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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의 놀라운 능력 (고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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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놀라운 능력
고린도전서 2장 1-5절/ 20030817/ 주일 낮 예배

< 하나님 안에 있는 삶의 가치 >

한 물건의 가치는 누구 손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농구공이 우리 손에 있으면 3만 원 짜리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마이클 조던 손에 있으면 4백 억의 가치가 있습니다. 야구공이 우리 손에 있으면 8천 원의 가치밖에 없지만 알렉스 로드리게스의 손에 들리면 3백 억의 가치가 있습니다. 골프 공도 타이거 우즈의 손에 있으면 몇백 억의 가치가 되고, 테니스 공도 피터 샘프라스의 손에 있으면 엄청난 가치를 만들어냅니다.

내 손에 있는 물맷돌은 장난감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다윗의 손에 있으면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무기가 됩니다. 오병이어가 내게 있으면 그것은 휘시버거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주님의 손에 있으면 수천 명을 먹일 수 있는 기적의 음식물이 됩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이 우리 손에 있으면 우리는 가치 없는 존재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의 손에 있으면 기적적인 존재가 됩니다. 성공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입니다. 행복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손 안에 잇는 것입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주님의 손 안입니다. 그 자리에서 이탈하면 삶의 균형을 잃어버리고 반드시 실패하게 됩니다.

지구가 있어야 할 자리는 태양계의 궤도입니다. 그 자리를 조금이라도 이탈하면 지구 안에 있는 모든 생명체는 죽게 됩니다. 그래서 지구는 철저히 순종을 합니다. 태양 주위로 수 천억 킬로미터를 돌지만 현재 과학으로 만들 수 있는 가장 정밀한 시계보다도 더 정확하게 매년 수천 억 분의 1초도 틀리지 않고 똑같은 시간 안에 똑같은 거리를 움직입니다. 그래야 지구 안에 생명이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하나님의 손 안입니다. 그 자리를 이탈하면 삶은 엉망이 됩니다. 가정도 엉망이 됩니다. 사업도 엉망이 됩니다. 인간관계도 엉망이 됩니다. 행복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꿈과 목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방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능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아무리 능력이 있는 사람도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끝장이 납니다. 그러나 아무리 능력이 없는 사람도 하나님 안에 있는 누구보다 가치 있는 존재이고, 그에게는 반드시 복된 인생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사실을 잘 교훈하고 있습니다.

< 아덴에서의 선교 실패 >

사도 바울은 정열적인 전도자였습니다. 어느 날 그가 2차 전도여행 중에 아덴 전도를 하게 되었습니다(행 17장). 철학의 도시 아테네에서 전도하면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믿기 전에 배웠던 철학적 사고에 믿음을 더해서 아테네 전도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테네 전도는 그리 신통치 않았습니다. 복음을 철학적으로 전도하니까 사람들이 별로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설교도 영 먹히지 않았습니다.

고작 반응이 있다는 것이 "어디 다음에도 한번 더 무슨 말 하나 들어볼까?"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실망이 되겠습니까?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에게 전도에 실패하고, 설교에 실패했다는 것은 어떤 실패보다 큰 수치심을 가져다주었을 것입니다. 사역에 회의도 들었고, 사역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삶에서 고난보다 더 무서운 것이 수치감입니다. 고난의 순간은 지나고 나면 바로 잊어버리지만 수치심은 수치스런 순간이 지나도 그 기억이 오래 남기 때문입니다.

저도 사도 바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설교하면서 어느 때는 "죽쒔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졸기만 하고, 별로 반응도 없고, 엉뚱한 데에 신경을 쓰고, 산만한 행동을 하고, "어디 무슨 말 하나 한번 들어볼까?" 하는 모습이 보이면 설교자로서 참 실망이 됩니다. 목회자들이 가장 목회를 포기하고 싶을 때는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가 아닙니다. 누가 뒤에서 욕하는 것을 들을 때도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이 먹히지 않을 때입니다. 그때에는 쥐구멍이라고 들어가고 싶고, 그날에는 유난히 더 피곤합니다.

