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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땅치 아니하냐? / 마 18: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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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마땅치 아니하냐?
성경본문 : 마태복음 18장 21~35절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지니라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 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태복음 18장 21~35절) 

<목회기도>
 
전능하셔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생명 주셔서 오늘을 살게 하신 은혜에 감사 드립니다.
이런 저런 일로 가슴 답답해하고 쩔쩔매며 살던 우리들
세상에서 지고 살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왔습니다.
세상에서 짓고 살던 죄의 모습을 감춘 채 앉았습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허물을 덮으시며 죄의 더러움은 씻어주시옵소서.
남의 나라에 얽매여 살던 이 민족이 해방됨을 기뻐하는 광복절을 보냈습니다.
우리는 참된 영적 해방을 누리며 사는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참으로 얽매이기 쉬운 모든 것에서 놓임 받은 기쁨을 누리며 사는
자유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욕심과 미움으로 가득 찬 심령들은 용서함으로 평안함을 얻게 하시고
욕심을 버려 자유함을 갖는 승리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하셨는데
진리이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답게 살게하여 주시옵소서.
병에 얽매인 기둥교회 성도들 놓임 받게 하시옵소서.
국민의 의무를 감당하기 위하여 군대에 나가있는 젊은이들에게
상함이 없는 은총을 주시옵소서.
객지에, 외국에 나가 있는 이들, 가족과 교회를 그리워하는 모든 이들에게도
평안과 승리의 소식만 오고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부족한 종이 말씀 들고 섰습니다.
능력으로 함께 하셔서, 붙드셔서 신령한 은혜가 충만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영육간에 치료받는 체험과 감격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8·15 해방기념일이 지났습니다.
성경에 보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했는데
요한복음 14장 6절에 보면 예수님이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진리 안에서) 평안함과 자유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몸 안에 필요 없는 것을 내버리는데 아까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땀흘린 것을 보고 아까워 하거나 소대변을 보고 아까워서 미련을 갖지는 않습니다.
소대변을 보고 나서 그것이 아까워 쳐다보고, 섭섭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버려야 하는 것은 깨끗하게 버려야 하고,
깨끗하게 잊어 버려야 깨끗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예배드리며 말씀 듣는 여러분 모두는
버릴 것을 버리며 사는 깨끗한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오늘 본문 말씀은 베드로의 질문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이는 용서의 한계를 묻고 있는 질문입니다.
추측하건대 베드로의 마음에 궁금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잘못했을 때 용서를 한다면 몇 번이나, 얼마나 하면 되는 것일까?]
베드로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그리고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하며 토를 달았습니다.
 
당시에 유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용서의 한계를 '세 번'이라고 했습니다.
세 번 용서한다는 것은 많이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유대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용서하는 한계는 세 번이라고 합니다.
제일 크게, 제일 많이 용서하는 것이 세 번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에 대한 약간의 암시가 아모스 1장 3절, 2장 6절, 욥기 33장 29~30절 등에
부분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일곱 번 용서하면 되겠느냐고 물은 것은
완전 숫자인 일곱이라는 의미와 함께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라는 뜻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
 
