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슬픔에서 기쁨으로 / 삿 2:1~5

  • 잡초 잡초
  • 240
  • 0

첨부 1


본문  사사기 2:1~5 
제목  슬픔에서 기쁨으로(임경근목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휴가철이 시작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쉼의 공간을 찾아 갑니다. 산으로 바다로 해외로 떠납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은 언제쯤 휴가를 떠나렵니까? 휴가를 통해 쉼을 누리시고 기쁨을 한 바구니 안고 돌아 오시기 바랍니다.

저는 최근 텔레비전에 보도된 자살 사건을 들으면서 비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삶이 아무런 의미도 없었고, 소망도 없었습니다. 사회가 이들을 품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 한국 사회를 향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이 더 크게 느껴지는 순간들이었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하는 생각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한편 목숨을 끊은 그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당면한 문제를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 했습니다. 세 명의 아이와 함께 아파트에서 뛰어 내려 동반 자살을 한 가족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슬픈 일입니다. 육체적인 문제는 육체가 없어지면 자연스럽게 없어집니다. 그러나 영적인 문제는 육체가 사라진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영과 육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자살은 문제의 해결이 아닙니다. 단지 문제의 회피일 뿐입니다. 그녀의 문제는 영원히 해결되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습니다. 문제의 해결은 살아 있을 때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겉으로 보기에 전혀 문제가 없는 사람도 그의 영은 병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육체적으로 힘들어도 견디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병들어 있는 사람은 육체적인 조치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의 연습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세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8)라는 말씀은 이런 차원에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바로 이 영적인 문제로 인하여 슬퍼하며 애통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오늘 읽은 본문에 등장하는 사사 시대의 우리와 같은 형제 성도인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이 큰 울음 때문에 그 지역이 '보김'이라고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보김'은 '우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스라엘의 보김에서 울며 슬퍼하는 신자들을 만납니다. 이들은 슬프고 애통한 일을 만났지만, 자살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약속의 소망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삶에 기쁜 일들만 있습니까? 성경에서는 근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근심하면 믿음 없어 보이기 때문에 늘 기쁜 것처럼 행동하지는 않습니까? 어떻습니까? 근심되는 것이 없습니까? 여러분에게는 정말 영적인 근심이 없습니까? 삶이 하나님의 기준에 합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애통해 한 적이 있습니까? 자신 안에 있는 남이 알지 못하는 죄를 보고 근심하며 애통해 하십니까? 남들의 조그마한 잘못에 대해서는 크게 보고 자신의 큰 실수는 쉽게 잊어 버리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성경은 근심이 모두 나쁜 것이라고 가르치진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고후 7:10)룬다고 했습니다. 팔 복 가운데 두 번째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마 5:4)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에 나타나는 신앙의 선배들은 자신들의 영적인 죄를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그것을 깨닫게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슬퍼하며 울었습니다. 울음도 보통 울음이 아니라, 큰 울음이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 보면 아주 재미있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시작하여 '보김'에 도착합니다. 어디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곧 바로 '보김'으로 온 것이 아니라, '길갈'에서 '보김'으로 왔다는 사실입니다. '길갈'이라는 장소는 여호수아 5장 9절에 처음 나타납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니라".# 길갈은 요단강 동편에서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첫 관문입니다.

바로 이 길갈에서 할례를 행했습니다. 신랑되신 하나님과 신부인 이스라엘이 함께 살게 될 #신혼 집#으로 들어가는 첫 순간 결혼 서약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할례입니다(수 5:1-6:2). 할례가 무엇입니까? 남성의 생식기의 표피를 잘라내는 고통스러운 행위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바보스럽고 행하기 어려운 요구였습니다. 적진에서 모든 군인들이 할례를 받는다는 것, 그것은 무장을 해제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생사를 가늠하는 위험한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묵묵히 믿음으로 순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논리를 버립니다. 조리에 맞지 않아도 말씀에 의지하여 할례를 행합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이 '길갈'에서 가나안 땅에서 최초의 #유월절#을 지킵니다. 유월절은# '구원의 축제'#입니다. 구원받은 기쁨을 즐거워했습니다. 유월절 잔치 후 그들은 더 이상 지겨운 만나를 먹지 않고, 그 땅 소산을 먹었는데 맛있는 볶은 곡식이었습니다. 길갈은 기쁜 잔치의 시작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이스라엘의 군대에 합세함을 보여줍니다. 이 군대장관은 천군천사로 앞으로 이스라엘에게 펼쳐질 전쟁에 함께 할 것이었습니다. 그 곳에 살고 있던 가나안 인들을 죽이고, 그들의 신을 없애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이스라엘, 곧 신부가 신랑되신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깨끗하고 거룩한 집에서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그들이 하나님 만 섬기겠다고 굳게 약속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수 24:19-28).