아덴 전도에 실패한 사도 바울도 그런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곧 그 상황을 극복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죽은 자가 무슨 수치인가?" 하는 생각으로 그는 믿음으로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처절한 교훈을 다시 얻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 외에는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이런 자세가 바로 사도 바울의 성공 비결이었습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일을 잘 하고 싶은데 잘하지 못해서 수치심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성공할 수는 없습니다. 때로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실패 중에서도 특별히 수치감을 크게 주는 실패가 있습니다.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때 다시 십자가로 향하는 자세입니다. 그러면 실패는 반드시 성공의 어머니가 될 것입니다. 고난을 슬기롭게 이용하면 인생의 귀한 약이 됩니다.

오늘날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병도 없고, 실망할 일도 없고, 가정에 문제도 없고, 모든 기도가 다 응답된다." 지나친 선전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도 아프고, 병들고, 힘들고, 하나님이 외면한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위대한 전도자의 기도도 응답되지 않을 때가 많았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을 보면 사도 바울은 자기의 가시를 없애달라고 하나님께 세 번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기도에 응답하시지만 응답하시는 형태는 다릅니다. 때로는 "예스!"하고 응답하시고, 때로는 "노!"라고 응답하시고, 때로는 "기다리라!"고 하시고, 때로는 "더 좋은 것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너무 무서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난주 도일 세이저 목사님 말씀을 인터넷을 통해 보았습니다. 그 중에서 인상적인 말씀 하나가 있었습니다. 이기적인 사람과 인격적인 사람과 성숙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고난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고난을 피하라!(Avoid troubles)"고 하고, 인격적인 사람은 "고난을 참으라!(Endure troubles)"고 하지만, 성숙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고난을 즐기라!(Enjoy troubles!)"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인조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조인(enjoy)라는 말은 '조이(joy,기쁨)가 있게 하다'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고난 중에서 기쁨을 찾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제물로 드려질지라도 기뻐하고 기뻐하겠다(엡 2:17)"고 했습니다. 우리는 고난과 실패에 너무 낙심하지 말고 그 실패로 인한 수치감에 너무 매달리지 말아야 합니다.

1974년 캘리 사이먼이 부른 "Haven't got time for the pain(고통에 빠질 시간이 없습니다)"라고 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고통은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는 유일한 것이다. 나는 고통에 빠질 시간도 없고(I haven't got time for the pain), 고통에 빠질 여지도 없고(I haven't got room for the pain), 고통에 빠질 필요도 없다(I haven't got need for the pain)."

세상 유행가도 고통에 빠질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인생이 길지 않습니다. 고통을 가지고 고민하는 데에 너무 시간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비록 시험이 많고 힘들다고 해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항상 고통보다 크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고린도에서의 선교 성공 >

아덴을 떠난 후 사도 바울은 고린도 지역으로 옵니다. 고린도 지역에서는 그가 다짐한 대로 오직 십자가만 전했습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고린도 전도에서는 사도 바울은 화려한 웅변과 철학적인 아름다운 말로 전도하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2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는 오직 십자가만 알기로 작정하고 오직 십자가만 전했습니다. 바로 거기에서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거기에서 영혼이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십자가는 초라한 것이지만 "십자가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진리를 믿을 때 바로 거기에서 진짜 능력이 나옵니다.

자유주의 신학을 하는 분들의 말은 멋있습니다. 기독교의 독선을 질타합니다. "너무 기독교만 구원이 있다고 하지 말라!"고 합니다. 굉장히 포용력이 있는 사람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말은 듣기에는 좋은 말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독실함을 독선으로 모는 것이 더욱 잘못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결혼한 후에는 한 남편, 한 아내만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독선입니까?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하지만 깊은 관계로 들어갈 때에는 사랑의 대상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모습을 독선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겉멋은 있어 보여도 결코 그런 사상에 물들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런 겉멋은 사람에게 진정한 변화를 주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체험하고 이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아덴과 마찬가지로 헬라의 중심 도시인 고린도에서 그것이 통할까 그는 두려웠습니다. 철학적 논리를 가지고 화려하게 전하고 설득해도 안되는데 사람 죽이는 형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전하면 사람들이 조롱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에게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본문 3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고린도 사람들이 미쳤다고 하지 않을까? 무식하다고 하지 않을까? 그러나 결과는 달랐습니다. 고린도 전도는 대 성공이었고, 결국 신약 교회에서 가장 큰 교회가 고린도 지역에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 성공과 실패 사이에 있는 것 >

아덴에서의 실패와 고린도에서의 성공 사이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환경도 유사했고, 전하는 사람도 똑같았습니다. 유일한 한 가지 차이는 십자가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었습니다. 똑같은 인생이지만 성공과 실패 사이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십자가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에서 성공과 실패의 차이는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성공의 원천이요 능력의 원천입니다.

