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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듭난 자의 삶 / 요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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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제목 :거듭난 자의 삶
† 성경본문 :요한복음 3:1~8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바티칸에 있는 베드로 성당 안에는 르네상스(Renaissance) 시대의 종교 미술가 라파엘(Raffaello)이 그린 「변화 산의 정경」이 있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등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구름이 펼쳐진 위에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의 황홀한 정경입니다. 그런가하면 그림의 하단에는 산아래서 아홉 명의 제자들과 함께 간질 병든 아들을 데리고 온 아버지의 모습이 나오는데 거기에는 어둡고 컴컴한 배경에 사람들이 서로 소리지르며 승강이를 벌이는 광경입니다. 이는 변화된 세계와 변화되지 못한 세계의 대조적인 장면을 묘사한 것입니다.

땅에서 흐르는 물이 기체로 변하게 되면 공중으로 증발됩니다.
땅 위에 서식하는 벌레들 중에 껍질을 벗고 나방이 되면 공중을 나는 곤충의 생태가 시작됩니다. 똑같은 종(種)이라도 거듭나는 변화를 가져올 때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새로운 차원의 세계관이 있습니다(고후 12:2). 거듭나고 변화된 사람만이 체험하는 영적 세계관입니다. 이 변화는 물리적이거나 화학적인 변화가 아닌 신비로운 변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의 랍비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시며 중생(重生)의 원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하고 묻는 니고데모의 질문에,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하고 대답하였습니다(요 3:3-5). 이는 거듭남의 진리가 신비로운 도리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거듭난 사람입니다(롬 8:1-2). 성경은 거듭난 사람과 거듭나지 못한 사람 사이에는 서로 비교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삶을 산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의 삶이요 은혜 받은 사람의 변화된 삶을 의미합니다.


Ⅰ. 거듭남의 은혜

사람이 거듭난다는 것은 니고데모가 아니라도 이를 쉽게 이해할 사람은 없습니다. 육신을 가진 인간의 체질로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신적 산물이라고 할 때 어느 누구도 이를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관점에서 설명을 못하지만 그 결과는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8절).

(1)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입니다.

본문 말씀 3절에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거듭남의 방법에 대하여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하였습니다(6-7절).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난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12-13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자는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요한1서 5:1에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죄를 대적하며 이를 멀리 하는 자입니다. 요한1서 3:9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벧전 1:23)


(2)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자입니다.

말을 시작하는 아이들이 「아빠」라는 말과 「엄마」라는 말을 가장 쉽게 가장 먼저 하지만 아무에게나 아빠, 엄마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자연스럽게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로 났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15에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8:16-17에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때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여야 될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된 자부심을 가지고 항상 하나님이 아버지 됨을 고백합니다. 고린도전서 12:3에는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 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3)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입니다.

로마서 8:14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4:6에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자에게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그 속에 있어서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서 살게됩니다. 거듭난 사람이라도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불완전한 육신의 요소를 지니고 있어서 항상 육신의 소욕에 시달리며 이를 억제하기 위하여 고통을 겪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 하였습니다(고전 3:1).

우리가 거듭난 자의 삶을 살고자 노력하고 있지만 항상 육신의 욕구가 치밀어 오르면서 우리를 죄 아래로 끌어내리고 있습니다(롬 7:22-23). 이처럼 우리의 약함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 속에 성령을 보내주셔서 육신의 소욕을 억제하고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로마서 8:9에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Ⅱ.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 받은 자

본문 5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물과 성령」은 사죄와 성결을 뜻합니다.
구약시대 하나님의 백성을 성결케 하는 의식 중에는 물로써 씻어 내고 불에 태우는 제도가 있었습니다(레 16:26-28). 이는 성령으로 새롭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에베소서 5:26-27에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1) 옛 사람이 소멸되는 것입니다.

신약적인 의미로 물은 세례를 뜻합니다. 사도 바울은 세례의 의식을 설명하면서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지고 장사지낸바 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6:3-4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라고 하였습니다.

기독교 복음에 있어서 언제나 새 생명의 도리는 죽음이 전제가 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50에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자의 삶은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매일 같이 옛사람이 소멸되는 작업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로마서 6:6에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2) 그리스도 안에서 재창조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7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이 옛사람을 소멸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세례를 통하여 가시적으로 표현합니다. 세례는 정욕으로 얼룩진 육신의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장사되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신령한 사람으로 다시 났다는 뜻을 지닙니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6:5에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4:22-24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고 하였습니다.

(3) 사죄와 확신이 있습니다.

성경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과 거듭난 사람의 구별을 옛사람과 새사람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또 옛사람과 새사람의 경계를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규정지었습니다. 에베소서 2:12-13에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과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밖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죄에 대한 공포와 회의에 빠져 불안하고 불확실한 생활을 하였습니다(롬 7:22-24).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가까이 있을 때는 사죄의 확신과 소망으로 담대한 삶을 살게됩니다. 로마서 8:1-2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8:38-39에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일 이나 장래일 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


Ⅲ. 거듭난 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나 완전히 성화(聖化)된 사람은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역시 완성된 천국이 아니기 때문에 죄와 마귀의 유혹이 극심한 곳이며, 우리 안에 아직도 육체의 소욕이 남아 있어서 언제든지 우리를 흔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하였습니다(벧전 2:11).

바울은 육신의 정욕을 억제하면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5:16-17에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하므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2:4에는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 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라고 하였습니다.

(1) 자기의 사명감을 인식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생애 중 옛사람과 새사람의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곧 다메섹 노상에서의 사건 이전에는 율법의 전통과 자기의 철학을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존재 가치와 사명감을 올바로 인식하였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1에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께 택정함을 입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또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에 저가 붙들었던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기고 배설물처럼 내어 버렸으며 오직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는 삶을 산다고 하였습니다(빌 3:8-12). 그는 에베소 장로들에게 송별설교를 하면서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 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하였습니다(행 20:23-24).

(2) 믿음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신약의 야고보는 믿음은 행함을 통해서 증거 된다고 하였습니다. 야고보서 2:22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중생의 도리를 교훈 받은 니고데모는 거듭난 사람으로서 삶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랍비요 공회 위원의 신분으로 처신하기가 매우 어려운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 당시 바리새파에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거나 그의 사역에 동조하는 사람은 유대교에서 출교를 시키고 그 사회에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요 9:22). 니고데모는 평소 그의 믿음을 들어내지 않으면서도 필요한 시간, 필요한 장소에서 자기가 해야될 일을 반드시 실천하였습니다. 요한복음 7:51에 보면 유대인의 공회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문제삼아 정죄하려고 할 때 니고데모는 이를 만류하며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하고 예수님을 변호하였습니다. 그는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을 때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함께 빌라도를 찾아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인수하여 값비싼 향료와 약품을 바르고 세마포로 싸서 장사지냈습니다(요 19:39).

(3) 소망 중에 인내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사람에게는 하늘 나라의 영원한 소망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29에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자녀된 성도들을 위하여 준비해 놓은 유업은 세상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육신의 눈으로나 인간의 감각으로는 식별할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그들에게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어떤 것인가를 알기 바란다고 하였습니다(엡 1:17-18). 문제는 이와 같은 소망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 다는 점입니다. 로마서 8:24-25에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또한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58에는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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