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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배로운 산돌 - 벧전 2: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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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배로운 산돌
벧전 2:4-10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5)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6)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1.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았으나

경찰철 통계에 의하면 2001년도 자살자 수가 1만 2277건이던 것이 지난해는 6%가 증가한 1만 3055건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하루 36건이고, 시간당 1.5명이 됩니다. 이 시간에도 우리사회 어느 구석에서는 생을 비관하여 죽음을 택하고 있는 사람이 계속 생겨나고 있을 것인데 참으로 끔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죽음에 이르지 못한 자살 기도자의 수를 생각하면 그 수는 10배 이상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의 전화" 상담실에 의하면, 자살자들의 공통점은 어떤 충격에 빠져서 '나는 쓸모 없는 사람"이란 부정적 사고에 짓눌려 근래 말수가 많이 줄거나, 대인 기피현상을 보이거나, 잠을 이루지 못하여 불면증으로 시달리거나, 알코올 중독증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은 곧 우울증으로, 우울증은 정신질환가운데 유일하게 전염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주변에 우울한 사회적 환경이 조성되면 그 영향으로 비슷한 행동의 공명현상을 만들게된다고 합니다. 누군가가 "아이고 죽겠다~"그러면 "너도 그렇냐? 나도 죽겠구만~" 하고는 꼬리를 물고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일전에 고등학교 2학년생이 성적을 비관해서 자살했습니다. 그 후 열흘도 못되어 아버지가 따라서 자살해버렸습니다. 그저께는 아들이 자살한 곳에 와서 어머니가 뛰어내려 자살해버렸습니다.

나름의 특별한 자살 동기가 발견되는 사람도 있지만 모방 자살건수도 많이 늘어나고 있는데, 주로 세상에 대한 용기를 잃거나 "나는 버림받은 사람"이란 열등감에서 자살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서 자살 방법을 알아내어서는 따라 행동에 옮기는 자살 전염병이 더욱 많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사회적 현상에서 역으로 희망을 선전하며 부정 공명이 아니라 긍정 공명 운동을 벌여나가야 합니다. 자살 전염병이 아니라 희망 전염병을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2. 예수님의 자아상 - 보배로운 산 돌

예수님은 "나사렛"이란 고향이 그의 이름 앞에 항시 따라 다녔습니다. 제자들도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나사렛이란 동네는 예수님이 어릴 적부터 자랐던 동네였는데, 갈릴리 지경의 작은 골짜기 마을이었습니다. 옛부터 별로 기록될만한 역사적 가치가 없었던 동네입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은 그의 친구 빌립이 예수님을 소개할 때 "나사렛 사람"이란 말을 듣고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고 코웃음을 친 적이 있습니다.

더구나 그는 어부보다 못한 목수의 가정에서 자라서 늘 험한 일을 하였기에 억세고 거칠어서 흠모할 만한 멋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던 사람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처럼 보였던 분입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2-3)

예수님의 생활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그분의 말씀에 나타나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58)

이렇게 출신 성분도, 외모도, 경제능력도 없어 보인 예수님이지만, 한 번도 비관하시거나 낙망하시거나 자조(自嘲) 섞인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제자들이 따라 왔지만 그들에게 줄 아무 돈도 없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보스 역할을 하기 위한 정치자금이 전혀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마 10:9-10a)

오늘 설교 본문에서는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돌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은 모양도 단단함도 없어서 집을 짓기에 쓸모 없어서 버린 돌과 같은 분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돌을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그 손에 드시니 그 돌이 "보배로운 산 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칼국수는 본래 가난한 서민들의 식사였는데 청와대에서 잘 드시는 바람에 전국적으로 칼국수 선풍이 불었던 적이 있지 않습니까? 유명한 탈랜트가 묶은 머리띠가 전국 온 시장마다 그 모조품이 날개돋힌 듯이 팔린 적이 있지 않습니까?

비록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은 돌이었지만 하나님의 손에 잡혀 있으면 그 돌은 오히려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보배롭고 존귀한 돌이 됩니다. 뿐 아니라 그 돌은 그 속에 생명력을 지닌 산 돌이 됩니다. 이 산 돌에 관한 사건이 구약 성경에 두 차례나 실제적 언급이 있습니다.

