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누가 지혜자인가? (호 14:9 )

  • 잡초 잡초
  • 361
  • 0

첨부 1



> 설교제목 :  누가 지혜자인가? 
> 본문 : 호 14: 9

이제 더운 여름도 지나가기 시작합니다.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 제법 가을이 가까왔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지난 한 주간은 젊은이교회의 제5차 태국선교여행이도 있었고, 꿈지기교회 여름수련회도 홍천에서 있었는데 모두 좋은 일기 가운데 은혜롭게 열매를 거두게 되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태국 선교여행은 캄보디아, 버마, 라오스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골든 트라이앵글 지역에 거주하는 몽족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는데, 아시아에서 가장 우리와 닮은 얼굴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흔히 몽골리안의 특징인 반점이 있는 민족이라는 공통점이 더욱 친근감을 더해 주었습니다.

40도가 오르내리는 뜨거운 열기속에서 강행군한 전도와 병자를 위한 기도사역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큰 도전을 주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전도 사역 중에 산 비탈 잔디밭에서 축구하는 몽족 청년들을 보고 즉석에서 일곱명씩 국가대항 축구를 하였는데 축구화를 신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지만 너무나 진지하게 경기를 치루었습니다.

경기 결과는 1:0으로 우리가 졌는데 경기 중 몽족 선수 하나가 넘어져 팔이 빠지는 사고가 일어나 모두가 염려하였습니다만, 간호사이신 정사파이야 권사님께서 그 자리에서 팔을 맞추어 주신후 마을 병원에 데리고가서 치료받고 기브스까지 하도록 정성을 다해 주었습니다. 감사하게도 그 날 저녁 집회에서 팔을 다친 형제가 아내와 함께 참석을 하였다가 말씀을 듣고 주님을 영접하는 기적이 일어난 줄로 믿습니다.

전 그 형제를 보면서 유두고를 생각했습니다. 사도행전 20장을 보면, 바울 사도는 드로아에서 사역중 밤이 맞도록 말씀을 전하였는데, 다락에 앉아 있던 유두고가 졸다가 떨어져 죽는 불상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집회 분위기를 망치고 깨뜨려졌지만 하나님게서는 바울을 통하여 그를 살리심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큰 영광을 돌리는 전화위복의 사건이 바로 이번 선교여행에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꿈지기 세상 중고등부 수련회도 홍천의 팔렬중학교에서 개최되었는데, 태국 선교여행에서 돌아온 다음날 달려가 보니까 너무나 시설이 훌륭하고 아름다운 환경으로 마음에 꼭 들어 좋았습니다. 중학교 1학년 1반, 2학년1반, 3학년1반 밖에 없는 아주 작은 규모의 학교였지만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후원하는 대안학교였습니다. 학교 정문에 들어서니 교훈이 다름아닌 성경구절이었습니다.

우리는 지난 8개월동안 호세아서를 통하여 주시는 메세지를 나누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게되는 계기가 되었고, 참 사랑의 실천이 쉽지 않지만 주님이 소원하시는 삶이기에 어떤 환경적 유혹과 도전속에서도 감당해야 하겠다는 의지를 일깨우게 되었습니다.

고멜이라고 하는 여성과 호세아라고 하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헤아릴 수 있는 중요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창부인 고멜을 데려와 아내를 삼고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너무나 충격적인 말씀이었지만, 역설적으로 순결하고 정결한 자녀를 낳으라는 메세지로 헤아리고는 우리 역시 순결한 주의 백성으로 살기를 다짐하는 계기가 된줄로 믿습니다.

오늘은 호세아서의 마지막 시간이 되겠습니다.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오늘 말씀 중에 중요한 키워드는 '깨닫다' 라는 동사와 '알다' 라는 동사입니다. 잠언 31장에 보면, 잠언의 결론 같은 말씀을 잠언기자는 이렇게 맺습니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우리 여성들 진주 좋아하시죠? 동남아에서 세계적인 진주가 생산이 되는데, 그 중에서도 필리핀이나 태국 같은 곳이 진주가 많이 생산되는 곳입니다. 진주를 보면 아주 영롱한 우유빛을 띠고 있는데, 구슬만한 진주의 가격이 무려 1,000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크기인데도 어떤 것은 1/10 가격인 100만원에 거래되고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차이가 나느냐고 물어보니까 보석 세일러가 설명해 주기를, 크기가 같아도 얼마나 원형에 가까우냐에 따라서 값이 차이가 나고, 같은 원형이라도 얼마나 깨끗하고 상처 없이 자랐느냐에 따라서 값이 차이가 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진주는 주로 남양만의 핑크타다막시마라는 조개에서 나오는 진주로 8mm정도의 핵을 삽입하여 12mm정도의 진주로 많이 채취하는데, 모패의 체내가 아닌 껍질 안쪽에 생성되는 반구형의 진주 종류로 원형 진주보다 가격이 비교적 낮다고 합니다.