왜 십자가에는 그런 능력이 나타납니까? 본문 4-5절을 보십시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십자가를 전하면 성령님께서 임하시고, 십자가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기 때문입니다.

루터가 어떻게 종교개혁을 일으킬 수 있었습니까? 그에게는 힘도 없었고, 돈도 없었고, 자기편도 없었습니다. 그가 가진 것은 십자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 하나로 그는 종교개혁을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을 일으키기 전에 마르틴 루터는 철저한 구도자였습니다. 만약 수도사가 수도한 일로 천국에 간다면 그 일 순위는 마르틴 루터였습니다. 그는 여러 번 굶어죽기 직전까지 금식했습니다. 그렇게 수도하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충분할 정도로 굶었나? 내가 충분할 정도로 추웠나? 내가 충분할 정도로 가난했나? 내가 충분할 정도로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일을 했나?"

그러나 그런 구도자의 생활에서 그는 아무리 해도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릴 수 없었습니다. 결국 자기 힘으로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는 구원의 길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는 십자가를 붙듭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하나만 의지하고 루터는 거대한 힘과 싸워 종교개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십자가를 앞세우면 산과 같은 문제도 정복할 수 있지만 자기를 내세우면 작은 문제에도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 '자기'가 오늘날 각종 문제의 시발점입니다. 십자가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히틀러가 나치의 상징으로 사용한 꺾인 십자가(하켄크로이츠)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반대는 자기입니다. 십자가를 앞세우면 영혼이 살지만 자기를 앞세우면 영혼이 죽습니다.

미국의 어떤 부자가 어느 날 요트를 타다가 요트가 바람에 가라앉게 되었습니다. 그는 재빨리 무선으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해안 경비대에서 대답이 왔습니다. "우리가 가는 중입니다. 어느 위치에 있습니까?(We're on our way. What's your position?)" 그런데 그 사업가는 "어느 위치에 있느냐?"는 질문을 영어로는 똑같으니까 비즈니스 하면서 항상 기분 좋게 들었던 질문인 "어느 직위에 있느냐?"라고 듣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ATN 영업부 부사장으로 있습니다(I'm vice-president for sales department of ATN)." 그렇게 자신의 위치를 모르고 자기의 직위를 앞세우면 그는 멸망의 길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 기독교인 삶의 핵심은 십자가에 있습니다 >

병든 종교는 항상 "내가 얼마나 했느냐?"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건강한 믿음은 "내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느냐?"에 관심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삶의 핵심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자기를 죽이고 십자가의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만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십자가의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알게 할 것입니다.

