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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유하십니까? (갈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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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하십니까?
(갈 5:1-6)
 
  지난 주간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충격적인 뉴스는 한 재벌회장의 투신자살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주요하게 다룬 뉴스였습니다. 보통 한 사람이 그냥 죽는 것도 놀랄 일인데 자살로, 그것도 한국을 대표하는 재벌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은 정말 보기 드문 일로서 모든 사람에게 충격과 파장을 불러오게 했습니다.

그의 죽음을 보면서, 그는 불쌍한 사람이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재벌그룹의 후계자로 지목될 만큼 인정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어떤 기업도 엄두를 못낸 대북사업을 부친의 뒤를 이어 나름대로 힘을 다해 수행한 사람입니다. 그 성과의 열매를 보기 전에 끝냈으니 정말 불쌍하고 허망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의 자살을 보면서, 교만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생명은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 우리의 의지로 온 것이 아닙니다. 갈때에도 하나님이 부르셔야 갑니다. 그런데 생명을 내 마음대로 조정하려고 했으니 이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요, 교만의 극치입니다. 이상하게도 최근 우리 사회에는 자살사건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생계문제로 아이 셋을 아파트 밑으로 떨어뜨리고 자신도 투신한 가족자살을 시작으로 해서, 고교생이 떨어져 죽고, 자식의 카드 빚 때문에 부모가 자살하고, 학교 교장이 자살하고, 군대안에서 벌어진 성폭행 때문에 군인이 자살하고, 가장이 식솔과 함께 자살하고, 성적을 비관해 자살한 아들을 따라 아버지가 자살하고 이젠 재벌회장까지, 마치 연작소설처럼 이어졌습니다. 요즘 인터넷에는 자살사이트까지 생겼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무모하게 생명을 내 던질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자살은 성경의 관점에서 무서운 범죄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입니다. 이것은 현대인을 유혹하는 사탄의 장난입니다. 참 무서운 시대입니다.

그의 죽음이후, 사람들은 왜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가에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정황을 통해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지만 정작 입을 열어야 할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많은 진실이 그의 죽음과 함께 파묻힐 것입니다. 왜 자살했는지 내막은 모르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죽음이 오기까지 뭔가에 쫓기고 있었다는 것, 마음이 편치 못했다는 것, 뭔가가 그를 억압해 거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것, 한마디로 자유하지 못했다는 것, 그것만은 확실합니다. 사람에게 자유만큼 귀한 것이 없습니다. 자유하지 못하면, 인생은 비참해 지는 것입니다. 질병도, 싸움과 갈등도 모두 자유하지 못하는데서부터 비롯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유'를 강조합니다. 오늘 본문도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주님은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오셨습니다. 우리는 자유를 위해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자유해야 합니다. 자유를 말하고, 선포하고, 알려야 합니다.

무엇으로부터 자유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자유를 선포한 뒤, 2절부터 하나의 중요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바로 '할례문제'였습니다. 갈라디아교회는 유대인들이 제시한 율법과 할례로 적잖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결국 이 문제를 풀기 위해 갈라디아서가 기록이 되었습니다. 4장까지 율법의 문제를 다루고, 5장부터 할례를 논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하나님의 백성과 구원의 징표로 믿었습니다. 다시 말해 할례를 받아야 구원얻은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예수안에서 정해진 새로운 법을 주장한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이면서 오히려 할례에 대해 맹렬히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본문에서 6절에 할례에 대해 이렇게 핵심적인 말을 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아무리 할례를 받았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 할례를 받지 않았다고 해서 저주를 받는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만이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할례는 신앙에 있어서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라는 것입니다. 형식을 가지고 근본과 핵심을 흔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바울이 할례를 자유와 함께 언급하는 의도는 우리가 자유해야 하는데, 특히 형식으로부터 자유하라는 것입니다. 형식 때문에 내용이나 본질이나 핵심을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마음에 담아야 할 진리입니다.

