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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이 우리를 지배하실 때 (갈 5: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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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성령이 우리를 지배하실 때 (갈 22-26) 
 
지난 주간에는 저희교회의 전 교인 수련회를 은혜 중에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환상을 보고 꿈을 꾸리라"는 주제로 가진 수련회에서 성도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환상과 꿈을 품고 돌아왔습니다. 그 꿈의 씨앗은 지금 우리눈에 보이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씨앗은 분명히 때가 되면 자라나게 될 줄 믿습니다. 벽에 붙어 있습니다.

두 주간 전 주일 예배 때 성령의 열매 아홉가지 중에서 첫 단계, 사람이 하나님께 대해서 맺는 열매로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내면적인 열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자연히 형제를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당연히 어떤 환경과 조건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기쁨은 세상에서 물질이 있을 때에만 일이 잘 될 때에만 기뻐하고 기분 좋아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기쁨으로 사는 사람은 힘이 넘칩니다. 기쁨으로 살면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가 화평의 관계로 형성됩니다. 죄사함의 기쁨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새롭게 형성합니다.
살맛이 나게 합니다. 봉사할 힘이 일어나게 합니다. 시험을 이길 힘이 나게 합니다.
마음에 죄를 품고 있는 동안은 하나님과 화평할 수가 없습니다. 스트레스만 받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로 나와서 죄 용서함을 받아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흘리신 보혈로 정결함을 받고 성령의 물로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 성령의 열매는 계속됩니다.
성령의 열매의 그 다음 열매는 인내와 자비와 양선입니다.
사랑과 기쁨과 화평이, 하나님을 향해 맺는 열매라면 인내와 자비와 양선은 인간을 향해 맺는 열매입니다.

1. 그 첫째가 인내, 오래참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오래 참는 것이 부족해서 불행한 일을 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잠언에 보면 오래참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말해줍니다.
잠언 15장 18절 말씀에는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
잠언 16장 32절 말씀에는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리라"하였습니다.
우리 민족은 하도 감정적인데다가 빨리빨리 습관까지 있어서 오래참고하는 것을 잘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한민족의 피를 가지고 있는 교인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BC400년 경에 히포크라테스는 사람의 기질을 네가지로 나누었는데 다혈질, 담즙질, 우울질, 점액질이로 나누었습니다.

1) 먼저 담즙질은 예리한 지성을 가지고 장기적인 계획을 훌륭하게 세우고 잘 이루어 나갑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에 쉽게 동요되지 않습니다. 목적지향적인 사람입니다. 대신, 성급합니다. 화를 잘 냅니다. 오만합니다. 사도바울이 이런 기질의 사람입니다.

2) 우울질은 매사에 분석적입니다. 예술을 즐겨 감상합니다. 천성적으로 내성적이지만 감정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여러 가지 기분을 냅니다. 친구를 쉽게 사귀지 못하지만 한번 사귀면 매우 충실한 관계를 맺습니다. 사람앞에 나서기를 싫어하는 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가 다른 사람은 찾아 나서기 보다는 남들이 자기에게 오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3) 점액질은 조용, 냉정, 느리고 태평한 기질의 사람입니다. 별로 흥분하지 않습니다. 항상 자기 감정을 잘 조절합니다. 기억력이 좋고 유머를 잘 찾아 내고 좋은 것의 모방도 잘 합니다. 그가 하는 일은 항상 깔끔하고 효과적입니다.

4) 다혈질은 온화, 낙천적, 생기있고 모든 것을 즐기는 기질의 사람입니다. 권태라는 말과는 거리가 멉니다. 정이 많고 화술에 능하고 친구를 많이 사귀고 감정에 의해서 결단을 내릴 때가 많습니다. 약점은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불안정합니다. 의지가 좀 약합니다. 일은 잘 시작하지만 끝을 잘 맺지 못합니다. 가끔 생각없이 말을하여 실수를 하기도합니다. 자기를 많이 나타내고 자기 중심적, 이기적입니다.

베드로 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성격이 하도 급해서 사고를 많이 쳤습니다.
항상 나서기를 좋아하고, 행동도 급하고 말도 급했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다가 날이 저물어 사마리아인의 한촌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과 그 일행을 환영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야고보와 요한이 화가나서는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이렇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전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잘 참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난 후에 제자들은 '순교를 당하기 까지 참았습니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 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두 악의와 함게 버리라"(엡4:30-31)
우리가 화를 내고 분을내고 참지 못할 때, 하나님의 성령이 근심을 한다는 것입니다.

역사상 가장 잘 참으시는 분이 있다면 그분은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명을 쫓아 세상에 오셨을 때 하늘의 부요함을 떠나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말 구유에서 탄생하시고 모든 인간들이 겪는 질고를 다 겪으셨습니다. 심지어는 그의 가족들 조차도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해 주지 못하였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가는 곳마다 시비를 걸었습니다.
제자중의 한사람 가롯유다가 배신하고 자신을 팔아넘겼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참으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 2절 말씀에 보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참으로 참기 힘든 일이 있습니까?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을 사모하십시오. 성령님이 함께 하시면 오래 참는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2. 둘째는 자비입니다.

자비(Gentleness, Kindness)란? 이념적이 아니고 실천적인 의미에서 남을 대할 때 부드럽게 대하고, 인자하게 대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출34:6)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신4:31)
하나님은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 모두에게 햇빛을 주시고 비를 주십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성도들에게만 좋은 것을 주시지 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이 잘되게도 하시고 일반은총을 받으며 살게 하시는가?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의 하나인 자비에서 나온 것입니다.

