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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경시(輕視)와 생명경외(敬畏) / 창 9:6, 마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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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경시(輕視)와 생명경외(敬畏)
                      창세기 9:6, 마태복음 16:26

오늘의 사회 풍조는 생명 경시가 사회에 만연되어 유행처럼 자살 소동이 일어나고 있다. 생명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확산되어 전쟁은 어린이들의 전자놀이방에서 스릴과 서스펜스로 일관된 어린이들의 장난과 같이 전쟁의 참상을 감상처럼 여기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며, 이라크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반전 반핵 평화운동 역시 생명운동에 주관된 일이라 생각한다. 재벌 그룹 총수에서부터 한 가정의 어린 자녀에게까지 죽음으로 몰아가는 사회적 현상을 "대한민국은 지금 자살 중" 또는 "자살 신드롬"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자살이 사회의 유행병이 되었다. 경찰청 통계에 의하면 하루 평균 36명이 우리나라에서 목숨을 끊으며, 이는 10여 년 전에 비해 거의 배나 늘어난 것이다. 인구 10만 명당 자살 사망자수 세계 5위 자살 증가율은 세계 최고를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세계 인류는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되살릴 수 있는 문화의 세기가 될 것이냐 하는 것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이 문제에 대하여 긍정적 사고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는 항상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식변화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기계 문명에 찌든 현대인들이 점차 생명 경외의 존엄성을 되찾으려 노력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금까지는 기계 문명의 발전에 비중을 둔 것으로서 상대적으로 인간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풍조를 촉진해 왔다. 과학의 대상을 대부분이 물질화 되어 버림으로서 생명 정신 속에 내재되어 있는 독자성마저 생명의 물질화라고 하는 추상적이고도 일반적인 개념 속에 매몰시켜 버렸다.

예를 들면 인간의 정신이라든가 그 정신이 관여하고 있는 생명체가 신용카드라든가 컴퓨터와 같은 것에 의하여 기호화되어 버린 지 오래이다. 그 결과 인간들의 전통적인 신념이나 관행 또는 풍습까지 변질시키고 파괴시켰다. 특히 과학의 인간 기호화는 인간을 기계화 또는 수단화시키므로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이나 이웃의 생명까지 수단화하는 풍조가 보편화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그런 현상이 기술 과학의 한계점임을 알게 된다.

