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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실패를 극복한 믿음 / 수 7: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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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를 극복한 믿음
여호수아 7:2-12

미국에서 가장 유명했던 저술가요 강연자로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고든 맥도날드 목사님이십니다. 헌신적인 남편이었고, 자녀들에게 있어서도 훌륭한 아버지이셨습니다. 이상적인 결혼 생활을 했던 목사님은 복음사역에 있어서도 행동파로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존경받을 만큼 귀한 삶을 살았던 분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고든 목사님이 외도를 하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깨달았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을 잃어버린 뒤였습니다. 사람들에게 불려 다니고 칭찬과 칭송을 듣는 동안 자신의 내면세계는 깨지고, 마음은 어느새 메말라 버렸다는 것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사기 꽃병이 단단한 바닥에 떨어져 깨져서는 회복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 두 개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영화 ‘불의 전차’의 한 장면입니다. 이것은 1920년 주인공인 에릭 리들의 실재 이야기를 다룬 영화입니다. 에릭 리들이 여러 선수들과 함께 열심히 달려갑니다. 선두를 차지하기 위해서 달려 나가는 순간 트랙 안쪽 잔디밭에 나가 떨어졌습니다. 영화는 멀어져 가는 다른 선수들을 바라보는 에릭 리들의 실망하고 좌절한 표정을 클로즈업시켜 줍니다. 그는 다시 일어나 달렸고 우승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또 한 장면은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여자 육상경기였습니다. 경주자들과 함께 1000m 를 달렸습니다. 전략상 중요한 지점에서 선수들이 박차고 달려 나가는 순간 한 선수가 트랙 안쪽으로 나가 떨어졌습니다. 카메라가 이 사람의 얼굴을 비춥니다. 그 얼굴에 고통과 실망, 낙심이 지나가고 그는 주저앉고 맙니다.

두 장면에서 목사님은 자기 자신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요즘 인생의 트랙에서 이와 같이 나가 떨어져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경기를 중단해 버리는 많은 사람들을 보고 있습니다. 현대그룹 고 정몽헌씨의 죽음은 지금이라도 인생의 트랙에서 내려와 당장 주저앉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의 죽음이 이토록 충격을 주는 이유는 현재 하루하루 겨우 살아가는 우리 삶의 마지막이 저와 같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일 것입니다.

고든 맥도날드 목사님이 떠올렸던 두 사람과 같이 트랙안쪽으로 튕겨져 나가 다시 일어설 것인가 주저앉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는 분들이 우리 가운데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호수아를 가만히 주목하여 보십시오. 그는 불가능한 일을 해냈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도 기대하지도 상상할 수도 없었던 전무후무한 승리를 이끌어 낸 사람이었습니다. 여리고를 무너뜨리고 점령했던 장본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승리의 환호성대신 울고 있습니다. 절망 앞에 있습니다. 여리고 보다도 훨씬 작은 아이성을 점령하는 가운데 큰 패배를 맛보고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정도로 백성들의 사기는 꺾였고 그 길에서 좌절하여 울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승리하면서 나가지 않으면 나아갈 길이 없습니다. 돌아갈 곳도 없습니다. 승리 외에는 길이 없는데 그 길에서 맛본 패배란 절망과도 같은 것입니다. 차라리 쓰러져 누워 있을 수만 있다 해도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왜입니까. 자신을 바라보고 기대하는 많은 사람들 때문입니다. 아니 그보다도 지금 이 자리에 주저앉기 위해 이제껏 그토록 열심히 살아오지는 않았기에 오늘 계속해서 내일을 향해 달려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호수아의 실패는 얼마 후 극복됩니다. 아이성을 다시 점령하고 그 승리를 통해서 새로운 미래가 열려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실망과 절망 패배의 순간에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다시 일어 설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일어설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여호수아의 승리가 오늘 우리 것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인생의 트랙에서 튕겨져 나와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하며 살아가는 분들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여호수아를 주목하십시오. 자기의 실패를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오늘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그는 자기의 실패를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7장 7절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붙여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편을 족하게 여겨 거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나이다"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슬프도소이다'라는 단어는 아주 절망적인 상황을 탄식적으로 이야기할 때 사용합니다. 아랍군대가 엘리사를 잡기 위해서 도단 성을 둘러쌌습니다.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아침 일찍 일어나 보니까 도무지 해결 방법이 없습니다. 이때 절망과 탄식과 두려움으로 엘리사에게 와서 '슬프도소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끝났습니다. 더 이상 우리 방법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힘을 벗어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탄식의 말입니다.