기독교를 한 마디로 정의하라고 하면 십자가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유일한 문제 해결책은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요새 많은 교회가 어렵습니다. 교회부흥의 유일한 방법도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요새 자녀 문제로 고민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자녀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도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요새 행복의 파랑새를 좇는 분들이 많습니다. 행복도 바로 십자가에서 옵니다. 오직 십자가의 사랑만이 선한 변화, 선한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미국에 커티스(Kurtis)라고 하는 슈퍼마켓에서 짐을 나르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창고에서 물건 박스를 뜯고 있는데 4번 계산대에서 짐을 날라달라고 요청하는 소리가 인터폰을 통해 들렸습니다. 처음 듣는 소리였습니다. 커티스는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어서 자기가 자원해서 4번 계산대로 나갔습니다. 계산대로 가니까 새로운 여직원이 그에게 미소를 지었습니다. 커티스는 그녀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습니다. 언뜻 봐도 자기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가슴에 있는 뱃지에는 "브렌다(Brenda)"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다음 날, 커티스는 그녀에게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습니다. 브렌다는 커티스의 순수한 모습을 보고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집에 도착해서 그녀가 집으로 들어가기 바로 전에 그는 그녀에게 토요일 일과 후에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브렌다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가 이유를 묻자 그녀는 어렵게 말을 꺼내 자기의 처지를 설명했습니다. 자기에게는 두 명의 아이가 있는데, 베이비 시터를 고용할 형편이 되지 않아서 외출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커티스는 그녀가 두 아이의 엄마로 이혼한 여자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하나도 놀라지 않고 자기가 베이비 시터 비용을 내겠다고 했습니다. 마지못해서, 그녀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토요일 저녁이 되었습니다. 갑자기 브렌다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베이비 시터로 올 사람이 급한 일이 생겨 오지 못한다는 전화였습니다. 브렌다는 아쉬웠지만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곧 커티스가 그녀를 데리러 집에 왔습니다. 그녀는 베이티 시터가 오지 못하게 되어서 같이 나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때 커티스가 "차라리 잘 됐다. 아이들과 함께 나가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아이들은 우리와 같이 나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커티스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커티스를 집 안으로 들였습니다. 곧 귀여운 첫째 딸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첫째 딸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바로 그때 브렌다가 휠체어에 탄 둘째 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 둘째 아이는 다운 증후군으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아이였습니다. 브렌다가 아이들과 함께 나가지 못한다는 이유가 바로 그 아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커티스를 놀라게 하거나 실망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는 브렌다에게 "나는 아직도 왜 저 아이들이 우리와 함께 갈 수 없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브렌다는 깜짝 놀랬습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결혼에 실패해서 두 명의 아이가 있는 여자를 원하지 않고, 특히 둘 중의 아이 하나가 중증 장애인인 아이를 가진 여자라면 더욱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이의 아빠였던 첫째 남편도 그 문제로 자기를 버렸는데 커티스는 전혀 다른 남자였습니다.

그날 저녁, 커티스와 브렌다는 아이들을 차에 태웠습니다. 그리고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영화 구경도 했습니다. 특히 둘째 아들을 커티스는 지극한 사랑으로 돌보아주었습니다. 항상 그 옆에 있어주면서 대화도 해주었고, 화장실에도 같이 가주었습니다. 아이들도 커티스를 매우 좋아했습니다. 브렌다의 상처 입은 마음도 하나님께서 치유해 주셨습니다. 자기를 버린 남자로 인해 생긴 마음의 상처를 말끔하게 치유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남자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헤어질 무렵에 브렌다는 커티스에게 자기의 남은 일생을 맡겨도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일년 후에, 그들은 결혼했습니다. 커티스는 그녀의 두 아이를 입양했습니다. 그 이후에, 그들은 두 명의 자녀를 더 가졌습니다. 지금 커티스 워너 부부(Mr. and Mrs. Kurt Warner)는 세인트 루이스에 살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33살이지만 아직도 미식축구 세인트 루이스 램스(St Louis Rams) 팀의 쿼터백으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스포츠 행사인 미식축구 최종 결승전인 슈퍼볼(Superbowl)의 MVP를 2번이나 차지했고, 몇 가지 NFL(미국 미식 축구 리그)의 기록을 깨뜨렸습니다. 그는 현재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선수로 평가받고 있지만 무엇보다 그의 가장 위대한 성취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의 믿음과 십자가를 지는 헌신적인 사랑입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의 십자가의 사랑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서 저도 어제 세인트루이스 램스의 공식 사이트 오픈 포럼에 커티스 워너에 대한 격려의 글을 한편 올렸습니다. 그와 같은 사랑이 있기에 아무리 슬프고 힘든 사람에게도 이 세상은 살만한 세상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전파하고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 십자가의 사랑만이 우리에게 행복을 줍니다. 그 사랑 안에 치유도 있고, 문제 해결도 있고, 축복 받는 비결도 있습니다. 우리가 능력을 받아 모든 어려움을 믿음으로 극복하는 길도 바로 십자가 안에 있습니다. 항상 십자가의 사랑으로 무장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복된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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