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우리는 대접하며 삽니다 (마 7:12)

  • 잡초 잡초
  • 253
  • 0

첨부 1



우리는 대접하며 삽니다(마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오늘은 광복 제 58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우리 가운데 연로하신 분들은 아마도 광복의 기쁨과 감격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나라 YMCA운동의 선구자였던 월남 이상재 선생이 독립운동을 하던 중 일경에 의해서 체포를 당했습니다. 그는 감옥에 갇혀서도,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줄기차게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급기야 그를 고문하던 일경이 지치고 말았습니다. 일경은 그에게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독립만세를 부르지 말라고 매질을 하는데, 매를 맞으면서도 자꾸만 독립만세를 외치면 어떻게 하겠다는거야?"
그때 이상재 선생의 답변은 이러했습니다.
"지금 내 속에는 목구멍까지 독립만세가 꽉 차 있소. 그러니 자꾸 건드리면 독립만세 밖에 더 나올 것이 무엇이겠소? 듣기 싫으면 아예 건드리지를 말아야 할 것 아니오!"
우리 선조들은 나라의 독립을 애타게 구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도 독립운동을 하던 중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죄수의 신분으로 감옥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으면서, 하나님께 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 목숨이 다하기 전에는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어서 우리 정부가 세워지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제 손으로 우리 정부의 뜰을 한 번 쓸어보고 우리 정부의 유리창을 한 번 닦아볼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그는 「나의 소원」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나에게 나의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서슴없이 우리나라의 독립을 원한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나에게 나의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그때도 나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원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세 번째로 나의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좀 더 소리를 크게 해서 우리나라의 완전한 독립을 원한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7:7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우리민족은 애써 독립을 구했습니다. 힘써 독립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독립을 위해서 계속해서 하늘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민족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1945년 8월 15일, 우리에게 광복의 기쁨을 선물로 안겨주셨습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48년 5월 31일, 그날은 우리나라에서 국회가 처음으로 열리는 날이었습니다. 그 당시 임시의장을 맡았던 이승만 박사는 순서에도 없는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는 대한민국 민주국회 제 1차 회의를 열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사상을 떠나서 누구나 오늘 이 순간이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자랑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다 일어나서 성심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텐데, 이윤영 의원 앞으로 나와서 간단한 말씀으로 기도를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이윤영 의원은 목사님이었습니다. 국회의원 모두가 일어선 가운데, 그는 단상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가운데 첫 머리에 나오는 일부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시일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사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하나님은 이제 세계 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한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만방에 정시하신 것으로 저희들은 믿나이다."

우리나라 국회 공식기록 제 1면 이승만 박사가 전 국회의원들에게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자는 내용과 이윤영 의원이 하나님께 드린 감사의 기도가 적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때의 기쁨과 감격과는 달리 지금 우리나라는 매우 어려운 상황 속에 놓여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정치는 혼동합니다. 국민들의 마음은 갈라져 있습니다. 경제는 최악의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 행렬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왜 우리나라가 이런 위기적인 상황 속에 놓여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유를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 바르게 사용하지 못하고 각자의 마음 속에 있는 이기적인 생각,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 사로 잡혀서 잘못 사용하고 있기 때문인 줄 압니다.

이런 위기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내 몫만을 챙기고자 하는 이기적인 생각을 떨쳐버리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이해해 줄줄 아는 따뜻한 마음, 넓은 마음,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는데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일깨워주시는 교훈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황금률, "the Golden Rule"이라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세 문장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다른 사람에게서 대접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둘째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입니다. 우리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라 대접하는 마음입니다.

셋째로,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입니다. 황금률의 정신대로 사는 것이 성경의 근본이요, 핵심이요, 요약입니다. 우리가 황금률의 정신을 잘 지키면 성경 전체의 계명을 다 지킨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계명을 아무리 잘 지킨다 할지라도 황금률의 정신을 지키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근본 자체가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크신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대접을 받고자 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대접을 하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으로 바뀌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의 삶을 통해서 이 시대의 어려운 문제들이 하나씩 하나씩 해결되어져 나아가는 은혜와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입니다.

나와 너와의 인간관계에서 누구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대접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서 어떤 대접을 받기를 원합니까? 사람은 누구에게나 약점도 있고, 강점도 있습니다. 단점도 있고, 장점도 있습니다. 내게 부족한 것도 있고, 또 내가 잘하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나의 잘못과 허물은 덮어주고 용서해 주기를 바랍니다. 반면에 내가 잘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기를 바랍니다.