그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일곱 번으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되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럴 수는 없으니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너희를 용서하시면서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요구하시지 않느냐?"하시면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이 임금에게 끌려가서
빚을 갚으라는 독촉을 받지만 돈이 없어 갚지 못합니다.
그때 임금이 그를 불쌍히 여겨 모든 빚을 탕감시켜 주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돈을 빌려 써야 될 부득이한 상황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돈을 꿔 쓸 때는 공돈 같지만…
갚을 때는 생 돈이 나가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말에 "외상이라면 소도 잡아먹는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요즘 신용불량자가 많습니다.
신용카드는 지금 현금이 없어도 카드로 결재하고 난 후
자기의 통장에 있는 돈으로 갚을 수 있도록 하는 편리한 카드입니다.
그런데 카드를 쓰는 것이 공짜 같아서 갚을 돈을 생각하지 않고
마꾸 쓴다면 그것은 죄입니다.
갚을 능력이 없이 남의 돈을 함부로 쓰는 것은 죄입니다.
여러분, 신용카드를 쓸 때 수지가 맞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수지가 맞는다'는 것은 수입과 지출이 맞게 생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의 돈을 꾸어 쓴다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사람은 일만달란트의 빚을 졌습니다.
일만(10,000) 달란트는 얼마나 되는 돈일까요?
- 1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입니다.
- 1데나리온은 예수님 당시 일군의 하루 임금입니다.
- 1만 달란트는 6000만 데나리온입니다.
  6000만명이 일하고 받을 수 있는 돈입니다.
우리 식으로 노동자들의 하루 일당을 50,000원이라고 생각하고 계산해보면
50000×60,000,000 = 3,000,000,000,000(0 이 12개)으로 3조원입니다.
일만 달란트는 한 마디로 어마 어마 어마… 한 돈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은 갚을 능력이 없을 정도의 빚을 진 것입니다.
그 사람은 임금에게 싹싹 빌면서 나중에 갚겠다고 애걸을 합니다.
그러자 임금은 이 사람이 불쌍해서 그 돈을 안 갚아도 좋다고
탕감(쓸 蕩, 덜 減, 빚을 완전히 면제 해주는 것) 해주고 돌려보냅니다. 
그 사람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은혜로 일만 달란트 빚을 해결 받았습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습니까.
 
빚을 탕감받고 신이 나서 집으로 가던 사람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관(같을 同, 벼슬 官)
즉 같은 곳에서 일하는 같은 등급의 관리를 만났습니다.
백 데나리온은 1만 달란트에 비하면
애들 말로 '새발의 피'… 그것도 안되는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멱살을 잡고(목을 잡고) 돈을 내놓으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랬더니 같은 등급의 관리인데… 그 사람이 엎드려 빌며 참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를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런 상황을 다 지켜 본 다른 동관들이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주인(임금, master)에게 가서 모든 일을 고했습니다.
결국 그 사람은 임금에게 끌려가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비유 속의 신하가 자기가 임금에게 받은 은혜와 사랑을 깊이 생각하고
감사하며 감격하고 있었다면…
그는 자기에게 작은 금액의 빚을 진 친구를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동료의 작은 빚을 용서 못한 것은
자신이 임금으로부터 받은 큰 은혜를 잊어버렸거나
그가 가진 욕심이 임금께 받은 은혜보다 더 컸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것이 모든 사람들의 근본적인 죄입니다.
하나님의 돌보심과 구원의 역사 등 엄청난 은혜를 받고 있는데도
그것을 은혜로 생각하지 못하고 자기 욕심만 채우려고 합니다.
자기 마음에 안들면 다른 사람을 정죄합니다.
다른 사람을 감옥에 가두는 것과 같은 고통을 줍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에 보면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약1:15)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용서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주기도문에도 용서에 대한 기도가 있습니다.
▶  마태복음 6장 12절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6:12)로 되어 있고,
▶  누가복음 11장 4절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눅11:4)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용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신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 주신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 잠언 19장 11절에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여 주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잠19:11)라고 하였습니다.
용서하면 반드시 용서한 사람에게 영광이 오게 마련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썩은 사과와 같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한데, 속으로는 자신이 상해 들어갑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속이 상해가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완전한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흘리신 피의 공로로 용서받은 사람,
옳다고 인정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이웃을 용서하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마지막 기도는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라는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르고
명령에 따라 일하는 사람들을 이해하며 용서를 구하셨습니다.
 
물론 용서는 죄를 묵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묵인하는 것은 죄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하는 것은 죄와 하나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고전13:6).
그러므로 용서는 모든 죄를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배격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용서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자에게만 적용되는 적극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미운 사람이 없나요?  싫은 사람이 없나요?
아마 여러분 가운데는 <고신일목사>가 싫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 중에 미운 사람, 싫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면
완전한 경지에 이른 성자이거나 바보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런데 미운 사람, 싫은 사람이 없다고 하는 완전한 사람이라도
그 완전함이 계속 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웨슬리 목사님은 "매 순간 순간… 온전해야 함을 강조" 했습니다.
 
