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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보혈은 완전한 속죄(贖罪)를 보증합니다 / 히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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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히브리서 9장 1절 - 28절
제 목 예수님의 보혈은 완전한 속죄(贖罪)를 보증합니다. 


(히브리서 7-10장 구분 도표) 히브리서 7장에서 10장까지는 예수님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위격과 사역을 논증합니다. 7,8장은 예수님이 어떠한 대제사장이었는가, 예수님의 위격을 논증하였고 9,10장은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님의 사역이 어떤 효력이 있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사실 히브리서 9장과 10장의 내용이 무우 자르듯이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마음에 감격이 벅차면 한 이야기 또 하고 또 하고 하듯이 9장, 10장도 사실은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님의 희생의 사역이 어떤 결과를 나타내었고 어떤 효력이 있었으며 어떤 능력이었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구지 구분을 한다면, 9장은 구약시대의 첫 제사의 실재(reality)로서 예수님의 보혈에 초점을 맞추었고 10장에서는 예수님의 죽으심, 희생 자체에 초점을 더 강조하였습니다.

히브리서 9장은 먼저 구약의 성막에서 이루어진 제사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밝혀 줍니다<1-5절>. 성막 이런 것들이지요?(성막 OHP 자료)...  첫 장막, 등대, 진설병, 휘장 뒤의 지성소, 금향로, 언약궤, 언약궤 안의 아론의 싹난 지팡이, 언약의 비석들, 그룹의 형상..들을 나열하다가 이것들을 이제 낱낱이 말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하나씩 자세히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요는 이러한 성막에서의 첫 제사는 비유로서 개혁할 때까지 맡겨둔 것이고 이 모형을 통해서 성령께서 증거하는 멧세지는 오히려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8-10절>.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은 성소 안에 지성소가 있는데, 성소에 들어가려면 염소와 황소의 피와 암송아지 등 동물의 피를 뿌리고 태우는 향을 내고 재를 날려서 제사장을 정결케 해야 들어갔고 더욱이 지성소에는 대제사장이 일년에 단 한 차례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소에는 일반 사람은 못들어가고 제사장도 그냥은 못 들어가고 들어갈 때마다 동물의 피로 정결케 하는 의식을 치루어야 했고 더욱이 지성소에는 제사장들도 들어갈 엄두를 못내는 곳이었습니다.
지성소를,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이 계신 곳의 상징인데,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또 지성소를 시은소(施恩所)라고 하는데 이는 은혜를 베푸는 장소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가 이렇게 힘들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여, 이 성소의 제사는 번거롭게 여러번 드리지만, 그것을 통한 멧세지는 오히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아직 막혀 있구나를 증거한다는 것입니다<6-8절>.

히브리서 기자가 첫 장막의 여러 모습을 이야기하다가 이런 것들 일일이 다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 것은 이제는 이런 것들 세세하게 알 필요가 없다는 것이고 이제는 그런 제사 안 들여도 됨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이런 제사가 필요없는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온전한 제사가 드려져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이제는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공관복음 모두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을 때,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주욱 찢어졌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지성소, 시은소로 나아가는 길이 활짝 열렸다는 의미이고 이제는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9장 10절에서 22절까지에서 옛 언약에 따른 첫 번째 제사와 새 언약을 따른 온전한 제사가 어떻게 다른지를 논증해 줍니다.(OHP자료)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반복적인 제사와 단번의 제사, 동물들의 피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 죄를 가릴려고 하는 것과 죄를 없애는 것,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한 것과 모든 죄인들을 위한 것, 양심을 온전케 하지 못하고 찌르는 것과 양심을 온전히 깨끗케 하는 것, 지성소에는 들어갈 엄두도 못내는 것과 하늘에 들어가셔서 함께 하시는 것, 백성들을 축복하려면 성막에서 나와야 하는 것과 백성들을 하늘로 인도하시는 것.. 이런 대조를 보여 줍니다.