우선 우리의 부정적인 면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다. 미국의 유명한 작가였던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 1899∼1961)가 쓴 글 가운데 「the Capital of the World(세계의 수도)」라는 짤막한 글이 있습니다. 스페인의 어느 가정 이야기를 다룬 내용입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몹시도 나무랐습니다. 아들은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가 버렸습니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을 찾기 위해서 백방으로 수소문을 해 보았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마드리드 신문에 큰 광고를 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파코야, 내가 너의 모든 잘못을 용서한다. 나는 너를 진정으로 사랑한다. 그러니 내일 12시 마드리드 신문사 앞에서 만나자."
그런데 "파코"는 스페인에서 꽤 흔한 이름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날 12시에 아버지는 마드리드 신문사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랬더니 파코라는 이름을 가진 청소년들이 800명이 넘게 그 자리에 모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잘못을 용서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기 마련입니다. 아울러서 우리의 허물을 다른 사람이 들추어내지 않고 덮어주기를 바라는 심정은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다른 사람이 나의 허물을 들추어내고 다닌다면 우리가 얼마나 속이 상하겠습니까? 기분이 좋지 않을 것입니다.

옛날에 어떤 재상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 재상이 자기 친구들을 불러서 술잔치를 벌였습니다. 재상에게는 특별히 총애하는 기생이 한 사람 있었습니다. 매우 아리따운 여성이었습니다. 남자라면 누구라도 그의 손목을 쥐어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정도로 예쁘게 생긴 여인이었습니다.

한참 술잔치가 벌어졌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바람이 세차게 불더니 등불이 꺼져 버렸습니다.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캄캄했습니다. 그 틈을 타서 누군가가 그 기생의 손목을 덥석 잡았습니다. 그 기생은 깜짝 놀라서 자기의 다른 손으로 자기의 손목을 잡은 사람의 갓끈을 끊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누군가가 허락도 없이 제 손목을 쥐었습니다. 제가 그 사람의 갓끈을 지금 끊어놓았습니다. 그러니 어서 빨리 불을 켜십시오!"
그때 제상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을 켜지 말아라. 자, 우리 모두 자기의 갓끈을 끊도록 하십시다."
그래서 각자가 자신의 갓끈을 끊고 난 뒤에 비로소 불을 켰습니다. 얼마나 현명한 재상입니까? 덕 있는 사람입니다. 만일 그 기생의 손목을 잡은 사람이 알려지게 되면 얼마나 난처하겠습니까? 마음에 상처를 입었을 것입니다. 문제가 복잡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는 마음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지 못하고 들추어내는 마음은 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허물을 덮어주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우리의 긍정적인 면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는 우리가 잘한 점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이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기를 바라는 심리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우리나라 유머 가운데 "얄미운 여자"라는 시리즈가 있습니다.

"10대에 얄미운 여자 - 얼굴이 예쁜데 공부도 잘하는 여자
20대에 얄미운 여자 - 똑같이 성형수술을 했는데 티가 안 나는 여자
30대에 얄미운 여자 - 실컷 놀고도 시집은 잘 가는 여자
40대에 얄미운 여자 - 엄마로서 이곳 저곳 쏘다녀도 자녀들이 공부만 잘 하는 여자
50대에 얄미운 여자 - 실컷 먹는데도 아랫배가 안 나오는 여자
60대에 얄미운 여자 - 남편이 돈을 많이 벌어놓고 죽어버린 여자."

다른 사람이 잘 되면 같이 좋아해 주어야지, 왜 얄밉습니까?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이 칭찬하는데 인색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칭찬한다고 돈이 듭니까? 왜 칭찬하는데 인색하십니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습니다.

