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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풀이와 하나님 - 눅 18: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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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한풀이와 하나님
본문 : 누가복음 18:1~18

  오늘은 광복절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먼저 오늘 성경말씀에 대한 이해
를 말씀드리면 이 말씀은 예수님의 비유 설교가 됩니다. 비유란 그 사회에
서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세상적 일을 토대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는 것을 말합니다. 비유 설교를 이해하려면 한 두 가지 주의가
필요합니다. 비유에 나타난 사건이 반드시 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야기를 만들어서 할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는 세상에 흔히 있는 이야기를
소재로 합니다. 가끔 교인들이 목사의 설교를 들을 때 세상 이야기를 많이
한다는 말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거의가 다 세상 이야기
를 소재로 하였습니다. 시집 장가가는 이야기, 씨뿌려 농사 짓는 이야기,
장사하는 이야기, 강도 만난 이야기, 고기 잡는 이야기, 진주 장사 이야
기, 밭에 감추인 보화이야기 등 전부 세상에 있는 일을 소재로 비유 설교
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비유 설교를 하시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잘 살펴야 그 설교의 본 뜻을 알 수가 있습니다. 결혼식 비유가 장가 잘 가
라는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또, 여리고 강도 이야기가 강도 피하는 방법
을 가르치신 것도 아닙니다. 씨 뿌리는 비유가 농사짓는 법을 설교한 것이
아닙니다. 그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 진리를 가르치는데 목적이 있습니
다.