미움은 죄로 타락한 사람 속에 자리잡은 사탄의 성품입니다.
그러므로 마음 속에 미움으로 가득 찬 사람, 누구를 미워하는 사람,
용서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은 이유야 어떻든지
이미 그 사람은 사탄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권하는 말씀이 많습니다.
▶ 마태복음 5장 23~24절에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고 했습니다.
예배를 드림에도 형제와 화목하지 못하고
드리는 예배는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 마태복음 6장 14~15절에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
했습니다.
▶  마가복음 11장 25절에
  "서서 기도할 때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막11:25) 했습니다.
▶ 누가복음 6장 37절에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눅6:37) 했습니다.
▶ 에베소서 4장 32절에는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2) 했습니다.
▶ 골로새서 3장 13~14절에는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골3:13~14) 했습니다.
 
 
용서는 필수입니다.
 
 
용서는 선택이 아닙니다. 필수입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대학에서 여러 과목을 가르치는 중에
필수과목과 선택과목이 있었습니다.
필수과목은 반드시 그 과목을 공부하고 학점을 따야 졸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필수과목을 가르치는 데 몇몇 학생이
제대로 출석하지도 않고, 나왔다가도 출석만 부르고 도망가고,
시험성적도 별로 좋지 않아서… 마음 좋게 생긴 제가…
그 학생들에게 낙제 점수인 F 학점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나중에 들리는 말이 "교수가 잘 가르치지도 않았으면서
낙제점수를 줬느니 어쩌느니…"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못들은 척 했습니다.
두 학기가 지난 후에 그 학생들이 다시 제 과목을 수강하러 왔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가르치는 필수과목에서 점수를 따야
졸업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출석을 부르다 보니 그 학생들이 있기에
"너희들 내게 낙제점수 받았다고 나를 욕했다며?"라고 했더니
"그게 아니라고 이런 저런 이유"를 대더니
그 다음 시간부터는 맨 앞자리에 앉고 올 때마다 쥬스를 사가지고 오고,
강의가 끝나면 가방도 들어주면서 얼마나 잘했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필수과목이라 점수를 잘 받아야 졸업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용서는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 하는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하는 필수입니다. 해도 좋도 안해도 좋은 선택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경험과 지식… 등으로 정리된 옳고 그름의
자신만의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기준을 절대라고 생각하고 살며
그 잣대를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들이대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에는 대부분 교만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가 옳다고 하는 자부심은 대개 교만으로 드러납니다.
  '내 생각은 이런데 저 사람은 왜 저럴까?'
  '내 판단으로는 이것이 옳은데…'
  '내가 벌써 몇 번이나 가르쳐 주고 이해하려 했는데…
  교인들은 왜 그럴까?, 목사님은 왜 이럴까?'
  '내 생각에는, 내 상식으로는' 이해도 안되고 용서도 안돼, 아니 못해…
물론 그 속에 정의감이 있으나 교만이 더 많이 차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베드로처럼 '이 정도면 되겠지',
'내가 일곱 번씩이나 이해했으면… 용서했으면 됐지. 얼마나 더'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몇 번이나 용서하리이까?'라고 물은 것처럼
'몇 번이나'라는 것은 사람의 기준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인간적 기준과 계산을 넘어서기를 원하십니다.
자신이 세운 정의를 내세우지 말고 하나님의 수준에 맞추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의 이해, 용서, 사랑…
다시 말해 끝없는 이해… 무한한 용서… 그것이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용서는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용서는, [acceptance]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빚을 탕감해 준 임금처럼
허물 많고 죄 많은 우리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죄를 깨닫고 뉘우치는 회개를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주셨습니다(요1:12).
- 영생을 얻게 해 주셨습니다(요3:16).
-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받아 주셨습니다(빌3:20).
우리를 천하보다 귀하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받아들여야 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자녀 됨에 감사하며
● 먼저 우리를, 우리 자신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더 정확히 말씀드려서 [자신의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지금 살고 있는 것, 지금 생김새, 지금 얽힌 가족… 등
우리가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영역을 받아들이고 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한국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용서가 안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인정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지금의 모습, 나이, 지금의 모든 조건과 환경 속에서,
그 안에서… 빛 되고 소금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자신을 받아들이고 현실을 인정하고 베푸는 용서는
비극적인 인생을 소망적인 인생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이런 사진을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 1972년 6월 8일 남 베트남군의 공군기가 자국민에 대하여
네이팜탄을 투하하는 비극적인 과오를 범했을 때,  도망치기 위해
갈팡질팡하는 마을 사람들을 정신 없이 촬영한  <닉 우트>기자는 
9살의 알몸의 소녀 팡 티 킴 후크의 너무도 또렷한 공포의 표정을 잡았다.
이 사진은 순진무구한 전쟁 희생자들의 존재를 전 세계에 알려
미국의 반전운동을 고조시키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베트남전쟁 때 트램방 마을에 폭탄이 투하되었습니다.
마을은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했습니다.
그때 불길 속에서 겁에 질린 9살 소녀 [팡 티 킴 후크]가 공포에 질려
알몸으로 도망 나왔습니다. 소녀는 온몸에 3도 화상을 입었습니다.
이때 AP통신의 <닉 우트>기자는 '소녀'의 비참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전쟁의 참화를 생생하게 보여준 이 사진은
닉 우트기자에게 '퓰리처상'을 안겨 주었습니다.
 