제사를 드리는 초점은 죄의 해결입니다. 그 죄의 해결을 위하여 제사에서의 제일 중요한 의식은 피를 흘리는 것, 죽음으로써 피를 흘리는 것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명은 피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레위기에서 피가 인간 육체에게 얼마나 중요한 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레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음으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죄를 속하는 것, 용서받기 위하여는 피가 반드시 뿌려져야 한다는 것이고 즉 피흘림이 없으면 사함, 용서가 없다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받고 양심이 죄책감에서 해방되고 싶어서 제사를 드리는 데, 문제는 동물의 피는 죄를 없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죄를 생각나게 할 뿐입니다. 동물의 피는 양심을 깨끗하게, 거리낌이 없게 하지 못합니다. 도리어 양심을 더 민감하게 자극할 뿐입니다.
어떻게 동물의 피가 사람의 피를 대신하겠으며 동물의 생명이 사람의 생명을 대신하겠습니까? 사람의 가치를 동물의 가치로 대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는 뭇 사람의 피보다 훨씬 더 존귀하고 보배로운 피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아담의 육신적 후손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피는 아담의 죄로 물들은 죄인의 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흠없고 점없는, 깨끗한 피이고 그래서 더 없이 존귀한 피입니다. 죄로 오염되지 않은 맑은, 거룩한 피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를 찬송할 때에 보혈, 보배로운 피라고 이야기하는 뜻이 이것입니다. 보혈, precious blood, 아주 존귀한 피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보배로운 피, 보혈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 피의 능력 때문입니다. 그래서 찬송가에서도 보혈의 능력을 찬양하지요?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그 보혈의 능력이 무엇입니까? 오늘 9장에서 우리가 주목하고 싶은 것이 그것입니다.
오늘 9장을 자세히 살펴 보면,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가 흘려져서, 보혈의 제사가 드려져서 우리에게 누리게 하는 은혜가 나타나 있습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첫째로 그리스도의 피가 죽음을 낳는 행동으로부터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14절 설명) 둘째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고 셋째로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합니다<15절>.
죽음을 낳는 행동, 죄로부터 양심이 깨끗해 지는 것이 이미 베풀어진 과거의 은혜라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열망과 능력은 현재 누리는 은혜이고 영원한 기업의 약속은 장차 받게 될 미래의 은혜를 말합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9장을 결론적으로 요약하면서 다른 표현으로 반복하여 깨우쳐 줍니다. <23절>의 "그러므로"는 결론임을 나타내 줍니다. <23-28절>까지 주의하여 보면, 반복해서 나타나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다는 표현이지요?
<24절> 그리스도께서 참 하늘에 들어가사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이는 현재를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하나님 앞에 나타나셔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하십니다.
우리가 오늘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예배의 삶을 드리도록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하나님 앞에 나타나셔서 우리의 변호사 되어 주시며 우리의 옹호자가 되어 주십니다.
<26절>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우리는 세상 끝 하면 지구의 종말을 생각하기 쉬운데, 여기에서의 세상 끝은 정확히 번역하면 세대의 끝, 첫 언약의 제사가 드려지는 세대의 끝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는 과거를 말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단번에 죄를 없애 버리신, 그럼으로써 우리의 양심을 온전히 깨끗케 하신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27,28절>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두 번째로 세상에 나타나시는 때가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듯이, 죽은 후에 심판을 받는 것이 모든 인간의 운명이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당신의 사람들이 온전한 구원을 누리도록 하기 위하여, 이 심판에서 면제되고 영원한 기업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미래에 세상에 다시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 날은 성도들의 구원이 완성되는 날이며 기업의 약속이 손에 잡히듯이 선명하게 체험되는 날이며 성도들의 기다림과 소망이 성취되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9장의 멧세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와 능력을 나타내 주는 9장의 멧세지는 <14,15절>과 <23-28절>을 통하여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의 보혈은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살려 줍니다<14, 26절>.
그리스도께서 과거에 인간의 역사 가운데 나타나셔서 보혈의 피로써 우리의 죄를 없애 주심으로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살려 줍니다.

2. 그리스도의 보혈은 우리를 오늘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게 합니다<14,24절>. 그리스도께서 보혈의 피로써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가셔서 현재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하여 변호해 주심으로 우리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게 합니다.

