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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판단과 고집을 버립시다 / 롬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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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로마서 2:1-5 
제목:판단과 고집을 버립시다.

  적어도 세상에서 성공적으로 산 사람들을 보면 나름대로 자기 삶에 철학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첫째, 나는 JOY의 삶이 되어야 하겠다. 즉, 기쁘게 살자는 것입니다. 기쁘게 살려고 하면 영어의 JOY 즉 J=Jesus first, O=others second, Y=you third라는 것입니다.

우선 순위가 분명해야 기쁘다는 것입니다. 나보다 항상 하나님, 그리고 다음에는 여보 당신을 위하여, 그리고 나는 제일 나중에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왜 문제가 생깁니까? 나를 먼저 생각하며 살고, 나에게 조금 불편하면 상당히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 이기주의가 문제의 씨앗이라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둘째, Happy home입니다.
행복을 가치관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행복해야 합니다. 삶이 행복해야 합니다. 가정이 행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행복해야 합니다. 같은 시간을 살면서 무엇 때문에 불행하게 살아야 합니까? 이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셋째, 투명하게 살겠다는 다짐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면 투명하게 살 수 있습니다. 때와 장소, 생각, 모두가 깨끗하게 살겠다는 사람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넷째, 기쁨과 행복의 전도사가 되겠다는 철학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복음은 기쁨의 소식입니다. 삶에 복음이 있습니다. 복음도 전하면서 좋은 말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좋은 말만 해야 합니다. 남의 이야기는 될 수 있는 대로 하지 않아야 하고, 한다면 좋은 것만 말해야 합니다.

어느 은혜 많은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어떤 분이 권사님에 대하여 이런저런 말을 하는 것을 제가 들었습니다. 라고 말하니까, 그때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그분이 왜 그랬을까? 왜 그런 말이 들리는 건가?’ 할 뿐 다른 말은 하지 않더랍니다. 남의 말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남의 비판에 대하여 자유로워야 합니다. 한 말을 들으면 흥분하고 저주하는 말을 하게 되면, 영적으로 손해를 보게 됩니다. 모든 문제의 초점은 자기 자신에게 돌려 볼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로마서 2:1-5절을 보면, 1장에서는 주로 이방인들의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죄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범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렇다면 유대인은 어떻다고 하였습니다. 이들도 역시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1장에서는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 범하는 죄를 지적하였다면 2장은 예수 믿는 다는 사람들이 범하는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죄는,

첫째, 판단하는 것입니다.(1절)

첫 마디가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라고 하였습니다. 요즈음 세상을 보세요. 서로가 판단하기에 바쁩니다. 국민들이 불안합니다. 조상이 무엇을 했느냐? 로 부터 시작하여 하나 하나 사사건건 비판하기에 온 정력과 힘을 다 쏟고 있습니다. 이건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치사하게 보여집니다. 치사한 것 몇 가지를 봅니다. 먹는 것 때문에 싸우는 사람입니다. 있는 대로 먹고 주는 대로 먹으면 되는 것이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습니까? 치사한 일입니다. 지나간 과거를 들추어내는 사람입니다. 작은 약점이라도 자기에게 발견되었으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사람이 치사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이라는 사람들은 한 마디로 판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판단한다는 말은 비판한다. 혹은 유죄 판결한다 라는 뜻입니다.
왜 판단하게 되나요? 상대방이 판단 받을 만큼 잘못해서 그렇다고 할 것입니다. 그것만은 아닙니다. 의인의식이 자기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의로운데 너는 악하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판단하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 잘 믿는다는 사람들이 범할 수 있는 죄인 것입니다.

우리가 왜 판단하는 죄를 범하게 되나요?

1. 의인의식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목사님이 설교합니다. 그 설교는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합니까? 자기와는 관계없다고 생각합니다. 회개하라고 하였습니다. 자기와는 관계가 없는 것 같이 듣습니다. 심판에 대하여 설교합니다. 놀라지 않습니다. 자기는 의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안전 불감증에 걸려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향하여 이렇게 말해 줍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사 6:9) 설교한 이후에 목사님에게 인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오늘 참 은혜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우리 집 며느리가 들었으면 좋았을 것인데 오늘 오지 못한 것이 섭섭합니다. 다음에 또 한 번 해주세요. 부부생활의 가정에 대한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 주일에 어느 가정 부부간에 싸움이 생겼답니다. 남편이 하는 말 “여보, 지난주일 목사님 설교 듣지 못했소.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 당신은 왜 그렇게 불순종하는 거요.” 그때, 아내 하는 말 “당신이야말로 목사님의 설교를 못 들었어요.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 그런데 나를 왜 괴롭게 하는 거예요.” 목사님이 설교할 때 시험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가 자신에게 비추어 보라는 말입니다. 나는 옳은데 네가 틀렸다 라는 생각을 하기에 판단을 하게 됩니다.