여러분 이 탄식을 했다면 여호수아가 얼마나 깊게 절망하고 있었겠습니까. 성경은 백성들의 간담이 다 녹았다고 설명합니다. 여호수아가 볼 때 여리고를 무너뜨린 사기와 군사력이라면 아이성은 간단히 싸울 수 있고 패배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나름대로 패배의 원인을 찾아보고 분석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장로들과 함께 옷을 찢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티끌을 뒤집어쓰고 저녁 늦게까지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여호수아가 왜 자신의 실패를 하나님 앞에 갖고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외에는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죽고 후계자로 지명 받았을 때 지금과 같은 두려움과 좌절을 겪었지만 그 때 자기를 찾아 주고, 용기를 주어 걷게 한 분은 하나님 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그는 다시금 신뢰하며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난 탕자. 우리가 생각할 때 탕자는 나가서 술 먹고 기생집 다니고 흥청망청 했을 것이라 상상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게만 살지는 않았습니다. 성경의 허랑방탕하다는 단어는 그런 의미로만 쓰이고 있지는 않습니다. 스스로 한번 잘 살아 보겠다고 애쓰고 힘쓰다가 그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점점 망하게 되었습니다. 부잣집 아들이 돼지가 먹는 열매를 먹으면서도 적응하고 다시 일어나보겠다고 몸부림쳤지만 역시 자기 인생을 조금도 바꿀 수 없었습니다. 그가 돌이켜 아버지 집에 돌아갔을 때에야 비로소 모든 것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 노력으로 되지 않았습니다.

사업을 하다 어려움을 겪고, 동분서주하며 이 사람 저 사람 사채 끌어다 부도를 막아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어렵고 곤궁할 때 애쓰고 몸부림치면서 그 일을 해결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또 어떤 경우는 어려움을 해결하려는 노력 자체가 더 큰 어려움을 만들어 내는 계기가 되지는 않았습니까. 근본적인 해결책이 없었지 않았습니까.

히스기야 왕은 자기가 선지자를 통해 병으로 죽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절망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슬픔과 아픔과 고통을 가지고 여호와의 벽 앞에 섰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섰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죽게 되었으니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나를 살려 주십시오.’ 자기 문제를 해결할 마음도 능력도 갖고 계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자기의 모든 것 다 내려놓았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예언하고 돌아가는 이사야를 돌이킨 히스기야는 생명을 15년이나 연장 받지 않았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는 곳이 어디 있습니까. 사람들이 왜 죽습니까. 해결할 곳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지 않습니까. 우리가 모든 것 다 내려놓고 하나님께 나갈 때 해결 방법이 있습니다. 거기만이 우리 살길이 있습니다. 세상의 허망한 것, 세상 노력과 열심은 진정으로 우리 해결책이 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 앞에 자기 문제, 실패와 낙심을 가지고 나갔던 것입니다.