세상은 이기적입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자기에게 조금이나마 유익이 있으면 가까이 합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쉽게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세상을 향해 하나님은 조건 없는 사랑으로 다가오셨습니다.
이러하기에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입니다.
현대는 과학이나 지식의 최첨단의 시대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빠른 변화 속에 살아가는 현실은 각박한 세상인 것 같습니다.
각박하다는 말은 잔인하다. 매정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러한 매정하고 잔인한 세상에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자비심입니다.
마태복음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자비심이 무엇입니까? 자비심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 남의 어려움과 아픔이 이해하려는 마음, 남을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말씀에서 자비란? 요구하는 것 이상을 주는 자비라고 말씀하십니다.
왼 뺨치면 오른 뺨 주고, 겉 옷 달라면 속 옷까지 주고. . . .
사실은 상대방이 요구하는 것만큼 해주는 것도 어렵습니다.
자식이 바라는 것 만큼 해 주는 부모, 목사와 교인, 부부사이, . .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강도 만난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강도 만난 현장에 제사장이 지나가고 레위인이 지나갑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갑니다. 앞의 두사람은 무서워하며 도망갑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상처에 포도주와 가름을 붓고 싸맨 다음에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가서 밤을 새워 그를 간호하고 다음날이 되자 두 데나리온을 주며 잘 돌보아 달라고 부탁까지 하고는 '만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길에 갚겠으니 잘 돌봐달라'고 까지하고 갔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신 다음에 율법학자에게 '너는 누가 강도만나 사람에게 이웃이된다고 생각하느냐?' 하고 질문했습니다. 그 때 율법학자가 하는 말 '자비를 베푼자입니다'. . .
이 비유는 예수님이 이땅에 자비를 가지고 참 이웃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 강도만나 피흘리는 사람을 책임지기 위해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도 '너희는 세상에 이웃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오늘도 세상에는 강도만나 피흘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유괴, 날치기, 신용카드 정보 사기범, 가장 믿었던 사람들에게 사기당하고 발등 찍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누구도 도와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싸움도 말리지 않습니다. 쓰러져 피흘리고 경찰이 와야 끝이 납니다. 이 모든 것들이 강도 만난 사건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교회는 많지만 이웃은 참 적은 실정입니다.
자비는 희생적입니다. 성경은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고,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잠언21장 13절에 분명히 보세요. "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
눅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
잠언에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하나님께 꾸이는 것이니 하나님이 갚아 주리라. "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알버트 슈바이쳐는 유능한 의사, 교수, 철학자, 신학자, 세계적인 음악가, 파이프 올개니스트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수많은 불쌍한 사람을 돌봐 준 자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손은 자비의 손이었습니다. 그의 손은 참으로 복된 손이었습니다.
그 손은 환자를 고치는 손, 음악을 연주하는 손, 때로는 병원을 짓기 위해서 노동을 하는 손. . . .남들은 그런일들을 하지 않을려고 하지만 그는 그 손을 가지고 자비를 베푸는데 사용했습니다.
자비는 단순한 동정이 아닙니다. 자비의 행위는 바로 하나님 나라를 실현시키는 신앙의 행위입니다. 무자비함으로 파괴된 하나님의 세계를 회복하고 그 무자비함으로 인하여 고난당한 자들을 위로하며 붙들어 주는 일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일입니다.
자비의 열매를 맺기 바랍니다. 단순한 동정이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열매로서 하나님의 성품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이런 성령의 열매가 열리면 세상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개혁' '개혁'을 부르짖지 않아도 개혁이 될 것입니다.


3. 셋째, 양선입니다.

'양선'은 '착함','선행'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요즘은 '착하다'는 것을 '세상을 잘 모른다' '바보스럽다'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삶들도 있습니다. 뭔가 잘못된 사고입니다.
요즘 세상에는 착하기만해서는 살기가 힘들다는 생각이 공통적인 세상입니다.
요즘 부모님들은 아이가 착하면 조금 걱정을 하는 부모님이 있습니다. 요즘 세상은 착하기만 해서는 살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좀 약삭발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착하라는 말이 지혜롭지 못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슬기로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바보스럽게 사는 것이 착하다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세상의 상식을 전혀 모르는 것을 착하다고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약은 것과 지혜로운 것은 다릅니다.
세상이 악합니다. 우리는 그럴수록 더욱 약삭빠르게 살 것이 아니라 더욱 선하게 지혜롭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갈 6:9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요즘같은 세상에 선을 행하는 것은 금방 낙심이 찾아옵니다.
좋은 뜻으로 중매를 서주고 낙심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너무 고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 . .(돈, 잘 생긴 사람)
사랑을 베풀어 주고도 배은 망덕당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선을 선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삭막한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을 행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선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5:9)
성령의 열매를 맺은 교인은 착합니다.

오늘 사회의 문제는 착한, 성령의 열매를 맺은 교인들이 없어서 문제입니다.
진정으로 예수를 믿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착함과 선행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착함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본래 그리스도인은 결코 착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착한 일을 도모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은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 . .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19-21)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선을 행하려고 할 때 때로는 강력한 악이 우리를 방해할 때가 있습니다. 정말 힘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때도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계속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선교에서 보이지 않는 귀중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은 앞에서 말한 담즙질의 사람입니다. 목적 지향적인 사람입니다. 성급합니다. 화를 잘 냅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바나바가 있었습니다. 행11:24에 보면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 ”

바나바가 본래 착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 믿고 성령의 인도 따라 살면서 양선이라는 성령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고 있다는 뜻입니다. 바나바는 성령의 열매인 착한 행실로 바울을 도울 대 바울의 사역이 큰 도움을 얻게 된 것입니다. 착한 성도들이 됩시다.
성령의 열매로 하나님이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키시므로 . . . .
우리는 성령의 나무들입니다.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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