현재 이 사람의 이름은 킴푹(36)입니다.
그녀는 현재 평화를 호소하는 유엔의 명예대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킴푹은 말합니다.
  "저를 전쟁의 상징으로 기억하지 말아주세요.
  한때는 열일곱 번이나 수술을 받으며 사람들을 증오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고통스러운 사람은 저 자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저는 모든 사람을 용서했습니다.
  그때부터 '행복'과 '사랑'이 보였습니다."
결혼한 킴푹은 아들의 이름을 '후안'이라고 지었습니다.
이것은 베트남어로 '앞날의 희망'이라는 뜻입니다.
용서는 비극적인 인생을 소망적인 인생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1999. 12. 2. 국민일보 참조]
킴푹은 화상을 입은 자신, 전쟁의 피해를 입은 자신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용서했습니다.
킴푹은 자신을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지금의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사람들을 용서하며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승리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용서는 자신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받아들인다는 것이 용서하는 것입니다.
내 지식으로, 내 경험으로, 내 판단으로 생각하기에…
다른 사람들이 잘못하고, 잘못되고, 이해 안 되는 것이라도
그 사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용서입니다.
물론 죄를 묵인하라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죄를 깨닫고 뉘우치며 용서를 구하는 회개를 할 때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완전한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깨끗이 소화해서 없애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먹고 삽니다.
음식외에도 먹는 것이 여러 가지입니다.
누가 칭찬하면 칭찬을 먹습니다.
욕을 하면 욕을 먹고, 아부를 하면 아부를 먹고,
험담을 하면 험담을 먹어야 합니다.
그런 것은 안먹고 버틸 방법이 없습니다.
좋고 나쁜 것들이 선택의 여지없이 우리 안으로 쏟아져 들어옵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전부 소화시켜 배설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몸 안에 쌓아두어서 이로운 것은 없습니다.
 