제가 시카고 있었을 때에 미국 청년들과 청소년들을 위한 자마(JAMA)대회를 이끌던 김춘근 박사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분은 1976년도에 악성간경화 진단을 받게 됩니다. 그 때 이분은 단돈 200불 들고 미국으로 건너가 하루 3시간 자며 시체 치우는 일까지 하면서 공부할 때였습니다. 동양인 1세로 누구도 하지 못한 미국 정치학을 공부하고, 108:1이라는 경쟁률을 뚫고 페퍼다인 대학의 조교수가 되었습니다. 4년 만에 최우수 교수상도 받은 그의 앞길은 창창 대로가 뻗어있는 것만 같았고 그의 생활은 안정권에 들어갔을 때였습니다. 그 때 나이 37세였고 8살과 2살 된 딸과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무서운 질병 선언을 받습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의사는 1년 밖에는 살지 못 할 것이라 합니다. 점점 배가 불러오면서 호흡이 가빠집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절규했던 것이 ‘왜(why)?’입니다. 하나님 왜 하필 납니까(Why me)? 왜 하필 내가 이 병에 걸려야 됩니까. 수술도 하지 못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그는 포기했습니다. 아내와 LA에서 2시간 거리에 있는 빅 베어 마운틴으로 갔습니다. 온몸이 아프고 힘이 없습니다. 배는 불러서 숨쉬기조차 힘듭니다. 아내는 내려가게 하고 산에서 혼자 머물면서 하나님 앞에 호소합니다. 갑자기 그 마음속에 시편 118편 5절 말씀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라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밤바람은 찹니다. 외롭습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의 마지막 절규는 비참합니다. 처절한 6일을 보냈습니다. 어쩌면 곧 죽을지도 모르는 그 상황. 갑자기 입술 속에서 영어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고 합니다. '내가 내 피 속의 있는 독소 때문에 육체적으로 죽어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진정 내 영혼 속에 있는 독소 때문에 죽어가는 줄을 너는 모르는구나.' 순간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박사님은 신앙이 굉장히 좋은 분입니다. 교회를 잘 섬겼던 분이고 하나님을 사랑했던 분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했다고 생각했는데 이 말이 자신의 입을 통해 들린 순간 그동안 하나님께 나아갔던 모습이 허상이었고 위선이었고 거짓이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진실로 회개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죄인입니다.' 그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엎드렸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한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치료하겠다. 내가 치료하겠다.' 그는 확신을 가지고 아픈 몸을 이끌고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산에서 겪은 경험을 얘기하니까 주위 사람들이 다 미쳤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병원에 가지 않았습니다. 자연 요법을 하면서 기도로 치료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년 만에 완전히 나았습니다. 그 분이 알라스카 대학에 교수로 계시면서 미국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영적으로 각성시키는 일에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을 제가 직접 보았습니다. 지금은 미국 본토에서 사역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나갈 때만이 살길이 열립니다. 때론 추상적이라 생각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나가 믿고 맡기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현실을 만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내가 가진 절박한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갖고 나갈 때만이 해결되는 하나님의 방법이 있습니다. 이것이 여호수아가 실패를 극복했던 첫째 방법입니다.

둘째로 실패를 승리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실패의 원인을 찾아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문제에 실패하고 나면 분석합니다. 원인을 환경에서 찾기도 하고 자신의 정책에서 찾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다음을 준비하고 새로이 출발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했을 때 성공하셨습니까. 왜 성공하지 못했습니까. 일반적으로 다른 학자들에 따르면 자기 논리 속에 빠져 있기 때문에 원인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자기 논리로 문제의 답을 찾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주인께서 직접 지적해주시고 찾아 주시고 깨닫게 해주시기를 기다렸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다렸습니다. 여호수아가 기다리면서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엎드리고 자기의 원인을 찾게 해달라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원인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11절 말씀 '이스라엘이 죄를 범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겼나니 곧 그들이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둑질하고 시기하여 자기 기구 가운데 두었느니라.' 하나님의 지적이 재밌습니다. ‘아간’이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아간 한 사람이 죄를 지었는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죄를 범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공동체에 책임을 물으셨던 겁니다. 공동체가 이 사람의 범죄에 대해 미리 알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공동체에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여호수아에게도 책임을 묻는다는 겁니다. 공동체에 책임을 물었다는 것은 곧 이 공동체가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한 문제를 우리가 분석해보면서 좀더 다뤄보겠습니다. 주님께서 또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의 언약을 어겼다.’ 표면적으로 볼 때 아간이 도둑질 했다고 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문제 삼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나타난 현상일 뿐입니다. 현상 뒤에 어떤 영적인 문제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시는 겁니다.

