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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살, 안해도 된다! / 고후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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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자살, 안해도 된다! / 고후 1:3-11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도다. . .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 .

  이 시간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고 기뻐하고 있지만 현대그룹 정몽헌 회장의 가족은 큰 슬픔 속에 빠져 있습니다. 그 분의 자살은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그 가족에게는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주었습니다. 재산과 명성과 영향력을 한 몸에 지닌 정 회장이 그 기업과 가족을 뒤에 두고 떠난 것은 큰 불행이요, 국가적 손실입니다. 왜 자살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어떤 분들은 지난 정부가 기업인을 통해 불법적 행위를 하였고, 정 회장이 그 조사를 받는 중에 자살을 했으니 정부의 책임이라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정치권이 너무 압박을 해서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았다고 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현대라는 기업이 남북 정부로부터 특혜를 받아 무리한 사업을 추진하다가 그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분들은 검찰의 고강도 조사를 견디지 못하고 죽었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정 회장 자신의 내적인 힘이 부족해서 그런 것입니다.

  최근에 우리 사회에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생계가 힘든 엄마가 어린 세 아이들을 아파트 창문 밖으로 던지고 투신하였습니다.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자살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회는 자살을 미화하고 종교화합니다. 2차 대전 때 일본의 ‘가미가제’ 특공대는 무려 4천여 명의 열아홉, 스무 살 젊은이들이 전투기를 몰고 미국 군함을 향해 돌진, 자폭하게 하였습니다. 지금도 이슬람 국가에서는 매일 젊은이들이 ‘지하드(聖戰)’라는 깃발 아래 폭탄을 안고 목표물에 뛰어듭니다. 알라를 위해 죽으면 바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부추겨 그들을 자살로 몰고 갑니다. 한편 스웨덴은 사실상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라 가난도, 실업도 없고, 의료비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은퇴하면 연금이 나와서 죽을 때까지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심지어 환락의 세계를 허용하는 등 성적 자유도 만끽합니다. 그 국민의 50%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 1/4만 천국을 믿으며, 교회에 나가는 사람은 10% 미만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을 보이고 있습니다. 잘 산다고 마음에 평화가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자살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을 뽑아 보았더니, 첫째로, 45세 이상 된 사람들이랍니다. 어째서 45세입니까? 종종 말하는 ‘Mid-life Crisis,’ 즉 ‘중년의 위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살 만큼 살아보았습니다. 죽도록 공부도 해 보았고, 직장생활도 20년 정도 했고, 결혼하면 행복하다 해서 결혼했고 자식도 낳아 키워 보았습니다. 그런데 뭔가 더 행복한 것이 있으리라고 기대했었는데 그 시점에 “이것이 인생의 전부인가?”하는 의문이 들고 가슴 속에 공허감이 깊어진답니다. 집도, 자동차도 사 보았고, 여행도 다녀 봤지만 다 그저 그렇습니다.

  다음에 알코올 중독자들이고, 흥분을 잘하고 갑자기 극심한 분노를 드러내는 사람들이랍니다. 여러분 중에서도 화나는 것을 못이기는 분들은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남자가 자살률이 높다고 합니다. 통계상으로 자살기도는 여자가 많으나 진짜 죽는 것은 남자가 많다고 합니다. 여자들은 한 번 시위를 하는 것이지요. 방법도 미수에 그칠 만한 가벼운 방법들을 사용한답니다. 또 어려움이 있을 때 도움을 거부하고 자신을 격리시키는 사람들, 장기간 우울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됩니다. 그리고 정신 병력이 있는 사람들이 자살을 잘 합니다. 가족과 사별했거나 이별했을 때도 자살의 충동이 생긴답니다. 질병이 심해지거나, 실직, 은퇴, 독신, 과부, 이혼자 등에게서 자살의 경향이 높다고 합니다.

