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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낌없이 주는 사랑 / 요 10: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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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없이 주는 사랑 / 요한복음 10장 11-18


영국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면서 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영국의 성자로 알려진 죠셉 스크라이브는 신학교에 다니던 시절 해변에서 만난 여인를 사랑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처녀는 병에 걸려서 몸이 허약한 나머지 일찍 세상
을 떠나게 됩니다. 결혼도 하기 전에 사랑했던 사람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는 일로 말미암아
사랑한 사람을 잃었다는 마음의 상처를 달랠 길이 없어서 스크라이브는 방랑의 길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어디를 가도 그의 아픔을 잊을 수가 없었고 가슴의 상처는 지울 길이 없었
습니다. 그렇게 여행하던 어느 날 스크라이브는 교회 앞에서 다 헤어진 옷을 입고 몸에 상
처가 난 체로 구걸을 하고 있는 거지를 만나게 됩니다. 그 거지는 상처를 입었을 뿐만이 아
니라 기진한 상태로 자기를 향해서 겨우 움직일 수 있는 손을 들어서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
습니다. 그러나 스크라이브는 자기 가슴에 있는 첫 사랑을 잃은 아픔 때문에 그 거지의 호
소를 그만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그 마음 속에 주님의 음성이 그의 마
음속에 들려 왔습니다. "내가 너를 위해 피를 흘렸건만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주었느냐?
네가 그처럼 한 여인에게 주고 싶었던 그 사랑, 그 여인 한 사람에게 주고 싶었던 그 사랑
을 이제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 어떻겠느냐?"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스크라이브는 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돌아 갑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집 나간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던 어머니는 병들었습니다. 그 어머니에게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
서 그 마음 속에 떠오르는 시상을 기록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그 고통...병든 어
머니의 가여운 모습.... 나의 생애 동안 만나는 근심 걱정 모두를 주님게 맡겨 버리라는 격려
가 그로 하여금 주옥 같은 찬송가를 탄생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찬송가 487장입
니다.

사랑하는 중앙 가족 여러분, 지난 한 주간 동안 아니, 여기까지 지고 온 마음의 짐이 있다
면 그것이 육체의 짐이든 마음의 짐이든 오늘 다 주님 앞에 내려놓으시고 진정한 쉼을 누리
시는 방법을 우리 주님께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만이 우리를 자유케 하고 복음이 우
리의 진정한 안식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주님을 주님으로 아는 일이 선행
되어야합니다. 주님이 시셨던 짐은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은 결코 쉽거나 가벼운
길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 주님은...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니라...."고 말
씀하십니다.
제가 질문하나 드리겠습니다. "내가 지고 있는 짐이 무겁고 가볍다는 것은 무엇으로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저는 지난 주 한 주간 휴가로 보냈는데 다른데 가지 않고 집에 머물렀습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휴가란 반드시 가족들과 함께 집을 떠나서 어디를 가야 휴가를 지내는 것이고 가장의
임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꼭 그런 것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올해는 집 안에 머
물렀습니다. 제가 생각할 땐 그렇습니다. 여행이란 어디를 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누
구와 가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그림같은 스위스 융프라우를 가도 마음에 안 맞는 사람과 함
께 가면 고통스럽고 마음에 맞는 사람과 가가운 곳을 가도 그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해 보았
습니다.
제가 왜 이런 말을 합니까? 짐이 가볍느냐, 무겁느냐는 그 짐 자체의 무게가 아니라 그
짐을 지는 자세에 달렸다는 말입니다. 내가 져야 할 십자가가 무겁다고 여겨지십니까? 주
님의 마음을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이 짐은 내가 져야 할 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우리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지니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10장 11-18절의 내용에서 우리는 인생의 모든 상처와 질병 그리고 죄
문제 지고 있는 모든 짐을 안심하고 맡겨도 좋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가 있습니다. 우
리 주님은 자신을 "나는 선한 목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를 통해서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의 사랑을 다시 확인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은 과연 어떤 사랑일까요?

1. 자기 양을 알고 베푸신 사랑입니다.
성경은 양을 아는 목자가 선한 목자라고 말씀합니다. 자기 양이 누구인지를 알고 그 양의
아픔과 눈물을 알고 약점을 알고 앞으로 어떻게 될 것 인가도 알고 사랑하는 것이 선한 목
자되신 우리 주님의 사랑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은 바로 아버지 하
나님과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교통하시는, 운행하시는 그 인격적인 사랑에 기
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는 바로 그런 인격적인 사
랑으로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아는 그 사랑, 아들이 아버
지를 아는 그 사랑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믿음이란 무엇을 일으키는 능력이기 이전에 아
버지와 아들이라는 주님과 성도라는 관계성에 잇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과거도
아시고 현재도 아시고 미래도 알고 계시고 우리의 약점이나 허물도 아시면서 우리를 사랑하
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의 죄와 허물과 부족함을 아시고도 우리를 미워하지 않으십니
다! 멀리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우리를 부끄러워하지도 않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더 나가서
우리의 약점이나 얀약함을 담당하시고 깨끗하게 하셔서 자신의 거룩함을 닮아 가게 하시는
놀라운 사랑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인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이 주고 받는 사랑의 가장 큰 특징을 말하라고 한다면 조건적인 사랑 또는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그래서 항상 계산이 앞섭니다. 이익이 될까... 손해가 될까...를 먼저 생각합니다.
따라서 사람은 자기에게 이익이 될 것 같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덤벼들고 손해가
될 것 같으면 부모나 자식이라도 멀리하는 존재입니다. 이기적인 사랑이 인간의 사랑이요
차별하는 사랑이 사람들 사랑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우리를 향해서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손해 될 것을 아
시면서도 사랑하시는 사랑이 예수님이 우리를 향해서 베푸시는 사랑입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을 닮아 가시기 바랍니다.

