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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유자의 고백 (롬 6: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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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자의 고백 (로마서 6장 15-23)

인간의 본성 가운데 하나가 바로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이라 하면 괴롭고 불편한 상황이 다가옴을 예기할 때나 현실적으로 다가왔을 때 일어나는 불쾌한 감정을 말합니다. 그런데 모든 상황이 다 두렵지는 않습니다.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것에 가장 약한 심리 상태 임를 반영하는 것이 됩니다. 예컨대 가난이 두려운 것은 결핍에 대한 지나친 공포를 반영하는 것이고 새로운 환경에 대한 두려움은 이전에 있었던 새로운 경험에 대한 실패와 자신감 결여, 열등감의 발로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 가운데 이성에 대한 상처는 지나친 두려움으로 자리 남아 새로운 만남에 대한 회피로 이어져 원만한 이성관을 해칠 우려가 생기게 됩니다. 사람들은 어떠한 맡겨진 일에 대하여도 강한 자신감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지만 지나친 두려움으로 인해 자기방어에 급급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최근 출간된 책 가운데 인사구조의 조직개발 전문가인 미국의 John G. Miller라는 분이 쓴 <바보들은 항상 남의 탓만 한다>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온갖 핑계와 변명, 무책임이 당신과 당신의 회사를 망친다고 경고하며 구성원이 서로 간에 책임을 떠넘기는 불평의 소리가 들리는 것이 위기의 신호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자신의 일에 대처하는 건강한 조직문화를 설명하면서 책임회피와 끊임없는 구성원간의 불화, 계획만 거창하고 실상 내용은 부실해져 결국에는 아무 소득도 거둘 수 없는 원인을 한마디로 '남의 탓'을 하는 태도에 두고 있습니다. 그 이면에는 자기를 평가하는 타인에 대한 두려움과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이요, 성공을 향한 집착이 남아 있기 때문에 불을 보듯 드러날 핑계를 남에게 돌리고, 환경을 탓하고, 상황을 탓하게 마련인 것입니다. 이는 우선은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잃었고, 자기확신에 대한 부자유와, 나아가 새로운 기회에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없으리라는 앞날에 대한 부자유가 두려움의 형태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원인을 직시하는 사람은 결과에도 자유로울 수 있으며 자기신뢰를 확증하는 사람은 실패 앞에서도 넉넉히 자유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미국의 기독교교육학자인 토마스 H 그룸(Thomas H. Groome)이라는 분이 그의 저서 Christian Religious Education이라는 책에서 자유의 유형을 세 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 자유가 뭐냐 하면 합리적 사유의 자유를 말합니다. 즉, 생각하는 자유입니다. 우리가 자유를 물리적이고, 때로는 물질적이며 정치적으로 생각하려고 하지만 육체적인 자유 이전에 가장 중심적이고 가장 핵심적인 자유는 생각의 자유라 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 속에 진정한 자유함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 행적, 과거, 기억, 억울하고 용납할 수 없는 일들이 나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 지금도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용서할 수 없어 괴로워하지는 않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그동안은 나의 생각이 자유롭지 못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는 걱정 중에 태반은 해도 소용없고 안 해도 그만인 그런 걱정입니다. 걱정하므로 잠도 못자고 몸이 축나며 감성이 약해져서 짜증이 늘고 원만하던 일까지 그르치게 되곤 합니다. 그래도 걱정 안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긍정적 사고를 가져야 한다고도 하고 플러스 발상으로 몸의 기운을 회복해야 한다고도 하는데 어디 그게 말처럼 쉬운 일입니까? 생각 자체의 틀을 바꿔야 하고 생각이 묶여 있는 곳에서 풀어내어 진정 자유 할 수 있는 곳에 나의 생각을 쉬게 하여야 합니다. 은총을 생각하고 나면 불평이 줄어들게 되고, 감사를 떠올릴 때 비로소 집착에서 헤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해석할 수 있을 때 모든 문제는 자유롭게 풀려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힘들게 하는 문제의 가장 근본적인 것은 죄의 문제입니다. 이것을 남들이 아는가 모르는가? 알게 되면 모든 것이 다 수포로 돌아가게 될 터인데...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 하면 모르게 넘어갈 수 있을까? 하지만 완전히 물러서서 '모든 것은 드러나게 되어 있다', '적어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다'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어질 때 참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 많고 허물 많은 나 자신을 지금까지 좋은 것으로 채우시고 용납하시고 참아 기회를 주심을 생각하고나면 비로소 불안과 부자유가 아니라 감격과 감사가 넘쳐나는 것입니다.