3. 그리스도의 보혈은 내일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한 구원의 완성을 보증합니다<15,28절>. 그리스도께서 미래에 다시 나타나셔서 자기를 바라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실현시키십니다.
이를 하나씩 조금 더 자세히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보혈은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살려 줍니다. 그리스도께서 과거에 인간의 역사 가운데 나타나셔서 보혈의 피로써 우리의 죄를 없애 주심으로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살려 줍니다.<14, 26절>
양심이라는 단어의 헬라어 뜻이 재미있습니다. 두 단어가 결합된 것인데 "무엇무엇과 함께"라는 뜻과 "안다"라는 뜻이 결합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안다.. 그것이 양심입니다.

영국에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잘 아는 이가 둘이 있다. 곧 하나님과 양심이다"하나님과 함께 아는 것, 그것이 양심입니다.
영어도 비슷하지요? conscience. con + science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 줄 아십니까? 행복하게 사는 제일의 조건이 있다면, 양심에 거리낌이 없어야 합니다.
고대 로마의 시인인 호라티우스가 노래했습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찾아 세상을 헤맨다/ 행복은 누구의 손에든지 잡힐 만한 곳에 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만족을 얻지 않으면 행복을 얻을 수 없다."마음속의 만족, 양심에 거리낌이 없을 때 가능합니다.

양심에 거리낌이 있는 사람은 기가 죽어 지내고, 눌린 심령으로는 삶을 진취적으로 살아가지 못하며 작은 일에도 쉬 피곤함을 느끼고 마음이 눌려 있기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예) 윤동주 시인의 서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민감한 양심으로 일깨우는 좋은 시이지만, 그러나 그 마음으로는 괴로워서 못삽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이런 사람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내 탓인 것처럼 여겨져서... 굉장히 겸손한 것같지만, 사실은 굉장히 괴로움에 눌리며 지내는 사람.. 이런 사람들의 문제는 양심이 자기 자신에게 민감하기 때문에, 모든 일에 자기 자신을 의식하게 되고.. 그러면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양심에 거리낌이 있으면, 위축된, 눌린 삶을 살아갑니다. 며칠 전에 영국의 의학협회에서 흥미로운 보고서를 냈습니다. 전공이 무엇이냐에 따라 수명이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법학, 의학.. 이런 골치아픈 전공을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수명이 짧고 공학, 과학 이런 노동의 기쁨, 발견의 보람을 느끼는 직업의 사람들이 수명이 상대적으로 길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신학을 전공한 목회자들, 종교인들이 대체적으로 혈압이 낮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 것같습니까? 종교적으로 살려고 하다보니... 양심에 찔리는 일이 많고 그래서 심장이 위축되어 산다는 것이지요. 성질대로 못사니까... 심장이 오그라들어서 혈압이 낮게 되는.. 그런데 사실 그렇게는 답답해서 못삽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사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람의 양심에 거리낌이 없겠습니까? 둘 중의 하나입니다. 자기의 행위 완벽함을 추구하여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아예 하나도 하지 않든지... 아니면 용서의 기적을 통한 자유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행실, 행위 완벽함으로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바라는 사람은 더 양심이 찔리는 일이 많아서 마음이 더 눌리든지 아니면 거짓과 오만의 가면을 쓰든지 둘 중의 하나의 모습을 보입니다.

행위 완벽함으로 자기의 양심에 거리낌이 없고자 하는 사람은, 도리어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인 존재인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고,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혹시 내가 악한 마음을 품어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하여 다른 사람의 눈빛 하나에도 마음이 점점 더 왜소해지고 신경쓰이게 되고 위축되고 살아갑니다.
참회록을 쓴 사람들을 보십시오. 어거스틴, 톨스토이... 이들이 양심껏 살고자 하면 할수록, 양심적이지 못한 자신을 더 발견하고 그래서 참회할 일이 더더욱 많습니다.

