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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살하지 맙시다(막 10: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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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하지 맙시다(막10:17-34)   


목회와 신학에 나온 내용입니다.
구역장인 한 성도가 우울증과 자살충동으로 상담실을 찾았습니다. 신혼 초부터 권사님이신 시어머니가 한 방을 요구하는 등 시어머리로 인해 평생 힘들게 살았다고 합니다. 그동안은 신앙으로 잘 견디었는데 50세를 넘기다보니 이제는 억제할 수 없는 분노가 치솟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같은 교회에 다니는 시어머니에게 소문날 것이 두려워 노골적으로 분노를 표출할 수도 없고 생각 끝에 시어머니가 애지중지하시던 난에게 화풀이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시어머니가 정성스럽게 물을 주고 들어가면 그 난들을 바라보며 '지긋지긋 한 것 너는 죽지도 않니? 죽어버려라!'라고 하며 미워했다고 합니다. 그런지 4주 뒤 몇 년을 멀쩡하게 살던 난들이 갑자기 하나씩 시들더니 마침내는 모두 죽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자책하며 상담실을 찾은 것입니다.
결혼 25년 동안 차곡차곡 누적되어 수위에 찬 분노가 이제 더 이상 기도와 인내의 힘으로 억누를 수 없어 분출이 된 것입니다. 분노가 들끓을수록 신앙적 자학에 시달립니다. 그래서 구역장님은 "목사님 그리스도인도 자살할 수 있어요? 자살할 수 있다고 말해 주세요. 저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그것마저 빼앗아가지 마세요"
남이 보기에는 아주 정상적인 삶을 사는 것 같고 신앙 생활 잘 하는 믿음 좋은 분 같은데 그 마음에 쌓인 분노, 우울증으로 인해 자살을 수 없이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그래도 상담실을 찾아 치료를 받았지만 상담실을 찾지 않고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자살 건수는 1만 3055건으로. 하루 평균 36명, 40분당 1명 꼴이 자살을 한 셈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자살을 시도한 사람은 자살에 성공한 사람보다 10배내지 20배가 많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하루에 360명에서 700명 가량이 자살을 시도한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 1/10의 36명 정도가 성공한다는 것이지요.

자살의 원인은 가지각색입니다.
1) 존재론적 이유입니다. 왜 살아야 하느냐는 질문에 답이 없어 자살하는 경우입니다. 삶이 허무하고 귀찮게 여겨질 때 자살을 생각하고 순간적 충동에 의해 자살을 시도합니다.

2) 상실감 때문에 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가까운 사람 즉 부모나 애인이 떠나고 기댈 곳이 없을 때 밀려오는 상실감을 감당하지 못해 자살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특히 믿고 의지했던 사람이 떠나면 실망이 워낙커서 자살을 결심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3) 환경적인 요인입니다. 카드 등 빚더미에 쌓이거나, 직장을 잃거나, 성적이 떨어지거나, 왕따를 당하거나 폭력을 당해 자존심이 무너지거나, 수사가 조여오는 심리적 압박이 있거나, 갑자기 우울해지거나 수치심을 느낄 때 이런 환경을 이기지 못해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환경이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입니다. 같은 환경도 견디는 사람은 견디고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못 견딥니다. 정몽헌 회장은 자살을 택했지만 김우중 회장은 자살하지 않고 도피 생활을 하며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환경이란 절대적인 아닙니다.

자살율이 열악한 환경에 사는 가난한 후진국보다 오히려 선진국이 더 많습니다. 유럽에서도 사회 보장 제도가 가장 잘 되어 있다는 비교적 선진국인 스위스가 다른 나라들보다 더 많이 자살합니다. 중국보다 미국이 더 잘살지만 미국에서 자살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북한보다 한국이 더 잘사는데 한국에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북한에서 죽을 고생하면서 자살하지 않고 살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한국에서는 자살을 택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환경이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기에 환경을 탓하며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환경과 자신의 환경을 비교하기에 우울에 빠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기에 항상 불안한 것입니다. 비교에서 행복을 찾으려 하기에 감사를 잃어버립니다.