  오늘 말씀은 잘못하면 큰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치 재
판관 같은 분인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하나님도 이
재판관과 같이 웬 여자가 날마다 와서 귀찮게 구니까 그 귀찮은 게 싫어서
할 수 없이 그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으로 오해되기 쉽습니다. 잘못하
면 '하나님은 내가 기도하는 것을 일단은 귀찮은 것으로 여기시는가?' 또
이렇게 생각하기도 쉬운 그런 말씀이 됩니다. 이 비유는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 내용에는 정 반대의 두 사람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는
절대 권력자입니다. "어떤 도시에"라고 했는데 그 도시를 지배하는 최고 힘
의 소유자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 큰 힘의 소유자는 그 도시를 통치하는
철학이 세 가지로 오늘 성경에 표현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두려
워하지 않는다." 라고 그랬습니다. 2절에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
지 않는다." 라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통치 철학에 정의가 없다." 그
런 말이 됩니다. 그래서 이것이 예수님의 비유에 올라온 것입니다. 또 하나
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을 무시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한다면 그 다음은 뻔합니다. 그는 자
기 마음대로 하는 폭군적인 통치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면 "불의한 재판관"이라고 하는 별명이 붙습니다. "모든 것을 옳게 판단
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그런 불의한 통치자, 재판관이다." 그렇게 그 사
람을 평가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절대 권력자의 정반대의 사람, 아주 힘이 없는 사람, 오
늘 성경 말씀에는 "과부"라고 그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또 등
장을 했습니다. 이 여인은 힘없는 절대 약자를 말합니다. 그가 힘이 없는
빈곤의 약자였기 때문에 그 사회에서, 그의 삶의 과정에서 사무치는 원한
의 슬픈 일을 당했습니다. 그 원한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성경에 나타나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대략 우리가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강제적 어떤 힘에
의해서 손해를 본 일이 있습니다. 재산을 빼앗겼다든지 아니면 여인 혼자
살고 있기 때문에 무자비한 성폭행을 당했다든지 그런 짐작을 우리가 할 수
가 있습니다. 어쨌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원한이
된 그런 사람입니다. 도저히 그 사회에서 살아갈 수가 없는 억울한 사정의
사람인게 틀림없는 그런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이 지구의 모든 사회와 역사
에서도 이런 사람이 수없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식민지였던 우리 나라 과거
도 똑같은 처지를 살아왔습니다. 나라를 빼앗겼다고 하는 것은 주권 침해
를 당한 것입니다. 이 주권을 침해당하면 그 다음으로 자유가 없어집니다.
자유가 없어지면 그때부터는 불의한 재판관 같은 폭군의 힘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이름도 내 마음대로 갖지 못합니다. 그것이 창씨개
명(創氏改名)의 역사였습니다. 빼앗긴 자유가 억울해서 이 여인은 울고 또
울었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되면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는 운명론으로 돌
립니다. "이렇게 된 것이 다 운명이겠지. 낸들 어찌 하리요… 아마도 내 생
애에 이런 억울한 일이 있어야 되는가 보다." 이렇게 운명론으로 돌리게 됩
니다. 또, "나라가 이렇게 된 것도 조선인의 운명이겠지… 내 힘으로 이 나
라를 어떻게 구원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됩니다. 또 하나는 현실과 타협
을 하게 됩니다. "세상이 바뀌었으면 바뀐 대로 살아가면 되는 것이지, 구
태여 피 흘려가면서 독립운동이다, 만세운동이다 하면서 죽을 필요가 있겠
는가? 어떤 사람들이 정치를 하던 나 같은 사람은 언제나 똑같은 생활이니
까 포기해 버리자." 그런 생각을 또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그 억울한 사건을 시정하는 노력을
하기를 결심하고, 힘없는 자신의 다리를 일으켜 재판관 앞으로 다가갔다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기 시작 합니다. 이 일은
하나의 "사회 정의를 위한 투쟁이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불
의한 재판관은 사람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거들떠보
지도 않습니다. 가뜩이나 힘이 없는 이 여인은 더 힘이 빠져 버립니다. 그
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고 그랬습니다. 재판관이 귀찮아서 견딜 수 없
을 만큼의 노력을 하였다고 그랬습니다. 오늘 말씀의 뜻은 재판관과 이 여
인 두 사람을 놓고 하나님은 이 여인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것으로 끝이 나
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과부의 그 같은 노력의 힘은 무엇인가? 이 여인의 호소가 큰
힘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힘에 못 견디고 재판관이 손을 들어 버린 것입니
다. 그 힘이란 무엇인가? 이 여인의 호소는 재판관에게 가서 사정 이야기
를 해서 나같이 불쌍한 사람을 구제라도 해서 구원해 달라는 그런 애걸이
아닙니다. 동정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일은 당신 같은 재판관인
통치자가 마땅히 해야할 일을 왜 안 하십니까?" 그겁니다. 그래서 힘이 있
는 것입니다. 재판관의 할 일이 무엇인가? 바로 선량한 시민이 당하는 억울
한 일을 선하게 처리하여 주는 사람이 아닌가? "지금 이 사회에서 나 같은
사람이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하고 사는 것은 바로 힘을 가진 재판관 같은
당신이 불의한 일만 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빨리 당신이 할
일을 하시오." 그겁니다. "나같이 혼자 사는 불쌍한 여자를 구제하고 동정
해 주시오." 하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 이 재판관은 직책상 당연히 이 여인
의 일을 도와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요, 억울한 이 여인은 당연히 법
의 공정한 보호를 받을 권리가 주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 당연한 일을
왜 당신이 하지 않느냐? 나는 포기하지 않고 이 일의 시정을 당신에게 촉구
하겠노라." 그 어떤 보이지 아니하는 힘에 눌려서 재판관이 손을 든 것이
지, 그 여자만 혼자서 내보내면 간단히 처리할 문제를 왜 손을 들겠습니
까? 세상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원리가 불의가 아니라 정의이며 이런 일을
맡은 힘의 소유자는 "그 힘을 최대한 동원해서 정의 바로 세우기를 해야 되
는데, 당신이 왜 이 일을 하지 않습니까? 빨리 하십시오." 그런 이야기입니
다.