반면,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인 존재인지를 인정하지 않는 마음은 자신은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살았다고 큰 소리치며 자긍하지만, 정말로 이 사람이 다른 사람 아무에게도 상처를 준 일이 없고 해를 끼친 일이 없냐 하면 그런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아니 정말로 모든 사람에게 상처를 준 일이 한번도 없는 사람일지라도, 그가 이래서 나는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자신의 오만한 마음을 못 깨달은 것이고 그 사람은 오만이 기초가 된 거짓된 평안을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성경은 양심이 화인 맞은 사람, 양심이 죽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둘 다, 사람에게 양심의 거리낌이 없음을 보증해 주지 못합니다. 자신의 행위, 삶의 태도를 내세워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사는 것은 불가능입니다.

인간의 제일의 행복 조건,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것, 양심이 깨끗해지는 것은 성령께서 그 마음에 온전한 죄사함의 확증을 줄 때에 가능합니다. 아니 그 때에만, 사람의 양심은 깨끗함을 입어 눌림과 불편함에서 벗어나서 평안과 자유를 누립니다.

<시32:1>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죄를 안지어서가 아니라 죄를 이미 많이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죄를 절대로 한번도 안지어서가 아니라 또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모습이라 할지라도/ 성령께서 우리 심령에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로 씻겨 주심으로써, 나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지는 죄사함의 기쁨, 평안과 자유를 누립니다.

이 온전한 죄사함, 양심이 정결케 된 은혜를 누릴 때에 사람은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답게, 인간답게 사는 기쁨과 맛을 누립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보배로우신 피가 흘리셨기 때문에, 오늘 현재 우리가 누리는 은혜인 것입니다. 당신의 양심은 이 은혜를 누리셨습니까?

둘째로, 그리스도의 보혈은 우리를 오늘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보혈의 피로써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가셔서 현재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하여 변호해 주심으로 우리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게 합니다<14,24절>.
여러분,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섬기는 신을 모시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사람들이 하도 오만해져서 종교, 신앙을 갖는 것을 신을 이용하는 것처럼 여기곤 하는데... 여호수아가 마지막 고별 설교를 하면서 "네가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했듯이, 신앙을 갖는 것은 섬길 신을 모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이 그 안에 계신 제일의 증거는 그 마음 안에 거룩한 열망이 피어 오른다는 것입니다.
나도 한번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고 싶다.. 이런 야무진 소원, 거룩한 열망, 거듭난 사람들에게는 다 있습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 열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데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 나는 자격없는 사람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예) 장상 씨(신학 전공한 사람). 나도 한번 나라를 위하여 백성을 섬기는 일에 드려지고 싶다 했는데... 자신의 허물에 발목 잡혀서 창피만 당했지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도 한번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드리고 싶은데..사단이 발목 잡습니다. "니 까짓게 무슨..."
또 잘 섬기다가도, 실수가 드러나면, 발목 잡히지요. 청와대 제1부속실장인 양길승 씨, 몰카에 발목잡혀서... 스스로 사표를 내고야 마는.. "에이, 역시 난 안돼.." 이러기 쉽지요.
그때마다 온전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옹호, 변호해 주십니다. "내가 저 형제의, 저 자매의 죄값을 이미 다 치루었습니다. 그에게서 성령을 거두지 말아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우리를 위한 변호, 옹호를 받으셔서 우리에게서 성령을 거두어 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수없이 많은 실수와 넘어짐을 겪었을지라도, 오뚜기처럼 절대로 쓰러지지 않고 그래도 하나님을 섬기며 살도록 꺼지지 않는 열망과 능력과 지혜를 부여받는 것은 이 그리스도의 은혜, 하나님 앞에 오늘도 나타나셔서 당신의 보혈의 능력을 베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어떤 연약한 모습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오늘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하여 변호해 주시는 그리스도를 기억한다면, 우리의 어떤 연약함과 과오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은 우리를 떠나가지 않으시고 오히려 더 우리를 위로, 격려하시는 분임을 기억하고 느낀다면, 그 성령님의 권고를 따라 다시 한번, 다시 한번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나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셋째로, 그리스도의 보혈은 내일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한 구원의 완성을 보증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미래에 다시 나타나셔서 자기를 바라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실현시키십니다<15,28절>.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모두가 다 운명으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인 성경이 명확하게 선포하는 또 하나의 운명은 인간은 모두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9:27>.
히브리서 기자만 그런 공갈, 과장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도 얼마나 자주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까? 
<마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10: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마12:18>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마12: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요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똑같이 선포했습니다.
<롬14:10>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복음의 멧세지의 주 이슈 중의 하나가 심판입니다. 이것을 학자들의 표현으로는 '예수의 복음은 종말론적인 복음이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복음을 현세적으로만 생각해서, 예수님 믿으면 마음이 평안하고 사람들 관계가 행복해 지고 일이 잘되고 현세적인 것에 지나치게 치우쳐 있지만, 그러나 예수님이 선포한 복음, 바울이 증거한 복음은 다분히 종말론적 멧세지입니다.