여러분 여호수아가 실패한 이유 중에 하나는 정탐꾼들의 보고를 받고 자만했기 때문입니다. '여리고에 비하니까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다 갈 필요도 없습니다. 한 3천명만 가도 충분히 이깁니다.' 그래서 그는 확신했습니다. 큰 여리고를 무너뜨린 군사력과 사기라면 아이 성은 아무 것도 아니겠다 싶었습니다. 여호수아 6장 2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명성이 온 땅에 퍼지니라.' 인생의 절정기에서 승리의 감격이 넘치는 그 순간이 바로 실패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그는 몰랐던 것입니다.

아이성을 치러갈 때를 보면 여리고 성을 치러 올라갈 때와는 다릅니다. 그가 기도했다든지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든지 하는 성경의 말씀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자신들의 힘으로 승리할 수 있겠다는 자만심에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문제점에 도달할 때는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제 제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저를 구원해주십시오.' 매달립니다. 그러나 해결되고 나서 시간이 지나면 자기가 했다는 생각 저도 모르게 하게 됩니다. 여호수아가 바로 그와 같았습니다. 아이성을 볼 때 '여리고 성을 내가 무너뜨렸구나. 우리 백성들이 함께 이성을 무너뜨렸으니까 아이성은 아무 것도 아니다.' 어제의 승리가 오늘의 승리로 이어질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기본만 가지고 합니다. 거기서 여호수아는 실패했습니다.

어제의 축복으로 인해 오늘 자만심에 빠져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했다면 그것은 내 삶에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닙니다. 어제 승리와 번영이 오늘 저주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합니다. 여호수아 7장 1절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진노하실 때 하나님의 종인 여호수아가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승리에 취하여 있을 때는 영적으로 둔하여져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자기 욕망과 환경에 따라 행동하게 되어있습니다.

발람이라는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기만 하면 자기에게 주어질 물질과 부를 생각했기 때문에 정신없이 갑니다. 자기가 탄 나귀가 가지 않자 나귀를 발로 차면서 가자 하니 나귀가 입을 엽니다. ‘저기 하나님의 천사가 칼을 들고 서 있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사람이 욕망에 휩싸이면 짐승도 보는 너무도 확연한 하나님의 뜻도 분별하지 못합니다. 어두워집니다.

여호수아가 승리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두 가지 문제가 생기는데, 두려움과 자만심입니다. 동전의 양면 같은 것입니다. 자기보다 앞에 있는 적을 크게 보고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두려움이라면, 자기 앞에 있는 적을 작게 보면 자만심에 빠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삶은 두려움과 자만심 그 연속이었습니다. 자기보다 큰 백성을 만나면 두려움에 벌벌 떨었습니다. 그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자기보다 약한 백성을 보면 자만심에 빠졌습니다. 어제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했던 것을 생각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다는 자만심에 빠지게 되니 최선을 다하지 않습니다. 대강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와 함께 하나님 앞에 그들의 잘못을 고쳐 나갑니다. 하나님께서 아간이 훔친 것 가지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취할 영광, 하나님께 올려 드릴 것을 너희가 취했다고 주님 말씀하지 않습니까. 내 힘으로 가능하다 생각한 그 생각과 행동이 하나님 영광을 훔친 것이 된 것처럼 아간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올려 드릴 물건을 자기가 취한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오늘 우리 삶에 있어서 실패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마땅히 올려 드릴 영광을 돌려 드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본적으로 주신 물질과 지식, 건강가지고도 할 수 있다고 하는 그 자만심에서부터 인생은 실패하지 않습니까. 거기서 우리는 최선을 다하지 않고 정성과 성의 없이 하는 우리 마음이 실패의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요.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속한 싸움이 아닙니다. 무서운 영적 전쟁입니다. 베드로는 우는 사자와 같이 사단이 믿는 자들을 넘어뜨리고 공격하고 있다고 경고합니다. 우리 자만심이 아이성을 돕고 있는 사단의 군대를 보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다시 주님의 약속을 붙들고 나갈 때 분명한 기준이 생겼습니다. 하나님 언약을 따를 때 얻는 형통함에 대한 신뢰였습니다. 이후로 여호수아는 패배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전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인도해주시고 승리하게 하셨는데, 내 스스로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생각하고 행해서 실패하진 않았습니까. 이제 다시 약속의 말씀에 의지해서 작은 일도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주님을 인정하며 말씀 따라 나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어제 승리를 위해서 최선을 다한 것처럼 오늘 내가 쉽게 할 수 있는 그 일도 하나님 앞에 있는 것과 같이 해 나가시지 않겠습니까.