  오늘 말씀 가운데는 네 번이나 나오는 똑같은 단어가 하나 있습니
다. "원한" 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문제는 원한 때문에 되어진 일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원한"이라 하는 부분은 자신의 잘못이 없는 억울한 일
을 당했을 때 그 불행과 고민을 자기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가 없
는 상태의 마음을 말합니다. 그 억울한 원한을 아예 체념해 잊어버릴 수만
있다면 괜찮은데 해결하려해도 할 수는 없고, 잊어버려야 좋은데 잊어지지
는 않고, 계속 마음에 남아 있는 모순된 갈등의 심정! 그것이 "원한"이라
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문화는 "한의 문화"라고 많은 학자들이 표현을 합니다. 마
음 밭이 한을 많이 만드는 그러한 정서를 가지고 그런 사회적 풍토에서 살
아왔기 때문에 한이 많은 민족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의 모든 문학이라든
가 무슨 예술이라든가 이것이 한을 바탕으로 하는 그런 것으로 많이 발전
을 해왔습니다. 마음이 변해서 떠나 가는 사람에게 원망과 증오가 가득한
데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나라고 저주하면서도
그 이름을 다시 부르는 심정, 그것이 한입니다. 한이 맺혔다고 그랬습니
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흩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대답 없
는 이름이여" 그러면 안 부르면 되잖아요? 그런데 마지막에 뭐라고 합니
까? "내가 부르다 죽을 이름이여.." 그게 한이란 말입니다. 체념할 수도 없
고 원수 갚을 길도 없고… 그래서 우리 문화는 한풀이 문화가 발달한 겁니
다. 그래서 "한" 종교가 나왔잖아요? 죽은 사람의 원한을 풀어주는 굿을 하
므로 한풀이를 합니다. 무당들이 칼춤을 추잖아요? 왜 칼춤을 춥니까? 죽
은 사람의 원수를 갚아주는 뜻으로 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위해서 원수
를 갚아줄테니 이제는 한을 풀어라!" 그러며 칼춤을 대신 춥니다.

  그러면 기독교적인 한풀이가 무엇인가? 원한의 사건이 생기지 않도록 불
의한 재판관을 귀찮게 하는 일이라고, 정의의 하나님께 그것을 구하라고 오
늘 예수님이 그렇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와 비슷한 사건
이 소개되어 있는 것을 기억합니다. 출애굽 역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히브
리 민족이 원한이 생겼습니다. 사실 애굽의 발전은 요셉 때문에 되었습니
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가서 그 요셉의 후손들이 그 땅에서 무한한 노예의
고통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조상 현명한 요셉 때문에 이 나라가 이
렇게 되어졌는데…' 이렇게 한이 생겼단 말입니다. 얼마나 원한이 생겼느
냐? 히브리인 집에 아들이 나면 낳자마자 죽여버렸어요. 그 보다 더 큰 무
슨 원한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원한을 풀기 위해서 그 도시에 절대적인
힘을 소유한 자 재판관, 바로 왕 앞에 나가서 과부와 같은 신세의 힘없는
늙은 목동이 남루한 옷차림을 하고 지팡이 하나를 들고 왕을 귀찮게 굴기
시작합니다. 성경에 보시면, 재앙이 아홉 번까지 지나갈 때까지 바로 왕은
히브리 민족의 출애굽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힘이 없는 모세
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열 번째 재앙을 불러오므로 민족 해방, 즉 원
한이 풀어져 나가는 출애굽 역사가 시작되도록 불의한 재판관을 끝없이 괴
롭힙니다. 한 도시라든가 한 나라라든가 자유의 나라가 될 때까지는 얼마
나 많은 사람이 이 여인과 같이 투쟁을 해왔는지 우리는 역사에서 넉넉히
배웠습니다.