신앙에는 양면이 있습니다. 형식과 내용입니다. 형식은 포장이고, 내용은 알멩이입니다. 둘 다 중요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소중한 선물을 줄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내용물을 아무렇게나 넣지 않습니다. 또 아무렇게나 포장하지도 않습니다. 소중한 것일수록 더 아름답게 정성을 다합니다. 받는 사람이 포장에서부터 사랑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예의입니다. 이처럼 형식과 내용은 둘 다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내용이 먼저입니다. 사실 내용이 좋으면 잘 포장되지 않아도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형식은 그럴듯한데 내용이 없으면 그것이 가장 실망하게 됩니다. 예수님시대의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형식의 귀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회칠한 무덤처럼, 겉은 화려하고 멋있게 보였지만 속은 곪고 썩어 있었습니다. 겉은 요란한데 속은 빈 깡통이었습니다.
지금 갈라디아교회에 있는 유대인들도 동일한 누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보다 율법을 주장합니다. 진실한 삶보다 할례를 강조합니다. 알멩이보다 껍데기, 핵심보다 주변 것, 내용보다 형식에 메여 있습니다. 그것으로 자기를 평가하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비판합니다. 철저히 형식의 노예가 되어 거기에서 빠져 나오지 못합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 형식으로부터의 자유를 선포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형식에서 자유해야 합니다. 할례보다 더 중요한 것이 믿음이요, 삶입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 할례와 세례를 받았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내가 주님을 믿은 뒤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많은 부분에서 형식에 메여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우리를 억압하고, 메이게 하고, 때로 짓누르는 모든 형식에서 자유해야 합니다. 그 자유를 위해 우리가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신앙에 있어서 형식일까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죄'가 형식인 것을 아십니까? 주님을 믿어도 여전히 우리가 죄를 짓습니다. 그런데 그 죄를 어떻게 해결합니까? 자백하기만 하면 용서를 받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단번에 해결하셨습니다. 죄는 종종 우리를 괴롭히지만 이제 힘은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죄는 껍데기요, 형식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이 본질입니다. 죄는 더 이상 능력을 상실한 것입니다.

로마의 역사에서 전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어떤 용맹스런 장군이 전쟁터에서 맹렬히 싸우다가 적군에 의해 그만 목이 잘렸습니다. 그런데도 열심히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으로 그것을 보던 어떤 부하가 떨리는 목소리로 '장군님, 목이 잘렸습니다' 라고 말하자, 그때서야 풀썩 넘어졌다는 것입니다.

죄가 그런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이미 죄의 목을 잘랐습니다. 죄는 계속 싸우고 있는 것 같지만 이젠 죽었고, 힘이 없습니다. 물론 나는 약하여 죄짓고, 또 하나님을 섭섭하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보혈의 은혜를 의지하고, 하나님께 나아와 죄를 인정하고, 자백하고, 회개하면 용서를 받습니다.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주관치 못합니다. 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거기에 메이지 말고 '너는 목이 잘렸다' 라고 선포하시고 죄가 우리를 주관치 못하도록 하십시오. 죄로 인해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마시고, 은혜의 보좌앞으로 날마다 담대히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염려'가 또한 형식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 인생에 염려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 삶은 산넘어 산입니다. 산을 넘으면 골짜기가 있고, 골짜기를 돌아가면 장대한 산이 우리를 가로 막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분명 염려는 삶의 부분이지만 주안에서 이것은 형식에 불과합니다.
왜 염려가 신앙에 형식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염려하므로 우리의 키를 한자라도 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산상설교에서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 삶의 결정적인 것들은 모두 염려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염려하면 할수록, 걱정하면 할수록, 오히려 무거운 중압감을 느끼고, 더 실의에 빠집니다. 주님은 그런 우리를 아시고, 염려를 대신 맡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너희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삶은 나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주님도 함께 합니다. 내가 기뻐할 때 주님은 함께 기뻐하십니다. 내가 슬퍼할 때 같이 슬퍼하고, 내가 아파할 때 같이 아파합니다. 우리 안에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 나를 도우시고 만지시고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이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염려에서 자유하십시오. 염려는 신앙의 본질이 아닙니다. 염려가 찾아올 때 기도하는 것, 걱정거리가 생길 때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내용입니다. 염려라는 형식과 껍데기에 메여 내용과 근본을 놓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마십시오.