2. 사랑하지 아니할 때에 판단이 생깁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가리운다” 고 하였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밉게 보입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사랑하지 않으면 흉을 보는데 발꿈치가 계란 같다고 한답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이것은 칭찬 같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비난이 될 수도 있고 칭찬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저녁시간에 고급 음식점이나 혹은 춤추는 곳에 가보게 되면 불이 밝지 않습니다. 어느 분이 음식점에 불이 어두운 것을 보고 물었답니다. 왜 이렇게 어둡습니까? 그때 주인이 웃으면서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무드를 살리려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는 아무리 어두워도 음식이 자기 입으로 가는 거지 귀로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요, 다음은 어두운 촛불 밑에서 보아야 추남도 추남으로 보이지 않고, 서로가 미인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더랍니다. 밝은 데서 보면 서로가 못 보게 되기에 미남으로 미인으로 보게 된다는 것이라는 것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다른 사람을 볼 때 사랑으로 보면 다 좋게 보이지만 사랑이 없어 보세요. 그럴 수가 있느냐? 심하게 말하면 그런 나쁜 사람이 어디 있느냐 라고 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희생이다, 책임을 지는 것이다, 사랑은 관심이다 등 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랑은 자랑하고 칭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결혼 주례 할 때에 사랑하라, 뜨겁게 사랑하고 살아야 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 사랑이라는 것이 칭찬해 주는 것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칭찬의 반대는 비난, 비판하는 것입니다. 칭찬하지 못하니까 판단하게 됩니다. 주변의 사람들을 칭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린 시절에는 칭찬 듣고 싶어서 나서기도 한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칭찬하려는 이들은 몇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1) 어떠한 경우라도 비난하듯 칭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 잘했구먼. 그래 이 말보다 당신 너무나 잘한 거야. 푸짐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칭찬은 귀로 먹는 보약이라고 하였습니다.

(2) 좋은 칭찬은 때와 장소의 문제를 소중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칭찬이란, 상대방의 행동이나 모습을 본대로, 느낀 대로 좋은 것을 좋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상대방도 모르고 남이 말해 주지 않은 것을 찾아 말해 주는 것이 칭찬입니다.

(3) 칭찬에도 독소가 있습니다.
잘못하면 사람은 버린다 잘하네 라고 하면 정서와 형편에 맞아야 합니다. 바른 칭찬은 그 사람을 성장하게 하고 새롭게 힘을 주어 땀 흘려 일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됩니다.

(4) 칭찬은 적은 것부터 해야 합니다.
적은 일 하나 잘해도 칭찬하라는 것입니다.

(5) 칭찬은 공개적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칭찬 듣고 화내는 사람 기분 나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칭찬은 사랑입니다. 비판은 상대방을 무시하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상대방을 우습게 보기에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상대방을 통하여 무시당하였다고 느낄 때에는 역시 비판을 하게 됩니다. 이것을 보면 유대인들이 얼마나 잘난 체 하였나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면 판단하지 아니 합니다.


3. 오해로 인하여 비판하게 됩니다.

이것을 무지라고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비판 할 때에 그 사람이나 그 문제에 대하여 분명히 알고 있다고 한 것이 사실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자기 감정이나 편견을 갖고 말하다 보면 전혀 그렇지 아니한데 그런 것같이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남을 비판 할 때에는 분명한 근거와 비판의 목적을 제시해야 합니다. 비판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다면 이것은 대단히 잘못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분노만 살뿐 일 것입니다.


4.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해서 비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잘못된 습관을 가진 것입니다. 말은 쉽습니다. 그렇게 힘들이지 않고서도 나옵니다. 예를 들면 “진실하라.” 넉자이며, 시간으로는 1초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어느 교수의 글을 보면 그렇게 시원스럽게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분의 칼럼을 읽어보면 마음이 확 트이는 것 같습니다. 그분이 국회의원이 되고 정치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옛날에 그분의 글같이 하지 못하더라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충성, 봉사하라 얼마나 좋은 말이며 간단합니까? 남들 비판 잘하는 사람들은 대개가 열등의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약점이 많기에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자기의 의를 내세우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입만 열면 비판하게 됩니다.

여러분도 남의 비판을 받은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비판은 잘못해서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때로는 너무 잘하기 때문에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해로 인하여 받을 수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다만 몇 가지는 기억해야 합니다. 먼저 비판 할 때에 자기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라도 완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름대로 시어머니를 잘 섬긴다고 섬겼는데 나를 비판하였습니다. 그런 때에 아직도 나 자신이 부족한 데가 있었구나. 이것을 찾아내야 합니다. 소리를 지르고 흥분하고 부정하려고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음은 자기 자신도 상대방의 약점을 들추어내고 말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맞불 작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피차간에 초라해집니다. 그리고 그래 맞아 나는 그런 인간이야. 이제 알았어 난별 수 없는 사람이야. 그래 그런 말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 인정하고 잘못을 고백해야 합니다. 사실이 아닌데 비판하거든 기다려야 합니다. 이후에 모든 것이 분명하게 알려질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다릴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비판을 싫어하는 자에게는 미래가 없다. 그리고 비판만 하는 자 또한 미래가 없다” 는 말입니다.
왜 남을 비판하게 됩니까?