오늘 패배와 절망을 통해서 지금까지 내 삶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그리고 내 힘이 아닌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다는 사실을 고백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고통은 더 크고 놀라운 승리를 위한 기초가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진심으로 하나님 의지할 때 이제 우리는 패망과 절망의 자리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하나님 음성 듣기 위해 나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 보좌 앞으로 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셋째로 여호수아가 실패를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는 하나님을 다시 발견했습니다.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패배를 통해서 오늘의 삶 속에서도 변함없이 붙드시고 포기하지 아니하시며 끝까지 인도하시는 신실하신 모습을 다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며 그 언약을 지키시는가를 아이성 전투를 통해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과거의 실패는 귀중한 교훈을 줍니다. 실패가 비굴한 요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일을 하는데 위축되게 해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놀라운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실패가 내 삶에 진심으로 유익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지속적이고도 변함없이 누리는 통로가 되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아가면서 얻게 되는 가장 큰 교훈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시편119편 71절 시편 기자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백합니다. 아이성에서 패배할 때까지 여호수아는 패배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에 첫 번째 패배, 날마다 승리하던 중에 겪은 패배였기 때문에 여호수아의 가슴에 아픈 상처로 남았습니다. 그런데 아픈 상처 속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약을 새겨 주셨습니다. 실패를 통해서 좌절케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실패 속에 하나님의 언약, 변치 않는 약속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가 가장 어렵고 힘든 그 순간 하나님께서 그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담대하게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너에게 정한 율법을 다 지키게 하고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딜 가든지 형통하리니 네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게 하지 말고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며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리라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고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이 약속을 따라서 자신과 백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다시 만났습니다. 여호수아는 깨달았습니다. 자기를 오늘도 지키시는 하나님을.

평소에 잘 살았습니다. 괜찮게 살았습니다. 그것이 자기 힘으로 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패배 앞에서 평범한 삶 위에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이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실패와 고난 앞에 내팽개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붙드시는 놀라운 사랑을 다시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병들게 만들었던 아간의 죄를 철저하게 제거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 전쟁을 다시 치르게 됩니다. 여리고를 점령했을 때 질렀던 승리의 환호 대신 아이성을 점령한 후에는 에발산에 가서 제단을 쌓습니다. ‘맞습니다. 하나님 평탄했던 나의 삶, 하나님의 언약과 은총 가운데 살아가던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우리의 실패 가운데도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이끌어 주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주님 영광 받으십시오.' 그리고 백성들로 모세의 율법을 다시 읽게 했습니다. 들려주었습니다. 언약의 하나님, 험한 인생 광야 길을 걸어갈 때 언약의 하나님을 붙들 수만 있다면 우리는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걸어갈 수 있노라고 그 백성들에게 가르쳤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다시 만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얻을 교훈이 무엇입니까. 여호수아가 얻은 교훈이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도 하나님을 만나야 됩니다. 평탄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자랑하는 분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하셔야 합니다. 알고 보면 우리가 잘난 것 아무 것도 없습니다. 스스로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신경줄 하나만 끊어도 사지를 못 쓰는 실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우리 행실과 정성을 내세우지 마시고 하나님의 은혜인줄 알고 영광 돌려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무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사명입니다. 고난과 어려움 중에 있습니다. 우리가 범죄해도 주님은 우리를 싫어 버리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붙드십니다. 놓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 언약을 오늘도 신실하게 행하십니다. 우리가 실패할 때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낙심할 때 희망을 주십니다. 새 생명을 주십니다. 그 약속을 다시 붙드십시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습니다.

인생의 트랙에서 튕겨져 나와 잔디 안쪽에 쓰러져 있는 분들 있습니까. 다시 시작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나에게 있습니까, 환경에 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 있습니다. 다시 출발하십시오.

'내 고초와 재난 곧 숙과 담적을 기억하소서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중심에 회상한 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내 심령이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애가 3:19-24)‘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애가 3:32-33)'

우리 주님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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