둘째는 선택의 자유를 말합니다. 우리에게 때로는 선택과 의지의 자유가 허락됩니다. 우리가 어떤 때에 우리의 의지로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깨끗한 양심이나 신앙을 따라 하나님 앞에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선택을 하느냐? 아니면 여러 가지 정황과 형편, 현실적인 이권과 명예를 생각하고 뭐.. 그러한 다음 일을 생각하고 주변적인 생각들이 우리의 마음을 붙들고 거기에서 결정을 좌우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평소의 생각대로 선택의 순간을 치러내셨습니까? 결혼을 하거나 자녀들의 혼사를 치룰 때, 순수하게 신앙과 인격을 보고 결정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이 댁과 하면 이런 유익이 있고, 저 댁과 맺으면 관계가 어떻게 되고 또 출세와 사업에는 또 어떤 영향이 있을까? 하는 부차적인 요인들 때문에 판단이 흐려지게 되어 마침내 선택이 빗나가게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선택에 얼마나 자유롭습니까? 여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행동의지의 자유입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려고 할 때 무엇엔가 또 끌리게됩니다. 이게 자유롭지를 못합니다. 물질적으로 정치적으로, 또 많은 책임, 나약함, 의롭지 못한 도덕성 같은 원인들로 행동이 깨끗하질 못합니다. 과감하지도 담대하지도 못합니다. 행동의지의 자유가 없습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저마다의 약함 때문에 살아가는 모습조차도 자유롭지 못하여 허덕일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이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상황적 원인이나 우리 심연의 욕망의 문제 등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자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의 삶 자체가 크게 뒤틀려져 있는 것입니다.

죄의 노예 되어 죄에 매이고 그로 인해 죄의식이 나의 의식세계를 주관하고, 형벌의식으로 발전하여 이는 자기위선과 변명으로 가득하게 되어 이제라도 잘못된 삶을 인정하고 회개하여 돌이킬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렇게 조차 할 수 없게 됩니다. 흔히 말하기를 요즘 10대는 핸드폰에 매여 있고, 20대는 인터넷에 매인 인생이고, 30대는 카드에 묶여 있고, 40대는 자녀교육에 완전히 묶여 있고, 50대는 성공에 매여 있고, 60대는 명예에 얽매여 있어서 은퇴하고야 비로소 초탈한 인생을 살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우리를 힘들게 하는 고통에서 자유 할 수 없고, 육신의 고통보다 더한 것이 마음을 괴롭히고, 영혼을 상하게 하는 죄의 유혹에서 자유하기 어렵습니다. 나아가 본질적으로 죽음에 대하여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여기에 자유로와야 살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여기서 자유로와야 넉넉히 죽을 수 있습니다. 기쁘고 감사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큰 복입니까? 불신자의 죽음에는 곡소리가 있지만 그리스도인의 장례에는 찬송이 흐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께 노래 할 수 있는 그러한 죽음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큰 복입니다. 세상을 사는 우리가 죽지 않겠다고 발버둥치는 것도 문제고 죽겠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이래도 저래도 때가 되면 다 죽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그날에 온전하게 주 앞에 나갈 수 있기 위해서 죽음을 이겨내는 자유자로 살 때에 더 이상 죽는 것도 사는 것도 근심거리일수 없습니다. 죽음 앞에 바르게 설 준비가 되면 이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산다는 것은 아무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제대로 죽을 수 없는 사람은 제대로 살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인식의 노예가 되기 쉽습니다. 뭐가 몸에 좋다고 하면 죄다 그것만 먹고, 어떤 운동이 좋다고 하면 모두 다 그것만 하고, 또 뭐가 나쁘다고 하면 하루아침에 다 내다버립니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소견에 이끌리는 것을 향해 움직이고 추구하고 쫒고 삽니다. 그것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돈을 섬기고 있던지, 지식을 섬기던지, 이념이나 사상, 정치적 노선, 명예를 섬기는 자도 있습니다. 때론 자존심을 섬기는 이도 있습니다. 섬긴다는 것은 중요하게 여기고 나아가 다른 것에 양보하지 않으며 이로 인한 손해도 불사한다는 것이 됩니다. 오늘 우리가 가는 곳이, 하는 일이, 목표로 두는 것이 바로 우리의 군주가 되며 우리는 그의 종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예컨대,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답니다. 술 먹는 사람들 그런다면서요? 처음에는 내 기분에 술을 먹고, 그리고는 술이 술을 불러서 먹고, 이제 지나서는 술이 사람을 먹어버린다지요. 이제 술 아니면 못삽니다. 어느 사이에 술이 나를 다스리고 통제하는 주인이 되버립니다. 나는 술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제 나의 마음과 의지를 다스리지 못하고 혈기를 부리고 제정신 들고나면 후회하고 또 반복해서 자신을 잃고 그러던 중에 내가 무엇이 종이 되는지도 모르고 종 된 인생을 살게 된다 하는 것입니다. 어디 술뿐이겠습니까? 지금 우리는 그 헛된 것들로부터 정말 자유한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마틴루터는 말합니다.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는 사람이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율법주의에 매여서도 안되고, 형식주의에도, 내 이름을 내려고 행하는 모든 노력도 모두 우리를 그리스도에서 벗어나게 함으로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매여야 한다면, 또 매이기로 했다면,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매여야 하고 분명하고 확실하게 매여 있어야 합니다. 그것에 진리이신 그분의 진정한 종이 되는 방법이요 동시에 더 이상 죄에 종노릇 하지 않을 수 있는 비밀이 됩니다.