  그러나 여호수아가 죽은 후 이스라엘은 쉬운 길을 택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는 일을 더 이상하지 않습니다. 어떤 지역은 아직도 가나안 사람들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은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적당하게 타협하며 살기 원했습니다. 그들에게 전쟁보다는 평화가 더 중요했고, 하나님의 명령보다 더 중요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비합리적으로 보였습니다. 토착 신들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토착화라는 명목으로 그들의 삶은 점점 혼합되기 시작했습니다. 불신자의 딸들과 결혼하고 그들의 신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도 섬기면서 다른 세상 것들을 섬긴 것입니다. 혼합주의 입니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홍해를 건너고, 광야의 기적을 경험했으며, 가나안 땅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얻게 된 역사를 경험한지가 어제 같은데, 하나님을 이렇게 빨리 잊을 수 있는 것입니까?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나라의 큰 사건들이 텔레비전에 보도될 때마다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이 열거되는 것을 볼 때 여러분은 어떠한 생각을 하게 됩니까? 멀리 보지 않더라도 우리 자신은 어떠합니까? 여러분의 직장에서의 삶은 어떠합니까? 여러분의 가정에서의 삶은 어떠합니까? 여러분의 부부관계는 어떠합니까? 여러분의 교회 봉사는 어떠합니까?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얼마나 세상과 짝하여 살고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받았던 명령인 가나안 땅 백성을 모두 죽이라는 등의 명령을 받지 않았습니다. 불교 사원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지 않습니다. 기독교 이외의 종교를 믿는 자들을 모두 미워하고 대적하여 이 나라에서 쫓아내라는 명령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싸워야만 했던 영적인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적인 불신앙의 세력들과 싸워야 합니다. 신자들과 불신자들의 구분이 모호한 세상이라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과 그리스도인의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인구가 전 국민의 1/4이 된다고 하는데, 왜 기독교 노동조합은 없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하는 방식대로 끌려 갈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세상 사람들의 목표와 다릅니다. 그리스도인 노동자들의 투쟁 목표는 뭔가 달라도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교사들의 모임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학교를 운영하고 학생들을 가르쳐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 답게 가르쳐야 합니다. 학부형들은 어떠합니까? 자녀들을 왜 교육시킵니까? 세상적인 성공을 위해서 입니까? 좋은 대학 들어가서, 많은 월급 주는 소위 좋은 직장 얻어 시집 장가 잘 보내는 것이 목표입니까? 그것은 세상적인 가치관이 우리에게 심어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목표는 그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선택하여 보아야 합니다. 그 내용이 어떠한지 비판적으로 선택해서 아이들에게 시청하도록 관리해야 합니다.
돈 씀씀이도 비 그리스도인들과 달라야 합니다. 우리들은 60년대 70년대를 빈곤의 악순환의 시대를 살아 오면서 열심히 생존을 위해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 돈을 써야 할지 배우지 못했고, 자녀들에게도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이제 2000년대의 상황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예수 믿고 복 받아 잘 사는 것이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가 되지 못합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주어진 것을 어떻게 그리스도인 답게 사용 하느냐 입니다.

우리 자신은 도대체 얼마나 세상 것들로 혼합되어 있습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유교적인 가치관이 기독교적인 가치관 위에 군림하고 있지는 안습니까? 혈연, 지연, 학연이 교회의 신앙 생활을 지배하고 있다면 그것은 큰 문제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 처세술을 그대로 하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세상과 혼합되었습니다. 예수도 믿으면서 세상도 놓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이득도 보고 천국에도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 가지만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적인 헌신을 요구하십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리스도의 법으로 세상을 정복해야 합니다. 그들은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정의가 바다와 같이 흘러 넘치는 사회를 만들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점에 대해서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며 애통해 하고 계십니까?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해있는 우리의 선배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말씀으로 찾아 오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을 일깨웁니다.

  #'길갈'#에서 '여호와의 사자', 곧 '천사'가 보김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는 마치 하나님 자신인 것처럼 말합니다. 1절에 #"내가 너희로 애굽에서 나오게 하고 인도하여 너희 열조에게 맹세한 땅으로 이끌어 왔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에게 세운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하나님의 약속을 제 확인합니다. 