소화가 잘 될 수록 음식을 먹는 것이 즐거운 것처럼,
나날의 삶이 즐겁고 기쁘고 건강하게 살려면
일상의 모든 것들을 빨리빨리 소화하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소화시키지 못하는 사람은 병든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새로운 음식을 먹을 수 없습니다.
여러 가지를 먹고 소화시킬 수 없는 사람,
이웃을 인정하지 못하고, 받아들일 수 없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용서를 한다는 것은 깨끗이 소화해서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미련 없이 없애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소화를 잘 시키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용서는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기둥교회 예배실 천장에 보면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는 전 세계에 교회 안에 있는 십자가 가운데
가장 큰 십자가라고 합니다.
[기도]라는 책의 저자인 "리챠드 포스터(Richard Foster)" 교수께서
우리 기둥교회 예배실에 오셔서 기도하다가 천장에 있는 십자가를 보시더니
"전 세계에서 교회 안에 있는 십자가 중에 가장 큰 십자가"라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십자가를 장식물로 여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목에도 걸고, 귀에도 달고, 손가락에 끼기도 하고
뱃지로 만들어 달고 다니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영성훈련(Training for Spiritual Formation)을 마치고 나면
십자가 목걸이를 걸어 줍니다.
그런데 성경 어디에도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녀라/십자가를 귀에 달고/십자가를 손가락에 끼고/
십자가를 뱃지로 달고 다니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딱 한 가지 말씀만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라"고 했습니다.
▶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리라"
    (마10:38)
▶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16:24)
▶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막8:34)
▶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눅9:23)
▶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14:27)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희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사형틀인 십자가를 지고 죽으러 가는 범죄자처럼
죽음까지도 기꺼이 각오하는,
자기 목숨을 예수님께 바치겠다는 자세를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우리 죄를 십자가를 지신 자신의 뒤로 던지신 용서입니다.
이사야 38장 17절에 보면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사38:17) 했습니다.
 
등 뒤에 던져 버리는 용서가 진짜 용서입니다.
진짜 용서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 참된 용서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부부이기에 져야 하는 십자가, 부모, 형제… 등 가족의 십자가
믿음의 십자가, 예수 믿기 때문에 져야 하는 십자가…
집사, 권사, 장로, 팀장, 교사, 찬양대원…등의 책임을 맡았기 때문에
져야 하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때로 그 십자가가 무겁고 힘겹기도 할 것입니다.
억울함을 당하기도 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땀흘림의 수고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 십자가 뒤로 모든 것을 던져 버리는 용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평안하고, 가정이 평안하고, 교회가 평안하고 모두 평안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믿음으로 영생을(구원을) 얻었지만(요3:16)
        여전히 세상에 얽매인 인생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요1:12)
      여전히 세상 혈육과 어울려 살아야 하는 인생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천국시민이 되었지만(빌1:20)
      여전히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야 하는 인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사는 우리는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우리 자신에게…
주변 사람에게… 관대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자신과 남에 대한 용서는, 받아들임은 마땅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십자가 짐 같은 고생스런 삶이라 할지라도
당연히 예수 믿는 사람은 감당해야 하는 십자가입니다.
지고 가야 하는 십자가입니다. 걸고 다니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너희도 용서함이 마땅치 아니하냐?
너희도 받아들임이 마땅치 아니하냐?"
"마땅치 아니하냐?"고 물으십니다.
주를 따르는 것이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허물과 죄를 등 뒤로 던지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마땅치 아니하냐?" 고 물으십니다.
여러분도 십자가를 지고 사는 믿음의 승리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찬송가 510장 함께 찬양합니다. ♬
"겟세마네 동산의"
1. 겟세마네 동산의 주를 생각할 때에
  근심이나 걱정을 사양할 수 있을까
  나를 항상 버리고 주를 따라 가겠네
2. 빌라도의 뜰에선 주를 생각할 때에
  수치됨과 아픈 것 못견딜 수 있을까
  길이 참고 묵묵히 주를 따라 가겠네
3. 갈보리산 올라간 주를 생각할 때에
  나의 받는 괴롬을 비교할 수 없으리
  십자가를 짐으로 주를 따라 가겠네
 
 
<기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삶이 되기 원합니다.
지금까지 십자가를 전시물로 생각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이 되기 원합니다.
나를 받아 들이고 다른 사람을 받아 들이고 용서하며
평안하게 사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마음에 구부러진 것을 다 펴게 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한 주일 말씀을 귀로만 듣는 성도들 되지 않게 하시고
가슴에 담고 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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