가령 결혼도 이제 한 사람에게 매이는 것입니다. 결혼은 서로 서로 상대방에게 매임으로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매여도 좋다고 생각 할 만큼 사랑할 대상이 있음으로 인해 진정 행복하고 자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받아야 살 수 있는 것 같지만 실상 사랑할 수 있어야 비로소 행복할 수 있고, 사랑할 때에 자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 할 줄 모르면 사랑받고도 많은 것을 누리고도 얻고도 감사할 줄 모르고 기뻐할 줄 모릅니다. 이런 재미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결혼하여 신혼에 접어든 부부를 보면서 신혼이란 한 사람은 신나고 한 사람은 혼나는 것이다. 그러면 되겠습니까? 서로서로 행복한 것이 사랑이요. 그 안에서 누리는 자유입니다. 분명한 것은 답답하다고 뒤집어본들, 뛰쳐나가본들 자유가 아니며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신학자 부르그만(Brugmann)은 우리 존재의 참 의미는 Who I am?가 아니라 Whose I am? 이라는 물음이어야 함을 이야기 합니다. 내가 누구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의 존재냐? 내가 누구를 위한 존재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혹 이전에는 죄인이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그의 백성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섬기며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비로소 죄인 되었던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은혜 안에 있으며 왜 죄를 지을 수 없느냐?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은혜가 권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능력을 지녔다는 말입니다. 은혜가 나를 다스릴 때 죄를 이길 수 있으며 유혹과 절망과 정욕을 이길 수 있습니다. 기실 종에는 여러 모양 있다지만 행복한 종도 있습니다. 힘들고 괴로운 일일지라도 기쁨으로, 감격으로 감당하는데는 행, 불행을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반대로 견딜 수 없는 괴로움으로 버텨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도저히 행복이란 없고, 감사함도 물론 없고, 소망 따위는 애초에 있지 않습니다. 그럴때는 종 가운데서도 죽지 못해 사는 노예가 됩니다.
죄의 종된 자와는 달리 의의 종된 자의 결과는 진리가 나를 자유케 하는 고백으로 이어지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 다음은 참 자유요 영생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을 본질상 죽을 수 밖에 없던 우리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한 결과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다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훈의 본은 가르침의 본을 말하는데 이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이끄시는 그리스도를 말하며, 그 뜻과 삶을 쫒는 바울을 말하며, 우리 앞에서 의의 길로 인도하는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잘 믿는 본을 앞에 두어야 합니다. 어떻게 믿고 어떻게 사는 사람을 본을 삼느냐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한 평생 잘 본받는 것이 제대로 믿는 것이요, 그 결과로 죄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하여 얻어지는 결과는 자유의 확장입니다.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세상의 모든면이 어두움이요, 희망 없음으로 인해 한탄이 늘어가는 자신을 보지만 예수를 믿음으로 의의 종이 되어 교훈의 본을 따라가는 동안에 날로 날로 자유의 영역이 넓어집니다. 세상의 유혹에서 자유하게 되고 죄의 문제를 극복하게 되며 더 이상 죄의 종 노릇 하지 않게 됨을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죄의 종의 말로는 사망이요, 순종의 종의 끝은 의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죄의 종에서 해방되어야만 의의 종이 될 수 있습니다.
이는 은혜 아래 산다고 하면서도 자유방임적인 신앙태도와 사상과 가치관을 가지고 희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경종이 됩니다. 죄의 문제는, 그리고 죄의 문제를 이기는 신앙의 승리는 기독교를 종교로 가지고 있다고 해서, 교회나가는 일과가 있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의에 이를 수 있는, 그리스도에게 종 되기를 자처하는 것에서 시작됨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스스로 하나님 앞에 매여 있는 사람이 죄에서 진정 자유함을 얻는 것입니다.