그러나 늘 문제는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음성을 높여 이스라엘의 잘못을 실날하게 거짓없이 지적하기 시작합니다. 2절에서 #'그러나 너희들은 내 말을 지키지 않았다'. "너희는 이 땅 불신자들과 계약을 하고, 그들이 하는 행동을 버리지 않고 행하고 있구나."#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있던 천군천사의 칼을 거두시고, 가나안 사람을 제거하지 않고 남겨두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죄의 대가를 치르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가나안 인들과 대결하지 않고, 평화하며, 그들의 것과 이스라엘의 것을 나누며 (결혼, 종교), 관용하는 것이 지금의 평화를 위해서 좋게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 지키는 것 보다 인간적으로 관용하는 것이 쉬웠습니다. 그들은 쉬운 길, 넓은 길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들 곧 너희 이스라엘이 관용하고 평화를 체결한 가나안인들이 너희를 늘 그렇게 평화롭게 만들지를 않을 것이다'.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될 것이라'#(3절)고 말씀하십니다.  그 한 예를 아모리 족속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본문 바로 앞 사사기 1장에 기록된 것을 읽어보면, 아모리 족속이 이스라엘에게 복종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단 족속의 땅에 머물며 강력하게 저항합니다. 그들은 단을 방해합니다. 내려와 치고는 산으로 도망하는 게릴라 전을 펼치며 이스라엘을 괴롭힙니다. 이 전에 이스라엘이 그들을 그대로 두는 것이 당장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 편하고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그들이 나중에서는 이스라엘에게 큰 가시 같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 생활도 동일합니다. 우리가 양보하고 열어 놓은 세상적인 신앙 양태가 우리의 삶을 괴롭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신앙적으로 키우기를 양보하고 세상적인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교육시켰을 때 자녀들이 신앙이 없어 노년에 걱정하며 보내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경우가 그러한 경우일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의 신앙교육을 세상 교육에 양보해서는 안됩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신앙적인 선택을 보고 배울 것입니다. 결국 그 세상적인 신앙의 선택이 그들의 미래를 괴롭게 할 것입니다. 말씀대로 가르치고 양육해야 합니다. 신앙으로 결단해야 합니다. 적당하게 타협하고 살 수 없습니다. 포기할 것은 과감하게 포기해야 합니다. 이것이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결단해야 할 과제입니다.  이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이라고 말합니다. 영적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전쟁 가운데 홀로 두시기 원치 않으십니다. 적당하게 화해하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찾아와 다시 용기를 불러 일으키십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희망을 보여 줍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성도들의 마음이 큰 찔림을 받아 자신들의 죄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죄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눈물입니다. 한 두 사람이 울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그 울음은 온 이스라엘의 울음이 되었습니다. 회개의 울음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죄를 인정했습니다. 오호라 우리가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우리를 이 죄에서 구원할꼬? 그들은 눈물의 회개의 눈물을 흘립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주여, 나를 버리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징계하시지만, 궁극적인 구원의 약속은 지키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꼭 지키십니다.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약속은 우리의 약함 때문에 취소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꼭 지키십니다. 비록 우리가 선택한 잘못된 길에서 하나님의 징계가 있을 때에도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은 그대로 유효합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보게 됩니다. 징계를 하시기 전에 하나님은 먼저 당신의 사자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전에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게 합니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약속입니다. 백성들은 바로 그 약속을 기억하고 슬퍼하며 울음을 터뜨립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제사, 곧 예배를 드립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을 다짐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후에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살았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오히려 실망스러운 삶이 계속됩니다. 이전의 삶과 별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들이 울고 불며 회개하며 예배를 드렸지만, 삶은 변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들의 울음이 거짓이었겠습니까? 제사가 가식이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죄인 된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도 가끔 설교 말씀에 깊은 감동을 받고, 헌금을 다른 때보다 더 많이 하고 울면서 교회 문을 나섭니다. 그렇지만,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옛 삶을 그대로 행하며 살 때가 많습니다. 습관화된 죄에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 '길갈의 하나님'은 '보김의 사람들'#에게 이전의 약속을 기억 나게 하여 회개 시킵니다. 그리고 소망을 가지도록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붙잡고 살 것을 도전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 매 주 강단을 통해 전파되는 생명의 구원의 말씀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항상 기뻐하라고 바울 사도는 권면했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볼 때에는 울어야 마땅하지만, 구원하시며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을 바라볼 때에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믿지 않는 자와 믿는 자의 차이가 있습니다. 약한 가운데 넘어지지 않고,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 말입니다.

하나님의 회개시키는 이 말씀, 곧 기쁜 소식은 '길갈'에서 '베들레헴', 곧 예수님의 구원으로 바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이 복음은 '보김'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보김', = '우는 사람들', '슬픈 사람들'. 우리는 이 '보김'에서 인간의 참 모습, 곧 죄인 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보김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이 보김에서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슬픔과  애통의 자리 보김에서 일어나 길갈의 약속을 기억합시다. 우리에게는 '베들레헴', 곧 '떡집'에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볼 때 기쁨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말씀의 떡'을 우리에게 먹여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김'에서 회개의 눈물과 함께, '길갈'의 하나님, 곧 '베들레헴'의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는 가운데 웃을 수 있습니다. 보김의 인생을 극복하십시오. 베들레헴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길갈에서 약속된 축복이 우리에게 풍성히 임할 것입니다. 영적 전쟁에서 실패하여 애통해 하며 근심하며 울고 있는 여러분에게 베들레헴의 예수님께서 소망과 희망을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