이제 자유를 안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말씀의 중심이요, 결론입니다. 길어서 다 읽지 않았지만 본문은 15절까지 이어집니다. 그리고 본문의 핵심적인 교훈은 13절입니다. 아주 중요합니다. 같이 보십시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우리가 자유해야 합니다. 형식으로부터, 죄와 염려로부터 자유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멋대로, 방종하기 위해 주어진 자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유하되 책임을 지는 자유인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은혜를 헛되이 해서는 안됩니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우리가 죄에 거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이 다 하신다는 이유로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주님의 일은 주님의 몫이고, 내가 자유하면서 지켜야 할 나의 몫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면서 나는 어떤 길로 가고 있습니까? 물론 선택은 자유입니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것의 결과까지도 자유로울 수는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내가 자유로이 선택한 나의 길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내 몫이라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타계한 미국의 '프랭크 시나트라' 라는 유명한 가수가 있습니다. 그를 생각할 때마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그가 부른 '마이 웨이(my way)' 라고 하는 노래입니다. 그의 중후하고 호소력있는 목소리로 부른 이 노래는 지난 30년동안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소개되어 아직도 그 노래를 즐겨 부르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클래식이 아닌 대중 노래로 이처럼 긴 기간동안 전 세계의 사람들을 사로잡은 노래가 그리 흔치 않을 것입니다. '마이 웨이'의 노래에 마지막을 보면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무엇이 인간의 길이며, 인간은 무엇을 얻어 왔는가, 만약 자기 자신이 아니라면 모두 무가치한 것이라네, 굴복한 자의 비굴한 말이 아니라, 진정으로 느끼는 바를 말하는 그런 인간 말일세, 혹 과장이라고 말할는지 모르지만, 나는 나의 길을 달렸다네..."
'마이 웨이'는 제목도 감동적이지만, 가사 하나하나가 얼마나 의미심장한 지 모릅니다. 그가 백발의 모습으로 의지에 찬 이 노래를 부를 때면 그는 세상에서 무엇이 인간의 길인지를 알고, 그 길로 잘 달린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의 노래 '마이 웨이'와 비교하여, 실제 그 인생의 '마이 웨이'는 같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범죄조직인 마피아와 연루되어 왔습니다. 그는 한때 미국의 대통령에게 여자를 소개해 주는 뚜쟁이였다는 사실도 판명이 되었습니다. 그는 네번의 결혼을 통해 그의 생활이 얼마나 문란했는지를 알려주었습니다. 그의 사후에 재산을 놓고 전처와 현재의 처, 배다른 자식들 사이에 벌어졌던 재산 다툼이 혈투로 번져 팬들을 실망시켰습니다. 그의 노래는 더 없이 감동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걸었던 그의 마이 웨이, 그가 선택한 삶은 결코 감동적이거나 아름답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자유는 방종이 아니라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혹 내게 주신 자유로 선택한 길이 나와, 다른 사람, 그리고 후대까지 악영향을 미친다면, 내게 주신 자유가 무슨 의미가 있고, 또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8월 15일은 우리나라가 일제치하에서 해방된지 58주년 되는 날입니다. 36년동안 나라를 잃고 억압과 고난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자유를 그리워 했습니까? 해방되던 날, 모든 사람들은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 나왔습니다. 아직도 그날의 함성이 쟁쟁하게 울려 퍼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 나라는 어떤 민족보다 자유의 소중함을 체험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해마다 이날이 오면 이 민족에게 해방을 주신 하나님께 너무도 감사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자유의 소중함을 아는 우리들, 이제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자유를 알아야 합니다. 죄와 염려라는 형식에서부터 자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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