  언제가 신문에서 우리 한국 사회에서 군대 나가는 것 때문에 문제가 되
었는데, 거기 내용은 고위 공직자들의 자녀들은 23%가 군대 안나갔다 그런
발표를 한 것을 읽어본 일이 있습니다. 그러면 힘이 없는 집 사람은 또 거
기서 원한이 생깁니다. '나도 힘이 있었더라면 우리 아들을 일선 전방에서
그렇게 고생시키지 않는 것인데…' 이런 원한이 생긴단 말입니다. 우리 나
라가 좀더 힘이 강해서 남의 나라에 침략을 안당했더라면 좋았을 터인데 힘
이 없어서 이 여인과 같이 성폭행을 당하고도 아무 할 말이 없는 그래서 원
한만 생겼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 원한의 민족은 전부 다 원한을 푸는 방법
이 한풀이의 문화로, 노래를 불러도 시를 써도 민족의 원한을 배경으로 다
이루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님은 가셨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
은 가셨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
어서 차마 떨치고 가셨습니다… 님은 가셨으나 나는 보내지 아니하였나이
다. 조국은 떠났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조국은 갔습니다. 그러나 내
가 보내지 아니하였나이다." "울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꽃
은 꽃이로되 식민지 꽃이 되어버린 울 밑에 봉선화여! 네 모양이 처량하
다." 그랬습니다. 여러분이 의미를 알고 부르시는지 모르고 부르시는지 모
르지만 "나그네 설움"이라는 노래가 있죠? 노래방 가셔서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욱마다 눈물 고
였다." 왜 내가 조국에서 사는데 내 발걸음이 정처가 없어야 되느냐 말입니
다. 왜 발자국이 눈물이 고여야 되느냐 말입니다. 식민지 노래입니다. "선
창가 고동소리 옛 님이 그리워도" 그래, 우리가 왜 식민지 였어? 옛님이 그
리운 겁니다. "나그네 흐를 길은 한이 없어라." 백년설이 이 노래를 우리
나라를 배경으로 해서 1940년 2월에 처음으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 한 해
에 10만장의 음반이 팔려나갔습니다. 민족 원한의 노래로 나라를 빼앗긴 서
러움을 이 노래 하나를 부르면서 표현했습니다. "타관 땅 밟아서 돈지 10
년 넘어 반평생 사나이 가슴속에 한이 서린다" 만주 땅에 끌려갔던 교포들
이 제일 즐겨 부르던 노래는 "타향살이" 였습니다. 한풀이에요. 이거라도
안하면 무엇으로 우리가 우리의 한을 풀 것인가?

  이 힘없는 과부의 소원은 마지막에 어떻게 되었는가? 결국 불의를 꺾고
승리했다고 오늘 말씀에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의로운 기도
를 들어주시는데 절대권력의 소유자와 힘없는 여인 둘 중에 힘없는 여인 편
에서 일하신 것입니다. 그 여인이 가지고 있는 절대적 힘이 있는데 그것
은 "정의"라는 것입니다. "재판관은 불의했고 이 여인은 정의로웠기 때문
에 하나님은 정의로운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신다! 그러므로 기도하라!" 이
겁니다. 오늘 전체의 교훈은 예수님께서 기도 생활을 하라는 말씀에 초점
을 두셨는데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선한 기도는 낙심치 말고 계속 투
쟁하듯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힘이 없
는 미망인이 절대권력을 무너뜨리고 승리한 것과 똑같이 아무리 어려운 일
이라도 선한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기도 역사 성취를 아느
냐? 이렇게 하라!" 여기 7절에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
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막대
기 하나를 들고 민족 원한을 풀기 위해서 세계적 강대국 권력자 바로 왕 앞
에 나갔던 모세! 이에 대해서 출애굽기 3장 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
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가서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리
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통 중에서 그들이 당하고 있는 그 고난, 그
리고 드리는 기도는 내가 들었다."

  저는 시내산에 갔을 때 새벽 2시에 일어나서 3시간 동안 시내산에 열심
히 올라갔습니다. 새벽 6시에 시내산 최고 정상 바위 위에 서서 그때 떠오
르는 아침해를 바라보면서 Quiet time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목동의 지팡
이 하나로 대 애굽 제국의 힘을 꺾게 하신 하나님! 모세가 이 자리에서 430
년 처참한 노예 생활에 사무친 원한을 시원하게 하나님이 풀어주신 기도의
응답을 받았던 이 자리!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
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로다." "여호와는 상심한 자
를 고치시며 압박 당하는 자를 구원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 도
다."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땅같이 주를 사모하나이
다." "재난 중에라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구원이시오 환난 때 산성이시로다. 오른 팔로 나를 붙드시며 깊은 웅
덩이에서 건지시리로다." "그렇게 하라!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너의 원한을
풀어 주실 것이다." 그랬습니다. 그것을 오늘 말씀에 우리에게 가르치는 겁
니다.
  아시면 같이 불러요. 
  "인생길 험하고 마음 지쳐 살아갈 용기 없어질 때
  너 홀로 앉아서 울지만 말고 예수님 품으로 나오시오
  예수님은 나의 생명 믿음 소망 사랑되시니
  십자가 보혈 자비의 손길로 상처 입은 너를 고치시리"
  할렐루야,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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