캔 블렌차드라는 사람이 미국에 있는 유명한 관광명소인 씨월드에 구경을 갔습니다. 커다란 범고래가 조련사의 신호에 따라서 멋진 쇼를 펼칩니다. 범고래는 무게가 3톤이 넘습니다. 또 사납기로 소문난 고래입니다. 그런데 조련사의 신호에 따라서 엄청난 무게의 범고래가 물 위로 뛰어오르고 풍덩 빠지는 연기를 펼쳤습니다. 나중에 쇼가 끝나고 난 뒤에 그는 조련사를 찾아가서 범고래를 어떻게 그렇게도 잘 훈련시켰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조련사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고래도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잘한다, 잘한다.' 칭찬해 주면 더 잘합니다."
그는 거기에서 힌트를 얻어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을 보면 "고래 반응"이라는 말과 "뒤통수치기 반응"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고래 반응"은 어떤 사람이 무엇을 잘할 때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무엇인가 잘못했다 할지라도 그 자리에서 질책하지 않고, 긍정적인 반응이 나오도록 유도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뒤통수치기 반응"은 반대입니다. 어떤 사람이 무엇을 잘할 때는 무관심합니다. 그러다가도 무엇인가 잘못하고 실수하면 뒤통수를 치면서 질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고래 반응을 원합니까? 뒤통수치기 반응을 원합니까? 뒤통수치기 반응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나와 너와의 관계에서 화목해질 수 없습니다. 누구나 다 고래 반응을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잘한 점을 인정해 주고 칭찬해 줄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7:1-5에서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비판을 받기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상대방에게 잘못한 것이 있다 할지라도 그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해 줄줄 아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또 마7:7-11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구할 때마다 언제나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선대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은 덮어주며 용서해 줄줄 알고, 다른 사람의 잘한 점은 인정하고 칭찬해 줄줄 아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입니다.

남에게서 대접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바뀌어서 남을 대접하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행20:35에 보면 예수님이 친히 하신 말씀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그렇습니다. 대접을 받고자 하는 마음보다는 대접하는 마음이 훨씬 더 아름답습니다. 더 복된 마음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나라는 참으로 복 있는 나라입니다. 축복된 나라입니다.

1919년 4월이었습니다. 3·1 운동 직후여서 나라가 매우 어수선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폐쇄를 당했습니다. 그때 수원에서 약 50리 떨어진 제암리에 있는 제암리 교회도 역시 폐쇄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그곳 주재소 서장이 무슨 영문에서인지 교회에 전갈을 보내 왔습니다. 다음 주일부터는 예배를 드려도 좋다는 전갈이었습니다. 목사님은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교인들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그 동안 닫혔던 문이 열려졌습니다. 그리고 깨끗하게 소제도 되었습니다.

주일이 되었습니다. 약 30명의 교인들이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찬송을 부를 순서가 되었습니다. 찬송가 364장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같은 고생이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일본 헌병들이 들이닥쳤습니다. 그들은 교회 문을 밖에서 걸어 잠갔습니다. 그리고 목조건물로 된 예배당에 석유를 뿌렸습니다. 불을 질렀습니다. 삽시간에 교회가 불길에 휩쓸렸습니다. 깜짝 놀란 교인들은 유리창을 열고서 어린 아이들을 밖으로 내던졌습니다. 일본 헌병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아이들을 총으로 쏘아서 죽였습니다. 목사님과 교인들은 계속해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141장이었습니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계속해서 찬송을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지붕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 안에서 예배를 드리던 모든 교인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불에 타 죽었습니다. 일제 36년 치하에서 일본사람들은 우리 민족에게 말할 수 없는 끔찍한 만행을 수도 없이 저질러왔습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1970년, 한일국교가 정상화되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일련의 일본 목사님들이 우리나라를 방문했습니다. 그들은 비극의 현장을 둘러보았습니다.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자기 나라로 되돌아갔습니다. 1년 동안 그들은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비극의 현장에 대해서 보고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의 기독교인들이라도 이 빚을 갚아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돈으로서 일천만 엔을 모금했습니다. 그 돈으로 그들은 제암리에 기념 교회를 세웠습니다.