2. 주님의 사랑은 자기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사랑입니다.
선한 목자되신 사랑의 가장 큰 특징은 자기 양을 알고 그 양을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버
는 사랑입니다. 선한 목자와 삯군 목자의 가장 큰 차이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선한 목
자라" 어떤 목자가 선한목자입니까? 양들을 돌보고 사랑을 베풀 뿐만 아니라 양들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버리는 목자가 선한 목자입니다.
얼마 전 교회가 어려운 일을 치르고 있을 때 어떤 성도님 한 분이 저를 찾아와 이런 이야
기 저런 이야기를 나누시다가 가셨습니다. 그리고 꽤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도 가슴속에 우
리는 한마디 말이 기억납니다. 아마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만한 말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
그 성도님의 신앙연륜과 체험과 말씀과 기도 속에서 함께 버무려져서 나온 일종의 믿음의
결정체라고 생각됩니다. 그 분이 입을 열였습니다. "목사님, 요즘 성도들은 목회자들을 존경
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성도들이 달라졌고 강팍해졌다는 것이요 윤리가 땅에 떨어졌다는 말
처럼 들렸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까 맞는 말 같기도 하고 목사로서 슬프기도 하고 스스로
조금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 말을 하려고 꺼낸 것이 아니라 정말 하고 싶은 말
은 그 다음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 요즘 목회자들은 목회에 생명을 안 겁니다!"
목사님, 요즘 성도들은 목회자를 별로 존경 안합니다" 이 말을 들을 때는 그래도 덤덤했습
니다. 그런데 두 번째 말 "요즘 목회자들은 목회에 생명을 안 겁니다!" 이 말을 듣고 나니
까 갑자기 제 몸이 더워지고 제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
러분! 우리도 얼마 안 있으면 새 목사님을 모시게 될 것입니다. 주님 닮아 가기를 힘쓰는
목사님 모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적인 조건이나 앞 세우고 잔꾀나 부리고 본질에서 떠나 있
는 목회자가 아니라 자기 양의 형편을 알고 양들의 아픔을 알고 양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선
한목자 같은 목회자를 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큰 교회라고 한다면 수단과
방법 안 가리고 오려고 하는 인간적인 욕심으로 가득 찬 목회자가 많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사랑!...주는 사랑!
예수 사랑! 어떤 사랑입니까? 자기 양의 형편과 처지를 알 뿐만이 아니라 들을 친히 나무에
달려 목숨을 내어 주사 양들의 생명을 구해 주신 아낌없이 주는 사랑, 거룩한 사랑입니다.

3. 주님의 사랑은 집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집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돌아왔을 때 행하셨던 아버지의 행동이 우리 인생들
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눅 17장에 나오는 돌아
온 탕자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아들이 아버지께 고백합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
께 죄를 얻었사오니 다시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 순간 제
가 보지는 못했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말문을 막으면서 "괜챦아! 괜챦아! 내가 다 안다...내가
다 알아..."그러면서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을 것입니다. 아들은 이런 아버지의
제츠쳐를 통해서 말로만 용서하는 것이 아닌 훨씬 더 강력한 아버지의 사랑을 느꼈을 것입
니다.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대목은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왔기 때문에 용서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는 이미 다 벌써 다 용서해 놓고 그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것입니
다. 그래서 아직도 상거가 먼데 다른 사람은 몰라보아도 그 아버지만은 금방 알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사랑이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과오나 허물이나 실수나 과거를 묻지 않으시는 사랑입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아버지는 그 아들이 새 출발을 할 수 있도록 아들의 신분을 회복하십
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십니다. 돼지 칠 때 입고 있었던 옷을 벗기고 준비해 놓은 좋은
옷을 입히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중앙 가족 여러분!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손에는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기워주셨습니
다. 그 반지는 언약을 상징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의 회복과 신분의 회복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루 하루를 살면서 지치고 피곤한 삶 때문에 처진 어깨와 힘없는 걸음으로 주
앞에 온 우리들이지만 우리가 그 분 앞에 우리의 존재를 맡기기만 한다면 메마르고 삭막한
우리의 심령을 어루만지시면서 속삭이실 것입니다. "넌 이제 사랑을 회복한 내 아들이다"
오늘 예배를 통해서 이 음성을 들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인이었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이 돌아온 탕자에게 일어났던 그 일과 똑같은 일
이 우리에게도 일어난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우리의 죄를 인정하며 하나님 앞에 나와 십자
가에서 자기 몸을 찢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는 그 순간 아버지는
죄의 옷을 벗기시고 새로운 의에 옷을 입혀 주십니다. 그리고 너는 영원한 나의 아들이라는
약속의 상징으로 반지를 끼워주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살찐 송아지를 잡고 이웃을 초청
해서 잔치를 엽니다. 이 넉넉하고 부족함이 없는 사랑이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님이 우리
를 향하신 사랑입니다.
마지막 남은 것까지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자기의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주시는 사랑으
로 세상을 이기시고 주님의 사랑이 저와 여러분들의 사랑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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