죄를 헬라원어로는 하말티아라고 하는데 이는 과녁을 벗어났다는 의미.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쫒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인생의 종착지에 이르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이는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것을 포괄하는 것입니다. 바로 살지 못하면 바로 죽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환호하고 세속이 열광하는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기준이 아니기에 우리의 마지막 타켓(Target)에 가서 꼽히는 화살의 끝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명중이 되어야지 빗나간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본질상 죄의 종이요,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가 죄에서 해방 된 의의 종으로서의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이끌리어 살 때 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거룩함이라고 노래하는 우리가 거룩하여 진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감히 하나님의 성품에 닮아가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본래 우리를 지으신 바,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우리의 태도는 오직 경건입니다. 죄에서 떠나 의의 종이 되기를 기뻐하며 경건한 삶을 통해서 거룩하신 주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누군가의 종이 되는 것처럼 분명한 자기 정체성이 없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 속에 사는 우리는 이 두 가지 구분에서 비켜갈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에는 하나님이 근심하실 일과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뿐임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의 방법과 사단의 방법. 하나님에게 종속되지 않으면 사단에게 종속될 수 밖에 없습니다. 죄의 종에서 떠나 의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이 일제의 학정에서 해방된 날을 광복절이라고 불러 온 것은 빛을 잃은 우리 민족이 다시금 빛을 찾았다는 외침이었건만 지금 우리에게는 도처에 빛을 잃은 모습으로 여전히 가득 차 있습니다. 사회의 그늘진 곳은 더욱 그 어두움이 깊어만 갔고, 온 국민의 살림살이는 반세기 이전보다 당연히 나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먹고 사는 문제로 인해 숱한 사람들이 가정을 잃고 가족을 잃고 꿈을 잃고 생명을 잃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토록 외쳤던 자유는 얻은듯하나 여전히 민족과 국민을 이끌어야 하는 이 땅의 지도자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어느 곳을 막론하고 빛을 되찾아주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해방된 지 58주년. 아직도 고통의 사슬에서 해방되지 못한 자가 무릇 얼마이며, 아직도 경제적 고통에서, 정치적 갈등에서, 이념의 다툼에서, 세대간의 단절에서, 지역과 계층간의 뿌리 깊은 반목에서, 저마다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의 목소리만을 고집하려는 이기주의는 사랑의 종노릇 하지 않으려는 욕심에서 조금도 자유하지 못하는 우리 시대의 자화상입니다. 자신과 그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는 진실과 배려 따위는 아랑곳없고 오로지 욕망의 죄의 종이 된 채로 살아가고 또 죽어가는 뭇백성들을 향하여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자유를 경험한 종의 감격에 참 고백이 우리에게 있으냐 말입니다. 진정한 자유를 필요로 하는 세대에 참 자유를 갈망하는 우리 모두에게 주님 주시는 의의 자유가 넘쳐흐르길 바랍니다..

에이브레함 링컨이 어느 날 길을 지나던 중 노예를 경매하는 곁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는 팔려나온 젊은 흑인 여인이 경매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눈은 그동안 노예로서 당한 고통을 그대로 담고 있었기에 증오와 멸시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주변을 노려보는 그녀의 눈을 본 순간, 링컨은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흑인 여인의 눈은 그녀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유린당하고, 노동력을 착취당했으며 또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해왔는지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잔인한 노예시장에 끌려나와 굴욕적인 경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너무나 마음이 아팠던 링컨은 경매에 입찰해서 최고액수를 제시하여 낙찰 받게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링컨에게 "당신은 날 가져서 무엇을 하려고 하죠?"라고 물었습니다. "당신을 자유롭게 하려고 하오!" "무슨 대가로 그러시죠", "아무런 대가도 없소이다." "그렇다면 제가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신다는 말입니까?" "네. 당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주겠습니다" "그럼 제가 갈 수 있는 곳 어디든지 마음대로 갈 수 있도록 자유를 준다는 말입니까?" "네, 당신이 가고 싶은 곳 어디든지 마음대로 가십시오" 그 순간, 증오와 멸시와 고통으로 가득 찼던 그녀의 눈에 따뜻한 웃음과 감격의 눈물이 번졌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링컨에게 "그러면 저는 당신이 가는대로 따라 가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언젠가 증오와 멸시의 눈빛을 가릴 수 없는 상한 심령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더 이상 죄에 속한 종의 삶을 살지 않도록 은총을 허락하셨습니다. 이제 다시는 죄의 종노릇하는 자가 아니라 자유자가 드리는 고백을 노래하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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