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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깊은 곳에서 / 시 13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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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내가 깊은 곳에서 
본문 : 시편 130:1~8 (구898) 

초등학교 다닐 때의 기억이다. 하루는 형이 호텔 뷔페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와서 자랑을 한다. 뷔페라는 식당이 잇는데 그곳에 가면 어떤 음식이든지 마음 데로 먹을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정말로 가보고 싶었다. 그리고 나서 얼마 지난 후 기회가 되어서 식구들이 함께 가게 되었다. 그런데 형이 숟가락과 포크를 저 사람들이 갖고 가면 이제는 더 이상 먹을 수 없으니 그런 줄 알라고 말한다. 처음 뷔페를 갔으니 많이 먹고 싶은 욕심에 웨이터가 왔다 갔다 하면 내 숟가락하고 포크를 가져갈까봐 두 손으로 꽉 쥐고 있었던 때가 생각난다. 왜냐면 갖고 가면 나에게는 먹을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기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기회를 빼앗긴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을 빼앗긴다는 것 참으로 괴로운 일이다. 1910년 우리 나라는 일본에 주권을 빼앗겼다. 말을 빼앗겼다. 이름을 빼앗겼다. 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기까지 36년 동안 빼앗김의 고통을 겪었다. 아리따운 처녀들은 몸을 빼앗겨야 했고, 젊은 청년들은 징용으로 끌려가 젊음과 생명을 빼앗겨야 했다. 당시의 아픔을 노래한 글 중에 “복사꽃 산골 마을/ 열두살 순이는 만주벌판 정신대로/ 장가 못 간 삼촌은 총알 받아 징용으로” 끌려갔다는 노랫말이다.

1926년 시인 이상화씨는 빼앗긴 조국의 아픔을 생각하며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를 지으며 이 땅의 회복될 것을 노래하였다. 나라를 빼앗긴 아픔을 표현한 시이다. 이같이 빼앗김은 너무나도 큰 아픔이다. 그러다가 1945년 8월 15일 빼앗긴 나라의 주권이 회복되고 이름을 다시 찾고 신앙도 다시 찾는 기쁨을 맞이 하였다.

이같이 빼앗기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 모른다. 우리가 살면서 이같은 빼앗기는 고통을 경험할 때가 있다. 지난 주 월요일에 정몽헌 회장이 자살해 죽었다. 그가 죽은 이유를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자기 자신의 명예를 빼앗긴 것에 대해서 무척이나 괴로워했을 것이다. 현대그룹의 회장이요, 대북 사업을 소신껏 했는데 검찰에 몇 차례 불려가서 조사를 받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명예를 빼앗기는 아픔을 경험했을 것이다.

이러한 빼앗기는 고통은 아이들에게도 나타난다. 중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인 여학생이 학교 언니로부터 몇백원씩, 몇천원씩 빼앗겼다. 빼앗기는 아픔을 통해서 무척이나 괴로워하였다. 결국은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투신 자살하고 말았다.

어떤 사람은 갑자기 들어닥친 사고로 인하여 건강을 빼앗긴 사람도 있고, 육신의 질병으로 인하여 건강을 잃어버린 사람들도 있다.
본문의 말씀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인하여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라고 고백을 한다. 깊은 곳은 마치 수렁에 빠진 것과 같다. 시편 69편의 말씀에는 “나는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졌다는 고백이다.

요즈음에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재미있는 공익광고가 있다. 어떤 사람이 카드를 조절하지 못하고 쓴다. 옷도 마음껏 사고, 자동차도 마음 껏 산다. 이러는 과정에 점점 이 사람은 수렁에 빠져든다. 무릎, 허리, 어깨까지 차더니 결국에는 머리 까지 그 수렁 속에 쏙 빠져 들어가는 광고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여러 가지 이유의 아픔을 통하여 “나는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진” 신세인 것을 경험할 때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 가도 설 곳이 없고, 저기에 가도 설 곳이 없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살해서 죽는가?

사랑하는 성도여! 우리가 빼앗기는 고통, 잃어버린 고통을 통해서 이렇게 나의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점점 수렁에 빠져 들어간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는가? 스스로 포기하면서 인생을 정리하겠는가? 그럴 수 없다.

본문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숫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기의 표현에 여호와를 기다리라는 표현과 여호와에게 소망을 두라는 말씀이 나온다. 두 말은 같은 표현이다. 내가 설 수 있는 자리를 빼앗겼지만 그 가운데서 주님에게 소망을 두고 기다리라는 말씀이다.