아이에게 2천 원을 주면 고마워 한다. 그런데 다른 아이에게 5천 원을 주면 이내 불평한다. 다른 아이는 5천 원인데 나는 왜 2천 원이냐? 선물로 받은 2천 원 자체로 감사하기 보다 다른 사람에 비해 부족한 것을 보면서 불평한다.
환경을 비교할 때 우울에 빠지고 자살의 충동을 느낀다. 비교하면 없는 것만 보여 짜증이 날 수 밖에 없다. 선진국일수록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하기에 더 박탈감을 느끼고 짜증이 나고 자살을 하는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환경을 비교하지 말고 주님의 뜻을 찾으면 감사가 풍성히 넘칩니다. 2천 원 준 것 자체가 고맙듯이 오늘도 생명이 연장된 것 자체가 감사하고, 일용할 양식이 있는 것 자체가 감사하고, 움직일 수 있는 건강이 있음이 고맙고 믿음이 있어 기도할 수 있음이 감사하고 마음껏 예배드릴 수 있는 자유가 있음이 감사한 것이다.
4) 자살의 가장 큰 원인은 자살이나 살인을 유도하는 귀신 문화이다.
살인, 폭력, 음란, 자살 등은 귀신 문화가 바닷물처럼 흘러 넘칩니다. 청소년들이 즐겨하는 인터넷 게임에는 잔인하게 죽이는 게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만화에도 생명을 파리목숨처럼 죽이고 죽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무의식 속에 매일 보는 만화 인터넷 게임을 통해 귀신 문화에 젖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폭행하는 것도 가정을 버리는 것도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악한 영이 문화를 통해 역사하는 것입니다.

살인의 추억이라는 영화는 많은 영화팬들이 호응을 했지만 당사자들은 그 영화로 인해 다시 한번 죽을 맛이라고 합니다. 당사자들에게 이 영화는 살인의 악몽을 다시 회상되게 하여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그런데 돈만 된다면, 인기만 된다면 다른 인생이 파괴되고 다른 사람이 망가져도 별 신경 쓰지 않는 귀신 문화가 결국 생명을 버리는 자살로 이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귀신 문화는 자살이 진정한 용기인 것처럼 부추기에 목숨을 쉽게 끊게 합니다. 귀신 문화는 자살이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 큰 죄임을 숨깁니다. 죄를 가볍게 여깁니다.

귀신 문화는 죽으면 끝이라고 속이고 있습니다. 죽으면 끝이 아닙니다. 가족은 평생 지우지 못하는 아픔을 가슴에 묻고 살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도 죽으면 끝이 아닙니다. 음부에서 더 끔찍한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불로치는 고통을 당합니다. 구더기도 죽지 않는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당합니다.

그런데도 영원한 세계가 없고 죽으면 끝이라는 거짓 문화에 속아 죽이고 자기도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삶에 대한 확신, 영생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사람들은 그리 쉽게 자살하지 않을 것입니다.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인 것이고 자살은 살인과 마찬가지로 생명을 도적질하는 것이라는 알 때 생명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영생에 대한 소망은 자살 충동을 이기는 원동력이 됩니다.
영생에 대한 확신은 어떤 고난의 환경이 와도 기도하면 이겨냅니다. 힘이 들고 지칠 때 주님의 은혜를 구하면 기도할 것입니다. 말씀을 부여잡고 이를 악물며 자살의 충동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녀들에게 좋은 게임기보다 영생을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어떤 좋은 선물보다 영생의 소망을 가르치고 인내하며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고 생명을 귀하에 여기는 말씀을 가르칠 때 자녀들이 험난한 세상에서 승리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3중 고통을 안고 살았던 헬렌켈러의 말처럼 하나의 문이 닫혀지면 다른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닫힌 문이 아니라 열린 다른 문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성경에 영생에 관해 관심을 가진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17절에 예수님 앞에 무릎을 끓고 질문합니다. '선한 선생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누가18:18절은 관원이라고 하였고, 마19:20절은 청년이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부자입니다.

부자 청년이 영생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칭찬 받을만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영생에 관한 관심이 인생을 거의 다 살아버린 노인들의 희망이라고 여기고 청년들은 관심이 없는 것처럼 여기지만 이 사람은 청년의 때 영생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영생이나 천국은 사회적으로 실패한 사람들의 피난처 정도로 생각하고 성공한 사람들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이 청년은 성공한 관원임에도 영생에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 온 것입니다.
사람들은 영생이 가난한 사람들이 위로 받기 위해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부자들은 별 신경쓰지 않는 것으로 여기는데 이 청년은 부자였음에도 어떻게 영생을 얻을지 예수님게 질문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청년은 칭찬받을만합니다. 예수님도 그를 보시고 사랑하였다고 합니다(21절).

그렇다면 자살 충동을 극복하는 영생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1. 먼저 영생은 선행과 공로로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부자 청년의 질문은 내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17절)?
17절의 영생이나 23절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나 26절에 구원은 같은 의미입니다.
이 청년은 내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보상 받을 수 있습니까 하는 당돌한 질문입니다. 나의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젊은 나이에 관헌이 되었고 부를 누릴만큼 누리기에 자기의 공로로 선행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티켓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당시 랍비들은 끊임없이 기도하고 율법과 시편을 암송하고 노인을 잘 공경하면 영생을 얻는다고 가르치기도 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착하게 살고, 진실하게 살고, 수해 났을 때 구제해 주고, 집 없는 사람들의 집을 지어 주기도 하고, 남을 도와주며 살면 구원받지 않겠나 그렇게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청년은 거의 완벽하게 선생을 행하였습니다. 19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속이지 말라, 부모를공경하라. 이런 것들은 20잘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행한 착한 청년입니다.