혹자는 기계적 패러다임을 인간적 패러다임으로 변화시키려 한다 해서 과학이나 산업이 그 발전을 중지할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발전은 계속하되 그 속도가 둔화되거나 생명의 존엄성을 고취시키는데 기여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전환되어 갈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일면으로 연구되고 있는 것이 산업 발전에 의해 파괴되었던 자연 환경을 복원시키는데 과학을 응용하려는 시도가 진행되고 있으며 파괴된 자연 환경의 재앙으로부터 인간 생명을 보호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환경 과학의 발전을 부추기는 수밖에 없다. 최근까지도 과학의 힘이 생명을 다량으로 살상할 수 있는 무기를 만드는데 이용되어 왔으며 자연 환경을 심각히 훼손하는 악순환으로 해서 과학 발전이 인간 생활에 선인가 악인가 하는 논란을 재현시키고 있다. 그러나 과학을 선이나 악으로 구분 짓는 것처럼 모순된 일은 없다. 왜냐하면 과학에 대한 선악의 결과는 과학의 힘을 사용하는 단계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과학적 인식은 사물의 판단 기준과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지해야 할 것은 21세기의 문화는 지금까지 무시되었던 '생명성'이라고 하는 테마 속에서 장르를 개척해 갈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이다. 앞으로는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본질로 하는 지식과 문화의 경쟁으로 패턴이 바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경쟁이 수그러지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정보 유통에 있어서 얼마나 능동적이면서 신속한가 하는 경쟁이고, 문화의 경쟁에 있어서는 전통 문화에 대한 자긍심 축적과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 낼 능력의 경쟁이기 때문이다. 물질 문명과 정신 문명이 함께 발전을 꾀하면서 교회의 선교의 자세도 갖추어야 할 것이다. 오늘의 현대 교회의 특성은 인간 영혼에 대한 존재 가치를 인식시켜 주는데 있다. 실체가 규명되지 않은 생명 정신을 보호하고 그 가치에 대한 존엄성을 인식시켜 주는 생명 신앙인 것이다. 생명 신앙을 선교하고 새로운 정신 문명을 발전시켜 생명경외 신앙을 가져야 한다. 오늘의 과학이 진행하고 있는 대로 생명의 신비를 모두 벗겨 인간의 수명을 무한히 늘려 놓거나 우주의 신비를 벗겨 놓는다면 과연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이러한 상상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주의 질서가 완전히 깨져 이 지구는 종말을 고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처럼 위험하고 경계스러운 일은 없다. 그러므로 교회의 역할은 이런 사태를 막는 일이 시급하다. 가공할 전쟁 무기의 개발을 막고 공해 요인을 줄이려 노력하여야 한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나님의 것이다. 내가 생명의 주인이 아니고 하나님이 생명의 주인이다. 내가 내 생명의 주인이라면 내 생명을 내 마음대로 끊어 버리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러나 생명은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기에 생명의 시작과 끝은 하나님 고유의 특권이다. 남의 물건을 훔치는 행위를 도적질로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소유를 훔치는 행위는 도적질로 생각하지 않는 의식이 문제이다. 비록 자신의 생명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생명 강탈은 실로 가공할 만한 죄악이다. 자살을 하나님의 소유물인 "생명 강탈" 행위로 생각해 보았는가? 이 믿음을 가지면 어찌 자살을 시도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도 고귀한 생명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고이 간직해야 할 터인데 권력보다 못한 것으로 민주화나 통일이나 좋은 근로 조건보다 못한 것으로 우리는 인식하고 있다.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은 남의 생명만이 아니라 내 생명에도 관계된 명령이다. 남의 생명을 끊으면 내 생명도 끊겨야 하는 것이 구약의 법이다. 남의 생명을 끊는 것이 생명으로 갚아야 할 중죄라면 내 생명을 끊는 것도 역시 내 생명이 두 개라면 나머지 하나로 갚아야 할 중죄이다. 생명 중시 사상은 비단 현세의 생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사후에 심판이 있고 심판 후 "불못"에서의 영생과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영생이 있다. "죽으면 끝이다"는 사고 방식은 사후의 생명을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데서 연유한다. 현세의 생명과 내세의 생명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 내 마음대로 할 수 없고 내가 내 마음대로 끊을 때는 생명이 고귀한 만큼 막중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천하보다 값진 생명을 주인의 뜻대로 바로 사용하도록 신앙 교육을 시켜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게 된다.

기독교는 생명 경시 풍조가 일어나고 있는 오늘의 사회에 생명 경외의 풍토를 심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것은 가장 시급히 논의되어야 할 과제이다. 인공 유산을 하고 초음파 탐지기로 태아를 검진하고 핵무기로 위협받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자살의 차원을 넘어 생명 경외의 길을 찾아야 한다. 여기에 근본적인 몇 가지 이해를 가져야 한다.
첫째로 전체성의 원칙에서 전체가 살기 위해 부분은 죽어도 괜찮다는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 이것은 다수가 살기 위하여 작은 부분은 소홀히 해도 된다는 논리와도 통할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데, 생명에 관한 한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생명은 키가 크거나 작거나 IQ가 높거나 낮거나에 상관하지 않는다. 생명은 그 자체로 경외되어야 한다.