구약에 나타난 소망은 그루터기 소망이다. 그루터기는 나무의 남은 밑둥을 의미한다. 잎도 떨어지고 가지도 떨어지고 나무 줄기도 떨어지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루터기를 남겨두신다. 그곳에서 다시 새순이 돋아 자라는 과정을 말씀하고 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것 같지만 하나님은 누구에게든지 소망의 그루터기를 남겨두신다는 약속의 말씀이다. 모든 것을 빼앗기는 아픔,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아픔이 있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소망의 그루터기를 남겨두신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깊은 수렁에서 고통스러워할 때에 주님에게 소망을 두고서 기다리라는 말씀이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도망갔다. 물고기 배 속에서 그는 사흘을 기다려야 했다. 아마도 물고기 배속에서 있는 기간은 하루가 한 달 이상의 시간 같았을 것이다. 깊은 곳에서 빠져 내가 설 자리가 없을 때에 우리는 주님께 소망을 두고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즉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소망 중에 기다림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요한계시록에 서머나 교회에 보낸 편지의 내용을 보면,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십일이라는 기한이 있다. 그 고통의 시간을 소망 중에 기다리라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비유의 말씀을 하셨다. 좋은 씨를 뿌려 놓았는데 싹이 올라오는 것을 보니 가라지가 같이 올라온다. 종이 주인에게 가서 우리가 가라지를 뿌리지도 않았는데 왜 이런 가라지가 올라옵니까? 지금 당장 뽑아버릴까요? 주인은 그냥 두어라 추수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씀하신다. 우리 주변을 볼 때에 악이 이기는 것 같고 악이 온 세상을 지배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는 소망 중에 기다림이 필요하다.
미국의 대문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라는 소설에 보면 산티아고 라는 노인이 5일간의 풍랑과의 사투 중 이를 악물고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희망을 포기하는 것은 죄악이다"라는 문구이다. 나에게 남은 것이 없이 느껴져도, 내가 서 있는 곳이 깊은 수렁이라서 스스로 서 있을 수 없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소망을 포기하지 말라.

그러면 우리가 그렇게 소망 중에 기다리는 분은 누구이신가? 시편 40편의 말씀에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소망 중에 기다리는 하나님은 내 발을 반석 위에 두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폴틸리히라는 유명한 신학자는 하나님을 표현하기를 “존재의 근거”라고 표현한다. 내가 절망 중에, 나의 모든 기초가 흔들려서 마치 수렁의 깊은 곳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 같지만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은 내가 있게 하는 기초가 되신다. 모든 것을 빼앗겨서 어디에 발을 붙일 곳이 없는 그런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기초가 되신다. 나를 있게 하는 근거가 되신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오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사랑하는 성도여! 사는 것이 힘이든가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점점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어가는 것 같은가요? 내 삶의 기초가 되신 주님을 소망 중에 기다리자.

또한 우리가 소망 중에 기다리는 하나님은 바다 가운데 길을 내시는 분이다. 깊은 곳에서 수렁에 빠진 것 같지만 하나님은 바다 가운데 길을 내신다. 이사야서의 말씀에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 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이까?” 우리가 소망 중에 기다리는 하나님은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 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모든 것을 빼앗기는 아픔이 있다고 할찌라도 하나님은 바다 가운데 길을 내시는 하나님이시다. 광복의 역사를 보라. 일본이 우리의 주권을 모두 빼앗을 것 같았지만 하나님은 바다 가운데 길을 내시는 분이시다.

요한복음 10장은 예수님께서 목자와 양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주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시고 목자되신 주님께서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모든 것이 빼앗겨서 더 이상 소망이 없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셨다.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다윗은 선한 목자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다윗이 말하기를 “제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뗑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나이다.” 사자에 물려가고 곰에 물려가도 끝까지 가서 되 찾아오는 목자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이시다. 우리가 모든 것을 빼앗기는 아픔이 있어도 하나님은 그 가운데 길을 내실 줄로 믿는다. 다시금 우리를 되 찾아 참된 기쁨을 누리게 하실 줄로 믿는다. 모든 것을 잃어버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바다 가운데 길을 내시는 분이다.

배가 좌초되었다. 생존자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 사람은 파도에 밀려 인적없는 작은 섬에 당도했다. 궁지에 빠져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열심히 외쳤고 다른 배가 보이지 않을까 하고 날마다 지켜보았다. 어설픈 오두막을 하나 지어서 좌초된 배에서 건진 물건을 몇가지 들여다 놓았다. 어느날 먹을 것을 찾아다니다가 오두막이 불에 타서 연기가 나는 것을 보고 슬퍼서 어쩔줄 몰랐다. 오두막이 금새 재로 변했다. 최악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기도에 대한 응답이 왔다! 다음날 일찍 배 한 척이 다가왔다. 섬에 고립되었던 사람은 어떻게 자기를 구하러 왔는가 하고 물었다. 선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당신이 낸 연기를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내가 깊은 곳에 있을 때에 인생을 포기하지 말라. 소망 중에 주님을 바라라. 우리가 바라는 주님은 내가 설 수 있는 든든한 기초가 되신다. 바다 가운데 길을 내어 주실 줄로 믿는다. 이러한 소망의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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