진주의 생성되는 과정을 아시죠? 조개 속에 한 이물질이 들어가면 조개 살 속에 상처를 주게 되고, 그 상처를 아물게 하기위해 만들어지는 분비물을 점점 진주를 커가게 하는 것입니다. 진주가 커서 구슬만하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진주가 겪은 고통의 세월이 길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현숙한 여인을 얻는 일은 그 값이 진주보다 귀하다고 하는 말은 우리가 현숙한 아내를 얻는 일이 많은 희생과 시간이 필요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이혼율은 세계 2위, 곧 세계 1위인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는데, 그것은 만남의 문제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거지요. 쉽게 만난다고 하는 것은 쉽게 만난 사랑이 고통에, 희생에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사랑은 고통이 담겨 있어야 하고, 사랑에는 희생이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랑일수록 끊어질 수 없고, 떨어질 수 없고, 깨질 수 없는 거지요.

부모가 아이를 고통 속에서 낳았는데, 어찌 그 아이를 버릴수 있습니까? 때때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데 이렇게 사랑한다’. 끊임없이 호세아를 떠나는 고멜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고멜을 데려와라’ ‘저는 데려오고 싶지 않습니다’ ‘데려와라 데려오되 가서 값을 지불하고 데려와라’ 우리의 사랑은 싸구려가 아니지요. 부부간의 사랑이 유지되지 위해서는 값이 지불되어야 합니다. 공짜로 사랑이 되어지지 않습니다.

요즘은 서로 간에 생일이나 어떤 결혼기념 같은 그런 날 부부가 서로 선물을 하게 되는데, 꽃을 하든, 아주 작은 반지를 하든 중요한 것은 자신의 희생이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어려운 생활 때문에, 우린 어렵기 때문에 생일도 기념일도 그냥 넘어가자. 그건 별로 좋은 모습 같지는 않아요. 어렵지만 틈틈이 모아서 하는 겁니다.

뭐, 옛날 같으면 저희들이 통학하면서 하루에 5원이면 버스를 탔습니다. 10리를 걸어가야 5원이 생깁니다. 저 약대에서 부천역까지 십리를 가방을 들고 20분 동안 뜁니다. 그리고 열차를 타고 서울로 통학을 합니다. 그렇게 5원을 절약하기 위해서 25분- 30분을 뛰는 거지요. 그렇게 해서 한 두어달 모으면 한 1,500원하는 브롯치를 사구요. 그걸 사서 어머니 생일을 기다렸다가 그 브롯치를 사서 드릴 때 그 기쁨은 말할 수 없어요. 그걸 받은 어머니가 ‘이거 무슨 돈이 나서 샀니?’ ‘다 사는 법이 있지요’ 뭐, 나올 방법이 없는데, 옛날에는 솔직히 용돈이란 것도 없었어요. 얻을 수 있는, 저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교통비에서 절약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 1,000원을 모으기 위해서 이 아이가 얼마나 많은 세월을 버스를 안 타고, 뛰어갔느냐 하는 것을 부모는 연상을 하게 됩니다.

1,000원짜리 브롯치가 이제는 10,000원 이상이 가겠지만, 그 값 이상으로 부모들은 고마움을 느끼는 거지요. 아픔이 담긴, 고통이 담긴 사랑을 받으면서 거기서 표현할 수 없는 애정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싸구려가 아닙니다. 여러분 10년, 20년, 30년 부부가 행복한 삶을 지탱한다고 하는 것은 그런 눈물겨운 희생과 고통의 댓가를 지불했기 때문에 오늘의 행복과 평안을 누리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통해서 고멜을 데려오라고 말씀합니다. 데려오되 값은 지불하고 데려오라. 희생하라는 거지요.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 희생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이 끊임없음을, 중단될 수 없음을 하나님의 사랑에 고통이 담겨져 있고, 하나님의 사랑에도 눈물겨운 희생이 있음을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호세아서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깨닫는 사랑이 성숙한 사랑이요, 이것을 깨닫고 아는 사랑이 성숙한 사랑인 줄로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누가 지혜자입니까?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까? 잘 듣는 사람입니까? 과거에는 듣는 일이 목회자를 초청하지 않으면 들을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다양하게 책들도 나와 있고, 더구나 21세기에는 정보화시대입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실시간에 수없이 많은 정보들을, 특별히 영적인 정보들도 귀한 은혜들도 누릴 수 있습니다.