1971년 9월 헌당예배가 드려졌습니다. 한국 교회의 여러 목사님들, 경기도지사, 수원시장, 그리고 지방의 유지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예배가 다 끝났습니다. 마지막 축도송을 부를 때였습니다. 그곳에 참석한 일본 목사님들은 통곡하면서 앞으로 나아가 그곳에 있는 한국 목사님들을 얼싸안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장내는 눈물 바다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들이 우리에게 저지른 끔찍한 만행과 우리에게 진 엄청난 빚을 무엇으로 값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들이 모금한 돈입니까? 그들이 세운 기념 교회입니까? 그들의 눈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것으로는 그들이 빚을 갚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빚을 탕감해 줄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피해를 당한 우리 민족의 자비로운 용서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덮을 줄 아는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용서할 줄 아는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말씀 그대로 대접할 줄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복 있는 민족입니다. 우리나라는 복된 나라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3·1 운동이 끝나고 난 뒤에 그 당시 우리 교회의 담임목사였던 차상진 목사님을 비롯해서, 그 당시 학생회 면려회장이었던 김원벽 지사 등 얼마나 많은 사람이 투옥을 당했습니까?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일경에 의해서 종이 한 장 남김없이 철저하게 수색을 당했습니다.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또 그 뒤에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김익두 목사님도 일제의 강압에 의해서 우리 교회를 사임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엄청난 피해를 당한 우리 교회이지만, 우리가 1993년 교회설립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제 1호 선교사를 어디에 보냈습니까? 일본이었습니다. 우리는 덮을 줄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용서할 줄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대접할 줄 아는 교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남에게서 용서받기를 원하십니까? 우리가 먼저 남을 용서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남에게서 인정받기를 원하십니까? 우리가 먼저 남을 인정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남에게서 존경받기를 원하십니까? 우리가 먼저 남을 존경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대접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바뀌어져서 대접하고자 하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는 신약이 없었습니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난 뒤에 제자들에 의해서 기록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하듯이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율법과 선지자로 구분했습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 다섯 권을 율법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나머지는 모두 선지자로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율법과 선지자는 우리 입장에서 보면 구약성경이지만,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성경전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황금률의 정신, 이것은 성경 전체의 근본이요, 핵심이요, 요약이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황금률의 정신대로 살면 다른 계명을 지킨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계명을 아무리 잘 지킨다 할지라도 황금률의 정신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 근본이 흔들리기 때문에 소용이 없습니다.

어떤 여대생의 수기를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 제목은 「얘야, 대강 해치우고 빨리 와라! 학원 늦겠다」입니다.
하루는 어느 여대생이 길을 걸어갔습니다. 길가에서 대 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개구리 뒷다리에 실을 매고 장난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개구리는 벌써 지쳤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신경질이 난다는 듯이 개구리를 발로 툭 차버렸습니다. 개구리는 몇 번 데굴데굴 구르더니 하얀 배를 드러내고서 숨을 깔딱깔딱 거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여대생은 그 아이에게 나무랐습니다.
"얘야, 그만 괴롭혀라. 개구리가 불쌍하지도 않니?"
그런데도 아이는 전연 대꾸를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개구리를 손에 쥐더니 뒷다리한쪽을 손으로 쭉 빼버렸습니다. 그러니까 개구리는 온 몸을 파르르 떨었습니다. 그때 그 아이를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얘야, 대강 해치우고 빨리 와라! 학원 늦겠다."
그 소리를 듣고 아이는 개구리를 공 차듯이 하늘로 뻥 차버렸습니다. 그리고 자기 어머니에게로 뛰어갔습니다. 그 여대생은 자기의 글을 이렇게 끝맺음하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마땅히 알아야 할 근본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마땅히 자기가 배워야 할 근본을 배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런 상태에서 그 아이가 학원에 간들 무엇을 제대로 바르게 배울 수 있겠는가?"
그렇습니다. 근본이 흔들리는데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다른 계명을 아무리 잘 지킨다 할지라도 이웃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이것을 우리에게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롬13:10입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갈5:14입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약2:8입니다.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우리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면 다른 계명을 다 지킨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 속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우리가 도적질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고, 거짓 증거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우리에게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데, 아무리 우리가 잘 믿고 다른 계명을 잘 지킨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체적으로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 이것이 바로 오늘 황금률의 말씀입니다. 내가 바라는 대로 다른 사람에게 해 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서 대접을 받고자 하는 그대로 다른 사람을 먼저 대접해 주라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우리의 강퍅하고 각박한 마음 속에 사랑을 불어넣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 햇빛과 바람의 이야기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나그네가 지나갑니다. 햇빛과 바람이 내기를 합니다. "누가 저 나그네의 외투를 먼저 벗길 것인가?" 먼저 바람이 나섰습니다. 세차게 불었습니다. 그러나 바람은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지 못했습니다. 바람이 세게 불면 불수록 나그네는 더욱 움츠렸습니다. 그리고 옷깃을 스몄습니다.

다음으로 햇빛이 나섰습니다. 햇빛은 빙그레 웃으면서 나그네를 따뜻하게 비추었습니다. 그러자 나그네가 옷을 벗었습니다. 이 둘 중에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사람을 아무리 세차게 몰아붙여도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더 강퍅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만이 그 사람의 마음을 녹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사랑으로 승리를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왜 이 자리에 나와 있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에 이끌림을 받아서 이 자리에 나온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우리의 마음 속에 이웃에 대한 사랑을 불어넣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무슨 일을 하든지 누구를 대하든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라 대접하는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기에 승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