5. 교만해서 그럽니다.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돌아볼 수 있는 눈이 열리고 나서 하나님께 중심으로 회개하였다면 남을 판단할 용기가 나지 아니할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이 누구를 감히 판단한다는 말입니까? 나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무슨 자격이 있기에 남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남을 판단하였다는 것이 아닙니다. 육과 원칙에 의하여 비판하였다면 자신은 그런 판단 받을 일을 하지 않아야 하는데, 판단하고도 자기 자신이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범하는 죄였습니다. 남을 내가 마음대로 판단하면 그 사람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리고 결과는 자신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판단하신다는 말은 심판하신다는 말입니다.

둘째, 그릇된 고집으로 회개하지 않는 죄입니다.

사람이 자기 주장이 있고 의지가 있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변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무시하고 자기 의견만을 고집하는 것은 편협한 마음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특별히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합당하지 않은 데도 계속 자기 주장을 하는 것은 고집입니다. 이따금 우기면서 득을 얻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 앞에서 하는 말이고, 하나님 앞에서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결과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어느 정도 고집을 갖고 회개하지 아니 하였다고 하였습니까?

1. 하나님의 인자하심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가진 것입니다.

지극한 사랑 극진한 친절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인자하심은 요한복음 8:1-11절에 나타난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돌로 쳐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돌을 들고 온 사람들을 다 보내놓고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 하던 자들이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인자함입니다. 만일 예수께서 그 여인을 보고 “여보시오 무슨 꼴이요, 백주에 그런 짓을 하면 어떻게 되는 거요.” 그런 설명이라도 하셨더라면 이 여자는 자살하였을지 모릅니다. 무조건 나도 너를 정죄 하지 아니한다가 아니라 사랑 받을 때 고집을 버려야 합니다. 사랑 받는다고 방종 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입니다.

2. 용납하심에도 회개하지 아니 하였습니다.

용납이란, 받아들이는 것이요, 기회를 주었다는 말입니다. 흔히 내가 누구와 관계가 잘못되어서 사과하고 싶은데 기회가 주어지지 아니하여 못 하는 분이 있습니다. 만나주질 않습니다. 말해도 듣지 않습니다. 이건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 할 때마다 즉석에서 벌을 내리신다면 살아 남을 자 몇이나 있겠습니까? 사랑으로 용납하셨다가 기회를 다시 주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기회를 붙잡은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위기를 호기로 알고 붙잡은 사람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1930년대 경제공황으로 가장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부도를 막지 못해 자살하는 기업인들이 연쇄적으로 발생하고 학교와 은행들이 문을 닫았습니다. 그때 한 기업인이 뉴욕 맨하탄에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을 짓겠다. 시련을 만나 한숨짓는 사람에게 어떤 희망도 없다. 그는 실업인들을 모아 아무도 상상하지도 못하는 102층 건물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경제인들은 모두가 그를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아마 곧 망할 것이라고 비웃었습니다. 그는 묵묵히 공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라스코라는 인물이며, 지금까지 맨하탄의 명물인 엠파이어 스테이트 건물을 지은 사람입니다. 위기에서도 기회를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회개할 기회를 주셨으면 고집 부리지 말고 해야 합니다. 그것이 나에게 어떤 어려움일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생각하지 못하였던 풍성함일 수도 있습니다. 그 기회를 잊지 말고, 회개해야 합니다.


3. 길이 참으심에도 회개하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고집입니다. 이 모든 말씀은 한 마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사랑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기다리십니다. 지금도 기다리시는 중입니다. 그런데도 고집이십니까? 돌아와야 삽니다.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고집부리다가 해를 입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하려는 시기가 겨울이었습니다. 예년보다 몹시 추울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충고를 해주었습니다. 철새가 다른 때보다 빨리 날아갔고, 여러 가지 경험과 과학적인 예를 들어 전문가들은 러시아 원정을 연기할 것을 나폴레옹에게 충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웃어 넘기고 말았으며, 심지어 힘없는 인간의 충고가 나에게 무슨 필요가 있는 일인가? 나는 한다면 할 수 있다 라고 하는 교만한 말을 하면서 고집을 내세워 결국은 대패하고 수많은 인명을 얼음 속에 쓰러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고집 피우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일은 동기와 시작이 중요합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범죄 하게 된 것은 바로 자기들만이 의롭다는 의인의식에서 남을 쉽게 판단하는 죄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판단하지 맙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에 내게 주어진 시간이 모자랍니다. 자기 자신도 지키지 못하면서 남을 판단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신도 망치고 판단 받게 하는 사람도 큰 해를 받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작은 나라 작은 독재자 돌푸스 수상의 어머니를 한 신문기자가 찾아갔습니다. 그녀는 키가 135센치의 단신이었는데 그녀는 한 마디 부정적인 말로 인하여 아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제 아들은 결코 야망을 가진 것이 아니었어요.” 그는 소년시절에 사제가 되는 것이 그의 꿈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위 사람들이 너같이 키가 작은 사람이 어떻게 사제가 되겠느냐? 라는 말을 들으면서 열등감을 갖고 결국은 독재자가 된 것입니다. 남을 판단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덮어주고 용납하는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고집 버리고 순리대로 하나님께 회개함으로 더욱 가까워지면서 더 큰사랑과 은총을 받으면서 자랑스러운 삶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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