이렇게 착하고 진실되게 살았으면 구원을 받을까요? 이렇게 자기 공로가 많으면 영생을 얻을까요? 대단히 미안한 말씀입니다만 성경은 아니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착하고 진실된 청년에게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지적합니다(21절). 그것이 탐심입니다. 자기 생각에는 선하고 착한 것 같은데 그의 마음 속에는 탐심이라는 죄가 버티고 있었습니다. 탐심을 없애기 위해 있는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좇으라 하니 22절에 부자 청년은 재물이 많은 고로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선행이나 공로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와벽하게 선하다고 하는 것 자체가 거짓입니다.

고통 법규를 잘 지키는데 딱지가 날아 올 때가 있습니다. 분명 나는 법규에 안전벨트를 매었고 승차 인원을 지켰고 중앙선을 침범하지 않았고 음주 운전을 하지 않았는데 범칙금 고지서가 날아옵니다. 교통 법규를 잘 지켰는데 한가지 속도 위반을 한 것입니다. 급한 일이 있어 고속도로에서 200km로 달린 것입니다.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고 중앙선은 넘지도 았았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속도 위반이 문제입니다.

이 청년은 살인도 하지 않았고 음란 사이트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인터넷 게임을 하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 욕 한번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탐심이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자기 선행이나 공로로 구원을 받지 못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잘난 것만 기억하지만 마귀는 우리 죄를 지적합니다. 마치 무인카메라는 속도 위반 차량을 찍듯이 마귀는 우리의 죄를 정확히 지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깨끗하도 하여도 죄투성입니다. 하나님의 볼 때는 죄 투성이입니다.

바퀴벌레는 언제 보아도 징그럽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샤워를  한 바퀴벌레라고 해도 씹어서 먹지 못합니다. 아무리 깨끗하다 하여도 바퀴벌레는 징그러운 곤충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선하고 정직하다 하여도 하나님이 볼 때는 죄악투성이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공로나 이사야의 고백처럼 걸레조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욥이 하나님을 모를 때 자기의 공로를 자랑합니다. 나는 가난한 자를 도와 주었고 가장 소년들을 정기적으로 후원하였고, 처녀는 쳐다보지도 않았고 종들에게 임금을 체불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고 보니 그것은 의는 말하기조차 부끄럽습니다. 죄악이 너무 많이 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입술을 가리고 다시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회개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하고 고백합니다.

부자 청년이 탐심으로 인해 영생의 길을 포기하고 근심하며 돌아갈 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23절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러운 것이다. 다시 말해 재물이나 선행이나 공로로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위로 하나님 나라에 가는 길은 전혀 업습니다. 절대 불가능한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해서 영생을 얻는 것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렇습니다. 영생은 사람의 공로나 행위로 얻지 못합니다. 아무리 선행을 많이 해도 우리 마음에 탐심이 가득하고, 우리 마음에 교만이 가득하고 우리 마음에 탐욕이 가득합니다. 우리 힘으로 우리를 구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살을 극복하는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재물로도 안되고 착하게 살아도 안되고 진실되게 살아도 안되면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요? 영생을 얻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제자들도 동일한 질문을 합니다. 26절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27절 예수님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사람의 방법으로는 안되지만 하나님의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습니다.

2. 영생은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십니다. 33절입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 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십니다. 모든 고문을 당하시고 수치스러운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기 예루살렘에 올라가십니다. 수치스러운 죽음을 누가 가고 싶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도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옮겨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 외에는 인간 구원의 길이 없기에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예수님 외에 영생을 길을 열 자가 없기에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십자가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선을 행하고 공로를 쌓아도 여전히 죄인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샤워를 해도 여전하 바퀴벌레는 바퀴벌레이듯이 성인군자처럼 살아도 여전히 죄인입니다. 사람의 스스로 힘으로 구원을 얻는 길이 없습니다. 욥처럼 정직하게 살고, 바울처럼 의롭게 살아도 스스로 구원의 길을 만들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십자가가 곧 영생의 길입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고통을 받고 저주의 죽음을 당하십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하나님 나라로 이어지는 다리인 것입니다.

갈3:13-14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십자가에서 우리의 저주를 대신 지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고후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희생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죄를 속량하여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이빈다.

롬5:21에)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영생에 이르는 것입니다.