저도 세계 곳곳에 유명한, 훌륭한 분들의 설교들을 인터넷을 통해서 듣습니다. 최근에 싱가폴에 하베스트쳐치에 콩히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는데 참 좋았어요. 싱가폴에도 이렇게 훌륭한 분들이 있구나. 열정적이었어요. 한 20분 설교하는데, 숨도 쉬지 않을 정도로 강렬하게, 그리고 낮예배지만 경배와 찬양팀들이 찬양을 인도하면서 얼마나 예배가 뜨거웠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경배와 찬양 참 중요한 것입니다. 주일 저녁 예배 때 경배와 찬양팀이 시작하기 전에 여러분들이 오셔야지 찬양팀이 한참 하고 있는데, 어슬렁어슬렁 하고 있는 것은 올바른 예배자의 태도가 아닙니다. 그 찬양을 통해서 흠뻑 은혜를 입고, 말씀을 들어야지요. ‘아직도 찬양이 끝날려면은 10분 남았겠구나’ 이런 생각을 가졌다면 그럼 그는 예배해서 실패한 거예요.

우리 경배와 찬양 샬롬, 엔크리스토 리더자들은 정말 기도로 준비해야 합니다. 일주일 내내 무슨 찬양으로 할까? 멘트는 어떻게 할까? 어떻게 기도인도를 해야 할까? 그런 부분들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그런 비디오를 보고, 그런 테이프를 듣고, 그런 것의 사이트를 들어가서 그것을 보면서 그것이 내 것이 되도록 몸부림을 쳐야합니다. 그리고 일 주일 만에 저녁에 나와서 인도할 때 모든 성도들을 은혜의 도가니에 인도하는 줄 믿습니다. 습관으로 캐리어로 해서는 안돼요. 준비되지 않는 모습으로 하면 안 됩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듣는다고 하는 것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듣는 일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어요. 잘 듣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오늘 주님은 말씀합니다. 깨닫는 자,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라고 하는 말은 지혜자란 곧 듣는 것 보다도 깨닫는 자가 지혜자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에서 주님 주시는 깊은 메시지를 깨달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현숙한 여인을 얻는 일은 진주보다 귀하다라고 했습니다. 말없이 그러나 수없이 많은 눈물과 희생이 담겨진 진주, 사람들은 그래서 그것을 좋아합니다. 잠언 31장에 보면, 고통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기에 값진 진주, 그것을 찾는 일보다 현숙한 여인을 찾는 일은 더 귀한 것, 그런 여인들은 이런 결과를 갖는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녀들에게 홍색옷을 입힌다. 색이 있는 옷을 입힌다는 거예요. 요셉도 야곱에 채색옷을 입힘으로써 아버지가 그를 사랑하는 것을 표현해 주었습니다.

과거에는 색이 있는 옷을 입는다고 하는 것은 사랑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60년대에는 생일 되면 아버지께서 장에 나가서 검정 고무신 하나 사 가지고 왔지요. 그것도 아까워서 웬만할 때는 들고 다니지 않았습니까? 60년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가방을 맨 사람이 흔치 않았습니다. 제가 시골 다닐 때 서울에서 이사온 애가 가죽가방 하나를 딱 매었는데, 그것이 큰 구경거리예요.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아이들은 보자기에다가 책을 둘둘 말고, 거기다가 벤또라고 하는 도시락을 떡 얹고, 도시락에도 반찬과 밥의 구별이 없지요. 어머니가 밥을 주걱으로 턱 떠서, 꾹꾹 누르고 옆으로 밀어내면 그 빈자리가 반찬자리예요. 거기다 콩장이나 깍두기 떡 놓고서 가서 뚜껑 열어보면 절반은 빨간물로 물들어 있지요. 다 먹고나서 그 빈 도시락 책상 같이 책보와 함께 싸서 어깨에 둘러매고 뛰면 말달리는 소리가 납니다. 따그락따그락... 여성들은 허리춤에 매었습니다.