인간의 운명에 심판이 있다는 것이고 그 심판에서의 의롭다 판정받는 것이 인생의 최고의 가치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사람이 자기의 삶의 여정, 형편으로 보아서는 심판 날에 정죄를 피할 수 없는 운명이지만,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들, 기다리는 자들, 의지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다시, 두 번째로 나타나셔서... 구원을 완성시키시고 영원한 기업을 얻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배 속에 약간의 더러운 것을 간직하고 있듯이, 털면 먼지 안나는 사람 없듯이... 살다보면 죄로 얼룩질 수 밖에 없고, 주머니 속에 칼을 넣고 아무리 감추려 해도 드러날 수 밖에 없듯이... 죄악의 본성이 환하게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 인간에게 심판은 운명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예수님께서 그를 믿는 자에게 심판의 운명에서 건져 주시고 하늘 나라의 상속, 영원한 기업을 보증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약속, 구원의 약속을 완성시키시기 위하여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재림하십니다.
<27,28절> (다시 읽는다)

예수님의 보혈이 보증하는 것은, 우리의 온전한 죄사함은 구원의 완성을 향한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양심에 죄사함 받은 자유를 누리고 오늘 거듭 넘어짐이 있을지라도 오뚜기처럼 일어서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오히려 구원의 완성에 대한 증거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죄에 시달리지 않는, 죄와 상관없는 몸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의 기업이 온전하게 누려지는, 그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예수님은 다시 오십니다. 이 은혜의 약속을 당신은 받으셨는지요?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사함의 선포를 받은, 양심의 깨끗함을 받은 사람이 오늘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의 삶을 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의 질곡의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의 삶을 드려가는 성도는 내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이 더욱 소망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께서는 그 소망에 응답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흘리신 그 희생, 온전한 제사가 우리에게 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죄사함을 받은 기쁨과 자유함을, 오늘 하나님을 섬기며 살고자 하는 거룩한 열정과 능력을, 그리고 장차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 우리의 구원을 완성시키시고 영원한 기업을 얻게 하시는 그 은혜를 넉넉히 베풀어 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에 어떤 아름다운 수식을 붙여도 지나침이 없지 않습니까? 그의 보배로운 피를 찬양하고 또 찬양함이 기쁜 일이 아닙니까? 아니 여러분, 성령께서 지금 이 시간에 당신의 심령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어 보십시오.
톨스토이가 그랬지요? "양심의 소리는 하나님의 소리다."라고.
당신은 양심의 깨끗함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오늘도 당신의 양심은 죄책감으로 눌려 있습니까?
당신은 오늘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의 삶을 드리십니까? 아니면 교회에 나오고 예배의 의식에 참여하는 것이 혹시 이런 거라도 해야 하나님께 혼나지 않지 않을까 두려움으로 하지는 않습니까?
당신은 예수님의 다시 나타나심, 재림이 소망이 되십니까? 아니면 두려우십니까? 당신의 운명을 생각하면 소망과 감사가 느껴지십니까 아니면 심판받을지 모르는 두려움이 지배하십니까?

만약 후자라면, 오늘 예수님 앞에 나아오십시오. 마음을 회개하여 예수님을 만물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당신의 주님으로 영접하십시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이 당신에게도 그 은혜를 넉넉히 베풀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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