하나는 다윗이 사용한 돌맹이었습니다. 작은 돌맹이에 불과한 돌이었지만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던져지면서 그 돌은 살아서 적장 골리앗의 이마를 맞추어 그를 넘어뜨리고 말았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꾼 꿈에 나온 것으로, 금과 은 동 그리고 철로 지어진 무섭고 거대한 신상을 무너뜨리어 산산조각을 내어버린 돌인데, 나중 도리어 그 돌 하나가 태산을 이루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돌이 "사람의 손으로 뜨이지 않은 돌"이라고 했는데 바로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돌을 의미하고, 그 순간 그 돌은 단순한 돌맹이가 아니라 "산 돌"(Living Stone)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당신은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붙잡혀 있음을 말씀하셨고 그렇게 인식하시며 행동하셨습니다. 비록 세상 사람들은 그를 무시했고 가진 물질적 능력이 없으셨지만 이 자의식이 예수님의 삶이 빛이 되게 하셨고 능력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요 8:16)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요 8:23)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


3. 너희도 산 돌이 되어 신령한 집을 세우라

베드로 사도는 오늘 설교 본문에서 우리들에게 강권하고 있습니다.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우리가 산 돌이 되려면 먼저 하나님에게 붙잡힌 인식 즉 하나님의 소유된 자의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의 실체는 남이 아닙니다. 환경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조건이 아닙니다. 곧 내 마음입니다. 김 수경 선생이 쓴 「참으로 소중한 나」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당신은 아름답고 매력 있어요
당신은 성격이 참 좋아요
차분하고 깊이가 있어 보여요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며 그렇게들 말했다.

그들은 입에 발린 말을 하고 있다.
나한테 잘 보여서 득이 될 것이 무어라고 저러는 걸까.
그저 내 앞에서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다.
저들은 나를 모른다

내 모습이 어떤지는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안다.

이따금씩 수면에 비친 내 모습을 볼 때면
언제나 다시 쳐다보고 싶지 않은 모습 그대로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몹시 자신감이 없어지고 소심해져서
기분이 굉장히 우울해졌다.
그럴 때면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목소리도 낮추었다.

누군가가 주목하면 나도 모르게 예민해졌다.
누군가 내 말에 귀를 기울이면 입술이 떨렸다.
언제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그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살폈다.

불청객 같은 기분이 가장 싫었다.
내가 굳이 있을 필요가 없는 자리에,
나를 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
머쓱하게 서 있어야 하는 기분

어디건 나를 간절히 원하며 기다리는 자리가 아니면
굳이 참석하지 않게 되었다.
"너는 이곳에 꼭 있어야 할 사람이야."라는 초청장이 언제나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당당해질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나를 환영하고 좋아해준다고 느끼면
나는 안도하면서 내가 가진 것을
모두 꺼내 좋을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내게 무심하거나
차갑게 대한다는 느낌을 받으면
나는 즉시 경직되고 소심해져서
아무것도 꺼내 놓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끊임없이 생각에 매달렸다.
왜 그들이 내게 차가운 거지?
내가 무슨 실수를 한 걸까?
내가 그 때 어떤 행동을 했더라?
혹시 그 말이 저들에게 불쾌하게 한 걸까?
오, 그러지 말걸 . . .
혹시 그들이 수면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만걸까?
혹시, 혹시 . . . ..

이런 늪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그런데 너무도 쉽게 잘 빠집니다. 늘 빠져 있는 사람도 간혹 있지만, 헤쳐 나온 후에 또 다시 빠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믿음에 굳게 서라"는 말씀이 필요합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마음에 세겨둡시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 43:1-2)

동시에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을 세워야 합니다. 즉 우리 가정이 산 돌 같이 생명력이 있어야 합니다. 가정에 하나님의 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가정이 신령한 집이 될 것입니다. 가족이 서로를 일으켜 주어야 합니다. 지치고 피곤한 세상에서 가정은 보금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에 들어오면 생기가 넘치게 되어야 합니다. 나의 존재를 인식케 되고 긍정적 자아 의식을 재충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족이 서로를 물고 뜯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럴려면 "우리 가정은 하나님이 만드신 신령한 집"이란 믿음을 가집시다. 비록 경제적으로 넘치지 못하고 부족할지라도 하나님을 찬미하며 기도하는 가정이 되면 산 돌처럼 생기 넘치고 행복하게 살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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