우리는 몇 십년만 지나가도 옛날 얘기 같은 그런 삶을 살았었어요. 이 얘기는 2.00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색깔 있는 옷만 입혀도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 어머니의 사랑을 표현하는 거예요. 현숙한 여인은 그런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기 아이에게 홍색옷을 입힌다는 거예요. 부지런하고 검소해서 그 어머니가 절약하는 가운데 자식들을 바르게 챙겨나간다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그 현숙한 여인은 남편으로 하여금 성문에서 그 지역의 장로들과 더불어 이야기 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 말에 장로라고 하는 것은 유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남편을 그 지역의 유지들과 견주어서 이야기 할 만한 위치로 남편을 세워놓는다는 것이지요.

사실 지금도 웬만치 세워진 남편들은 아내 덕분인 줄로 믿습니다. 아내의 헌신적인 뒷받침이 없으면 남편은 사회적으로 설 수 없습니다. 성경의 말씀입니다. 현숙한 여인은 자기의 남편으로 하여금 성문에서 장로로 더불어 앉게 하고 대화하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특별히 우리 여성들은 남편들을 세우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남편이 대통령 된다면 부인은 뭔가요? 영부인, 대통령 부인이 되지요. 어떤 분은 남편이 자꾸 업그레이드 되면 굉장히 속상해하고, 약올라 하는 분이 있어요. 남편만 잘 되고 자기는 뭐냐는 거지요. 잘 모르는 분 같아요. 남편이 국회의원되면 아내는 국회의원 부인되는 것입니다. 올라가는 만큼 아내도 올라가는 거예요.

요즘은 여성상위라고 하지요? 여성이 올라가면 남편도 올라가요. 여성이 사회부 장관되면 남편은 장관의 남편이 되는 거예요. 이건 남녀의 차별의 문제가 아니라 부부의 문제입니다. 아내가 올라가면 남편이 올라가는 거예요. 남편이 올라가면 아내도 올라가는 거예요. 동반자적인 의미에서 서로의 배우자에 대해서 세워주기를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현숙한 여인이란 크리스찬 성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얻는다면 그의 가정을 세우고, 그의 배우자를 세우고, 그가 속한 삶을 강건하게 만든다는 거지요. 평안의 교회에 속해 있는 사랑하는 성도들도 여러분을 통해서 여러분의 가정과 여러분의 삶의 자리가 강건해지고, 세움을 받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누가 총명한 자입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곧 바로 아는 사람이 총명한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안다고 하는 것은 단순한 지적인 의미로 아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호세아서는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백성은 망하는도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백성, 여호와에 대해서 지식이 없는 백성은 망하는 도다. 거기서 안다고 하는 것은 학문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더욱 구체적으로 주님은 말씀합니다.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제가 여러분을 압니다. 여러분이 저를 압니다. 그것은 단지 보이는 외형적인 것을 안다고 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성도들을 좀 더 깊이, 좀 더 많이 아시기를 축원합니다. 알아야합니다. 제대로 못 알면, 단편적인 것만 가지면 실수하기 쉬워요. 바로 알고, 그의 아픔과, 그의 고민과 그의 기도의 제목을 알아야 합니다.

적어도 그런 분들이 7-8분만 되어도 그의 신앙이 건강할 수 있습니다. 어떤 시련이 와도 그는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장 8절에 보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파라오가 나타났다고 그랬습니다. 그건 사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예요. 왕이 되려면, 애굽에서 파라오가 되려면 어릴 때부터 궁중에서 공부를 하기 시작합니다. 무술을 연마하고, 역사를 공부합니다.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바로 몇 대 위에 왕에 대한 모르겠습니까? 그 앞에 수 천년에 역사를 전부 공부할 텐데요. 요셉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그가 총리가 되어서 이 애굽을 어떻게 다스리고, 애굽에 어떤 유익을 주었는지, 잘 배웠을 겁니다. 하지만 새로운 왕 투투모스는 요셉을 알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요셉과 그의 민족 유대민족을 모르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을 종으로, 노예로 삼았습니다. 알면서 모른 채 하는 이 모습 무서운 일이지요?