둘째로 더 적은 악을 선택하는 원칙에서 부모와 자식 사회의 가치 어른과 아이로 비교되어 생명 경시와 연결될 수 있지만 생명과 같은 것에는 적용시킬 수 없는 것이 원칙이다. 확실히 더 적은 악이란 양적인 것이나 물질적인 것에 관계된 것이지 생명과 같은 질적인 것이나 도덕적인 영역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다. 즉 아무리 더 적은 악을 선택한다 하더라도 생명에 관계되는 한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로 이중 효과의 원칙으로서 어머니와 아이의 생명 가운데 어머니의 생명은 선택하고 어린아이의 생명을 버리게 되는 예 같은 것과 연결시킬 수 있겠지만, 이 원칙도 생명을 경시하는데 오용 될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는 생명의 신성성과 존엄성을 확신하고 그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차관하고 있음을 인식하여 생명의 청지기로서 바르게 사용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이 자기만을 위해서 지속되거나 쓰여져서는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하신 대로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도 있어야 한다. 즉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썩을 수 있어야하고 그것을 영생하도록 보존하여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목숨은 친구를 위해 버리더라도 영생을 얻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명심하고 그의 의를 구하는 일에만 생명이 쓰여지게 해야 할 것이다.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생명은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부여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은 사고 팔 수 있는 물건과 다르며 자기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도 못 된다. 우리는 생명을 통해 무엇보다 먼저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하나님은 생명을 스스로 창조하시고 사람에게 차관해 주시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사람에게 생명을 빌려주시고 당신이 기뻐  하시는 목적을 위해 사용하도록 하시었다.

"차관"이라고 해서 빌린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경우는 무상으로 증여하는 형식으로 차관 되었으면 반드시 창조주의 뜻에 따라 사용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생명을 가진 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사용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함께 살고 있다. 생명은 이렇게 함께 살 수 밖에 없도록 부여받은 것으로써 협력하고 나누고 돌보도록 되어 있다. 어린아이는 부모 도움을 받고 부모는 자녀의 도움을 받으며 이웃과 이웃이 서로 나누는 삶을 살도록 요구받고 여기서 생명의 공거성(共居性)이 나타나며 동시에 타자성(他者性)이 제시된다.

가령 태아는 부모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하면서도 부모와 함께 성장하며 살아가고 있다. 동시에 그 태아는 부모에게서 받는 보호에 대해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 또 태아는 출생하고 성장하며 장성하여 부모와 함께 살며 부모 뜻만 아니라 남을 돕는 일에도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결코 생명은 스스로 단절되도록 쉽게 허용되지는 않는다. 생명을 단절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귀한 생명을 살릴 절실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가볍게 버릴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생명 경시 풍조에서 자살이라고 하는 오늘의 사회를 보면서 기독교윤리는 말한다.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는 어떤 특별한 상황 하에서는 인간은 자기의 생명을 아낌없이 버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특별한 상황이란 자기 희생을 요구하는 경우들이다. 예를 들어 군복무 중에 자기의 소임을 수행하는 일이나, 부당한 공격을 당하는 친구를 보호하는 일이나, 전염병 환자들을 돌보는 일이나, 박해 시에 자기의 신앙을 증거 하는 일 등이다. 이런 종류의 모든 실례에 있어서 관계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죽음을 전적으로 또는 직접적으로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사랑 정의 자비 또는 동정의 어떤 행위를 함에 있어서 피할 수 없는 결과로써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 있다. 그리고 그는 이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불렀다고 그렇게 믿는다.

그러나 만일 어떤 이기적인 동기로 인하여 자신의 생명을 직접적이고 계획적으로 탈취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기독교윤리 이해와는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해 둔다. 생명은 하나님과 그 이웃을 위한 봉사에 사용하도록 하나님에 의해서 나에게 위임된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내 생명을 얼마나 오랫동안 살게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 자신의 일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 둔다. 그런 까닭에 직접적이든 고의적이든 간에 자신의 생명을 파괴하는 일이나 자살하는 일은 창조주 그리고 구속자인 하나님께 대한 죄이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거부이며, 그의 주권에 대한 부정이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나누기 위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 자신에 대한 특유한 사랑에의 범죄 제6계명의 위반, 회개를 방해하는 절망의 행위이고, 그리고 가족이나 사회로부터 한 구성원을 조속히 빼앗고 그들의 필요에 도움을 줄 기회를 거부하는 인류에 대한 범죄인 것을 유의하기 바란다. 한 삶에 대한 사회적 생명 경시를 보면서 생명경외(生命敬畏)의 신앙을 위해 우리를 부르시는 시대의 소명이 있음을 믿음으로 아멘 하시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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