벧전3:18절에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사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사람으로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다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길을 여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은 것은 죄인인 나를 구원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영생을 선물로 주십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믿음의 영생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룩하신 십자가의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영생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요3:15-16 이는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던건처럼 십자가에 다릴신 예수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36도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5:24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요6: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십자가의 복음에서 우리 대신 하여 저주를 당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에 영생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룩하신 영생의 길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 길이 영생의 길이고 십자가의 예수님을 진실되게 믿는 사람은 영생이 있기에 자살의 유혹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3. 영생을 소유한 사람은 삶의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십자가 복음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 사람은 삶의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주의 복음을 위해 삽니다.
28절에 베드로는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위하여 좇았나이다.

그때 예수님은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으니라(29-30절)

영생을 소유한 사람은 주와 복음을 위해 삽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 산다는 것은 초대 교회 당시 다 버리는 것입니다.  집도 가족도 전토도 다 버리는 삶이었습니다.

영생의 가치가 너무 크기에 감히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울입니다. 바울은 젊어서 성공한 사람입니다. 결혼도 하고 젊어서 랍비가 되었습니다. 젊어서 랍비가 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성공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예수님의 복음이 너무 고귀하여 모든 것을 버립니다.


빌3:7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바울은 영생의 비밀을 알고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모든 성공을 배설물 똥처럼 버립니다.
독일의 신학자 예레미야스에 의하면 모든 것 속에는 전토, 성공, 랍비라는 신분 그리고 아내와 자녀도 포함된다고 봅니다. 랍비들가 되려면 결혼을 해야 합니다. 바울도 랍비였으니까 결혼을 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고전 7장의 내용은 결혼하지 않는 사람이 알 수 없는 내용들을 기록합니다. 하여튼 바울은 결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랍비가 갑자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니 이것은 그 당시 아주 큰 충격입니다. 무당이 예수 믿는다는 것보다 더 큰 파격입니다. 무슬림이 개종하는 것보다 더 큰 사건입니다. 이럴 경우 유대인인 아내가 남편을 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예수님을 믿게 되자 아내와 자녀들이 바울 곁을 떠났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주와 복음을 위해 아내와 자녀를 잃은 경우입니다. 보통 그 당시 그러했습니다. 재산을 잃는 것은 유가 아닙니다.

영생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주와 복음을 위해 삽니다. 이땅에서 성공은 길어야 100년을 누리지만 영생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2000년에 비하면 100년은 짧은 세월이듯이 영생에 비하면 인생은 시인의 말처럼 점과 같습니다. 거의 없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마치 비유한다면 연극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시간 짜리 연극에서 왕의 역할을 한들 거지의 역할을 한들 다시 삶으로 돌아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추억뿐입니다. 아주 잠시의 순간에 왕의 역할을 연극에서 했다하여도 삶이 곤고하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다. 연극에서 거지의 역할을 했다해도 삶에서 행복을 누리면 행복이 아닙니까?

우리 인생은 이렇게 짧은 것인데 인생을 보람 있게 의미 있게 살아야 하지만 인생의 소위 말하는 성공을 위해 남의 속이고 남에게 해롭게 살지 않습니다. 나만의 성공을 위해 이웃의 아픔을 본못척 죽어가는 영혼을 못본척 하지 않습니다. 영생에 대한 소망이 확고할 때 주와 복음을 위해 삽니다.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영생을 모르고 자살하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모르고 인생을 아등바등 사는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복음 전하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예수님이 기도하신 겟세마네 동산에 가서 10여 금식 기도를 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기 위함입니다. 10일 째 비몽사몽간에 하나님 나라에 갑니다. 말할 수 없는 환희를 느낍니다.
하나님 나라에 있는 자기 성도들의 방을 보니 너무 찬란한 빛이 비치는 금과 보화가 가득합니다. 참 좋았습니다. 열심히 헌신하며 봉사하며 충성하는 성도들의 모든 것을 주님이 아시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방을 보니 지푸라기뿐입니다. 교회를 크게 세웠고, 많은 선교사를 파송했고 장학사업을 했고, 불우한 사람을 도왔는데 방안에는 지푸라기 뿐입니다.
깨어나서 반성했다고 합니다. 선교 사업, 장학사업, 봉사 등은 교인들이 정성스럽게 헌금한 것으로 했지 자기 사례비로 한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 버린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후배 선교사가 선교지로 가는데 교회 선교부에서 지출하기로 된 선교비를 목사님 통장을 정리하여 했다는 것입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 한 것이 없기에 하나님 나라를 본 후에 주와 복음을 위해 작은 헌신을 했다는 감동의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생의 소망이 있는 사람은 주와 복음을 복음을 위해 핍박을 받되 즐거워 하고 주와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되 찬송을 부르며 주와 복음을 위해 충성하며 눈물로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생의 소망이 확실할 때 자살의 충동을 이깁니다.
영생은 우리의 공로나 선행으로 얻지 못합니다.
영생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허락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영생을 선물로 받은 자들은 주와 복음을 위해 헌신의 삶을 삽니다.

그런 종들이 되길 축원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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