사무엘상 2장 12절에 보면 엘리 제사장에 두 아들을 통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무슨 말이예요? 모태신앙입니다. 주의 종의 가정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누구보다도 잘 알겠지요? 많이 배웠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뻐하시는 삶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거예요. 저를 포함해서 목회자 가정들 특별히 하나님 앞에 신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끊임없이 성도 분들은 기도해 주셔야 합니다. 우리 장로님들을 비롯해서 권사님, 집사님 가정의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도록 신실하게 자라가도록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들이 늘 조심해야 할 일은 자녀에 대해서 조심해야 됩니다. 아무개권사님, 아무개장로님 아이들 함부로 말하면 안 됩니다. 자녀에 관한 한 어느 누구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자신이 없지요. 바로 그 문제가 내 문제가 되고, 우리의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개 성도님 가정의 자녀에 이러이러한 어려움, 주님 그 일로 인해서 그 가정 얼마나 고통 가운데 있을지 우리가 압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그 자녀를 붙잡으셔서 그 가정이 기쁨의 가정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로 인해서 하나님 영광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내 아이처럼 기도해 주셔야 합니다. 가장 경솔한 사람이 다른 사람 가정의 자녀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 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사무엘상 2장은 그것을 말합니다. 지적으로 너무나 잘 알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 그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노라. 여러분들이 10년, 20년 그 이상의 신앙생활을 하셨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지 못하면 사람들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할 겁니다.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두려운 일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그럼으로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 헌신하면서 내 삶을 다 드려서 하나님의 그 사랑에 보답하고 응답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 백성이 하나님을 알지 못함으로 인해서 망한다고 호세아는 탄식합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하는 거예요. 얼마나 눈치가 없는지, 하나님의 뜻을 눈치 채지 못하는 거예요. 호세아 14장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 에브라임에게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의인이라야 그 도를 행하리라.’

오늘 우리가 교독한 시편 1편을 보면 복 있는 사람과 복 있지 않은 곧 악인의 사람을 비교해서 말씀합니다.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오늘 9절에서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이라야 그 도를 행하리라. 그러나 죄인은 그 도에 거쳐 넘어지리라‘

아무리 하나님께서 사랑의 말씀으로, 은혜의 말씀으로, 영성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선포하신다고 하더라도 악인은 그 말씀에 거쳐서 넘어진다는 거예요. 여러분, 목사의 설교에 시험 드는 사람 있지 않아요? 주님의 말씀에 시험 들고, 오히려 분이 나서 예수를 죽이려는 유대인들이 있지 않습니까? 주님이 뭐 잘 못된 얘기를 해서 그럴까요? 우리의 심령이 강팍하면 여호와의 도가 거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말씀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사람들에게 미련한 것이고,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어떤 이에게는 능력이 되고, 어떤 이에게는 거치는 것이 되지만 거치는 것 때문에 능력의 말씀을 포기할 수 없어요.

바울 사도의 선교여정을 보면 가는 곳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거하지만, 그 증거한 말씀 때문에 어떤 이들은 비방하고, 어떤 이들은 조롱하고, 어떤 이들은 죽이려고 달려들지만, 어떤 이들은 그 말씀을 듣고 주님을 영접합니다. 가는 곳곳마다 가정교회가 생기고, 가는 곳곳마다 하나님의 교회가 생깁니다. 우리 70인 전도대도 전도를 나가다 보면 아마 환영하는 가정보다 환영받지 못한 그 기회가 더 많을 것입니다. 칭찬을 받고, 격려를 받는 말보다 빙방하고 욕하고 조롱하는 말을 훨씬 더 많이 들을 것입니다. 퍼센테이지를 따져서 비방하고 조롱하고 반대하는 사람이 더 많으니까 이 전도를 중단합시다. 그렇게 해야 되겠습니까? 단 1%의 영접하는 자가 있으면 우린 그 1% 때문에 우리의 물질과 우리의 시간과 우리의 모든 정성을 기울여서 주의 복음을 증거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신앙은 그러기에 세상의 기준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법도는 그러므로 세상의 기준으로 예단할 수 없는 그런 비밀이 있습니다. 오늘 주님은 누가 이 삶에 지혜자 냐고 반문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말씀에 깊은 묵상이, 주님의 그 고통이 담긴 아픔이 담긴 피눈물 담긴 주님의 사랑을 깨달아 가면서 이제 내가 주님을 압니다. 이제는 주님의 사랑이 어떤지 알 것 같습니다. 그 사랑에 저도 응답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알아가는 길입니다. 곧 이 세상에서 지혜자요 총명의 사람인 줄 믿습니다. 지혜자로서 총명의 사람으로서 이 세상 속에 주의 백성으로 든든히 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이 험한 세상 너무나도 다양한 이론과 사상이 범람하는 이 사회 속에서 여전히 주님의 사랑에 붙잡혀 생명을 걸고 주의 뜻 이루기를 소원하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내 생명 다하여 실천하며 행하기를 다짐하는 주의 제자들이 여기 있습니다. 지난 8개월 동안에 호세아서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주님의 은혜가 더 귀하고 복된지를 알게 하신 아버지 이제 행하게 하옵소서. 이제 실천하게 하옵소서. 능력의 삶으로 열매를 맺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