  자살하기 전에 나타나는 증세들이 있습니다. 인생을 한탄하는 빈도가 늘어나고, 갑자기 말을 하지 않고, 말을 해도 매우 흥분해서 합니다. 나라나 기업체나 상사를 원망합니다. 가장 친한 친구와 오랜 시간 대화를 하기도 합니다. 이번에도 정 회장이 고등학교 동창과 마지막 밤을 보냈다고 하지요. 갑자기 주변을 정돈하기 시작합니다. “죽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나는 아무 쓸모없는 존재야” 라고 말하면 위험 신호입니다. 잠을 못 잘 때, 술을 너무 많이 마실 때, 사람들을 기피하고 두문불출할 때는 자살의 전조입니다.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펴야 하고, 만일 우리 자신에게 이런 느낌이 있다면 바로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결국 내적인 문제입니다. 시련을 감당할 내적 힘이 부족한 것이지요. 속사람이 약해진 것입니다. 그러니 자존감이 깨지고, 두려움과 불안이 커져 자살을 선택합니다. 자살한 어느 영국인 젊은 비서가 유서에, “다 쓸 데 없어. 인생은 살 만 한 가치가 없어” 라고 썼답니다. 즉, “인생은 살 만 한가?” 라는 질문에 “살 가치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면 죽는 거지요. 잘못된 생각이 잘못된 결과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수차례에 걸쳐 “생각을 컨트롤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도 바울도 작은 생각 하나도 멋대로 생각하지 말고 그리스도께 굴복시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인생은 살만하다!”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알고, 성경적 삶이 무엇인지 알면 우리의 인생은 살 만 합니다! 그 생각에서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로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세계 교회사에 헨리 벤 듀슨이라는 유명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뉴욕 유니온 신학교 교장으로 20년, WCC를 창시하고 회장을 수십 년 역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77세 때, 그 사모님은 80세에 자살했습니다. 그의 유언은 이렇습니다. “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에게 당신의 평화를 허락하소서.” 그야말로 혼돈이지요. 이 분이 1920년에 목사 안수를 받을 때 노회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가 신성이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까?” 그런데 이 분이 믿지 않는다고 대답한 거예요. 이어서 “당신은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것을 믿습니까?” 이 질문에도 믿지 않는다고 대답했는데도 노회가 안수를 해 주었습니다. 그는 유명한 목사님이 되었지만 결국 자살로 그 삶을 마쳤습니다. 그는 ‘안락사 협의회’ 회원이었는데, 그 단체는 인생은 각자의 것이므로 죽고 싶을 때 가장 편한 방법으로 각자 죽음을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에게 자살의 자유를 주어야 한다고 믿고 가르칩니다. 출발부터 잘못된 신앙을 가진 분이 잘못된 생각 때문에 이런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모든 것이 생각에서 옵니다. 옳은 생각은 옳은 결과를, 좋은 생각은 좋은 결과를, 잘못된 생각은 잘못된 결과를 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맞지 않는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에 맞지 않는 결과를 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철저하게 날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근육경색증에 걸린 남편과 암에 걸린 부인이 병원비 때문에 자살했습니다. 10살 난 쌍둥이가 자살을 했습니다. 그들은 유서에 “우리는 아무 가치가 없어요. 우린 가족이 아니에요. 안녕, 미안해요” 라고 썼습니다. 왜? 죄의식으로 자존감이 저하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을 가치 없는 인간으로 떨어뜨릴 때 살맛이 안 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디에서든지 언어와 태도에 있어서 다른 사람을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귀중히 여기셔서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이 전 우주를 다 합한 것보다도 더 소중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네 형제에게 라가라 하는 자는 지옥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라가”는 바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가치 있는 인간에게 “바보 같은 녀석”이라고 말한다면 지옥에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저를 소중히 여기시고 가치 있는 존재로 삼아 주셨습니다. 전에는 이것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 창조를 알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영생과 천국을 알기 전에는 인간이 그저 원숭이의 후손인 줄 알았어요. 우연히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이고, 실존주의자들처럼, “인생이란 공중에 던져진 한 줌의 흙과 같다”고 무가치하게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하셨으며, 따라서 “사람을 죽인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라” 하셨습니다. 살인은 하나님의 형상을 짓밟는 것이며, 창조자를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우리는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죄는 우리의 가치를 떨어뜨립니다. 그러므로 죄 짓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우리에게 은총 주셔서,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의 가치가 드러나게 하여 주옵소서. 소중함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 이런 기도가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어떤 분이 제게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과 마지막 대화를 하고 죽으려고 전화를 드렸습니다. 내 손에는 두 자루의 권총이 있습니다.” “왜 죽으려고 합니까?” 물었더니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내 어머니마저도 나를 버렸습니다. 살 이유가 없어요”라고 합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물었더니 마약을 많이 해서 어머니의 속을 상하게 했답니다. 제가 두 시간 동안 전화를 붙잡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전화를 끊으면 그 사람이 자살을 할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당신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신다.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당신의 부모는 당신을 버려도 하나님은 당신을 버리지 않으신다”라고 했더니,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당신은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못 되어도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에 나에게 전화하도록 하신 것은 당신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복음을 전했고 그 분은 두 시간 만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석 달 후에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제가 자살하려 하기 전에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이 있었는데 자수를 하고 감옥에 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잘 하셨습니다. 마약을 끊는데 감옥만큼 좋은 곳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감옥에서 마약을 완전히 끊고 내가 성경공부 교재를 보내줄 테니까 그곳에서 신앙이 성장해서 나오세요” 당부하고 기도해 주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런 것 같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사랑할 대상이 있으면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면 죽을 수가 없어요. 아내를 사랑해도 죽을 수가 없지요. 어머니를 사랑해도 죽을 수 없습니다. 또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면 죽을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가 없어요. 인생에는 분명히 고난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자비와 위로의 하나님을 알면 자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하나님을 알면 위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셔서 우리 입술에 찬송을 일으켜주십니다. 5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고난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여러분 가난합니까?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었고 달랑 옷 한 벌 있었으나 죽으실 때 그것마저도 빼앗겼지요. 주님은 여러분이 당하는 모든 고난을 다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2천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여러분에게 위로가 있기를 원합니다. 수술대에 올라갈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했더니 용기가 나더라는 분들이 계십니다. 아기를 낳을 때 너무 고통스러워서 예수님을 생각했다는 분들도 계십니다. 고통과 시련을 겪을 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위로가 있고 힘과 용기가 생길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들도 고난을 당했습니다. 본문에 보면 사도들도 “우리가 환란 받은 것도”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며,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를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의 위험과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에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여 애쓰고 여러 번 자지도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자살하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순교를 택했습니다. 그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하면서 고난을 견뎌내었습니다. “우리가 받은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려 함이라.” 믿음으로 견뎠습니다. 소망이 인내를 낳습니다. 여러분의 가슴에도 영원한 하나님에 대한 소망, 해결에 대한 소망을 깊이 느끼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고난은 힘에 지나치도록 심한 고생이었다”라고 하였습니다. 8절에 보면 “살 소망이 끊어진” 고난이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 고난을 이겨냈습니다.

