도 동생들을 등에 업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 이유를 이 시간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
그 때는 거의 모든 아이들이 그런 모습으로 살았지 않습니까 ?
그녀는 그런 모습으로 교회 앞에서 즐겨 놀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군들이 초콜렛과 캔디를 가지고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미군 한 명이 그녀가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안스러워 보였는지 그날 그 미군은 그녀를 등에 업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날 그녀는 <그처럼 넓은 등>, <그처럼 따뜻한 등>은 생전 처음으로 경험했답니다.
그 때 그 등을 통해서 그녀는 <인간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었다고 지금 고백하고 있습니다.
평생을 통해서 정말 멋지게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삶을 살아가는 한 여인의 삶 !
그 삶은 한 미군 병사의 <따뜻하고 넓은 등>에서 결정이 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보시겠습니까 ?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일어나서 걷기도 하고 뛰면서 하나님을 찬미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놀라서 묻습니다.
<이 어찌된 일이냐>고 말입니다.
그 때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보인 행동이 있습니다.
11절 말씀을 보실래요 ?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

여기 <붙잡는다>는 단어는 그저 단순하게 손으로 그 무엇인가를 붙잡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헬라어 <크라티아>는 사람을 붙잡되, <등뒤에서 끌어안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놀라서 <이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을 때 !
그 때 나음을 받은 사람이 보인 여기 이 행동을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여기 이 사람 때문에 내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러기에 나는 여기 이 사람을 너무나도 사랑합니다.
나은 사람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보인 행동 속에는 여기 이런 마음이 담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
누군가가 달려와서 끌어안을 수 있는 등 !
여기 이 베드로의 <따뜻하고 넓은 등>은 너무나도 멋진 등이지 않습니까 ?

우리는 하루 한 번 이상 <거울>을 보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
꾸미고 치장하기 위해서이지요.
그렇게 꾸민다고 하는 것은 좋게 말하면 <화장>하는 것이지만, 나쁘게 표현하면 <위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
우리가 그렇게 거울을 보며 우리를 위장할 때, 우리는 대체로 <전면>을 위장합니다.
<우리의 뒷면>은 거울로 위장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진정한 나>는 어느 쪽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
그것은 <얼굴>이 아니라 <등>입니다.

어떻습니까 ?
그 등이 <따뜻하고 넓은 등> 맞습니까 ?
아니면 나만을 생각하는 <차디차고 좁은 등>입니까 ?

성도 여러분 !
<예수님의 등>을 기억하십니까 ?
채찍에 맞아 여기 저기 살점이 떨어져 나갔던 <예수님 등> !
그런 몸으로 십자가까지 지셨던 <예수님의 등> !
예수님의 그 등을 기억하시는지요 ?
지금이라도 우리 모두가 달려가 꼭 끌어안고 싶은 등이 바로 그 예수님의 등이지 않습니까 ?
여기 이런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정신으로 <나와의 만남>을 <잊지 못할 만남>으로 만들어 가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나와의 만남>을 잊지 못할 만남으로 만들어갈 수 있는 <또 다른 비결>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부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놀라서 <이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을 때 !
나음을 받은 앉은뱅이가 아무런 말도 없이 베드로에게로 달려가 그를 등뒤에서 끌어안았다면 그 행동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
그것은 여기 이 사람이 나를 고쳐주었다는 <무언의 행동>이지 않습니까 ?

그 때 베드로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무엇입니까 ?
<본문 12절> 말씀을 보시지요 !
베드로가 많은 사람들을 향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

성도 여러분 !  보이십니까 ?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영광을 가로채고 있지 않는 <두 사람의 모습>이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는 여기 이 두 사람의 모습 !
그들의 그 모습은 그 날 그곳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을 <더욱 더 진한 감동의 마당>으로 끌고 갔을 것입니다.

베드로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 !
그것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그처럼 <대단한 것>이었기에 그날 그 순간은 베드로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자랑하기에 너무나도 좋은 상황이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런 상황 가운데서 넘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 동안 정말 수고 많이 하셨는데 !
그 동안 너무나도 애를 많이 쓰셨는데 !
그런데도 그 공을 모두 <자기자신>에게 돌려버림으로 인해서 그 모든 수고가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리게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거기에는 <감동>이 없습니다.
그처럼 <감동>이 없는 자리 !
그런 자리가 <좋은 만남의 자리>로 기억될 리가 있겠습니까 ?

우리 나라 <천연기념물> 제 53 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
그것은 <진돗개>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
우리 가운데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신 분 계신가요 ?
<한 사람>도 없습니까 ?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뭐죠 ?
개보다 못한 존재 ?
아니, 이것은 <농담>입니다.

하지만 성도 여러분 !
여기 이것을 농담으로만 여길 수 없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알고 계시지요 ?
<진돗개의 탁월함>이 세계적으로 지금 인정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처럼 뛰어난 진돗개가 <군견>이나 <경찰견>으로는 이용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모든 면에서 뛰어난 진돗개가 <군견>이나 <경찰견>으로 안성맞춤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여기 이 이유를 아시는 분 계십니까 ?
성도 여러분 !
그 이유는 진돗개라고 하는 놈은 주인을 쉽게 바꾸지 못하기 때문이랍니다.

군대나 경찰에서는 <어느 한 사람>이 평생동안 군견이나 경찰견을 다룰 수 없습니다.
언젠가는 저들이 복무기한을 마치고 전역해야 되고, 그렇게 되면 그 개를 다루는 사람은 바뀌기 마련입니다.
<개의 입장>에서 보면 주인이 수시로 바뀌는 거죠.
그렇게 주인이 바뀔 때마다 지금 군견으로 이용되고 있는 <셰퍼드>는 사흘 정도면 새로운 주인의 말을 잘 듣는답니다.
하지만 진돗개만큼은 <옛 주인>을 잊지 못한답니다.
그래서 진돗개는 <새 주인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답니다.
그러니 진돗개를 군견이나 경찰견으로 이용할 수 있겠습니까 ?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
한 인간에 대한 <진돗개의 충성심>이 이 정도인데,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우리 인생의 주인을 갈아치우고 있지는 않는지요 ?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떤 존재 ?

마땅히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우리가 지금 가로채고 있다면 그것은 곧 우리가 우리 인생의 <주인행세>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인생>을 놓고도 우리가 <주인행세>를 하려고 할 때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
거기에는 <감동>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 만남은 <잊지 못할 만남>이 될 수 없습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모습 !
하나님과 여러 사람들 앞에서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는 모습 !
사람들은 그런 모습이 있는 만남을 기억합니다.
그런 만남을 잊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늘 저는 <잊지 못할 만남>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어떻게> 우리의 만남을 그런 만남으로 만들어 갈 수가 있을 것인가 ?
그 대답을 저는 오늘 <세 가지>로 제시해 드렸습니다.
<첫째>는 <시간을 나누는 삶>입니다.
<둘째>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삶>이었습니다.
<셋째>는 <자기부인의 삶>입니다.
여기 이런 삶으로 우리의 모든 만남을 평생동안 잊지 못할 만남으로 만들어 가시는 우리 영암의 식구들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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