  여러분! 분명히 아십시오. 인생에는 여러분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좀 덜 고생하고 사시려면 이 둘을 잘 구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해야지요.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면 됩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네 모든 근심과 걱정을 주께 맡기라. 그가 돌보시리라” 하셨습니다. 많은 경우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감당하려 하다가 자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할 수 없으면 “하나님, 너무 힘이 들어서 감당을 못하겠습니다. 도와주세요” 하며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도움을 구하세요. 사도 바울도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하였습니다. 내가 능력이 부족할 때 하나님께 도움을 청했더니 하나님께서 이루셨다는 간증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가족과 대화를 하세요. 가족은 타박하거나 무시하지 말고 진지하게 들어 주십시오. 옳든지 그르든지 정죄하지 말고 계속 들어주면 살아납니다. 정죄하거나, 비난하거나, 책망하면 죽습니다. 또 성숙한 전문가들과 만나 자기 속에 있는 것들을 다 끄집어내어 이야기를 하십시오.

  혼자 고민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수요일에 모여서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 시간이라도 마음껏 하나님 앞에 와서 우리의 고뇌와 기쁨과 슬픔과 감사를 하나님 앞에 드러냄으로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찬송하면 건강해집니다. 기도하면 건강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 속사람이 강해집니다. 그리고 불가능한 것들은 하나님께 맡기고 쉬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 “Rest in the Lord”라고 하였습니다. 주 안에서 쉬라는 것입니다. 주 안에 있으면서도 계속 몸부림치면서 쉬지 않고 고민하니까 죽는 것입니다.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께 도움을 청하고, 그리고 쉬십시오. 주님께서 피할 길을 주사 감당케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우리에게 옵니다. 우리에게는 위로와 힘이 있습니다. 성령님을 왜 우리 속에 주셨습니까? 우리를 돕기 위해서입니다. 도움을 청하십시오. 그리고 위험과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11절에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고 하였습니다. 서로서로 도와야 됩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어려운 인생길을 가는 중에 서로 돕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교회공동체 아닙니까? 우리 교회 안에서도 서로 돕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해서 “인생은 살 만 하다”라는 간증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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